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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
Dever, William G.
정가 : USD 20 (한화정가 : 28,820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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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일자 : 2008-07-29 | 페이지수 : 360 | 무게 : 1kg
도서크기 : 0 X 0 X 0 | 책장정코드 : PB
출판사명 : Eerdmans Publishing Co, WM. B.
ISBN : 0802863949
제 9 장
여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 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관한 이러한 포괄적인 대화를 거치면서, 나는 내가 그리고 있는 이스라엘 민간 종교의 그림이 독자들에게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추정해왔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이러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라도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는가? 아마도 이것은 단지 골동품 애호가들만의 선호일지도 모른다(나와 같은 경우이다). 이번에는 이러한 질문들을 몇 몇의 관련성이 있을 법한 “청중들”에게 관련해서 던져보기로 하자.
(1) 고대 이스라엘 민간 종교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평가가 고고학자들에게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가지가 있다면, 고고학자들은 “제의”와 제의적 유물에 대해서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전적으로-지나치게-전형적인 반감은 옹호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편애가 어떠하든지 말이다. 우리는 종교가 모든 고대 사회에서 전적으로 근본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 어떤 특정한 종교적 신앙과 행습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문화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보다 공감 할 수 있어야만 하며, 심지어 감정적으로는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적인 면에서는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방치됨 이상이라는 데에 있다. 많은 제의적 장소들과 설비들이 매우 부주의하게 발굴되고 있으며, (한다고 해도) 잘못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뀔 필요가 있다.
(2) 이 모든 것들이 성서와 신학적인 연구에 어떠한 관련성이 있을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많은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평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상당한 엘리트들로,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생색을 내지 않을 뿐이지(그들의 것이란 모두가 본문에 관한 것뿐이다), 오만방자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로써, 만약 실로 그들이 [앞서 말한 자신들의 본문에 관한 연구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진짜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들 자신만의 개념-그들의 기준으로 세련되게 만들었던 것-을 옆으로 치워놓아야만 할 것이며, 그것이 과거에는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신학과 자기 자신만의 신앙적인 판단은 역사적인 연구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분리되어야만 한다. 심지어 자신의 신앙적 판단이 정직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의 견해로 보자면,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는 불충분하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여기에서, 고대와 현대 모두에 있어서, “실제 생활의” 종교라고 불렀던 것에 반하는 편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역사가 필요하며, 장래에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는 고고학적인 정보가 주요한 증거들로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연구를 다시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유럽에는, 자유주의적 개신교파와 로마 가톨릭 내에서 “수정주의적” 성서학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 집단과 여성신학의 결합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학자들 가운데 몇은,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는데, 부분적으로 위에서 논의했던 “프라이부르그 학파Freibourg school”와 연대하고 있다. 나는 1993년에 “오직 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굉장한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작업에 눈이 열렸던 적이 있다. 그들의 작업이 영어로 출간되지 않았던 관계로, 나는 그것을 여기에서 인용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참가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철저한 루터교인인 에하르트 거스텐버거Erhard Gerstenberger는 당시에 기독교적 신학 서적을 출간했는데(2002; 위를 보라), 그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견해를 가져야할 것을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여성적 특징”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성신학학계의 도움이 증가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에 정확하게 기초하고 있다. 자신의 부록에 “우리시대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거스텐버거의 마지막 말들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인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적 행동과 묵상처럼, 그것은 존재 혹은 비존재의 질문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행성에 문명을 보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거스텐버거 2002:331)
고대 이스라엘의 다신론에 대하여 고고학적이며 도상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신학적인 관련성을 연구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성서학자들 가운데 또 하나의 유럽 “학파”는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Utrecht 대학에 그 거점을 두고 있다. 나는 위에서 그들의 최근 저서인 「오직 한 하나님? 고대 이스라엘의 유일신주의와 여신 아세라 숭배Only one God? Monotheism in Ancient Israel and the Veneration of the Goddess Asherah」(2001)를 논의한바 있다. 저자들 대부분은 내가 1980년대 중반부터 밑그림을 그려왔던 위치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이단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아세라가 야웨의 배우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프리첸Vriezen이 고고학적 증거들을 다루었던 장은 탁월했고, 다익스트라Dijkstra의 비문상의 증거도 대단했다. 다익스트라는 또한 “구약에서 여성과 종교”에 관하여 탁월한 내용을 쓰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도발적인 장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유명한 성서학자인 밥 베킹Bob Becking의 “오직 한 하나님: 성서신학을 위한 있을 법한 결과에 관하여”라는 글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이 다소간 성서전통 안에 기초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과 함께, 그렇지만 “우리는 다양성의 세계에서 성서전통을 직면하고 있다”는 점 둘 다 고려하면서, 베킹은 곧 바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아세라와 그 해석에 대한 고고학적이며 비문상의 증거가 오늘의 신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오직 한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의 종언을 암시하는가? 감히 말하자면, 유대인 혹은 기독교 공동체가 아세라 숭배를 시작해야만 하는가? (베킹 2001:200)
적어도, 베킹은 유일신주의에 관한 “무분별한” 언급이 점차적으로 사라져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다.
(3) 이스라엘 민간 종교의 새로운 이해와 현대의 여성운동과의 관련성은 아마도 가장 분명하다고 하겠는데, 비록 여신을 인식한다는 것이 여자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히브리 성서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바 있다. 그들은, 확대해서 말하자면 바로 그들이 “실제적인 생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 이곳저곳에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필요, 그들의 견해-그들만의 경험-는 결국엔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 여전히 많은 현대의 여성신학자들(과 심지어 몇 안 되는 남자들)은 이스라엘 사회과 생활에서 여성들의 실제적인 공헌도가 의심할 바 없이 실질적-그리고 특별히 종교적인 예식에 있어서는 여자들이 “민간의 전문가”(위를 보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이었다고 주장해왔었다. 불행하게도, 여자들이 어느 수준에서건 공헌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히브리 성서 안에서 그러한 방식으로는 발견되지 못했다.
히브리 성서를 공격하거나 그것을 “구해내려는” 시도 모두가 오늘날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매우 남성 중심적인 문헌이다. 그러나 오래 전에 잊혀진 여신을 고고학적으로 재발견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들에게 그들만의 독특한 오래 전에 잊혀진 목소리를 되돌려서, 그들로 오늘날 우리에게 그들만의 종교적인 삶, 즉 “기록되지 않은 성서”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여성들은 (단지 여성주의자들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알려지고 또한 심각하게 취급되기 위한 그들의 오랜 투쟁 가운데 고무되고 있음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은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부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떠한 교조적인 여성주의자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들은 본래 한 분 위대한 어머니가 있어서 역사 이후의 시기에 벼락출세한 남성 신에 의해 폐위되고 이후에 억압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어떠한 증거도 없이 주장해왔다. 이것은 「여신의 언어Language of the Goddess」(1989)과 같은 책에서 유럽의 고고학자인 마리자 김부타스Marija Gimbutas에 의해서 가장 강력하게 논증되었던 내용이다. 그러한 가짜-학문은, 고대 종교의 신앙, 형상, 신성 그리고 행습들을 선택적으로 부흥시키는 다양한 뉴에이지 여신 제의와 “신이교Neopagan” 종교에 의해서 신봉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집단들 가운에 일부는 내가 공개강좌를 열었을 때 나의 의견을 채택하고자 했으나, 내가 여기에서 그렸던 고대의 여신의 묘사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안을 줄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반드시 숭배해야만 하는 그러한 살아있는 신으로써 여신을 다시 살려놓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녀를 통해서 과거에 있었던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필리스 버드Phyllis Bird가 논평했던 것처럼, “여자들의 종교는 여신 숭배와 동격이 될 수 없다”(1991:107).
“여신 운동”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정 수단은, 루시 구디슨Lucy Goodison과 크리스틴 모리스Christine Morris가 편집한 「고대 여신들: 신화와 증거Ancient Goddesses: The Myths and the Evidence」(1998)에 들어있는 학자들의 소논문이다. 저자들은 한 세기 혹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여신을 말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비평적인 평가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얻어낸 고고학적인 자료들의 빛에 비추어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캐럴 반 데 툰Karel van der Toorn이 작업했다). 그 책에는 일부 극단주의적인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의 비평도 들어있고, 남성 쇼비니즘에 대한 대응으로 여성 쇼비니즘을 주장하는 사람의 글도 들어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또 하나의 “비법mystique”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저자들은 홀로 있는 고대의 “여신”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각각의 문화는 그 다양성에 의해서 평가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로 된 여신”은, 그래서 그녀의 생태적인 면과 모든 여자들의 그것이 결국 그들의 운명이 된다는 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적인 필요에 의하여 창조된 환상일 뿐이다.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여신’과 벗이 되었던 고대인들의 예술에 대하여 여성주의자를 그려냈던 풍자적 그림은, 학문적으로나 어울릴 만한 사람이 도서관에서 책 앞에 굽실거리고 있는 동안,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여성의’ 직관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고고학자들을 ‘이성의 상자’ 안의 피난처를 찾고 있는 ‘지저분한 남학생’으로 여기면서 악마화하는 것과 반하여, 우리가 의문시할 수 있는 바로 그 성별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자각이 없는 주관주의는 과거를 식민화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거란 바로 고대인의 생활에서 남은 자들이 스스로 중심이 되어서 현대인의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흡수됨을 일컫는다. 여성의 역사를 다시 부르짖는 급격한 상황 속에서, 여신에 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고고학적 기록물들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언급하지 않아왔다. 그들이 그 유동성에 관계하는데 실패했던 영원한 진실을 찾았던 것이다. 단지 자신들의 이론에 적합한 고대 유물들을 뽑아내면서, 그들은 그 상황에서 고려되어야할 방식으로 주요한 증거를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구디슨과 모리스 1998:14)
첨언하자면, 높이 평가를 받는 고고학자(이면서 공공연한 여성주의자)인 루스 트링햄Ruth Tringham과 마가렛 콘케이Margaret Conkey 역시, 너무나 자주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김부타스와 “여신 운동”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여신 문학에서 나타났었던 이야기는, 활동적으로 과거를 다시 그려내고 또한 현재의 상황을 위해서 ‘쓸모 있는’ 과거를 창조하려고 애를 쓰는 자들에게나 그 힘과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것은 유일한 이야기도 아니고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다. ... 성전과 성소, 그리고 신과의 관련된 ‘사실들’을 제공받는 것이 보다 만족스러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로써,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설명을 위한 노력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고 확신한다(구디슨과 모리스의 책에서 1998:45).
또 하나의 유용하면서도, 분별 있는 소논문 모음집은 캐런 킹Karen King이 편집한 「고대와 오늘에서 여자들과 여신 전통들Women and Goddess Traditions in Antiquity and Today」(1997)라는 책이다. 몇 몇의 작가들은 이집트와 고대 근동 전통을 살필 뿐만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다른 비-유대교와 비-기독교의 종교적 전통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종교들 안에서 여자들의 경험을 조사하고 있다(고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수잔 에커맨Susan Ackerman). 이들 모든 작가들은 여성주의자로,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교조주의적인 “여신 열성가”는 아니다(스스로를 “아마존”(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용맹한 여인족 사람-역주)이라고 부르고 있는, 에밀리 어윈 컬페퍼Emily Erwin Culpepper는 예외로 한다). 그들은 이전 학자들 대부분이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들이 항상 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여자들의 영성이 우월해야만 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또한 여신이 최고의 지위에서 통치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여신 운동”의 실패에 대하여 역사적이면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특별히 환생한 여신이 유대교적이거나 기독교적으로 보였을 때를 말하고 있다.
(「여성의 경험과 신의 본성The Female Experience and the Nature of the Divine」(1981)의 저자인) 유딧 오취숀Judith Ochshorn의 소논문은 가장 좋은 것에 속한다. 그녀는 족장 종교가 오로지 성서를 기록했던 고대 이스라엘 남자들만의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그들의 단일한 “남성 신”이 지상에서 남성의 지배를 반드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보다 온건한 여성주의자들과 (그리고 나와) 함께,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비전은 상당부분 확대될 수 있으며, 또한 여성의 경험을 포용하기 위해서 개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특별히 유일신주의 신앙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확대되어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취숀은 여신을 너무나 좁게 “풍요”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에 반대하는데, 왜냐하면 여자들은 어머니라는 생리학적으로 긴급성을 뛰어넘어 많은 관심사와 필요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짧게 말해서, “여신 운동”은, 그것이 어떤 여자들을 피상적으로는 만족시켜 줄지는 몰라도, 여전히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여자들에게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힘, 아름다움, 풍요함, 사랑, 조화 그리고 평화”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단순한 유토피아는 아닌 것이다(1997:390).
종교사 분야에서 여신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일은 종교에 온기와 관심 그리고 치유를 가져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들에 의해서 제정되고 축하되는 성적인 결합에서의 기쁨까지도 가져다주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기여가 될 수 있다. 여성주의를 전반에 걸쳐서 다루기에는 충분치 않지만, 여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일은 도움이 된다. 여성 운동 내에서도 많은 “학파들”이 존재한다(위를 보라). (1) 예를 들자면, 현재의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은 종교적 공동체에서부터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는데, 대부분은 기독교 성서연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지, 유대교 성서학계에서는 이따금씩 발생한다. 전자의 경우는 필리스 체스터Phyllis Chester, 아델라 야르브로 콜린스Adela Yarbro Collins, (초기 작품들에서) 메리 달리Mary Daly,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 엘리자베스 스츄슐러 피오렌자Elisabeth Schussler Fiorenza, 그리고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과 같은 지도적인 인물들을 포함하며, 후자의 경우는 다른 이들 가운데에서 아달랴 브렌너Athalya Brenner, 나오미 골드버그Naomi Goldberg, 그리고 유딧 플라스코프Judith Plaskow가 있다. 탁월한 작품들로 콜린스가 편집한 책인 「성서학계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관점Feminist Perspectives on Biblical Scholarship」(1985)과, 그리고 트리블의 책인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1978)과 「두려운 본문Texts of Terror」(1984)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유대인 작품은 그 수에 있어서 많지 않은데, 그러나 한 가지를 인용할 수 있다면 플라스코프의 「시나이에 다시 서다: 여성주의자 관점에서 본 유대교Standing Again at Sinai: Judaism from a Feminist Perspective」(1990)과 「신들을 바꾸다: 여성주의와 전통 종교의 종말Changing of the Gods: Feminism and the End of Traditional Religion」(1979), 그리고 브렌너와 캐롤 폰테인Carole Fontaine이 편집한 판본인 「성서 읽기의 여성주의적 지침서: 접근들, 방법들 그리고 전략들A Feminist Companion to Reading the Bible: Approaches, Methods and Strategies」(1997)이 있다. (혹자는 수잔 에커맨, 필리스 버드, 그리고 케롤 메이어스-위에서 다룬 바 있다-를 추가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이 “여성주의자”로서 주로 취급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리 분명치 않다.) 어떤 측면에서는 “급진적”일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남성 신을 반드시 폐위시켜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단지 가부장적인 종교가 서서히 폐지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한 여성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신 운동”에 찬성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의 저작에서 그들은 일차적으로 비평적인 학자이고, 여자는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보다 상당히 급진적인, 종교적 단체에 속하지 않는, 또 하나의 여성주의 “학파”가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단지 “후기-기독교”(혹은 후기-유대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다. 그들은 여성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종교를 기꺼이 포기하려고 한다. “여신”이라는 것은 없으며, 남성 혹은 여성의 신도 없다는 것이다. 대안적으로, 그들은 일종의 “자연발생적 종교”를 지지하는데, 이는 때때로 여성의 영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종의 여신과 관련된 신비로움에 호소하고 있다. 눈에 띄는 저작으로 캐롤 크라이스트Carol Christ와 유딧 플라스코프가 공동 편집한 「여성영성의 부활: 종교에 관한 여성주의자 독본Womanspirit Rising: A Feminist Reader in Religion」(1979)을 들 수 있겠다. 이 논문집에서 때때로, “신학theology”은 “비신학thealogy”이 되고, “역사history”는 “여성사herstory”가 된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보다 급진적인 세속 여성주의자들은 아마도 자신 스스로를 “신이교도들Neopagans” 혹은 “윅캔들Wiccans”(마녀들)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은 김부타스의 초기 저작(위를 보라)에 영감을 받았는데, 그 책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와 공식적인 종교 모두에서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던 우주적인 분으로 추정되는 대지Earth Mother를 기념하고 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상 서적들은, “원시 여성 종교”를 낭만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들로, 메리 달리Mary Daly의 후기 저작인 「아버지 하나님을 넘어서Beyond God the Father」(1973)과 크리스틴 다우닝Christine Downing의 「여신The Goddess」(1984), 그리고 메를린 스톤Merlin Stone의 「하나님이 여자였을 때When God Was a Woman」(1978)과 (원문 그대로 인용하자면) 스타호크Starhawk의 「나선형 춤: 위대한 여신이라는 고대 종교의 재탄생The Spiral Dance: A Rebirth of the Ancient Religion of the Great Goddess」(1979)가 있다. (윅캔 잡지와 저널지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역시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의 범위를 벗어난 것들이다.)
다양한 여성주의 그룹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적인 문제가 무엇이건 간에,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여신과 자신들을 동등하게 여기고 있는지 와는 별개의 문제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가지 발전이 있다: 일부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반(反)-셈족주의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개신교 학자인 카타리나 폰 캘런바흐Katharina von Kellenbach는 자신의 「여성주의 종교 저작물에서의 반-셈족주의Anti-Judaism in Feminist Religious Writings」(1994)라는 책에서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론적 근거”가 없어 보였지만, 다음으로 나는 이러한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적인 종교와 히브리 성서를 기록했던 고대 이스라엘(“유대인”) 사람들이 명백하게 여자들을 억압했던 점 모두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유일신주의 그 자체가, 히브리 성서-거의가 배타적으로 남성 신-안에서 신성한 것으로 소중히 여겨지고 있는 것과 같이, 필연적으로 압제적이며, 그 어떠한 종류의 신학적 이원론에 의해서도 완화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들의 이러한 비난은 너무나 부주의한 것이어서 답변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수사법은 충분히 급박하다고 하겠다-특별히 그들 대부분이 유럽에서 나왔기 때문인데, 즉 반-셈족주의의 재생현상이 전적으로 너무 명백해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신은 분명히 승인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누가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여성주의 운동에서 어떤 이들은 여신의 재발견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발견하고 있는 동안에, 여자들의 특별한 관심사에 대해서 동감하고 있는 많은 남자들도 역시 그녀들의 움직임에 공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성적으로-이미-정해져버린 용어로 기술하고 있는 신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적당하고 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성서 언어는 기득권을 가진 남성적인 특성을 담은 용어를 통해서 신성에 관하여 말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도 성서를 기록했던 사람이 바로 남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만약 여자들이 그들 자신의 성서를 기록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매우 다르게 나타났을 것-아마도 보다 인간적으로-이라고 위에서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성차별을 역전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단지 생리학적인 사실들을 인식해야한다는 것뿐이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그 가치나 업적에 의해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나의 의붓딸인 한나Hannah가 다섯 살이었던 어느 날, 우리가 신학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 딸은 나에게 이것을 설명해주었다. 딸이 나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남자이면서도 동시에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엄마와 나는 종종 여신에 관해서 대화하며 책도 쓰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딸에게, 왜 하나님이 여자도 되어야만 하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아이들만이 우둔한 어른들에게 보일 수 있는 그런 무시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대답했다: “에이 바보! 세상사람 절반이 여자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있잖아요.” 그 말이 정답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신과 여자들의 대중적인 제의를 재발견하는 일은 균형을 잡아준다. 그것은 성서기록자들의 남성 중심적 편견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신적인 신비로움을 인간 경험의 중심에, 그리고 맞는 말이지만, 인간의 성적인 사랑이라는 신비에 보다 가까이 가져다 놓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한다.” 우리 인간들은 발생된 존재들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한다고 한다면, 남자들에게 최적인 모든 것과 여자들에게 최적인 모든 것을 결합하는 방식이어야만 한다. 심지어 남성 중심적인 성서 기록자들이 때때로 여성적인 심상을 사용할지라도 말이다. 야웨는 이스라엘을 “낳았고”(신 32:18), 그는 “자궁”이 있다(욥 38:29).
그러한 단일의 “혼성적인 신성함”은 다신론의 논리적인 귀결일수 있다. 심지어 그것은 다양한 신들이 다스린다는 특별한 장점을 존속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 그렇게 분명히 상충되는 특징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을까? 복수의 하나님과 동시에 자비의 하나님? 여전히 가나안의 여신들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때때로 이러한 정반대의 짝을 이루는 점들을 겸비하고 있다. 라파엘 파타이Raphael Patai는 “음란한 여자-처녀-어머니의 융합된 모습”에 관해서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순은 인간 본성의 모순됨과 직면한다. 우리도 역시 모순의 결정체이다-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지 않은가?
(4) 후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히브리 여신과 베일에 싸인 그녀의 존재는 비-서구 세계에 어떠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가? 혹은 이것은 단지 서구의 “문화 제국주의”의 또 하나의 표본일 뿐인가? 확실히 세계의 남은 부분으로 우리가 뻗어나가는데 있어서 한 가지 방해되는 점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아이러니하게도 “동양적인” 종교이다) “독특하며” 그러므로 우월하다는 유대-기독교의 관념이었다. 특별히, 결과적인 이러한 유일신신앙은, 서구의 문화적 전통의 근간이 되었던 것으로, 모든 “원시적인” 정령 신앙, 다신론, 그리고 심지어 계몽되지 않은 다른 유일신신앙보다도 우월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후기구조주의postmodernism”라는 것을 거의 존중하지 않으며 다른 글에서 그것을 단지 또 하나의 허무주의의 형식일 뿐이라고 폭로한 바 있는데(데버 2001), 서구 문화 전통에 대한 그것[후기구조주의]의 비평은 “죽었고, 백인의, 유럽의 남성”이라는 지배적인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이제 우리는 여성들, 유색인종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숨김없이 말하자면 더 이상 유럽 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들이 독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이 남성적인 지배체제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존재를 믿게 했던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이 보편적인 인간들의 다양한 신앙과 가치들을 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극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의” 종교적인 전통에 관한 어떤 겸손함으로 귀착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성서 연구들은 제3세계 신학자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아오고 있다. 킬과 울링허의 개척자적인 저작물인 「신들, 여신들, 그리고 신의 형상들Gods, Goddesses, and Images of God」(1998)의 마지막 글에서, 저자들은 모든 사람들, 모든 인종과 모든 성을 위한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할 것을 도전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믿기로 “우리의 상징 세계를 혁신적으로 재건함”으로써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한 일은
유대-기독교의 하나님 형상에 나오는 숨겨진 여성적 양상을 그 구원을 베푸는 힘과 함께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성공하고 있는 기독교 단체로부터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인 색채가 가미된 신학들로부터 우리에게 자양분을 줄 수 있는 신학적인 기품의 많은 형상들과 개념들에 우리의 눈을 여는 것이다(킬과 울링허 1998:409).
(5) 마지막으로, 고대 이스라엘 민간 종교의 실체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내가 이 책을 시작하면서 말을 걸었던 “보통”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만약 어떤 것이라도 있다면, 무엇일까? 유대교 혹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서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권위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대답은 다양할 수 있다.
어떤 정통주의나 혹은 심지어 보수주의자들의 확신은 내가 여기에서 말했던 모든 것을 즉시 거부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성서적인 종교”는 유일신론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전형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의 항변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정해졌소, 그러한 사실들로 나를 헛갈리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은 은밀하게 안도할지도 모르겠다. 성서 기록자들은 다신론은 악한 것이며 정복되어져야만 한다는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지난 날 발생했었다. 역시 성서가 결국 옳았다. 아세라는 존재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가버리고 없다-귀찮은 것을 떼쳐서 시원하겠다.
기질 상으로 보다 자유로운 자들, 훈련받고 경험이 있는 자들은 (그리고 후자는 실제로 고려된 이들인데), 심지어 그들이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개념이 너무나 미비한 것임을 언제나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의 “여성적인 속성”을 재발견하는 일이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새로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단지 우리들 전 인류의 여정에 대한 진보의 표징일 뿐이다. 급진적 좌파들의 경우, 적의에 차 있는 세속주의자들의 경우, 그들은 이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성서 자체가 난센스이고, 종교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나는, 특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남자들에게 말할 수 있다. 여신을 아는 것은 나 자신의 다른 반쪽을 알아가는 일이었다. 파타이가 표현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여신은 남자들에게 네 가지 말을 전한다: 내게서 멀리 떨어지라. 나는 처녀이기 때문이다; 나를 즐거워해라. 내가 모두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 같은 젖가슴 안으로 피난처를 삼으라; 그리고 내 안에서 죽으라. 내가 너의 피에 목마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그것에 강력하게 반응하는 남성의 정신 상태 안에는 깊은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남자에게 들어오고 그를 움직인다; 그들은 남자를 굴복시켜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남자들을 유혹해서 그녀 안에 그들 스스로 멸망하게 했다. 그녀의 사랑으로 혹은 죽음으로. (파타이 199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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