Bible Study/구약 성서

전무후무? 그때 그때 '가짜뉴스'와 '압수수색'이 있었다

진실과열정 2019. 9. 9. 20:17

<전무후무? 그때 그때 '가짜뉴스'와 '압수수색'이 있었다>

 

'전무후무'는 제갈량이란 인물과 관련된 고사성어이다. 제갈량, 그런 사람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극상의 표현이다. 이 '전무후무'라는 유일회성 표현이 우리나라를 뒤덮었다(백만건이 넘는 가짜뉴스가 정보의 모든 채널을 마비시켰으므로, 그러므로 전무후무란 말은 수사학적으로 옳지않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몇주간 일어났던 이런 사건은, 사실 '전무'하지도 않고, (더욱 조심스러운 것은) '후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뉴스가 있었다. 사무엘상 25장은, '나발일보'의 단독보도를 언급한다(10-11절; 사실, 10절에 나오는 '파라쯔'의 히트파엘형은 하팍스레고메나-단독보도이다):“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무찌른 용사였다. 정당한 언론은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당시 민중의 의견을 그대로 전달했으며, 이는 외국의 방송국까지 인정된 사실이었다(21:11; 29:5). 그러나 야훼로부터 '지명'을 받은 이후(16:13), 사태가 극변했다. 지명철회를 당한 사울로부터(16:14) 다윗은 '전무후무'한 핍박을 받게 된다. 다윗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했다.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그는 칼이나 창보다 자신의 사명을 지키려했다(16:10-11; 19:8-12). '나발일보'과 같은 가짜 뉴스는 정치적으로 다윗의 입을 막은 후에 나타난 결과였다. 

 

사무엘상 25장 10절의 내용 중, '억지로 떠나는'이란 표현은,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읽는 사람들이 명확하게 이해하기 힘들다. 사울이 가지 말라 했는데, 다윗이 억지로 떠났다는 말인가? 그래서 다윗이 나쁜 사람이란 결론을 내리는 단독보도인가? 보다 정확하게 나발일보의 표현을 해석하면 이렇다: <여러분! 다윗이 누군지 그 정체를 밝혀드리지요! 요즘이 어떤 때입니까? 종들이 많은 그런 시대아닙니까? 어떤 종이냐구요? 자기 맘대로, 아니! 그렇게 힘을 써가며 자기 주인을 배신하는 그런 놈들이 넘치는 시대아니냐구요! 여러분 주변에도 그런 사람같지 않은 사람있죠? 그게 바로 다윗이랍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철기I시대는 새로운 정착의 시기였다. 그 이유는 후기청동기 시대의 범지중해 문화권의 대규모 붕괴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서쪽 해안을 점령하면서, 고대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질서가 대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이것은 사사기로 기억되는 각 지파들의 혼동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씨족중심의 초기이스라엘은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외부의 침략에 취약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인간관계는 성서가 말하는 이상적-호혜적-질서를 구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삿 18장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관계는 현실의 이익앞에 쉽게 배신하며 야훼신앙을 구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 거짓뉴스였다. (나발은 히브리어로 미련함이니[삼상 25:25], '나발일보'는 '오보뉴스'라 해도 되겠다. 그리고 나발일보의 운명은, 37절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안에서부터 그 마음이 죽은 상태가 되고' 만다. 그 속이 썩었으므로, 열흘이 지나든 아니 십년이 지나든 멸망은 신적으로 예고된 것이다.)

 

이러한 '나발일보'가 전국을 뒤덮은 것과 함께, 실제로 사울은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다윗을 잡으려 했다. 최초의 '압수수색'이라고 해야할까? 좋은 예가 사무엘상 23장 23절에 나온다: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이말은 권력의 실제인 사울이 한 말이다.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유다 <몇 천 명>이란 표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울은, '나발일보'에 뒤지지 않는, '십신문'의 제보를 받고 달려와서, 유다 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다윗을 찾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유다 사람 몇 천 명이라도, 그들을 한 줄로 세워서 한사람한사람 얼굴 대조하면서 다윗을 찾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렇다고 유다사람들이 사울의 말대로 한줄로 섰을리는 만무하다) 


보다 정확한 해석은, <몇 천 명>은 히브리어로 '엘레프'인데, 그 뜻은 <씨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가 더 현실적인 번역이다: “그가 이 지방에 있는 이상, 유다 부락들을 남김없이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고야 말리라.” 유다 땅의 모든 집을 가가호호 탐색해서 찾아내겠다는 권력의 외침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사울이란 최고 권력자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전국민이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동정심이 인다. 사실 사울은 자신의 권력을 악용해서, 일전에 국민들을 “어렵게 만들었다”(삼상 14:29 <- 이 표현은 신명기적역사가가 아합을 가리킬때 사용했던 극혐이었다[왕상 18:18]). 다윗 한 사람을 찾아내려고, 모든 권력을 이용해서, 온 나라를 어렵게 만드는 최고 권력가, 그가 바로 사울이었다.

 

야훼는 다윗을 지명했고, 소수의 사람들은 다윗을 따랐다(삼상 22:2). 다윗 그가 얼마나 사울을 변화시키려고 했는지, 성서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랬다. 권력자 사울 자신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지하고는 있었다(삼상 26:21). 그러나, 역사는 “다윗은 자기 길로, 사울도 자기 길로 돌아갔다”고 정리한다(26:25). 사울은 자결했고, 다윗은 활 노래를 지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부음을 받지 않음같이 되었구나”(삼하 1:21).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 '전무'해 보이지 않은 이유는, 대략적으로 그 유사한 패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언론과 권력이 한사람을 어떻게 짓밟는가 하는, 그 평행한 패턴말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전무후무'라는 말 자체는, 유일회성으로 그쳐야만 그 존재 가치가 증명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역사 안에서 반복된다면, 그 책임은 '전무후무'의 유일회성을 지키지 못한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후무'하지 않으려면, '사울권력'과 '나발일보'는 정당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