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묵시에 대하여

진실과열정 2013. 11. 16. 01:48

'묵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프로야구에서 감독이 코와 모자를 만지작거리면서, 은근슬쩍 사인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렇게 몰래 나타내는 것일까요? 상대편이 보고 단번에 알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또는 초대기독교사회에서 '물고기'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암묵적으로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 상황은 기독교를 압제하는 현실에서, '익두스'(물고기)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말을 상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회이건 '우리'와 '너희'로 나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보다 '너희'가 더 우월한 상황 아래에 있고, 더 나아가 그 상황이 핍박이나 압제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념을 묵시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켜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이 문학의 한장르로 나타난 것이,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와 신약에서 요한계시록입니다.


     묵시라는 문학장르의 특징은, 일단 어렵다는 것이지요. (당연합니다. 한번 보고 그 뜻을 알아낸다면, 그것은 묵시가 아닌 겁니다.) 어렵기 위해서, 묵시는 상징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 상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신화적인 것들 예를 들면 하늘의 세계를 끌어들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에서 등장하는 사자, 곰, 표범, 넷째짐승, 열뿔과 작은 뿔은 각각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헬라, 셀류시드, 그리고 (다니엘서의 직접적 박해자였던) 안티오쿠스 4세를 가리킵니다(단 7:3-8). 그리고 요한계시록 역시 '큰 성 바벨론'(계 16:19)으로 등장하는 대상은 로마입니다: 로마는 7개의 언덕으로 일컬어졌으며(17:9), 666이 네로의 숫자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은 (네로 이름의 마지막 N이 없는 616이 있는) 사본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지요(13:18). 묵시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는 기존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서의 상황은 (예언자들의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이고(에스겔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떠난 것이지요), 계시록의 상황은 (정경적으로 볼 때, 바울 사도의 그 많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엡 6:24) 결국 계 1-3의 교회들의 모습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정치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기존 질서가 '우리'가 아닌 '너희'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너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의 세계를 통한 기존 질서의 전복 혹은 '하나님의 정의'를 소망합니다(단 12:1; 계 18:21; 19:11-16). 묵시의 세계관은 세상에 대한 불신이며(단 12:10; 계 22:11), 그러므로 묵시의 수사학은 현재 고난 속에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라는 최후의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단 12:2-3; 계 21:3-4).


     그런데, 한가지 차이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세번의 반복적인 신적 심판의 장면이 나옵니다(6:1-7:17; 8:2-11:19; 15:1-16:21). 불의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유독 주목을 끄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사이클에서 다섯번째 인을 떼는 장면을 보면(6:9-11), 순교자들의('죽임을 당한 영혼들') 절규를 느끼게 됩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는 세번째 사이클에도 발견됩니다(16:6):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핍박을 당했고 또 지금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라는 혹은 하나님이 심판/신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심판의 다른 이유들이 찾아볼 수없고, 단지 '우리'의 원성 혹은 기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번째 사이클에서 보다 더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나팔을 불때마다 세상의 1/3이 깨지고 불타고 흑암으로 변하는 지독한 심판의 장면인데, 그 나팔을 불기 전에 천사가 향로를 땅에 쏟게 되며, 그 향로에는 "성도의 기도"가 들어있습니다(8:4-5). 과연 성도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첫번째와 세번째 사이클에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복수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의 반응에 대하여 다니엘의 반응은 어떨가요? 다니엘도 기도를 하였습니다(단 9장). 그런데 계시록의 기도와 사뭇 다릅니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9:7-10, 19).


     각각의 신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회개 기도 속에서 천천히 기다렸고(단 12:11-13), 요한은 교회의 회복을 복수 기도 속에서 급하게 기다렸습니다(계 22:12,20). 회개 기도와 복수 기도를 놓고 볼때, 우리는 시편의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에서도 감사시가 있으며(136편), 저주시가 있습니다(137편). 그러므로 다니엘에게서 시편 51편의 기도가 떠오른다면, 요한에게는 시편 69편이 생각납니다. 어느 묵시가 좋은 묵시냐 하는 질문은 성서를 대하는 가치판단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신앙 공동체가 보여주었던 신앙전승을 무시하지 않으며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의 묵시를 생각해볼 때, 이렇게까지 묵시가 활동할 수 없는 '노골적인 세상'에서, 진정한 묵시를 살아가는 것이란(계 22:7), 과부의 두렙돈이 보여주었던 하나님 사랑(막 12:33, 41-44)과 이름없는 사마리아인이 보여주었던 이웃 사랑(눅 10:33-36)에서처럼,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만 보이는 삶이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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