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역사적예수] 제임스 로빈슨,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진실과열정 2008. 10. 28. 13:26

제임스 M. 로빈슨,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소기천 역(서울: 살림, 2008)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가이드를 받았다! 제임스 로빈슨은 "유다복음"과 관련해서 지나가듯 읽은 기억이 난다. 사실 거기에서 로빈슨은 일종의 고문서장사치로 폄하되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서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저자가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책은 1958년의 작은 소논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비록 번역본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이 책의 흡입력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저자는 현대교회의 '가현설'에 반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p.9). 즉,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결별을 선언한 것에 대해서, 저자는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트만의 바울/요한 케리그마 중심이론에 반응하면서, "역사적 예수는 필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19세기의 역사주의는, "실제로 있었떤 나사렛 예수"와 "객관적 역사적 방법을 가지고 구성한 예수의 전기(역사적 예수)" 사이의 일치가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비록 이러한 태도가 "순진한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20세기에 와서는 위의 두 가지 사항이 분리하게 되고, 결국 역사적 예수의 '역사학적 의미로 전락(축소!)'했다고 보았다. 이제 방향은 전환한 것이다. 즉, 양식비평적 차원에서, 교회의 실정과 예수의 전승이 결합하면서, 복음서의 케리그마적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교회적 배경이 아닌 본문에 역사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즉, "케리그마(신앙) 안에서 역사에 대한 접근방식(예수의 의미)을 감지한 셈이다."(p.45)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접근은 '심리주의/실존주의'로 예수의 의미를 추구하지만, 결국엔 인간의 실존 차원을 묻는 심리주의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이러한 접근으로는 인간변화에 쓸모 없는 연구가 되고 만다."(p.51)

 

그러므로 저자는 눈을 돌린다. 즉, "케리그마"에 역사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묻는 것이다(C.H. Dodd).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저자는 '아니오'라고 대답을 하는데, 왜냐하면, 케리그마의 본질은 신앙이며, 케리그마의 역사적 측면까지도 신학적인 렌즈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빌 2:6-11; 골 1:15-20; 고후 8:9; 롬 10:6-9; 고전 8:6). 이렇게 볼 때, 결국 자료의 문제가 생기며, 새로운 자료의 선택으로 대안이 제시된다. 결국 복음서를 새로보아야 한다. "역사의 신학"으로 말이다. 따라서 역사와 자아에 대해서 새로운 개념이 요구된다(여기에서 저자는 딜타이의 해석학적 경험을 강조한다). 기존의 "자연과학적 모델"로 역사를 인식하지 말고, 초월적 측면(의도/투신/의미)을 드러내는 역사로 나아가자(p.69).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접합한가? 그렇다. 이를 통해서 케리그마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비신화화의 자극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케리그마를 종교적 관념의 객관화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발생했음의 사실 안에서 인식해야 한다"(p.81). 사도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케리그마를 발견할 때가지 직관적으로 그들의 기억들을 해설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에 대응했다. 다시 말해면 그들의 기억들을 '케리그마화'한 것이다"(p.85).

 

이렇게 저자는 역사적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새로운 탐구의 목적은 예수의 존재와 예수에 대한 케리그마의 존재 이해를 동일화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p.92). 이렇게 볼 때, Q는 새로운 자료로 적합하다. 그것은 예수의 케리그마를 전달하며, 기독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케리그마는 예수의 역설을 선포한다. 칼 바르트의 '케리그마'가 이렇게 강력할 수 있는지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