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모세]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보다 정확하게 말해보면, 창세기 1장의, 어떻게 본다면, '길고 긴 과정'에서 뭔가 깨달아야 하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실, 창세기 1장 1절이 있고, 곧 바로 창세기 2장 4절부터 읽는다면, 정말 '깔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많은) 성서학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해석하면서, (고대 근동의 마르둑 신화에 대한 대안으로써 '신적 메시지'로 기능하면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 곧 '집의 제작'이었다고 제안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뭔가 이루실때, 분명 '눈깜짝할 사이에' 하실 수 있지만(왕하 6:17), 많은 경우에 (사람의 입장에서) '길고 긴 과정'을 거치시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한가지 사건이, 출애굽기 과정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출 15:18)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사신다는(출 15:17) 엄청난 신학적 청사진을 보여주시면서, 막상 그 성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거의 1년이 지나서 완성하게 하십니다(출 40:17).
사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40일 간의 과정을(출 25:1-31:18) 성경은 7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틀(frame)로 잡고 있으며, 그리고 마지막 말씀이(31:12) 다름아닌 '안식일 준수'라는 면에서, 성막(하나님의 집)의 제작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그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출 39:43과 창 1:31(2:2)는 분명히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길고 긴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어찌되었건 '40'일이란 기간은 보통 사람들에게, 유독 성경의 사람들에겐 만만치 않은 시간입니다. '길고 긴 과정'을 나라면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마늘 먹어 사람이 되었다는 곰의 인내까지는 생각지 않아도 말입니다.) 사실, 이야기는 누구라도 그 정황이 되면 '견뎌낼 수 없다'가 사람의 현주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대부분의 경우,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기보다는(창 2:1; 요 19:30) 미완성의 인생 앞에 좌절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많은 경우, 즉 사람의 조급함으로 실수하고 넘어졌을 경우, 어떻게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주어야 하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지도자가 상당히 다르게 사람들의 잘못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더딤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출 32:4). 모세가 아론에게 자초지종을 듣고자 했을 때, 아론의 대답이 이렇습니다(32:22):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는, '키 베라 후'라고, "이(백성)들이 (천성적으로) 악하지 않습니까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론에게서 '인간의 전적타락'을 찾아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론은 개혁주의 신학의 원조일까요?) 마치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린 것처럼 아론은 말합니다(24절):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이 말에 대한 모세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25절):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여기에서 히브리어는, 아론의 앞선 말(키 베라 후)을 비틀고 있습니다: '키 파루아 후'라고, "이(백성)들이 관리를 받지 못했구나(그래서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구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브리어를 읽어볼때, 백성들을 향한 아론의 직설적인 공격과 대비하여 모세는 아론의 그 말을 그대로 비틀어서,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론아! 이들을 잘 관리했어야지. (25절 하반절) 아론이 그들을 내버려두어서 망나니가 되었잖아!" 아론이 백성의 원죄(베라)를 지적했고, 모든 정황을 '결정론적'(자동으로 만들어져 나온 금송아지!)으로 이해했다면, 모세는 오히려 아론을 지적하면서, 사람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서 상황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물론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출 32:9). 이것은 여호와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중재로 인해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32:12). 몇 백년 후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렇게 외쳐댔던, '돌이키라!(히. 슈브)'라는 외침을, 이번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외치는 것이지요: "노를 그치세요!(슈브!)" 주의 백성에게 '악(하라아)'을 행하리라는 뜻을 돌이키소서(히. 나함)! 그러자 여호와께서 정말(!) (악을 행하리라는) 뜻을 '돌이키십니다'(14절).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다(창 6:6)도 되면서, 마음을 바꾸다(렘 26:13,19)도 됩니다. 모세는 아론의 결정론을 거부한 것이 아닐까요? (모세를 아르미니우스와 연결시켜보는 일은, 이 본문에서는 조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히브리 성서의 22절(아론의 원죄론)에 대한 비평주를 보면, 사마리아오경은 '베라'가 아니라, '파루아'로 쓰면서 25절의 '파루아'를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아마 사마리아오경을 봤던 옛신앙공동체는, 아론의 원죄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나봅니다.) (한편, 다른 얘기지만, 32장 26-29절은 신 33:8-11절과 맞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목회적인 관점에서, 40일을 기다리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고, 결국 진멸당해도 마땅한 그런 잘못을 저지른 백성을 앞에두고, '이들은 원래 악인입니다!'(난 잘못 없다구요!)라고 말을 하는 것과, '내가 이들을 관리하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내가 잘못했네요)라고 말을 하는 것의 차이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아론의 죽음(민 20:29)과 모세의 죽음(신 34:8)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겉으로 보기엔 비슷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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