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양심, 그건 사랑으로 결정된다."
책도둑, 마커스 주삭 (정영목 역)
우리에게 뉴스가 되는 것은, 일본의 전후세대가 부모세대의 과오를 뉘우치면서 우리나라에 와서 사죄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일본인들 중에서도 전쟁과 침략을 반대했던 '양심적 목소리'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다. [책 도둑]이라는 책이 후자에 속한다. 두 권으로 된 비교적 짧지는 않은 책에서, 독일 전후 세대이면서 나와 같은 소위 X세대(75년생)가 바라본 나치 정권에 대한 담담한 묘사와 함께, 총과 칼 대신 여유와 배려로 어려움을 이겨낸 독일 서민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리젤은 의붓 딸로 독일의 어떤 가정에 들어가게 된다. 친절을 꼭꼭 숨겨놓고 있는 의붓 엄마와 반대로 친절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의붓 아빠가 한 가정을 이루어, 거기에 짓궂은 친구들과 영원할 것만 같은 단짝 친구와 함께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독특한 점이라면, 화자를 ‘죽음의 신’으로 설정한 것으로, 3인칭 전지적 작가라는 다소 진부한 입장을 대신해서 참신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동생의 주검의 자리에서 발견한 책([무덤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을 몰래 훔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리젤은 나치의 맹목적인 정신일치화 운동으로 벌어진 20세기의 분서갱유의 현장에서 또 한 권을 훔치게 된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시장의 부인의 서재실에서 ‘허락된 책도둑질’을 계속하게 된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자신의 위치가 무한정 넓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아빠에게서 시작된 유대인 청년을 지하실에서 몰래 숨겨주는 일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따귀를 맞고 웃음을 짓는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을 하루에 스물 네 번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이 유대인을 숨기는 일이었다(I. 312)
혼돈의 시대에서, 생존까지도 위협을 받는 시대에서, 나약한 한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며 또한 어떤 결정, 혹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여기에서 한 권의 책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저자는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자칫 지나치게 우울할 수 있는 세계를, 십대 여자아이의 섬세한 분위기를 잘 묘사한 것 같다. 즉, 정신의 실제화라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한 힘(사탄의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앞에서 개인의 양심이 얼마나 미약하게 타오를 수 있는지를, 바로 그 언어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세계를 정확하게 그리고 더 생생하게 인식하는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II, 244): “강을 건너자 햇빛에 관한 소문이 구름들 뒤에 서 있었다.”
저자는 글의 소중함, 말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저자는 히틀러를 ‘말을 흔드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국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가 망쳐놓은 세계를, 가정의 아버지인 한스 후버만이 세워놓은 참된 세계. 역시 아버지는 위대하다. 국가를 뛰어넘는 개인의 위대함은 새로운 세대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다시 소녀가 말을 했을 때, 소녀의 입에서는 질문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뜨거운 눈물들이 눈에서 자리를 찾으려고 싸웠지만 소녀는 그것들이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호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나았다. 말이 모든 일을 하게 하자. “정말 오신 거예요?” 소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 뺨에서 씨앗을 가져온 게 맞나요?” (II, 296)
소녀는 자연스럽게 운명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용기를 배운다. 전후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 과거는 무엇을 남기며 그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었다는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운명도 없으며, 선택뿐이 남겨있다.
'Culture > [독서] 좋은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라카미 하루키, [1Q84]-두 개의 달 혹은 완전한 생명력 (0) | 2010.02.25 |
---|---|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0) | 2010.02.21 |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0) | 2010.01.30 |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예수는 신화다] (0) | 2009.12.29 |
브루스 링컨, [신화 이론화하기] - 새질서를 은밀하게 제시하는 이데올로기 (0) | 2009.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