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에베소서 강해-7] "------"(3:1-21)

진실과열정 2010. 6. 18. 13:11

꼼꼼하게 읽는 에베소서(8)-찬송가 493장 


 

…… (3:1-21)

“깨달음에 대한 전율, 깨달음을 위한 기도”

 

 

저는 처음에 이런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꼼꼼히 말씀을 읽으면 첫째로 재미있고, 둘째로 유익하며, 마지막으로 도전이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에베소서를 꼼꼼하게 읽으면서 몰랐던 것도 새롭게 알고, 그동안 알았다고 생각됐던 것도 다시 정확하게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오는 바울의 핵심 메시지도 듣게 되었습니다.

 

1. 깨달음에 대한 전율

   바울의 도전, 곧 바울의 핵심메시지는 단 한마디로 ‘교회’입니다. 조금 길게 말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지는/세워지는/자라가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단지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급하게 생겨난, 새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비밀을 깨닫게 하셔서 알게 된 이후로, 이 교회는 창세전부터 세워진 계획이며 섭리이며 예정이었습니다. 구약의 역사가 교회를 위한 역사였습니다. 수직적인 구원 사건은 교회라는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평적인 구원 사건 역시 교회라는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원수되었던 우리가 한 몸을 이루어 연결하는, 곧 한 몸을 이룬 새사람으로써 조직된 유기체(有機體)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교회’라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에베소교회에게 그리고 21세기의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보다 본격적으로 교회의 비밀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새사람으로 조직된 유기체로써 과연 어떻게 교회의 각 부분이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더 이상 연속해서 편지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라는 새생명, 더 나아가 ‘교회’라는 영적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눈이 열리고 입이 벌어지며, 머리카락이 쭈볏쭈볏 서는 것을 느끼며, 무엇인가 그의 깊은 곳에서부터 뒤흔드는 전율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나의 경험).

   그래서 바울은 보다 본격적으로 교회의 비밀을 풀어주기 전에, 숨을 고르는 작업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3장입니다. 여러분들이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어가시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부분이 바로 이 3장입니다. 왜냐하면 1-2장의 흐름이 갑자기 탁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3:1을 보면, 바울은 앞선 2장, 곧 서로 원수되었던 우리가 ‘한 몸’이 되어서, 한 몸을 입은 새생명의 교회로써 지어져 간다는 메시지에 이어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잠깐 숨을 고릅니다. “……”에 동그라미를 칩시다. 너무나 위대한 비밀이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도저히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이 교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 둘 다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교회의 비밀을 진행하기 전에, 에베소 교회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말하는 거 이상한 거 아냐.. 진리야. 그런데 비밀이야. 그래서 계시 곧 성령을 통하여 깨달음의 빛을 비춰서 밝히 드러내지 않게 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비밀인 것이야. 라고 계속적으로 당부합니다(3:2-4): 2절,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 + “내게 주신”; 3절: 비밀 + “알게 하신”; 4절: 그리스도의 비밀 + “깨달은 것”

   그리고 바울은 다시금 교회야 말로 하나님의 모든 섭리의 최종점이라고 강조합니다(3:9-11). 영원부터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란, 바로 10절에 나오듯이,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2. 깨달음을 위한 기도

   이어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기도를 합니다. 바로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 겁니다. 바로 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바로 14-19절입니다; “지식,” “알아,” “깨달아”에 동그라미를 칩시다). 정말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하나님의 풍성한 속뜻 곧 교회를 깨닫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합니다(20-21절):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것은 둘을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를 가리키는 겁니다.

   이렇게 바울은 보다 심오한 한 몸이 된 새사람(2장 11-22절)으로서의 교회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여지는 가에 대해서 말하기 이전에(4장), 하나님의 섭리 그 자체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교회’로 통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먼저 짚어주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3장의 내용을 생각해볼 때, 결국 우리는 3장은 없어도 되는 장이라고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3:1과 4:1이 같습니다. 3:1의 말줄임표로, 그리고 이후의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2장과 4장의 긴밀한 통일성을 헤치고 말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의 신앙과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즉, 신앙인이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한다는, 그 실제적인 사례를 우리가 이곳 말고 또 어디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먼저 계시를 받았으니, 은혜대로 너희도 또한 계시를 받기 원한다는, 바울의 넉넉한 사랑을 다른 어떤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에베소서 3장은, 비록 논리상의 흐름은 깨트릴지는 몰라도, 신앙의 흐름은 오히려 배가 되게 하는 도전과 은혜의 장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3. 영적 깨달음으로 인해서 삶이 전율해본적이 있는가?

   우리는 지식에 대해서 무엇인가 거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지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또한 바울이 지식을 배설물취급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식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지식만이 전부라는 편협함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헬라인들이 글을 쓰는 전문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헬라의 철학에 비추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고 입을 모아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차대구 구조, 헬라식 수사법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지식이 전부라는 것을 거부해야하지만, 지식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닌, 핵심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기술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은 수집광이 될 뿐, 그 많은 것을 관통할 수 있는 통찰력이 부족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그 핵심을 깨달았던 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지식의 정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있기를 바라듯이,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에도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깨달음은 현장에서 계속적으로 부딪히면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는 여러 가지 열쇠중에, 바로 “깨달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여러번 제자들에게 “너희가 깨닫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상황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의 현장에서 부단히 예수님과 부딪히면서, 제자들의 인간적인 생각과 예수님의 신적인 뜻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불꽃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단번에 깨닫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좇는 그 순간부터,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16장 12절에, 드디어 제자들이 “깨달으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드디어 16장 13절에 예수님이 드디어 입을 여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깨닫기 전에,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겁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진주를 주어도 진주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원리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역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깨달음을 위한 다시 말해서 신령한 지식을 위한 기도를 이렇게 힘들게, 2장과 4장의 순탄한 논리를 깨뜨리면서 까지 3장에 집어넣었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냥 단순히 2장 이후에 4장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준 것과 다름이 없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고 있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성장하는 삶입니다. 이 성장한다는 것에 대해서 바울과 예수님은 입을 모아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식/ 깨달음이 없으면, 성장도 없다.” 그러므로 3장 14-19절의 바울의 기도는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의 영적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기도문으로 삼아야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교회, 다시 말해서 깨달음이 없는 교회는 비전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깨달음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신령한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영적인 세계가 정말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와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낮아지는 삶이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시간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나의 생각을 쪼개고 나의 옛사람을 쪼개서 진정한 새사람으로 만드는, 신령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깨달음은 불교용어가 아니라, 원래 기독교정신입니다.

 

4. 깨달음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바울과 예수님은 어찌보면 교육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턱대고 쏟아 부어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눈높이를 맞춘 스승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서 나가는 사람을 볼 때, 뒤에 쳐져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상당한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잘못된 리더는 “왜 나를 따라오지 못하느냐?”라고 뒤에 있는 사람들을 재촉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오히려 그의 뒤로 가서 그의 등을 밀어주는 사람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그게 등을 밀어주는 리더입니다).

   우리교회는 셀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셀은 세포라는 의미로, 그 자체로 독립적이면서 상호조화하는 생명력이 있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교회조직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셀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 한국적인 문화, 곧 폐쇄적인 문화에서 셀을 성공시키기는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다시 구역이나 속으로 회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구역이나 속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셀을 포기하기에는 그 잠재적인 파워와 영향력이 너무 아쉽다는 겁니다.

   어찌되었건 우리교회는 많은 셀리더들을 양육하고 있고, 셀리더들은 또한 각 셀대원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리더사역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3:1의 말줄임표가 셀리더 혹은 저자신에게도 가끔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3:1은 곧 4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쉼니다.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책임지시면 된다는 식으로 무턱대고 막 자신의 깨달음을 퍼붓지도 않습니다. 바울에게 기준은 에베소 교회였고, 그들이 준비되지 않았다 싶으면, 쉴줄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보기도는 계속적으로 하고 있었지요!(14-19절)

   우리도 이러한 원리를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로 2주후에 새성전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텐데,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수많은 충돌들이 발생하기도 할 것입니다. 특별히 그 많은 새신자들을 양육하고 관리하는 문제에서, 다시 말해서 셀을 운영하는 방향에 있어서 생각지도 못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사역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역자체에 있지 않고, 성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목적을 교회라는 비밀의 깨달음 자체에 있지 않았고,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그 목적을 두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놓으시기만 하면 안 됩니다. 더욱 철저하게 셀리더로서 훈련을 받되, 셀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도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가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쪼록 바울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셔서, 앞서 가는 리더가 아니라, 뒤에서 밀어줄 수 있는 리더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말줄임표’를 통해, 오히려 더 큰 영적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그렇습니다. 일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다. 그렇습니다. 결국,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기도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결국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해주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