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성서와 '공작' (열왕기상 21장)

진실과열정 2020. 4. 14. 11:52

성서와 공작

 

성서는 (1) 공작이다. 다시 말하면, 장인들이 만든 작품(anthology)이라는 뜻이다. 고대문헌으로서 다른 문화권의 신화적 요소들을 차용하는 문학적 흡입력이 있으며, 또한 다양한 공동체적 경험을 자신들의 시대적 요구에 맞게 야훼정치신앙으로 투영해서 주장하는 과단성도 있다. 그리고 성서에는 (2) 인간사회의 공작 들어있다. , 성서의 기록자들은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거짓의 사회화라고 있는 공작’(사보타주) 전에 먼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2) 공작을 성서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우선, 성서의 텍스트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야훼 이데올로기 선언이라는 점을 주지하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역사적 뿌리를 재구성할 있을 것이다.)

 

대번에 드는 텍스트는 열왕기상 21장의 나봇의 포도원이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실정을 사회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왠만한 성경책은 나봇의 포도원이라 소제목을 붙인다. 히브리어성서(21:1) 바예히 아하르 핫데바림 하엘레흐라고, “그후에 이런 일이 있게됩니다라고 시작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이전에 뭐가 있는지 봐야합니다~’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쫓기 때문이다(이런 구절로, 22:1; 39:7; 40:1 있다). 그러나 앞에서 (1) 공작이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표현은 앞과 뒤가 사건적이나 논리적으로 반드시 연결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성서의 편집자들이 여러 자료들을 취합하며 연결하는 과정에서 붙이는 문학적 장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편집자는 20:43 근심하고 답답하여라는 독특한 표현을 집어넣어서 앞의 이야기를 끝마쳤고, 21:4 다시 근심하고 답답하여라고 하면서 아합이라는 인물의 일관됨을 보여주고 있다.)

 

열왕기상 21장에는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유산인 나봇의 포도원이 어떠한 불법적인 공작을 통해서 아합이 소유할 있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고발될 있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텍스트의 내용을 살펴보자. 21 1절부터 20 상반절까지를 꼼꼼하게 읽어보려고 한다(히브리어 본문을 살펴보았다, 개인적 주석이 섞여 있다). 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귀찮은 분들은 패스해도 된다.

 

나봇의 포도원이야기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단어는 포도원이다. 포도원이 이슈가 사건이다. 포도원은 나봇의 소유이며, 나봇이란 사람은 이즈르엘 토박이이다. 그런데 가까이에 사마리아의 아합의 왕궁이 있단다. 아합은 나봇에게 제안한다: “그대의 포도원이 나의 왕궁에 너무 가까우니 왕실정원으로 삼고 싶소, 그대가 좋게 본다면 좋은 포도원을 주리다. 그것도 아니라면 합당한 가격에 사고 싶소” (이것은 현대인이 , 기회다. 조상의 땅을 팔아 대목을 챙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인에게 땅은 야훼의 것이었는데, 말은 약자에게서 토지를 지키려는 야훼신앙의 원시적 토대가 구체화된 표현이다. 왕이라도 야훼신앙 위에 있을 없다는 것이, 나봇의 입장이었다. 한편 여기에서 기록자는 아합의 말에서 본문의 접미사를 기술적으로 사용하면서, ‘네것은 내것이라는 소유권 이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봇은 야훼신앙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절대로 안될 말씀! 야훼께서 허락하지 않소!”(할리라흐 메야훼! 삼상 24:7; 26:11). 포도원은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소유이기에, 후손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텍스트를 기록한 서기관은 아합을 재미있게 그린다. 여기에서 아합은 성인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합은 자기 집에 가서 감정을 보였다(4: “의기소침하고 부루퉁했다”, 사르 베자에프). 사르 베자에프라는 감정언어는 여기와 20:43에만 나오는 표현이다(한편, 20:43 예언자의 심판 신탁을 받은 후의 감정이다). 4절에서 이러한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나봇이라는 철벽을 만나서 좌절한 것인가? 아니면 야훼의 명령 앞에 속이 상한 것인가? 단지 성인아이 보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란 말을 들어도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본문은 소유격접미사를 남용하면서까지 아합의 소유욕을 문학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자기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합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의 침대에 누워서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아합의 금식[?] 이후 이세벨의 전략이 되기도 한다).
이제 이세벨이 등장한다. 독특한 점은 5절이 시작되는 히브리어 ’(통상 and) 여러 영어 번역본에서 ‘but’으로 구분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이런 점에서 NRSV TNK 조금 고상하다고 하겠다). “ 마음이 속상해서, 먹고 있어?” 아합은 투정을 부린다(6; 나는 최선의 거래를 제안했지만, 나봇이 거절했어). 그러나 여기에서 서기관은 아합의 대답에 무엇인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나봇이 자신의 것을 팔거라고 한다(나봇의 말에는 아합에게서 보이는 소유격접미사 없다. 나봇은 이라고 적이 없다. 아합이 거짓 고백을 했거나, 야훼신앙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이다). 이세벨의 대답이 현실적이다: “당신이 사마리아의 왕인거 맞어?” 그러나 TNK 번역은 뉘앙스가 다르다: “당신!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누군지 보여줄 때야” (여기에서 히브리어는 아사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왕으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단어는 이후에 이세벨의 공작 빈번하게 등장한다.) “일어나 먹고 기분 풀어!”
이세벨은 공작을 진행한다: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인장을 찍어(누가 주인인가? 누가 왕과 왕의 소유를 마음대로 사용하는가!), 나봇이 살고 있는 도시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낸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높은 자리에 앉히시오. 그리고 기레기(‘브네 벨리알’) 두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증언하게 하시오: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소! [히브리어는 바라크 축복하다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저주의 완곡어법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왕을 축복했지만, 이것은 듣는 이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것이 된다. 그대로 듣는 이에 따라서말이다] 그러니, 그를 끌고가서, 돌로치고, 죽이라!”라는 내용이다. (본문은 공작에서 선수는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어떤 과정으로 진행할지 모두 보여준다.)
11절부터 구체적인 실행이 나온다(11절에서 써보낸대로라는 표현이 두번이나 등장한다). 그래서 성사람들(장로들과 귀족들) 그대로 실시한다(히브리어 아사’). 12절은 9절을 빼다 박았다. 그냥 본문 인용 그대로이다(인용만 해대는 기레기들과 같다). 쓰레기 같은 사내가( 반복 등장!) 나봇을 상대로 증언하기를,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소, 그러니 그를 성밖으로 끌고가서 돌을 들어 치고 죽입시다!” (여기에 실행자들은 성밖으로, 돌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추가한다). 이후, 그들은 이세벨에게 보고하기를, ‘미션 완료’(돌던짐-나봇-죽음). 결과를 듣자 마자’, 이세벨은 아합에게 말한다: “일어나 취하라! (나봇은 죽고 없다)”. 그리고 듣자 마자’, 아합은 일어나 포도원을 취했다.
17, 바로 그때(힌네)! 이제 야훼의 말씀이 디셉사람 엘리야에게 임한다. “일어나 내려가라! 사마리아의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고 거기 있다.” 걸렸어! 그에게 선포하라! 야훼의 기소이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살인에, 거기에 더해서 불법취득까지 했구나!” 야훼는 선고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바로 장소에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아 먹었듯이, 피도 핥아 먹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를 먹어치우리라!” (히브리어로 아타!’라는 말은 이세벨이 제일 처음으로 단어로[7], 야훼의 가장 마지막말로 인클루지오 되면서 운명이 극적으로 반전된다) ‘성인아이아합은 당혹스러워 한다: “내원수! 나를 어찌 찾았지?” 엘리야의 대답이 클라이맥스이다: “찾았다! (이놈)”
이후, 20 하반절부터 29절까지는 야훼의 심판이 추가되고, 아합의 반응이 이어지는데, 부분은 후대의 추가구절로 생각할 있다. 왜냐하면 비록 성서에서는 간단히 언급할 뿐이지만(왕상 20:34), 역사적으로 아합이 이스라엘에서 강대한 국력을 보유했으며, 그의 시대에 왕조가 멸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신명기적 역사가는 왕상 21:29 통해서 신학적 변증을 완성할 있었다. 또한 26절의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행위라는 구절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신학적 서술에 빠지지 않는 입장이기도 하다(므낫세를 평가했던 왕하 21:11 보라). 여기에서 아합은 느닷없이 신명기적 역사가의 변호를 받는 모습이다: 네가 스스로 넘어갔구나(히브리어의 뜻은 팔다이다. 스스로 팔렸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합은 이제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악의 소유물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25절에 반복되는 것처럼, 이세벨의 소유가 되었다. 아합은 야훼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이세벨이 너를 잘못 이끌었기 때문이다(25 수트라는 단어 역시 신명기적 역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배역적인 행위이다).

 

아주 텍스트의 읽기였다. 이제 공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가지를 확인할 있다.

 

(1)    우선 텍스트는 주요 단어를 반복하면서 공작의 과정을 고발한다: ‘써서 보내다라며 이세벨은 거짓 증인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글을 쓰는 일은 엘리트 집단이 있는 제한적 권력의 행사이다. 글에는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왕의 인장까지 있으니, 누구도 글을 반박할 없다. 또한 일어나다라는 단어가 반복한다. 아합을 일으키는 말이다. 권력자가 움직이는 표현이다. 그런데 텍스트는 결과적으로 야훼께서 엘리야를 일으키시는데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신적 비판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거짓이 세계를 지배한다.

 

(2)    공작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외형적으로 소유 문제이다. 아합은 자신의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그것을 가질 동산, 부동산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없는 일들은 분명 존재한다. 나봇의 포도원은 나봇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합에게 없다. 가지고 싶은데 가질 없다면, 권력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내면적으로 권력 문제로 들어간다. 나봇은 야훼신앙의 권력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았다. 야훼신앙은 왕권에 비할 없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의 왕권이 야훼신앙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권력자들이 행하는 실수이다. 자신의 권력이 국민주권 위에 있다는 착각말이다.

 

(3)    공작의 과정은 어떠한가? 텍스트는 공작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첫째, 기획자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세벨이다. 이세벨의 입장에서는 아합의 태도가 우습다. 권력자가 주권을 무서워하다니! 사실 이런 태도는 성서의 입장에서 이국적이다. 공작을 해서 뭐든 있다는, 바로 그런 생각이 시돈 사람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왕상 16:31). 그런 측면에서 신명기적 역사가는 현대적으로도 옳다: 왜구는 척결해야 한다. 둘째, 협력자가 있다. 여기에서는 브네 벨리알이라는 놈이다. 개역개정은 불량자,’ 새번역은 건달,’ 공동번역은 무뢰배 다양하게 번역했다. 이런 쓰레기들을 다양하게 번역할 있는 한글이 놀랍다. 오늘에는 기레기라고 해야겠다. 권력자 이세벨이 써준 대로 기레기들이 배껴 쓰며, 그대로 행동하는 사회적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라고 한다. 협력자들도 복수형이다. 세번째, 동조자가 있다. 여기에서는 성의 장로들과 귀족들이다. 이들이라면 사태를 파악할 있는 기본적 자질이 준비된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중산층 혹은 사회적 지도층이라고 있다. 이들의 견해가 이슈 중인 문제를 확증하고 또한 확대하는 효과를 만든다. 그렇기에 건강한 사회일수록 사회적 지도층의 현안 파악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중산층의 분별력이 붕괴했다. 어찌 기레기 놈에게 속아 넘어갔는가! 두렵거나 혹은 무지했거나. 네번째로, 사회적 분위기이다. 이세벨은 아합에게서 한가지 힌트를 얻는다. 금식이다! 금식은 일종의 계엄과 같다. 사회에 비상을 선포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낀다. 시민들의 무지 위에 권력의 두려움을 올려 놓으면, 공작은 탄탄대로를 걷는다. 마지막으로, 행동이다. 본문은 작전이 매우 급작스럽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지 동사 개를 사용할 뿐이다. ‘끌어내서, (돌로)치고, 죽였다’. 공작의 실행은 순간이다. 눈감으면 이미 코는 베어지고 만다. 공작은 그런 것이다.

 

(4)    공작의 신학적 비판은 무엇인가? 텍스트에서 야훼는 공작을 심판한다. 야훼는 엘리야를 사용했다. 야훼신앙은 신앙인을 통해서 공작을 대적하게 만든다. 20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나의 이라고 하면서, 은연중에 신학적인 교훈을 던진다. 신앙인은 공작의 대적이다. 야훼는 19절에서 팩트를 체크해서 기소하며(죽이고, 여기에 더해서 빼앗았다), 그에 합당한 심판을 선고한다(개들의 먹이가 것이다;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최악의 저주거리가 된다). 놀라운 점은, 야훼의 복수는 극적이라는 점이다. 나봇이 돌을 맞아 억울하게 피를 흘린 바로 그곳에서, 아합 역시 피를 흘리며 죽을 것이다! 권력자가 공작하는 바로 그곳에서 신적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5)    열왕기상 21장은 북왕국에 흐르는 정의와 공평 대한 야훼신앙을 보여준다. 나봇은 정치적 살해를 당했다. 토착왜구에 의한 계략이 치밀했다. 그것을 돕는 놈의 기레기들이 권력자의 똥구멍을 핥았다. 시민들은 금식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계엄 분위기 속에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 권력자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야훼신앙을 지키려는 의인의 죽음은 이러한 공작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야훼는 예언자를 통해서 정의와 공평을 회복한다. 예언자는 두려움 속에서 일어나며, 예언자는 거짓을 고발하며(20 상반절의 마지막 단어, “찾았다!”), 예언자는 합당한 심판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