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예수는 신화다]

진실과열정 2009. 12. 29. 06:46

 

SBS에서 방영되어서 논란을 일으켰다던, 그때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문제의 책을 읽게 되었다. "예수는 신화다." 1999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2002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지만 한국기독교의 엄청난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판매를 중지하다가,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발간되었다. 확실히 문제작이긴 하겠다. 그 내용 역시, 상당히 편중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파격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파장은 쉽게 물리칠 수 없는 것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전파되는 이러한 정보는 재고할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의 주된 주장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 대한 기독교의 도용'이라는 것은, 영화 [시대정신]에서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내가 보기에 상당히 편중된 전문가라고 보인다)은, 자신들의 말과 같이 "얼토당토않은 소리"(11)처럼 들릴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The Jesus Mysteries Thesis)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실존한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여러 유서 깊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하나의 신화"라는 주장이다(10). 워낙 파격적인 주장들을 들어왔기에, 이러한 서두에 던져준 주장에 별다른 감흥은 느낄 수 없었지만, 과연 그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에 중점을 두고 읽어내려갔다. 나의 결론은, 기독교의 과거(혹은 기원)에 대한 또 하나의 가능한 주장을 반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승자의 역사만 있는 알고 착각의 늪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저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신화 오시리스가 피타고라스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로 전파되면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로 진화되었는데, 이러한 신화는 부활을 핵심 요소로 가지고 있으며 영적 가르침을 암호화한 영적 비유로, 비밀종교 의식을 통해서 고대 세계 곳곳에 전파되었던 것으로,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가 되었고,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 등"이 될 정도로 범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42).

 

과연 이러한 고대의 신비 종교가 최첨단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현대인에게 종교는 떨어질 수 없는 애증의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첨단으로 올라갈수록 심연에는 본질적으로 종교성이 더욱 굳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SF 영화를 보면, 종국적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니콜라스 케이지의 [노잉], 존 쿠삭의 [2012]) 그렇다. 고대의 신비 종교가 현대인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현대인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제1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대부분의 (혹은 거의 전부!) 그림들이, 그 밑그림으로 고대의 신비 종교를 '베껴내고!'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알고 있는' 예수의 생일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활이라는 고유한 성격, 또한 탁월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결한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우월한 가르침까지. 이 모든 것들이, 저자의 주장에 따르자면, 특별히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역사적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의 모습들이, 고대의 신비 종교(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 12월 25일의 생일, 동정녀 출생, 별에 의해서 예고된 탄생, 침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 기적과 치유, 12사도, 나귀를 타고 입성, 부당하게 고소당한 의인, 상징이 된 빵과 포도주 의식, 나무/십자가에 메달림, 대속의 희생양, 사흘만에 부활, 빈 무덤을 찾은 세 명의여신도. 이 모든 내용들은 왠만한 기독교인들이라면 눈에 그려질 정도로 익숙한 성서의 그림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러한 사항들을 나열한 뒤에 한결 같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라고 선언한다(96-99). 어느것이 먼저 나올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많은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더 잘 -그리고 더 일찍이- 표현되어왔다. 그러한 표현들의 이면에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해온 고대의 교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켈수스, 101)

 

 

저자의 핵심은 간단하다.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신비로운 사상들이, 유독 기독교에서만 독특하게 받아들였던 이유는, 신화적인 원리의 세계관을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체화했기 때문"이다(135). 고대 세계를 이해하는 현대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선입관만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중에 치명적인 잘못이 있다면, 바로 신화의 세계를 과학의 눈으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신화의 세계에 존재하던 삶의 한가지 흐름을 중심적으로 소개한다. 고대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려는 점에서 저자들은 분명히 공헌을 한 바 있다. 그들이 논의의 전환점으로 삼았던 점이, 바로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시대 배경을 모르고 얼마나 오해되어왔는지! 저자에 따르면, 이 표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다(163). 다시 말해서, 낮은 수준의 자아가, 비밀을 전수받음을 통해서, 수준 높은 자아와 일체가 되는 경험이, 고대 사회의 '미스테리아 종교'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162). 그러므로 저자는 논의의 방향을 '영지주의'를 중심으로 진행하는데, 고대 사회의 '영지주의' 모티프를 차용해서 예수의 그것으로 대치시켰다고 보고(207), 본래 기독교가 영지주의적인 모습, 다시 말해서 복음서나 바울 역시(273,!)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고유한 모습이었다고 주장한다. 바로 여기가 학자들의 논쟁점이 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앞서 고대사회의 종교적 모티프들이, 성서에 차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저자들의 주장은 이미 식상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의 창조나 홍수와 같은 부분들도 훨씬 앞선 고대사회의 신화가 존재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저자들은 한 쪽 편을 너무 지나치게 중점을 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고대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종교적 모습들을 '영지주의의 미스테리아'로 확대해석한 것이 과용이라고 하겠다. 사실 기독교의 기원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 역시 '미스테리아'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보다 훨씬 계산해 넣어야 할 요소들이 더 많음을 인정하고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신봉하고 있는 문자주의적 근본주의 신앙 풍토에 필요한 일격을 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의 글들을 비판적으로 인용함으로써 거꾸로 시대를 읽어내는 치밀함은 대단한 수완이다(비록 재인용한 부분이 상당 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미 완성된 성서 이전에,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신학교에서 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결론적으로 본래 영지주의적인 기독교가 어떻게 문자주의적 기독교로 '변질(?)' 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내가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바트 어만의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을 참고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간단하게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장 마다 저자들은 간략하게 새롭게 발견된 결론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신적 극단주의자"들이 "배신자"들을 이겼다는 역사의 해석은 적절한 지적이다(348).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극단주의적인 입장이 세력을 얻어가고 있으며, '지식을 터부시하는 문명사회'가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 예를 들어, Howard Clark Kee, The Beginnings of Christainity: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New York: T&T Clark, 2005)를 보면, 다양한 보론들이 논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