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상으로 존재의 이유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뿐만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지적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 이들은 전쟁을 수행하며 통치전반에 등장하는 '왕실 엘리트'나, 제의를 통해 고대신화를 절대화함으로 소위 '만들어진 신'을 교묘하게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종교 엘리트'와는 달리, 평생을 비의적 기록물을 전수받고 또 전수하는 일종의 '기술자 계급'에 해당한다. 사실 전쟁을 담당하거나 종교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글자'는 하위계급이 수고해야만 하는 그런 불필요한 것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농업/목축업 대중들과도 역시 거리를 두고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삶의 다양성에 상대적으로 폐쇄적일수밖에 없었다(추수의 과정에서 소수를 남겨두는 일이, 생태학적 기능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되었는데, 이것이 서기관에게 있어서는 윤리적부분으로 이해되었을 수도 있다; 신 24:19-21).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서기관이라는 독특한 길을 걷는 것일까? (오래전에 '시누헤이야기'라는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서기관에 대해서 도움이 될 것 같다.)
보다 전문적으로 Karel van der Toorn의 Scribal Cultrue and the Making of the Hebrew Bible이란 연구서가 있는데, 고대서아시아의 서기관 문화를 잠깐 언급하면서, 성서에 곧잘 등장하는 '명한 말씀을 가감하지 말지어다'라는 유명한 표현이(예를 들면 신 4:2), 오래된 고대메소포타미아 서기관 전통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p.332 n.54). 중요한 점은, 왕실 소속 아래에서 자리를 잡은 '고대 이스라엘의 서기관' 역시 큰 그림인 '고대서아시아의 서기관 문화'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고, 소위 말하는 '비교문헌 연구'는 필수불가결한 작업임을 암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볼때, 히브리성서는 레위인계층을 서기관과 연결하고 있는데(신 17:18), 아마도 레위인(레위사람제사장)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고대사회에서 굉장한 지적 사치를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사기 17-18장의 사건에서, 단지파의 사람들이 레위소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평범한 농민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지적능력때문이었을 것이다("그들이 미가의 집에 가까이 올 때에, 레위 소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삿 18:3). 또한 신명기법전은, 물론 멸망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피난한 엘리트였다고 하더라도, 레위인의 기능을 서기관의 그것과 동일시한다(신 17:18).
결국 서기관은 인류문명의 최전선에서 '문자의 힘'을 경험하고 파생시킨 위대한(?) 집단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창조자'였다기보다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파자/유지보수자'로서 활동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고대서아시아의 초기문명인 수메르를 출발로, 고대이집트의 선각자적인 통찰을 '받아 먹었던 먹물'이었던 셈이다. 고대인들에게 '표절'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의 그늘 아래에서 그들의 신화적 세계관은 '파견된 서기관'에 의해서 쉽게 받아들여졌고, 왕실간의 혼인이나 인구의 이동으로 선진 문명의 이야기들은 소재와 형태를 변형시켜가면서 이야기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진채 각 집단의 서기관들에게 '최종결정'을 남겨두게 되었다. 솔로몬(잠1:1)과 히스기야(잠23:1)를 말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잠언의 일부분에서 이집트 엘리트들의 작품을 표절 혹은 수용했다고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잠 22:17-24:22; van der Toorn 2007:133). 이렇게 볼때, 서기관들이 주기적으로 기록물을 남김으로써, 각 시대의 정신은 표준적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작업은 유일회적이었다기보다 왕실의 필요에 따라 매우 정치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성서에서 고대서아시아의 더 오래된 신화적 이야기들과 평행하고 있는 수많은 점들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ANET나 KTU, CoS등 여러 편집물들은 고대서아시아의 잊혀졌던 고대서기관들의 노력들이 상당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즘 Mark S. Smith의 Poetic Heroes: The Literary Commemorations of Warriors and Warrior Culture in the Early Biblical World를 읽고 있는데, 성서와 고대서아시아가 수렴하는 부분들이 전에 공부했던 것들보다 더 뿌리깊이 내려와 있음을 배우게 된다. 특별히 다윗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서의 문학적 분석으로 매우 통찰력있게 요약해놓은 구절이라고 생각했던, 삼상 16:18의 4가지 요약표현이 사실 고대서아시아(와 더 나아가 고대그리스!) 신화문학이 말하고 있는 영웅들의 그것과 표현적으로도(!)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헤렘'과 같이 민감하며 혹은 독보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부분 조차도 고대세계의 신관 아래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로직이었음을 알게된다(p. 172; 이것은 야훼의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에 제동을 거는 좋은 접근이 되기도 한다). (한편, Mark S. Smith는 고대근동어 전문가로, 이 책을 통해서 결국 다윗설화의 고대성을 간접적으로 입증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과적인 통찰이고 무엇보다도 바알사이클이나 아캇서사시와 같은 고대문헌들의 분석과 연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서기관이 공을 들여 작업해놓은 '문헌자료'를 볼 때, 단지 평면적으로만 텍스트에 접근하는 경우, '몰역사적 수수께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꼬이고 꼬인 실타래처럼, 결국 필요에 맞는 부분만 잘라서 사용하는 '편리한 혹은 이데올로기적' 성서연구가 자행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볼때,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상호모순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에서 이러 점을 엿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선언하는 표현(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이전에, 과연 성서는 '언제부터 공의의 하나님으로 말했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리고 그들에 의한 신앙의 전통을 엿보게 되면, 성서의 초반부가 제시하는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다. 조상들의 하나님은, 히브리선조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하기 이전에 만났던 다양한 어려움들을 능히 해결주셨던 '좋으신 하나님'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각자 아내를 두고 편법을 사용했을 때, 하나님은 '공의로움'보다 '좋은 결과'를 보여주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가는 그림은 '공의로움'의 신이 아니라 공의라는 가치조차도 초월하여 '절대적 순종'까지 요구하는 하나님일 것이다. 아마도 창세기의 제일 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24장에서, 조상들의 남긴 신앙의 핵심은 바로 '인자와 성실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탄한 길과 형통함을 주셨도다!'였을 것이다.
사실, 종교는 삶과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었고(William G. Dever, Did God have a wife?), 그렇기에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혹은 우리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는 그러한 신이라고 한다면, 대중은 등을 돌렸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공의'라는 개념은 신의 판단이 이 세상을 얼마나 질서있고 현재를 안전하게 유지해나아가는 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다. 누군가는 그러한 '절대적 질서 판단자'가 있어야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서기관들은 나름의 기록물을 통해서, 현재화시키며 역사화한다. 그런데 수천년 동안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자리를 잡은 절대자가 있었는데, 우가릿문헌에 의하면 바로 고대가나안의 '엘(El)'이 그러한 재판관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야훼 하나님이 유일한 재판관이다. 물론 이쪽은 이렇게 말하고 저쪽은 저렇게 말한다. 그런데 문헌학적으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서기관'의 활약을 살펴볼 수 있다.
성서를 연구하는 역사적 학자들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혹은 서기관'의 인식이 처음부터 완전형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앞서 조상들의 하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형되어갔음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농업기술이나 자치방어력과 같은 필수적인 부분들이 있었던 것처럼, 역시 통치이데올로기로서 그들은 그들만의 '이야기/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서기관의 작업으로 남겨지는데, 이들은 고대서아시아의 세계관을 활용했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관으로 표현하였다. Frank M. Cross는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라는 책에서, 야훼가 바알의 '기능적 자리'를 대체하여 존재했다고 고대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했음을 문헌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Mark S. Smith는 God in Translation: Deities in Cross-Cultural Discourse in the Biblical World라는 책에서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얀 아스만이 비판적을 제시했던 것과는 달리), 모세의 배타적 유일신론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반대의 그림이었을 것이라고 통찰력있는 연구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신 32:8-9에 대한 방대한 분석이 그것이다(p.197-212).
이렇게 볼 때, 야훼는 일찌기 '조상들의 (뒤를 봐주는) 하나님'이었고, 이후에 '가나안의 재판장'의 자리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공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발점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8세기 예언자들의 사회비판에 이어, 역사적으로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붕괴하였을때, 반성적으로 자신의 멸망은 '하나님의 공의'였다고 일종의 '신정론'적인 논증으로 기능하였던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더 나아가 '묵시적인 개입'에 대한 신앙적 뿌리로 활약했던 것이 바로 '공의'에 대한 갈급함이었던 셈이다(Christine Hayes 2012). 그러므로 단편적으로 공의와 사랑을 대치시키며, 그것을 역동적으로 풀어내려는 작업이 있기 전에 정말 '공의인가?' 혹은 정말 '사랑인가?'를 처음부터 묻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것은 처음에 언급했던 서기관의 작업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이들이 글/문학을 남김으로써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는 신세계가 열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기록 그 자체를 숭상하기 이전에, 이들이 흡수했던 혹은 이들이 이용/차용/표절했던 원세계 역시 주목해야 함을 암시한다. 사상은 언제나 새로운 결과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민의 흔적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기관은 사실 왕실에 기능하는 그룹이다. 이들은 왕실이 사라지고 난후 새로운 그룹이 된다. 바로 '작가'들이다. 고대의 서기관들이 신 4:2에서와 같이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폐쇠적인 마인드를 가졌다면, 그러한 표현 자체를 거꾸로 보아, 글들을 표절하거나 수정하거나 혹은 없는 사람을 있었던 사람으로 하고, 또 그 사람인 척하면서 글을 썼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Bart E. Ehrman이 재미있게 또 유익하게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Forgery and Counterforgery: The Use of Literary Deceit in Early Christian Pol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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