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설교를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목회자"
- review article by. 양지웅 -
1. 서론
본 글은 강해설교 분야의 권위자인 Haddon W. Robinson의 Biblical Preaching: The Development and Delivery of Expository Messages (3r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s, 2014)를 정리하고 평가함을 목적으로 둔다. 해돈 W. 로빈슨은 보스턴의 고든-콘웰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이며, 수많은 책을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많은 번역서가 소개될 정도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본 도서(이하 「성서적 설교」라고 칭함)는 1980년에 처음 선을 보였지만, 2001년과 2014년에 제2판과 제3판을 출간할 정도로 꾸준히 신학교와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며 인정을 받고 있다.
2. 본론: 강해된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달하기, 「성서적 설교」
「성서적 설교」는 10개의 단계로 강해설교의 작성과 설교의 구조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본 서는 두 가지로 크게 요약될 수 있다: (1) 성서 본문을 강해된 메시지로 발전시키는 것과 (2) 작성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크게 두 가지의 하위 부분으로 나누어서 진행하도록 하겠다.
(1) 성서 본문을 강해된 메시지로 발전시키기
현대사회는 의사소통 기술과 방법이 현격하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한 현대사회에서 설교는 지식적으로나 감정적인 부분에서 옛 영광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현대기술은 ‘구글링(googling)’이란 키워드를 제시함으로써, 손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설교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어떠한 시대에도 필요하며 요구되는 사명이다. 성서는 한결같이 설교를 내세우고 있다(벧전 1:23; 롬 1:11-15; 살전 1:9-10; 2:13; 딤후 4:2). 중요한 것은, 설교의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인데, 바로 강해설교이다. 저자는 “신적 권위의 힘을 가장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설교의 형식은 강해설교이다”라고 말한다(p. 4). 강해설교란, “성서적인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해당구절을 그 문맥안에서 역사적/문법적/문학적으로 연구하여 끄집어 낸 주요생각을, 우선 성령의 만져주심을 통해서 설교자 자신이 일차적으로 인격적 경험을 한 후에, 회중들에게 적용하도록 하는 설교방식”이다(p. 5).
강해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성서 본문의 핵심 개념을 올바르게 잡아내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성서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방법으로 단어를 사용함으로 의미했던 것”을 밝혀내는 일이다(p. 6). 이것이 설교자의 입체적인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무엇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회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실수하는 첫단추가 바로 ‘해당 본문에서 주요 아이디어(the Big Idea)’를 잘못 찾아내는 경우이다. 혹은 설교자들이 ‘바늘’이 아닌 ‘빨래 방방이’로 본문이 말하는 핵심 생각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저자는 중요한 생각을, “주제어”와 “보충”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바로 질문의 형식으로 제시된 주제에 대하여, 대답의 모양으로 보충의 관계가 성립됨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생각이 제시될 수 있다고 말한다(p. 22). 설교자는 본문을 접할 때, 그 본문이 무엇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어떠한 대답을 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토대 위에, 저자는 10가지의 설교 준비 과정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설교할 본문을 선택하는 일”이다. 본문은 목회력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준비될 수도 있고, 회중들의 특별한 요구에 따라서 변동이 심할 수도 있는데, 어느 한편을 옳다고 보기보다 융통성 있는 원칙 아래에 중용하는 것이 좋다. 한편, ‘주제 강해’는 주제 설교와 차별되는데, 주제 설교가 단순하게 ‘증거 본문’으로 제시되는 것에 반하여, 주제 강해는 해당 본문들의 깊은 연구를 통해 해당 주제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차원에서 다르다고 하겠다.
두번째는 “해당 본문을 연구하고 정보들을 모으는 일”이다. 성서 구절은 단지 몇 절로 끝나지 않는다. 그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더 큰 단락이 있으며, 더 큰 단위의 책이 있다. 결국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당 본문을 설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자가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설교자는 입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단어와 문법적인 연구를 포함하여, 비평적이며 학술적인 주석을 참조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최근엔 다양한 연구도구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어서, 설교자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혜롭게 정보를 모아야 한다.
세번째는 “해당 구절을 연구하면서, 부분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해를 위한 아이디어로 결정되도록 발전키시는 일”이다. 본문 연구는 모래시계와 같다고 하겠는데, 처음엔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한 후에 다시 청중을 위한 하나의 완전한 메시지로 종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기에는 해당 본문을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바꾸어서 표현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결국 다른 방법으로 말하면, 해당 본문을 더 이해하기 쉽도록 바꿔 말하는 것(paraphrase)이 필요하다(p. 43).
네번째는 “석의적인 아이디어에 세 개의 질문을 던져서 발전시키는 일”이다. 여기에서부터 본문이 설교를 향해서 본격적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필요한 세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이지?” (2)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고?” (3)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무엇보다 성서는 현대인과 엄청난 시공간의 차이를 가진 글이다. 그러므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설교자는 해당 본문이 말하는 문자적, 문화적 의미를 일차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일종의 설득의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해당 본문의 진실됨을 설득해야 한다. 저자는 설득의 과정에서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보여준 바울의 모습이 좋은 예가 된다고 말한다(p. 54). 마지막으로는 설교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화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적용점을 찾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적용은 반드시 성서저자들의 신학적 목적에서 추출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p. 59). 결국 성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원숙한 안목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본문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맥락) 이해가 필요하며, 성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변치 않는 성품들을 파악하며, 하나님 해당 인물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통해 더 깊은 통찰을 깨닫고, 특별히 제시되는 영구적인 원리들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이어령비어령’하지 않으려면, 성서 자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적용점으로 두어야 한다.
다섯번째는 “청중들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설교자는 주석된 주요한 아이디어들을 보다 명확하고 기억 가능한 문장으로 작성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강사가 아니다. 문장으로 제시되는 아이디어는 반드시 신선하고, 생동력이 넘치며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되어야만 한다(p. 69). 성서 자체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것처럼, 설교 역시 분명한 목적이 있는 행위이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자신이 이 설교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늘 생각하면서, 보다 명확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여섯번째는 “해당 설교의 목적을 결정하는 일”이다. “성서의 모든 책들은 그 독자에게 어떤 생각을 일으키거나 삶을 변화시키는 행동을 유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는 해당 성서 본문의 의도에 맞게 그 목적을 찾아야 한다.”(p. 73). 여기에 기준을 찾을 수 있는데(딤후 3:16-17), 바로 가르치며, 훈계하며, 교정하고, 성장시키는 목적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설교가 ‘지, 정, 의’ 곧 전인격적인 면에서 변화를 목적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곱번째는 “선택한 목적을 구체화할 방법을 결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설교의 뼈대를 작성하는 일이라고 하겠는데, 저자는 다음의 다양한 논리적 구조를 제시한다: 연역적, 귀납적, 귀납-연역적, 문제-해결의 방식(p. 79의 그림).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주옥 같은 본문 연구와 핵심 아이디어의 발견이 있더라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면, 설교는 늘 아쉬움으로 그치고 만다. 연역적 논리는 분명한 논지를 제시하기 때문에 간명하지만 반대로 긴장감을 놓칠 수 있다. 귀납-연역적인 접근은 서론에서 질문을 던지고 점차적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긴장감을 살리는데 좋지만 자칫 지루하게 되어 힘이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실생활에 생긴 의문들을 성서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설교에 유용하다고 하겠다. 귀납적인 방법은, 서서히 진리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접근이지만, 직설적인 설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없고, 혹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 접근은 역사적 내러티브를 다루기에 용이하다.
여덟번째는 “전체적인 구조를 짜내는 일”이다. 이것은 아웃라인(개요)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 성서 구절의 주된 생각들을 배열하는 것 자체로 아웃라인을 대신할 수 있다.”(p. 92). 주의할 점은 아웃라인은 간단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소수의 초점에 맞추어져야 한다. 또한 아웃라인은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질문의 모양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문법으로 표현된 문장이 되어야 한다.
아홉번째는 “개요 안에 추가하는 내용들을 담아서 설명하고 증명하며 적용하고 적용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중요한 뼈대에 살을 붙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이 요구된다. 우선 ‘바꿔 말하기’를 통해서 제시된 생각을 다양하고 사실적이며 입체적으로 만들게 된다. “정의하기와 설명하기”는 어떠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포함시키거나 다른 무엇과 연결시키는 사고의 방식으로, 특별히 신학적인 어휘등을 제시할 때 가능한 한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중요한 부분들을 제시해야 한다. “사실 정보 제시”는 통계와 같이 객관적인 정보를 제시함으로써 권위와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인용”은 함축적이며 권위있게 보일 수 있으나, 어느 한 입장에 편중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글들을 사용해야 한다. 저자는 특별히 “예화”에 집중한다(5페이지나 할애하였다). 예화는 실제적인 세계를 잘 보여주는 방식으로, 마치 빛을 비춰주는 것과 같이 효과적이다. 감정을 만져주어 ‘공감’을 일으키는 예화가 좋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와 ‘청중’의 교집합을 지혜롭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p. 112의 그림). 많은 설교자가 청중이 모르는 사람들의 책을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제일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예화인 셈이다.
열번째는 “서론과 결론을 준비하는 일”이다. 첫인상이 중요한 것처럼 설교의 시작은 매우 중요하다. 서론에서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설교의 시작을 만들 수 있다. 저자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p. 121), 그것을 요약하면, 청중이 불편해하거나 낮설게 만들어서 긴장과 집중을 유도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서론에서는 해당 설교의 필요성을 제시해야 하고, 자연스럽게 본문으로 이끌어주어야 하며, 창조적으로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결론은 설교의 내용을 정리하며, 예화를 통해서 완전하게 설교를 이미지화시켜야 하며, 질문이나 기도의 방식으로 청중들의 반응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중요한 점은, 설교의 결론부분에서 새로운 설교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2) 작성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이렇게 저자는 10가지 과정을 통해서 효과적인 강해설교의 작성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어서 저자는 설교자의 문체에 대해서 다룬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간명하게’ 작성하는 것이지만 이를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개요가 분명해야 한다.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작성해야 한다(17-18단어). 문장 구조도 단순한 것이 좋다. 전문용어를 피하고 쉬운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문체에 있어서, 직접적이며 설교자의 인격이 반영된 개인적인 글이 좋다. ‘저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좋다. 표현은 생동감이 넘치는 살아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나친 형용사는 삼가하고, 수동태보다는 능동태가 낫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실제 설교를 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기술들을 언급한다. 특별히 ‘비언어 의사소통’인 몸동작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몸은 말보다 힘이 있기 때문에, 몸으로 설교자의 진실됨이 나타나야 한다. 사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문을 전달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청중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p. 151). 설교자는 페션모델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어울리며 어느 장소와도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산만하지 않은 정도에서, 설교의 내용에 맞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활동이 요구된다. 특별히 청중의 이해를 위해서 손동작은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p. 155). ‘아이 컨택’ 역시 매우 중요하다. 흘끔 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응시함으로써 설교자는 청중들과 신뢰감을 형성할 수 있다. 또박또박 진실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충분한 호흡을 유지하는 훈련은 설교자가 더욱 준비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3. 평가
「성서적 설교」는 권위있는 설교자의 평생에 걸친 연구 노하우가 잘 녹아있는 책이다. 특별히 설교를 하나의 ‘거룩한 창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창작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을 만들어낼 때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기 쉽지 않은데, 해돈 로빈슨은 이것을 균형있고 조리있게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10단계의 과정을 통해서 ‘강해설교 작성하기’와 이후에 ‘설교 전달하기’의 실제를 말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논의를 위해서 비평적으로「성서적 설교」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성서적 설교 자체를 돌아보며,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 저자가 제시했던 부분들을 살펴보겠다.
(1) 성서적 설교가 과연 강해 설교인가?
우선 무엇보다 궁극적인 질문은 책의 제목이다. 저자는 책의 제목을 ‘Biblical Preaching’으로 하였다. 모호한 제목이다. 성서를 설교하는 것인지, 성서의 방식대로 설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렇기에 저자는 부제목으로The Development and Delivery of Expository Messages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저자는 성서적 설교란, 성서의 본문을 ‘설명/해설’해서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저자는 본문의 올바른 이해가 강해설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말하면, 저자는 본문을 ‘파라프레이즈’ 혹은 ‘자구(字句) 풀이’식의 논리 나열이 강해설교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제시한다(p. 82-83).
물론 설교자에게 주어진 것은 성서이며, 구체적인 해당 본문이기에, 일차적으로 그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강해’를 말하며,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단순하게 문법적/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 같다. 일예를 들면, 저자는 52페이지에서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약한 자’(the weak)를 “an overscrupulous Christian”이라고 ‘심리적으로 연약한 사람’의 차원으로 말하였는데 과연 저자의 설명은 옳은가?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거리가 먼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의 ‘약한 자’는 실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층임에 분명하며,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볼 수 있는 ‘patron-client’ 관계와 같이 오늘날의 ‘갑/을’ 관계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할 수 있다. 물론 이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연구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강해 설교가 본문을 설명/해설하는 과정에서 “과연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저자는 성서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런데 과연 설교자는 어떻게 성서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많은 설교들에서 ‘자구풀이’식 설명을 마치 강해설교인양 만족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성서 각권의 통일된 메시지에 기여를 하는지 혹은 수직적으로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문학적으로 해당 본문이 어떻게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는지 파악하는 기초 작업은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저자가 54페이지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을 상대로 바울이 세상의 학문으로 그들에게 진리를 설득하려 했던 것을 ‘진리의 설득과정’ 안에서 제시했는데, 사도행전의 계속된 내러티브나 고린도전서의 암시된 언급을 추론해볼 때, 바울의 이 설득은 성공적이지 못한 사례로 생각할 수 있다.
연구자는 개인적으로 ‘성서적 설교’는 성서를 설명하는 작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성서가 말하는 방식대로 설교하는 연구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언제나 독자를 상정하고 있다. 결국 2인칭이 최종 목적이라는 셈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1인칭 즉 성서저자가 직접 경험했기 보다는, 3인칭의 사건 즉 신앙의 선배들이 역사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건들이 구전이나 기억을 통해 공동체의 신앙으로 1인칭화(‘우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서는 그 스스로가 3인칭->1인칭->2인칭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해돈 로빈슨이 처음에 제시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저자는 강해 설교를 요약하기를 “성서 구절을 연구하며,” “그것을 설교자가 경험하고,” “청중들에게 의사소통한다.”라고 하였다(p. 12). 이것은 다른 말로, 성서 구절의 3인칭 사건을 입체적으로 연구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설교자가 1인칭화하여 진리의 말씀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청중들인 ‘당신들에게’(2인칭) 삶의 변화를 도전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강해 설교’라는 개념에 대하여 스스로 부족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강해 설교’ 자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p. 80에서 저자는 강해가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설교 작성의 다양한 요소들에 대하여
우선 설교 본문 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저자는 상당히 융통성 있는 선택을 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p. 29). 이것은 좋은 선택인 것 같다. 특별히 이민 목회의 경우, 교인이 100명 이내의 목회를 할 경우, 탄력적인 운용이 필요하다고 본다. 연구자가 목회를 돕는 교회 역시 30 가정 내외의 10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인데, 이 정도면 가정들의 여러가지 일들이 눈에 선하며, 각 가정들의 당면 문제들이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에 목회자가, 마치 신약의 서신서들처럼, 해당 문제들을 목회적으로 풀어내는 본문을 이끌어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설교자는 지식을 전달하는 강사가 아니라, 청중의 삶을 알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이끌어가는 ‘목자’이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설교목사’와 ‘목회목사’의 구분에 대해서 연구자는 성서적이지 않은 운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설교목사라고 해서 전혀 성도와 무관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심방을 포함하여 목회를 전문으로 하는 목회자가 있음에도, 또다른 설교목사가 설교를 하는 일은 ‘목자’가 다른 목자에게 꼴을 먹이게 하는 일이라고 보인다.
저자는 핵심 아이디어의 뼈대를 채워가는 논리 구성의 방식으로 연역의 과정과 귀납의 과정 등을 제시하였다(p. 89). 이러한 논리는 설교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매우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이에 더하여, 성서의 각 장르와 특정한 논리의 과정이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연역의 과정은 서신서의 흐름에 맞다고 보며, 귀납의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내러티브 즉 역사서나 복음서가 적합하다고 본다. 물론, 모든 논리를 장르와 일치시키는 무리가 있지만, 성서 그 자체가 어떻게 그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그 방식에 가깝게 설교를 제시하는 것도, 성서적 설교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른 예를 들면, 시편의 경우엔 그것의 역사적, 문법적 배경을 설명하기보다, 말 그대로 시를 느끼며, 시편의 작가가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그 마음을 품고 청중들이 같은 심정으로 시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모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언서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는 그대로 표출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설교자는 아모스처럼 설교단에 등장하자마자 ‘사자의 울음소리’를 외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암 1:2).
또한 저자는 뼈대를 채우는 여러가지 방식들을 제시했는데(p. 98-116), 이것 역시 성서 자체가 어떠한 방식들로 해당 본문을 소개하고 있는가와 비슷한 방식으로 구성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시편의 경우에 저자가 언급한 “바꿔 말하기”가 잘 나타날 수 있는 본문이 많은 것 같다(시 18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입체적인 언급들을 성서 자체가 하는 것처럼, 설교자가 해당 본문의 특성을 잘 살려서 구성을 이끌어 간다면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성서를 읽어가는 방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들어있는 언어유희와 같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예를 들면, 미 1:10-14), 이러한 부분들도 무미건조하게 언어적, 역사적 정보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나 이름의 유래와 같이, 과거와 현재의 청중들 모두 그것을 들으면서 언어유희를 느꼈던 것처럼, 본문의 다양한 장치들을 경험하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서론과 결론에 대한 언급은 매우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해준 것 같아서 유익했다. 오늘날 TV 방송판매나 프로그램을 볼 때, 초반부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게 된다. 설교 역시 처음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오래 전에 장경동 목사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느닫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 그 장소는 침례신학대학교 강당이었다. 신학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긴장된 예배에서, 장경동 목사는 이 한마디로 ‘아이스 브레이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이후로 설교는 스폰지처럼 흡수되었다. 물론 설교의 방향과 다른 접근이었지만, 나름대로 시작할 때 자기만의 노하우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연구자는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의 조명과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기본이 되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기도가 중복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설교자가 온전히 하나님께 붙잡히고 받은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임무를 돌아볼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는 필수라고 본다.
4. 결론
「성서적 설교」는 균형있게 설교의 모든 것을 잘 담아낸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설교의 기초과정을 되집어 볼 수 있었다. 특별히 10가지 과정을 통해서 차근차근 설교를 구성하는 장인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제시된 설교 전달의 실제에서 흔히 실수하게 되는 부분들을 살펴봄으로써, 보다 원숙한 설교자로 설 수 있는 도움을 받게 되었다.
설교자는 설교단에서 죽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 동안 성도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바를 정확하게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준비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단에서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여 진리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목숨을 걸게 된다. 성서적 설교를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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