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예술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
- review article by. 양지웅 -
1. 서론
본 글은 Steven D. Mathewson의 the Art of Preaching Old Testament Narrativ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를 정리하고 평가함을 목적으로 둔다(이하 책을「구약 내러티브 설교」라고 부른다). 저자인 스티븐 매튜슨은 웨스턴 보수주의 침례신학원에서 대학원석사를,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몬타나의 드라이 크릭 성서 교회를 섬겼으며, 현재 일리노이즈의 리버티빌 복음주의 자유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중이다. 또한 그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설교학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며, Joshua and Judges(2003)를 출간했다.
2. 본론: 구약의 내러티브를 이해하기와 예술적으로 설교하기
「구약 내러티브 설교」는 이전 과제인「성서적 설교」(Haddon W. Robinson, Biblical Preacing: The Development and Delivery of Expository Messages)의 연장선상에 있다. 「성서적 설교」가 강해설교를 위한 10단계의 구체적인 과정과 실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구약 내러티브 설교」는 특별히 구약의 내러티브라는 문학장르를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과정과 실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구약 내러티브 설교」는 강해설교에 대하여 해돈 로빈슨의 주장과 상당히 일치한다. 저자는 강해설교를 저자의 의도를 알아내는 차원에서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 것과 그 진리를 청중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강해설교의 구체적인 방법보다 “철학 또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p. 20). 즉, 강해설교를 성서본문의 석의과정 자체가 아니라, 저자의 숨은 통일된 의도를 밝혀낸다는 차원에서, 강해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본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1) 성서본문에서 설교를 위한 핵심 아이디어를 잡아내는 것과 (2) 핵심 아이디어에서 설교를 작성하는 단계, 그리고 (3) 실제로 구약 내러티브 본문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5편의 설교를 소개하고 리뷰하는 방식이다.
(1) 본문에서 개념으로
가장 먼저 본문을 정하는 일이 우선된다(2장). 이를 위해 설교자는 먼저 준비된 석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된 의미에 목적을 두고 본문을 연구하는 일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성서의 핵심개념을 포함하는 본문을 선택하는 일은 중요하다(p. 32). 이렇게 볼 때, 기초적으로 성서신학의 훈련이 충분히 쌓인 설교자가 보다 더 적합한 본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의 의도에서 ‘Bid Idea’를 찾아낸다. 이것은 계속된 흐름 안에서 저자의 통일된 생각을 발견하는 일이다. 또한 성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는 문헌이기 때문에, 고대의 문학을 읽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본문을 정하면서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내러티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네 가지의 문학적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플롯, 등장인물, 배경설정, 그리고 성서저자의 시점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각각 독립된 장으로 소개할 정도로 비중이 크고 잘 알아두어야 한다. 첫번째로 저자는 내러티브의 핵심인 이야기 모양을 파악하는 문제를 다룬다(3장). 즉, 플롯이다. 내러티브의 가장 큰 문학적 특징인 플롯은 독자의 흥미와 몰입을 이끌고, 사건속에서 의미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기능이 있다(p. 44). 플롯의 핵심구성은 ‘발단-위기-해소-결과’인데, 어떠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등장인물들 간의 복잡한 사건이 전개되면서 긴장이 고조되다가, 신적인 개입이 있거나 주인공의 혁신적인 선택과 변화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고, 어떠한 종결지점으로 옮겨지거나 또는 새로운 전환점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한편, 문학의 기법인 플롯과 관련해서, 보편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을 ‘전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희극은 구성상으로 U모양이다. 삼손과 사울 그리고 에서는 비극 좋은 예이다. 특별히 유대인 학자들은 히브리성서의 내러티브 안에 있는 다양한 전형적인 장면들의 효과를 소개하고 있다(p. 49-50, Robert Alter).
두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등장인물이다. 등장인물을 통해서 청중은 비로소 이야기의 흥미를 가지게 된다. 저자는 “구약 내러티브는 행동에 보다 관심을 둔다”라고 말한다(p. 57). 현대 문학이 심리를 묘사하거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비해, 히브리성서는 행동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등장하는 비중과 역할에 따라 크게 주연과 조연이 있다. 구약은 “연필로 빠르게 스케치하는 것”처럼 인물을 묘사하기 때문에(p. 60), 생생한 그림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대신에 ‘이름’이나 ‘지명’의 드러난 의미를 통해서 인물은 쉽게 그 성격이 드러난다. 좋은 예로, 사무엘서의 ‘나발’이나 창세기의 야곱의 아들들, 사사기의 ‘드보라, 야엘, 바락’ 그리고 룻기에서 나오는 아들들의 이름이 그것이다. 또한 어떤 부분에서는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등장인물의 연설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단초가 된다”(p. 65).
주변의 환경을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5장). 저자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했는데, 첫번째는 해당본문의 시대와 장소를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지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해당본문이 전체 이야기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첫번째를 ‘역사적 환경’(inner setting)으로, 두번째를 ‘문학적 환경’(inter setting)이라고 부른다. ‘역사적 환경’은 역사적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치이다. 좋은 예로 룻기의 도입을 들 수 있다(룻 1:1). ‘문학적 환경’은 전체 내러티브 안에서 해당 본문의 특정한 기능을 찾는 것인데, 예를 들면 삼상 25장에 신적인 복수를 드러내는 전체 내러티브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 두가지 모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변의 환경을 통해서 저자의 의도된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마지막 요소는 화자의 시점이다(6장). 저자는 무엇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석자는 반드시 해당 이야기의 관점에 목표를 겨냥해야 한다”(p. 72). 다양한 방법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는데, 시각적인 어휘로 표현된 부분들을 관찰하여 읽어내면서 독자는 외부적인 관점을 찾아낼 수 있고, 등장인물의 독백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알아낼 수도 있으며, 삼하 11:27과 같이 화자가 아는 것이거나 화자의 평가나 해설을 통해서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그리고 가끔씩 히브리어 ‘힌네’(보라!)라는 특유의 표현을 통해 화자는 독자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한편, 구약 내러티브는 전지적 작가시점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고대문학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일관된 시점에서 벗어나, 아이러니와 상호충돌의 기법을 통해서 문학적 기교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욥의 아내가 히브리어 원문으로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어버려라!’라고 한 것처럼(욥 2:9), 표현된 말과 의도가 다르게 나타냄으로써 화자의 시점을 더욱 명쾌하게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렇게 네가지의 요소로 내러티브의 중요한 특징을 언급한 이후에, 저자는 초점을 심화시킨다(7장). 저자는 탁월한 문학비평가들의 연구서들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본문의 ‘핵심 개념’(Big Idea)를 석의적인 생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원래 독자/청자들에게 어떠한 의도로 기록되었는가를 발견하는 ‘석의 과정’에서 시작하여,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역할하는가 라는 ‘신학적 과정’으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는 개인적이며 동시대적인 방법으로써 어떻게 오늘의 청중에게 전달될 것인가 라는 ‘설교 과정’으로 완성된다(p. 83). 저자는 사무엘하 11-12장, 창세기 13장, 창세기 22장, 그리고 사무엘상 17장을 예를 들어 그 실제를 제시하였다.
(2) 개념에서 설교로
제2부에서는 석의과정을 거쳐 저자의 의도인 ‘핵심 개념’을 파악한 것을 가지고, 설교로 옮기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과정이 더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8장). 저자가 말하는 강해설교를 풀이하면,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의 3요소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즉 ‘로고스’는 이해적인 차원인데, 저자는 설교의 첫번째 과정은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을 설교할 때에 어떤 부분이 설명이 필요한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두번째는 ‘파토스’로 이것은 감정적인 차원인데, 이것은 설교자가 내러티브에 들어있는 신적 진리를 어떻게 평가하며 청중들에게 믿어지도록 확신하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에토스’라는 의지적인 부분이 있는데, 설교와 관련해서는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약에 비해서 구약 내러티브에서 적용점을 찾아 제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도덕적 교훈’으로 설교를 마무리해서는 안된다(p. 100).
설교의 실제에서, 아이디어를 포장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9장). 쉽게 말해서, 설교자는 “쫙 달라붙는” 표현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생각이 전달되는 언어구사 능력은 설교자에게 필수요건이다. 기억 가능하며, 압축적인 어휘가 좋은 글이 된다. 또한 죽은 표현이 아니라 생생한 이미지를 전달해내는 ‘말로 만드는 그림’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의 목적 역시 중요하다(10장). 무엇보다 설교자의 목적이 아니라, 성서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목적을 반영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천이 가능한 결과를 기술함으로써, 설교가 허공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목표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p. 110).
저자는 설교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저자의 방식을 따라갈 것을 요청한다(11장).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논리 개진 방법들 가운데, 저자는 귀납적 설교를 제일 중요하며 좋은 것이라고 제시한다: “이야기는 귀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서의 이야기들을 다루는 대부분의 설교들은 역시 귀납적으로 작용해야만 한다”(p. 115).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방법들도 소개한다. ‘플래시백’ 기법은 결과를 제일 먼저 소개하면서, 어떻게 이런 결과가 벌어졌는지 그 과정을 따라간다. 이것은 특별히 비극에 잘 어울린다. 귀납-연역이 혼합된 방법론도 있는데, 이것은 방대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 귀납으로 시작하여 연역으로 논리를 변증하거나 증명하는 과정이다. 일종의 신정론을 다루는 본문일 경우에 어울린다고 하겠다. 준-귀납법은 ‘핵심 개념’이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졌을 때, 각각의 과정을 설명하거나 단계적으로 구성할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 한편 1인칭 기법은 이야기의 심도있는 전달이 가능하지만, 자칫하면 연출된 퍼포먼스 정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설교의 아웃라인은 뼈대이며 설교의 진행을 보여주는 지도와 같다(12장). 잘 짜여진 아웃라인은 그 자체로 “생각의 용액”과 같아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뼈대를 작성하기 위해서, 저자는 다음의 몇가지 팁을 제공한다(p. 123). 우선 청중들에게 아웃라인을 보여주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숨기는 것이 낫고 없는 것 같지만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메인 아이디어를 마지막 부분에 드러내는 것이 낫다. 아웃라인은 완전한 문장으로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한 부분에서 막히지 않고, 계속된 진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아웃라인의 실제적인 차원에서 저자는 ‘문제’를 지적하고(disease) 그것을 메시지를 통해 ‘신적 치유’(remedy)의 과정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p. 127).
뭐라해도 설교자는 말로 청중에게 다가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황금의 입술’이 필요하다(13장). 설교문 그 자체는 충분치 않은데, 왜냐하면 설교/연설은 자연스러운 대화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저자는 다양한 내용들을 언급한다: 구약 이야기를 보다 창조적으로 기술해내는 훈련이 필요하며(여리고의 장엄한 성곽구조를 설명하거나, 에훗의 치밀한 암살 계획을 영화처럼 묘사하는 것), 이야기의 역사-문화적 연구를 탄탄하게 진행하고, 무엇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어휘를 사용해서 핵심 부분만이라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때 과장된 수식어나 수동태를 피하고, 시각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미지를 전달하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그리고 내러티브에서 예화나 인용, 그리고 객관적인 사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그리 선호할 것이 못된다.
설교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14장). 설교의 시작에서 초점은 청중의 관심을 확보하는 것이며,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조성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설교의 본문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다. 다양한 기법들이 있는데, “급히 시작”(cold open)하는 방법은 곧바로 사건의 중심으로 청중을 이끌어 설교에 스피드와 긴장을 더해준다(p. 149). 1인칭 설교를 할 경우에는, 청중이 혼동스럽지 않도록 적절한 소개를 하거나 설교자가 뒤를 한 번 돌아선다든지 해서, 청중이 설교방식을 이해하고 진행하는 것이 낫다. 한편, 설교의 결말은 적용의 타이밍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마지막까지 핵심 개념의 내용을 가지고 가야 한다.
설교는 전달이다(15장). 저자는 노트 없이 진행하려면, 우선 잘 짜고, 암기가 아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기도와 끝없는 연습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강대상이 없이 진행하는 것을 추천한다. 움직이면서 말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으며, 말을 마치고 청중을 응시함으로써 파토스를 높일 수 있다. 표현은 크게하되, 겸손함을 잊으면 안된다.
(3) 설교의 실제
저자는 다섯명의 설교가들의 구약의 내러티브 설교를 실제로 소개하였고, 각각 해당 설교자와 인터뷰를 통해서 설교를 어떻게 기획했으며 어떠한 부분이 강조되었는지를 자세하게 피드백하고 있다.
3. 평가
「구약 내러티브 설교」는 이야기 풍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교회에 필요한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본 도서를 통해, (1) 설교에 대한 저자의 기여점을 살펴보고, (2) 책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3) 설교와 관련하여 실제적인 부분들에 생기는 또 다른 의문점들을 제시하면서 진행하도록 하겠다.
(1) 내러티브 이해와 관련한 저자의 기여
많은 목회자들은 말을 잘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기술이 부족하다. 시간에 쫓겨서 본문의 보물을 충분히 캐내지 못할 경우, 구약의 내러티브는, 구약의 예언서나 시가서와 함께, 설교자들이 피하고 싶은 본문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구약 내러티브’를 잘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문학 ‘장르’(genre)로서 내러티브를 읽어내려가는 ‘문학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자신의 집필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나는 설교가들이 구약 내러티브라는 문학을 강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p. 21).
저자는 확실히 문학으로서 ‘장르’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단순하게 초중고 시절에 배웠던 국어시간의 기억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저자는 최근 문학비평의 한 분야인 내러티브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서들을 소개하였다(p. 80). 소개된 학자들 대부분은 유대인이며(Robert Alter, Shimon Bar-Efrat), 이들은 분명하게 문학적인 ‘기법’(art)을 발견하는데 학문적인 기여를 했다. 연구자도 구약을 공부했던 경험이 있는바, 이들 문학비평가들의 ‘세밀한 읽기’(close reading)에 감탄을 마지 않았으며, 특별히 본문에서 있는 그대로 나올 수 있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순수한 기쁨을 얻은 바가 있다.
기존의 설교들이 큐티식의 접근과 같이, 단어의 빈도수에 메시지가 결정되는 것이라든지, 특정 부분만 강조되어 전체의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든지, 다양한 인물의 복잡한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허덕이고 있었다고 한다면, 「구약 내러티브 설교」를 통해서 목회자들은 내러티브 이해를 쉽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특별히 문학비평의 약점 중에 하나가 ‘전문 용어’들이 너무 많다는 점인데, 「구약 내러티브 설교」에서 저자는 필요한 부분에서만 소개를 했을 뿐(p. 44-56), 일반적으로 내러티브를 쉽게 접근하게 도왔다. 무엇보다 해돈 로빈슨의「성서적 설교」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일종의 ‘각론’과 같은 느낌을 주어서, 강해설교의 내러티브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설교의 실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저자는 많은 목회자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공감하고 자신의 연구 결과들을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저자는 설교의 ‘수사적’ 특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라는 3요소가 건강하게 들어있도록 설교 작성을 돕고 있다. 예를 들면 설교문을 완벽하게 작성을 하되 그것을 설교의 자리에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연스럽고 역동적으로 선포하는 개인적인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명의 탁월한 설교가들의 내러티브 본문 설교를 실제적인 예로 제시하여, 다양한 결과물들을 감상할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피드백을 가질 수 있었다. 저자가 책 제목에서 비추고 있는 것처럼, 구약 내러티브를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예술적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2) 여러 논쟁점들
연구자는 성서신학(구약학)을 공부했으며, 상대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저자가 내러티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했던 것처럼, 설교자는 본문과 씨름하는 것처럼 기초 성서신학의 다양한 부분들에서도 동일하게 씨름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저자는 32페이지에서 “성서의 핵심개념을 포함하는 본문을 선택할 것”을 요청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기본적으로 충분한 성서신학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핵심 개념’을 석의적으로 꺼내는 과정에 의문이 생긴다. 예를 들면 저자는 여러 곳에서 사무엘하 11-12장의 내러티브를 Paul Borden이 이해한 것을 기초로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3부의 설교의 실제에도 좋은 사례로 제시하였다. Paul Borden은 우리야의 충성스러움을 핵심 키워드로 잡고 다윗이 하나님이 허락하심과 허락하지 않으심 모두 은혜가 됨을 배웠다라고 주제를 잡았다(p. 84). 그러면서 ‘음란마귀 척결하기’라든지, ‘리더가 충성하지 않을때’라는 전형적인 설교들에 대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저자도 인정했던 것처럼, 이 책은 석의를 위한 것이 아니며 설교를 위한 것이기에, 자세한 석의 과정은 생략되어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Paul Borden의 접근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본문을 삼하 11-12장으로 잡았지만, 실제로는 12장의 후반부가 빠져있다(p. 127; 삼하 12:26-31). 어떻게 보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삼하 11:1이 “랍바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삼하 12:26-31의 생략은 본문의 통일성을 깨뜨린다. 사실 Paul Borden은 삼하 12:26-31을 생략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보다 용이하게 달성한 것 같이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저자가 제일 처음으로 강조했던 ‘본문 선택’의 문제는 거듭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저자가 창세기 22장을 ‘아버지의 날’을 위한 설교로 제시한 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해서 21세기 서구인들의 편견은 얼마나 작용했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아 희생제사는 출 22:29이나 겔 20:25-26에서 분명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시 석의 과정을 통해서 ‘핵심 개념’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저자는 이삭을 예배할 것인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라는 대결 구도로 잡고, 그것을 곧바로 21세기 현장에 적용시켰다. 연구자는 오히려 21세기의 상황이 창세기 22장을 그렇게 읽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사실 자녀를 예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무엘상 2장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29절). 특별히 사무엘상 2장에서는 ‘중하게 여기다/무겁다’(카보드)라는 내러티브상의 핵심 개념이 도드라지고 있어서, 잘못된 예배를 선택한 아버지 엘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삼상 4:18).
연구자는 창세기 22장은 자녀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아브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물론 창 22:2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세밀하게 ‘이삭’을 집어내시지만, 창세기 전반에서 아브라함은 그렇게까지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 21:9-11에서 아브라함은 (성서 기록자의 폄하와는 달리)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을 깊이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2장이 있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자신을 제일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창 12; 20장). 따라서 창세기 22장은 ‘아들’ 이삭이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기애를 포함하여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가 문제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비교우위’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그 자체가 사라지는 불합리한 상황에서 신앙인은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갈 수 있는가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언급했던 ‘보다’(히브리어 라아)를 강조하는 것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저자는 이 ‘라아’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것을 해석이 들어간 상태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창 22:8에서, 히브리어 원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실 것이다”라고 했지만, 많은 번역본들이 ‘준비하다/provide’(ESV, NIV, NRSV)라고 해석한 번역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TNK만큼은 “God will see”라고 직역을 했다(이것은 역시 창 22:14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국, 창세기 22장은, 신앙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가도록 요구되는 상황에서, 참 신앙인으로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행동과 표현(보다!, 창 22:4,8)에 대해서, 하나님 역시 결국엔 같은 행동으로(보다! 창 22:14) 도우심으로서 신적 정의를 이루신다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편, 이것은 다윗과 연결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 장소가 모리아산이며(창 22:2; 대하 3:1), 앞서 언급한 ‘보다’라는 히브리어의 자음(yr-)은 예루살렘의 그것과 유사하며,[1]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에게서 일차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창 22:17; 삼하 5:6-7).
마지막으로 저자가 크게 의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학비평가들은 내러티브를 ‘문학’의 한 장르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로 로버트 알터(Robert Alter)는 “성서를 역사화된 산문 허구(Bible as historicized prose fiction)”라고 불렀다.[2] 역사적인 핵심 사건들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세밀한 부분들의 묘사나 기교들은 순수한 문학적인 차원이라는 말이다. 또한 시몬 바-에프랏(Shimon Bar-Efrat) 역시 내러티브 연구의 기초가 역사비평의 객관적 시간 개념과는 관계가 없는 “내적 세계(inner world)”를 다루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러티브의 시간(Narrated time)”은 물리적이며 객관적인 시간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다.[3]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서론에서 분명히 구약의 역사성을 강력하게 수호하고 있다(p. 20). 그렇기 때문에 문학적 내러티브를 역사적 사건보도로 만들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본래적 기능이 역사적 증명의 차원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저자는 생생한 이미지를 사용해서 설교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호수아서의 여리고 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공성전차(battering ram)”을 언급하는데(p. 143), 역사가들은 그러한 공성전차의 도입이 아시리아 제국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4] 결국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역사적 검증의 실수를 조심해야 하겠으며, 무엇보다도 내러티브 그 자체를 문학적으로 파악해서 저자의 진정한 숨은 의도를 잡아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3) 설교와 관련된 실제적인 의문들
저자는 설교의 적용과 관련해서 실천 가능한 결과를 기술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실천사항은 정말 섬세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나치나 싶어 ‘매뉴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그날 설교를 듣고, ‘행운의 편지 5통씩 보내는 것’은 조금 어색할 정도이다(p. 110).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해돈 로빈슨의 강해설교에서 보면, 크게 설교과정에서 인칭의 변화가 느껴진다. 다시 말해서, 3인칭으로 주어진 그들의 본문이, 연구자를 통해 1인칭에서 실제로 경험되고, 성령의 확신 가운데 2인칭으로 선포되는 것이 강해설교의 요약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적용과 관련해서 설교자 자신의 말씀과의 뜨거운 영적 씨름을 소개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부분들을 설교자 자신이 1인칭으로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저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3인칭의 본문에서 갑자기 2인칭으로 전환되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쉽다고 본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이렇게 행동하시오!” 그러나 설교가 ‘로고스-파토스-에토스’의 종합적인 과정이라고 한다면, 설교자 스스로가 말씀에 대한 도전을 이렇게 살아보았노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비록 매뉴얼처럼 되지는 못할지라도 가치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성서의 내러티브를, 설교에서도 내러티브로 전달하였다. 다시 말해서 귀납적으로 설교하였다. 이것이 효과적인지 의문이 든다. 저자의 말대로, 연역적이지 않기 때문에, 긴장이 들겠지만, 실제로 설교문을 읽으면서, 긴장감이 들기보다는 쉽게 피곤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야기의 힘은 복잡하고 도저히 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위기’가 어떻게 신적인 정의와 신비로움으로 ‘해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할 때, 청중들은 이미 ‘해결’과 그 다음의 ‘결과’를 모두 알고 있다! 어느 누가 영화 ‘식스 센스’를 다시 보겠는가! 저자는 스포츠의 결과를 미리 아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은 없으며, 내러티브 설교가 바로 그것과 같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포츠의 결과를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특별히 재방송을 본다고 한다면 말이다. 연구자는 오래 전에 목사님이 ‘에스더 설교’를 내러티브 방식으로 전달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목사님이 에스더서를 처음 읽으셨나보다!” 결국, 여기에서 드는 근본적인 의구심은, 과연 내러티브라는 문학적 장르를, 그 자체도 메시지로 이해해서, 똑 같은 모양으로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4. 결론
내러티브라는 장르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숨겨진 보화와 같다. 그러나 보화를 캐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땅을 파야한다. 캐어낸 보화를 정말 값나가는 보석으로 만들려면 숙련된 기술자의 손을 거쳐야 한다. 「구약 내러티브 설교」는 내러티브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자들을 돕고 있으며, 진부한 설교에서 벗어나 구약의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학적 특징들을 설교의 현장에서도 유효하게 발휘될 수 있도록 자극하고 있다. 비록 석의를 통해서 핵심 아이디어를 집어내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필요한 논의가 질서있게 소개되고 있다.
[1] Cyrus Godron and Gary A. Rendsburg,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Revised Edition; W.W. Norton & Company, 1998), 216.
[2] Robert Alter,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New York: Basic Books, 1981), 24.
[3] Shimon Bar-Efrat, Narrative Art in the Bible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4), 10, 142.
[4] John Rogerson eds.,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Bible (2n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53.
'Culture > [독서] 좋은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 (0) | 2018.12.28 |
---|---|
Elmer A.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0) | 2018.12.28 |
"성서적 설교를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목회자" (0) | 2018.12.28 |
"혁신과 헌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의 관계" (0) | 2018.12.28 |
"파격과 보수, 그리고 중도: 서로 다른 교회관들 사이에서" (0) | 2018.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