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신학을 전공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지만, 배우고 공부할수록 그 연구의 대상이 갈수록 불분명해지는 것은 아닌지, 깊은 의문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학함'이 (사실과 의미를 따지는) 역사학인지, (고대인의 미적감각을 논하는) 문학인지, (현대를 위한) 윤리학인지, 혹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고통인) 언어학인지, 혹은 그 무엇인지... 신학이란 정녕 '신'과의 깊은 관계를 체험하고, 그 분의 본질과 사역을 논하며, 초월자의 영역을 유한자의 세계에 전달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이성이 아닌 초이성의 작업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신경험이 바로 그것이겠지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자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므로, 역사와 문학, 윤리와 언어는 인간이 신께 나아갈 수 있는 '유한하지만, 가장 건전한 접근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어느것도 절대적인 '열쇠'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높이고 (번역된) 한글은 낮추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연구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암 4:3에서 '하르몬'을 읽어낼순 있어도, 그게 과연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낼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인간의 겸손한 상상력으로 계속하여 생각하며 묵상하면서, 제한되었지만 그 안에서 풍성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히브리어를 잘 모르지만 몇가지 점에서, 정말 단순한 묵상의 차원에서, 신앙에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그 알파벳의 모양에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현재 출판되고 있는 히브리어는, 비록 기원전 5세기까지 그 모양을 거슬러올라갈 수 있어도 기원후 10세기에 와서야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히브리어 성서는, 그 성서가 원래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을 시대(기원전 8세기이후)의 '폰트'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에스겔 9장[4절]에서 이마에 "표를 하는" 것이, 히브리어로 '타바 타브'라고 되어있어서, 결국 히브리어 마지막 알파벳 '타우'를 쓰라는 것인데, 사실 그 시대엔 그 알파벳이 [첫번째 그림 2번의 베레쉬'트'가 아니라] 'X'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두번째 그림을 참고하죠[W.G. Dever 2001:210]. 비문이나 인장과 같은 고고학적 유물에 새겨져 있는 진정한 고대어를 줄줄 읽어낸다면, 좀 멋지겠죠?)
고로 우리가 벤-아세르 가문(마소라학파)이 집대성한 히브리어 폰트의 모양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어이없는 접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떤 면에서 '전통'이기에, 바뀌어진 폰트를 통해서도 묵상할수 있음이, 감사의 제목은 아닐까요? 이후의 내용은 상당히 주관적임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첫번째 그림 1번은 (대부분) '야(흐)훼'라고 읽습니다. 첫글자가 '요드'라고 히브리어 22알파벳 중에서 유일하게 '짧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이 닿지 않는 알파벳입니다. 야훼 하나님 만이, 하늘임을 눈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가장 잉크가 적게 들어가는 알파벳이지만, 가장 경건한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첫번째 그림 2번은 창세기 1장 1절의 첫단어인 '베레쉬트'입니다. 개인적으로 "처음엔"이라고 번역하고 싶네요. 어찌되었건 '베'라는 전치사 자체가 그 모양으로 출발선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역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라는 것을 눈으로 배우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10년전에 곽목사님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첫번째 그림의 3번과 5번입니다. 3번은 '할랄'이라는 단어로 바로 '찬양하다/높이다'입니다. 시편의 그 유명한 '할렐루야'죠(104:35). 4번은 뭐냐하면, 역시 (조금 강한 목소리를 내서) '할(!)랄'이라고 읽는데, 이 뜻은 '더럽히다'입니다(겔 7:22,24). 놀랍죠. 성소에서 '찬양'과 '더러움'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0.1mm의 차이가 이것을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찬양의 '할랄'은 히브리어 '헤'가 하늘에 닿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늘과 같아지지 않을 때, 비로소 신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움의 '할!랄'은 히브리어 '헤트'가 하늘에 닿습니다. 사람이 하늘과 같아지려할 때, 그 사람은 신을 더럽히는 자가 됩니다.
찬양/높임의 '할랄'은, 성서를 보면, 처음엔 사람이 차지하였습니다. 사라의 미모가 높임을 받았고(창 12:15), 압살롬의 긴머리가 호감이었으며(삼하 14:25), 죽기전에 꼭 가야할 여행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겔 26:17). 비록 단어가 처음으로 이방의 신을 높일때 사용되었지만(삿 16:24). 결국 이 '할랄'은 다윗에게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데 사용됩니다(삼하 22:4). 그러나 이 단어는, 이 할랄이 지나칠때, '미친것'으로 보여집니다(삼상 21:13; 나 2:5). 우리가 하나님을 높일때, (성령안에서) 인격적으로 찬양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번째 그림 5번은 '야다흐'라는 단어로 역시 '찬양하다/감사하다/높이다'입니다. 시편은 '할랄'과 '야다흐'로 가득하지요. 어쩌면 '야다흐'는 경험적인 고백의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창 29:35에서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유다가 '야다흐'에서 나왔다는 점이 신비합니다. 쉽게 말하면, '김감사' '이찬양'이란 이름이니깐요). 역시 다윗은 '야다흐'를 사용하여 야훼 하나님과의 깊었던 관계/체험을 고백합니다(삼하 22:50; '할랄'이 4절에 있다면, '야다흐'는 50절에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역대하를 보면, 이 '할랄'과 '야다흐'가 함께 하면서, (언젠가 다시 건축될) 야훼의 성전에서 예배로 드려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대하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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