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오르한 파묵, [눈] "자신의 눈 결정체를 해독해보라"

진실과열정 2010. 2. 26. 10:34

오르한 파묵, [눈], 이난아 역

 

 

다시 한 번 파묵의 책을 들었다. 왜냐하면 올 해 초에 '눈'이 엄청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정말 '눈' 때문에 고립된 것 같은, 소위 위대한 자연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폭설로 인해 잠시 동안 고립된 한 작은 도시에서 벌어진 군상들의 삶과 종교, 사랑과 배신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일종의 '희극'과도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하얗게 뒤덮인 캔버스에 멋지게 그려질 것 같은 기대감이 하나 둘 씩 무참하게 혹은 역설적으로 더러워지는 모양이다. 마치 폭설이 내린 후에, 멋드러진 풍경을 기대하지만, 실상 밖에 나가보면 흙탕물에 번져 있는 세계말이다.

 

작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추적한다. (여기에서도 한편으로는 전작 '검은책'이 작용하는 것 같다.) 반체제 인사로 또한 유명한 시인으로 설정된 친구 '카(Ka)'의 눈 속에 피웠던 사랑의 열꽃을 추적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눈(Kar)'와 주인공 '카(Ka)'와의 평행선을 감지할 수 있다.) 주인공은 터키의 독특한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희괴한 자살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망과 반대로 그것을 변혁시키려는 개화된 사상의 발전의 충돌,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더욱 복잡해지기만 하는 남자와 여자 간의 은밀한 사랑의 비밀을 캐내게 된다. 그 과정이 매우 과장되기 때문에, 때로는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또한 반대로 매우 솔직한 터키인들(혹은 우리들)의 만담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작가가 바라 본 세계는 매우 원시적이다. 남자들은 종교에 헌신하고 여자들은 자살을 하기 때문이다(I:57). 이 모든 것은 한 곳으로 엮어 있다. 나는 그것을 관계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가! 너무나 오래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결국 나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상하관계의 세계관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여성이 히잡을 벗는다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더 편하고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게 될 걸세; ... 하지만 히잡은 여성을 불편, 겁탈,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 속에 더 편히 나갈 수 있게 만들어."(I:72) 문화가 정말 다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여전히 뉴스에서만 볼 수 있는, 히잡을 쓴 여성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히잡을 쓴 여성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문화인류학자의 에믹(emic)과 에틱(etic)의 문제를 상정할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독일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시인(카)은 분명 에틱, 즉 외부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또한 독자들 역시 '앞선 문명'이란 편견으로 그들을 동물원의 미개인인양 어설픈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된다. 그렇다, 바로 그것을 깬다! [눈]은 몇일간 계속된 눈때문에 도시가 고립되고 그로 인해서 급격한 정치적 변동이, 의식화된 사람들의 고집과 전통적인 사람들의 그것과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들을, 유쾌한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경쾌함과 풍자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문명화된 사회의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것이 분명하다. 언제 우리가 하찮은 눈 때문에,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기나 할까! 되지도 않는 소리지!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요사이 지구촌의 선진국이라는 문화도시들이 경험하는 '눈사태'로, 바로 우리들이 당황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섣부른 에틱적인 자존심은 내버려야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시인이 끝까지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세계관은, 우리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며, 어줍잡지 않게 소통의 가능성만을 비칠 뿐이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히잡을 쓴 여자들과 염주를 든 남자들이 믿는 가난한 사람들의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제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저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기 저 아름다운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을 믿고 싶습니다. 세상의 은밀한 균형을 주시하고, 인간을 더욱 더 문명화하고, 더 섬세하게 만들 신은 있습니다. ... 하지만 그 신은 당신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밖에, 텅 빈 밖에, 어둠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에 내리는 눈 속에 있습니다(I:148).

 

혼자서 신을 믿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믿고 그들 중 한 명이 되는 거야. 그들이 먹는 것을 먹고,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이 웃는 것에 웃고, 그들이 화를 내는 것에 화를 내야만 비로소 그들의 신을 믿게 돼. 그들과는 생판 다른 삶을 살면서 같은 신을 믿지는 못하지. 공정하신 신은 그것이 이치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I:298).

 

사건은 급격하게 진행된다. 눈으로 갇힌 도시에 쿠데타가 발생하고, 그 중심에 여성들의 히잡을 벗겨내고야 말겠다는 지도부층의 새로운 의식이 욕망을 발한다. 원시적이며 이성에 반하는 사회속에서, 놀랍게도 시인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이용을 당한다. 물론 그가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나 할까? 첫사랑을 찾아서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한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진 시인의 계획은, 느닷없이 발생한 쿠데타와 맞물리면서 엉뚱한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연극을 전면에 내놓고 있는 구성과도 같이, 풍자적인 상황극으로 이해된다.) 결국 사랑을 획득하기에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버렸다.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인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눈 덮인 아타튀르크 대로의 슬픈 듯 깜박거리는 가로등에 시선을 고정시켰다(II:201).

 

후반부로 가면서 시인의 결과물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뒤따라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자 놀라움이었다. 눈 결정체가 만들어내는 육각형의 구조가, 눈 속에서 경험된 인간의 욕망과 꿈으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작가의 치밀한 구성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하고 있는 위치에서, 혹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의 눈 결정이 완성되듯이, 시인은 그곳에서 인생의 낮설음을, 꿈틀거리는 사랑의 뜨거움을, 우리를 간지럽히는 인생의 즐거움을, 지켜주지 못한 아픔의 분노를, 이 모든 것을 덧없다고 덮어버리는 야속한 눈송이를 노래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내적인 지도인 이러한 눈송이가 있어야 한다. ... 멀리서 보기에 서로 닮은 사람들이 사실은 얼마나 다르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지는, 자신의 눈 결정체를 해독하면 모두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II:228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