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조직

진실과열정 2013. 5. 9. 01:19

이스라엘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던 '영적지도자들'로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지혜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관련된 연구들만 해도 정말 흥미진진하지요.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 나지 않지만, Joseph Blenkinsopp의 Sage, Priest, Prophet: Religious and Intellectual Leadership in Ancient Israel(1995)가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LAI 시리즈로, 90년대이래로 성서학이 간학문적 연구를 받아들이면서 기획된, 보다 '입체적인' 성서이해를 갖는데 큰 도움이 되지요. (허나, 블렌킨솝의 이 책은, 아무래도 부피를 고려했는지, 성서본분을 중심으로 얽히고 섥힌 이들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풀어내는데 치중을 했습니다.) (성서의 성격이 재조명되고, 성서밖의 풍성한 연구 결과,) 최근 경향은, 이들을 칼로 무자르듯이 구분할 수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마을 이장님이 어떤 경우엔 제사도 집전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어주어야 하며, 더 나아가 언제 모를 심어야 하는지도 결정해주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어찌되었건 우리는 성서가 보여주는 큰그림만에 익숙하기에, 자연스럽게 제사장이 보여주는 엄격한 '구별(히, 바달)' 의식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P가 보여주는 '구별'이야말로 제사장 사역의 출발점이고[레 10:10], 동시에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의 창조이기도 하였지요[창 1:4].) 이렇게 '구별'을 통해 '거룩'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P의 이데올로기였기에(레 11:44-47), "놀랍게도" 이들은 히브리성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짜'를 구별하는 '가지치기'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느 13:3). 뭐, 성골이니 진골이니 혹은 그냥 족보없는 평민이니 하면서, 같은 사람이지만 사실은 같지 않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제사장의 족보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혹은 '꿈도 꾸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나올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P인 민수기에, 질서위반기록[11:26-19]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반전을 기대하게 됩니다.)

 


물론 대전제는, 야훼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창1장은 물론이고, 창2장도 나름의 질서가 있죠). 거룩한 일을 위한 구별된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야훼는 융통성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그게 '나실인'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레위인이 아니어도, 혹은 여자라도(!)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오케이~가 떨어지는 거지요(민 6:2). 정말, 그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내용은, 제사장들의 그것과 일치합니다(민6:3//레10:9f; 민6:5//레21:5; 민6:6//레21:1-3). 질서 속에서 유통성을 보여주시는 '아름다운' 하나님을 보는 장면이지요. 이러한 아름다운 융통성을, 원칙주의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구요. (똑같은 본문에 대해서, 바울[롬 4:1-5; 갈 3:6f]과 야고보[약 2:21-26]가 '손뼉'을 치고 있음을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손뼉, 혹은 하나님의 융통성은 엘리와 사무엘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엘리는 (아쉽게도) 아론의 아들 이다말의 후손입니다. 아론의 장남 엘르아살에게서 비느하스가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게되지요(민 25:11ff). 어찌되었건 실로의 엘리는 그래도 진골이지요. 이러한 진골 앞에 사무엘이 '구한바'(히, 사알)되어, 결국 야훼께 '드려진'(히, 사울) 존재가 됩니다(삼상 1:20,28; 한편, 1:1과 9:1의 유사한 이야기 진행방식을 고려해볼때, 숩사람 사무엘이 베냐민사람 사울을 어떻게 포함하면서 보다 큰 북이스라엘의 전승으로 발전하였는지를 살펴본다면, 좋은 길이 열릴 것 같네요). 주목할 점은, LXX은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제사장 혈통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의 구별된 일을 할 수 없었지만, 역시 야훼는 융통성의 하나님이기에, 사무엘은 '제사장'도 되었고(2:35), ('지혜자'를 포함하여[9:9]) '예언자'도 되었으며 더 나아가 '사사'도 될 수 있었습니다(7:16; 8:1).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융통성은 역시 P에 의해, (아이러니하게도) '가지치기'의 반대인) '접붙이기' 되었고(대상 6:28), 다시 역사는 손바닥 하나로, '짝짝'이 아닌, '붕붕' 거리는 이상한 소리만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바다 깊은 곳에 생을 두고 살았던 어부들을 부르셔서 하늘 저 높은 곳의 세계를 소망하게 하신 일은, 정말 하나님의 지혜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성골도 천민도 없는거죠. 예언자, 제사장, 지혜자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늘소망가지고, 겸손하고 정열적으로, 오늘을 살라고요. 

'Bible Study > 성서 연구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식  (0) 2013.05.15
케티브-케레: '사랑'이라고 쓰고, '용서'라고 읽는다  (0) 2013.05.09
666  (0) 2013.05.09
속음/속임  (0) 2013.05.09
한글미학-번역  (0) 201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