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를 만나는 컨텍스트>
이사야 63장 8-9절의 한글개역개정 번역은 이렇습니다: "(개역개정) (8)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이 말씀은 이사야 63장 7-14절의 단락안에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 그러한 구원이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특별히 9절의 부분에서 '울컥할' 정도로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9절 상반절의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번역이 존재합니다. 한글을 보면, 공동번역이 다릅니다: "누구를 대신 파견하거나 천사를 보내지 아니하시고 당신께서 친히 오시어 그들을 구해 내셨다." 이것은 다른 영어번역에도 나타납니다: "In all their troubles, it was no messenger or angel but his presence that saved them. (Isa 63:9 NJB)"; "in all their distress. It was no messenger or angel but his presence that saved them; (Isa 63:9 NRS)". 제가 사역으로 올린 번역에서처럼, 9절 상반절은 확연하게 의미가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케티브(쓰기)'와 '케레(읽기)'로 "다르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히브리어는 (빨간색) '로' 곧 "아니다!"라는 부정문으로 써있지만, 서기관들의 읽기 전통은 그것을 (파란색) '로' 곧 "그분이"로 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글개역개정의 번역은, 파란색을 따라서 읽었고, "그들의 모든 환란 중에, 그분도 환란을 받으셨다/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새번역)"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케레'를 받아들이는, ESV나 TNK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의외의 발견은, NAS인데, 대체적으로 '케티브'를 고집하던 번역이 여기에서는 '케레'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헬라어번역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번역은 '케티브'에서와 같이 "아니다!"라는 부정문으로 번역됩니다: "out of all their affliction: not an ambassador, nor a messenger, but himself saved them, (Isa 63:9 LXE)" 여기에서 관심은 'himself'로 나타나는 "αὐτὸς κύριος"와 같이, 사신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고 오직 야웨 하나님 스스로가 백성들을 구원하셨다라는 강조라고 하겠습니다. 한편으론,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에도 '케티브'와 같이 "부정문"이 나와있기 때문에, 본문 상의 고대성은 '케티브'를 따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헬라어에서 '사신'으로 되어있는 것을 히브리어로 역추적한다면, 잠언 13장 17절에서처럼, "찌르"( צִ֖יר )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사야 63장 9절 상반절은 전혀 다른 번역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고대적인 원리에 따른다면, (1) 쿰란과 칠십인경의 번역에 따라, 빨간색을 선택하여, "아니다!"라는 부정문이 되는 것이고, (2) 더 나아가 칠십인경의 '사신'(πρέσβυς)을 참조하여, '환란을 당하다(짜르)'를 "사신(찌르)"으로 읽는 것이, 공동번역과 NJB, 그리고 NRS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표현한 사역이기도 합니다. 사실 새번역의 경우에는 '케레'(파란색)를 선택했지만, 그 이전 번역인 표준새번역에서 '케티브'(빨간색)로 번역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번역의 선택이 의미 심장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적인 논리, 곧 텍스트 상에서는 빨간색이 맞습니다(공동번역, NJB, NRS).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NRS의 선택이 가장 논리적입니다. NRS는 8절 하반절(그래서 그는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와 9절 상반절(모든 환란 가운데)를 하나의 의미로 묶었기 때문입니다: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distress."(NRS를 절 구분없이 읽어본다면, 그 번역의 의미를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럼 왜 우리가 읽는 번역은 "하나님의 동참"으로 읽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조금 간단하게 생각하면, 바로 "신학 안에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신다는 텍스트의 단순성에 대해서, 경건한 신앙의 전통은 '백성의 어려움을 백퍼센트 있는 그대로 공감하는 하나님'으로 확대 재생산했던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텍스트에 기초해야 합니다. 전통이나 관습에서 돌아서서 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이, 성서 시대에나 혹은 그 이후에나 '온전한 종교 개혁'의 근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사야 63장 9절을 두고, 이것이 맞은가 저것은 틀린 것인가 라는 '옳고 그름'의 논쟁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 사실 텍스트라는 것이 그 자체로 온전히 텍스트화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는 전통/관습 안에서 하나의 텍스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온전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쓰고, 그것을 설명하는 다른 문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텍스트는 컨텍스트 안에서 합리적인 의미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대와 장소가 변하면서, 텍스트는 새로운 텍스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텍스트는 신앙공동체라는 특유의 컨텍스트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텍스트는 보다 더 '신앙적인' 텍스트가 됩니다. 이것은 히브리성서나 신약성서 그 자체의 생성과정에서 역추적해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읽기가 신앙적인 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빨간색으로 기록된 것을, 하나님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공감(파란색)으로 발전시킨 것이, 신앙공동체의 '내적성장'이 아닐까요? 물론 이것을 무분별하게 확대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라도 마음대로 새롭게 읽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경전이라고 믿고 한구절 한구절을 사모하며 읽는 그 말씀에 대해서, 그것의 '경전됨' 자체가 얼마나 자유로우며, 또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 새롭게 느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다시 말씀을 들고, 어느 말씀이건 차분히 읽어보신다면, 그 안에서 텍스트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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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Michael Fishbane, Biblical Myth & Rabbinic Mythmaking, 1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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