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으로 이번 주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우울했다(blues).
특별히 우리나라와 미국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나라와 미국사회는 서로 반응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한인사회가 행여나 보복이라도 받을까봐 전전긍긍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번이나 거급 사죄하는 듯한 표정은,
(사실, 대통령은 가끔씩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입모양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마치 철부지 막내아들이 마을에 문제를 일으켜서 부모된 입장이랄까?
이것이 우리나라의 공동체 의식일 것이다.
미국언론은 범인이 우리나라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언론은 '한국인'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태생'이라고 선을 그엇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8세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사람이 볼 때에 그는 미국인인 셈이다.
미국사회자체가 다인종 사회인 melting pot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는 차이가 생겨난 것 같다.
우리나라는 그가 우리나라 출신이었다는 점에,
그리고 미국은 그의 정신병적인 그 사람의 본질에 있었다는 점.
내가 볼때, 미국사회가 문제의 본질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나의 견해는,
문제의 본질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에만 우리는 관심을 둔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은 우리나라 TV에서 연일 방송하지만(수천개의 인터넷 답글과 함께),
4월 20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의 200여명의 사망자 사건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마치 지난 2002년 월드컵의 환호성에 파뭍힌 여중생사망사건(미군에 의한)과 복제품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더 낫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는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본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의 생각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대량학살과도 같은 이러한 테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단순한 정신병자의 오버행동으로 볼 것인가?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볼 것인가?
총기합법화에 대한 사회적 분열의 현상으로 볼 것인가? 종교에 미친 광신자의 종말인가?
예수께서 유명하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서(막 2:1-12)는 예수를 보기원하는 사람들로 집문이 막힐 정도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다. 그들은 예수의 유명함(1절은 '소문'이라고 말한다)을 보았다.
그런데 유독 네사람은 예수의 능력을 보았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일을 벌이고 만다.
죽은사람과 같은(중풍병자) 사람을 억지로 메어 들고 온 것이다.
그들은 인산인해로 집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기까지 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냥 멍하니 하늘만 쳐다볼 것이겠지만,
유대사회에서 죽은사람과 한집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민 19:14).
그러므로 움직일 수 없는(그래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천장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것을 보고,
아마도 집안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부리나케 집밖으로 뛰쳐 나갔을 것이다.
(물론, 중풍병자가 죽은사람은 아니지만, 유대적 사회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죄와 죽음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상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그렇게 반응했을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는 파격적인 말씀을 한다: "죄사함"
예수님이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예수님은 '남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다시 말해서 '서로 돌아볼 수 있는' 그런 눈이다.
그러므로 서기관의 예수님을 비판한 것은 더욱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서기관은 율법을 중심(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7절)으로 봤다면,
예수님은 사람(그 사람의 믿음)을 중심으로 봤다.
이것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바른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것 같다.
(마가복음이 편집적으로 2:1-3:6까지 예수님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무엇을 어떻게 보는 가?'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앞으로 2002년의 사건과 또한 버지니아 공대의 사건과 같은 일들은 일어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 것이 아닐까?
한가지...
'왜?'
왜 예수님은 그러한 사건을 그렇게 보았을까?
(혹은 마가는 왜 그렇게 편집해서 마가복음을 기록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마가가 예수의 의미를 '부활'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의미있는 이유는 그의 부활에 있다.
그의 사역 자체가 부활의 예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중풍병자는 사회적으로/종교적으로/개인적으로 죽은 사람에 다름 아니다.
예수님은 죽은사회를/죽은종교적관계를/죽은육체를 살린다.
예수, 그에게는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사건을 그렇게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Hesed&E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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