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다윗과 요나단, 그리고 교회

진실과열정 2019. 12. 10. 09:10

다윗과 요나단은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더 나아가 교회의 한 몸됨을 보여줍니다. 성서는 이러한 점들을 매우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사무엘상).


요나단은 신앙심이 투철한 용맹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이 '요나단(예호나탄)' 곧 '야훼가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요나단의 용맹성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대치중에 있을 때(삼상 14장) 빛을 발합니다. 그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분연히 일어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훼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14:6) 본래 히브리어는 "키 에인 라야훼 마에쪼르 레호시아흐 베라브 오 비메아트"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구원함에 있어(레호시아흐) 야훼에게는(라야훼) 장애물(마에쪼르)이 없다(에인). 많건(베라브) 혹은(오) 적건간에(비메아트)" 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겠지만,) 야훼에게만큼은 어떠한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기적같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블레셋이(13:7) 이제는 오히려 요나단 때문에 벌벌 떨게 됩니다(14:15).


다윗 역시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극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서가 골리앗을 "싸움을 돋우는 자"(베나임, 싸움의 승리자라는 뜻입니다)로 몇 번이고 묘사하며(17:4, 23), 특별히 골리앗의 풍채와 무장상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점을 볼 때(17:4-7), 이스라엘에 이러한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지 의문을 품게합니다. 그런 와중에 다윗이 등장합니다. 이 다윗에 대해서는, 사실 성서가 다양하게 전달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유약한 목동' 수준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6:18을 보면, 다윗에 대한 평가는, 놀랍습니다: 우리말에서는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라고 다소 짧게 나타내서, 쉽게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거의 '완벽남' 그 자체임을 알게 됩니다: 호기(개역개정은 '용기')로 되어있는 '기보르 하일'은 큰 용사를 뜻하는 말로, 룻기에서 나오는 보아스를 소개할 때(유력한 자, 룻 2:1), 또한 사사 입다를 '큰 용사'라고 할 때(삿 11:1), 또한 여로보암을 소개할 때(왕상 11:28)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번째 '무용'은 히브리어로 '이쉬 밀하마'로 번역하면 '전쟁의 남자'입니다.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겁니다. 세번째 '구변'은 히브리어로 '네본 다바르'로 '타고난 말쟁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준수한 자'는 히브리어로 '이쉬 토아르'인데, 겉으로 보기에도 정말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남자라는 뜻입니다(이러한 평가를 들은 여자가 또 한 명이 있는데, 바로 25:3에 나오는 아비가일입니다. 그녀는 장차 다윗의 아내가 되지요!). 우리말로 짧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히브리어를 보면, 말 그대로 '완벽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완벽남이기에 그는 골리앗에게서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가 그동안 쳐서(17:35; 히브리어로, 나카흐인데, 이 단어는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죽였던 사자나 곰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36절). "내가 사자와 곰도 쳤은즉! ... (골리앗도)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케아하드, 이 말은 '하나처럼'이라는 뜻으로, 골리앗은 내가 쳐죽인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효과적인 표현입니다) 되리이다!" 그 이유는 야훼께서 짐승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듯이'(히브리어로 나짤), 역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역시 히브리어로 나짤)이기 때문입니다(37절). 역시, 야훼는 (비록 성서의 내러티브 안에서는 숨어계시지만) 다윗을 건져내십니다. 놀랍게도, 다윗의 돌은 골리앗의 이마를 칩니다(17:49; 바로 히브리어로 나카흐입니다! 골리앗이 바로 짐승과 같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놀라운 점은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던진 믿음의 선포입니다. 17:47에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라는 표현은, 요나단의 선포와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라야훼 함밀하마"로 '전쟁은 야훼께! (속해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단과 다윗은 상당한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공통점이 18장에서 결정적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18:1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우정 이상의 차원을 보여줍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라는 구절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예호나탄 니크셰라흐 베네페쉬 다비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요나단(예호나탄)의 마음(네페쉬)이 다윗의 마음과 묶여졌다(니크셰라흐, 이 말은 카샤르 동사의 수동태형입니다) 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묶여진 것'입니다. 성서는 신비하게도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의 의지를 초월한 신적 활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인을 하나로 묶으신 겁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이제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18:1에 "사랑하니라"는 히브리어로 바예에하베후로(동사원형은, 아하브-사랑하다) 능동태로 연속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 사람은 본질상 원수이기에 하나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능동적인 활동이 필요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네페쉬'인데, 바로 하나님이 요나단과 다윗을 하나로 묶으신 그 매개체(여기에서는 네페쉬, 마음)를, 있는 그대로 다시 활용해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본질상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그 매개체를 통해서, 공동체를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과 요나단은 보다 적극적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3절에 그들은 "더불어 언약을 맺게" 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바이케로트 예호나탄 베다비드 베리트"인데, 언약을 맺다라는 말은, '카라트 베리트'로 '둘 사이를 자르다'입니다. 약속을 맺는 당사자 사이에 생명체를 놓고, 그 생명체를 가르는 겁니다. 약속을 어기면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우리는 갈라지지 않겠다라는 고대인들의 신실함의 표현이었던 겁니다(그러한 배경의 어휘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게 당부한 말씀이 겹치게 됩니다. 엡 4:2-3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하나가 되었음(신적수동태!)을 믿어야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능동적으로, 그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 사랑해야 겠습니다. 나의 기준이나 나만의 방식이 아닌, 공통의 매개체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다는 확신을 서로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납의 행위를 통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