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권. "역시 그의 그림은 굵으면서도 시원하다"
마이클 케냐(Michael Kenna)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그의 그림은 굵으면서도 시원하게 지나간다. 사실 1-2권에서 충분히 끝을 맺었던 것 같은 그의 이야기가, 혹시 지독한 독자들의 ‘애프터 신청’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문학에 책임감을 갖고 있는 출판사 편집인의 감언이설 덕분인지, 그가 풀지 않아도 ‘충분했던’ 무한한 상상력의 사슬을 풀어놓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굵은 그림이기에 즉 별 세밀한 그림들이 없기에 간명하고, 그렇지만 그가 제시하려는 이 세대의 혹은 한 세대 전의 지나간 청춘의 반성과 해결책에는 충분한 시원함을 맛보았다.
굵은 그림이라하면, 3권이 끌고 가는 이야기의 굵기가 너무나 짧고 굵다. 전편에서 덴고가 정체불명의 신비학생(후카에리)을 만나 ‘리틀 피플과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라는 초현실적인 소설 「공기번데기」를 써내려가는 지성적 번득임과, 그와 동시에 아오마메가 유명 교단의 교주를 ‘허락살해’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스릴이 지배적이었다면, 3권은 전편에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했던 -그래서 더욱 애간장을 태워놓았던- 아오마메의 지리한 ‘숨어 지내기’와, 교주 살해자를 추적하는 제3의 인물(우시카와)의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상(혹은 그의 결말)과, 마지막으로 전편에 비해 확실히 비중이 떨어져버린 덴고의 가족관계회복이 보여주는 다소 억지스러움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시원함을 느꼈던 것은, ‘고독’이라는 문제를 이처럼 지독하게 집착하며 건드리면서 결국 어떻게든 결말을 내보려는 작가의 최종결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30년 전이 어떤 세계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작가가 말하는 1Q84년 혹은 ‘고양이 마을’은 ‘고독’이 지배하는 세계임에 분명하다. 외롭지 않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고독하다(136, 266, 391). 아! 고독하지 않은 것은 두 개의 달 뿐이다. 그러한 세계는 극복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작가는 이 세계에서 그것을 이룬다. 우리가 같이 있다면, 이 장소가 어떤 곳이건 관계없다. 그것이 고독의 타파이며 인생의 답이다. 그들을 지배했던 달은 몰락하고, 이제 그들만이 전부다. 그러므로 비록 독자의 무한한 상상력의 열정을 식혀주었다는 차원에서만 봐도, 작가는 충분히 시원하게 현대의 문제를 씻겨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3권은 사족이다. 책의 1/3이 과거의 재탕이지 않은가!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삽입시켜 3박자라는 새로운 구도를 만들었지만, 그 스스로가 자신을 “거북이”로 자인했던 바와 같이(178), 이야기는 멀고도 먼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리와인드’가 되고 말았다. 그러한 느림보 진행으로 전편을 파라프레이즈하는 과정에서도, 숨어 지내는 인물들의 일상이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물론 맥락은 1984년이리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소셜네트워크도 없고, 그 흔한 아이폰도 없으리라. 그래서 내가 볼 때, ‘사람을 찾는다’라는 설정이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세계-이러한 작가의 설정이 너무나 정적이어서 숨이 막혔다(영화 Enemy at the Gate에서 느껴졌던 긴박감의 2%라도 있었더라면! - 물론 후에 밝혀진[286,335] NHK수금원의 불쾌한 노크가 일종의 신선한 공포감을 선사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람 찾기가 어려워야 하겠는가?(412)
그래도 3명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그리고 약간은 ‘시간차’를 두면서, 술술 풀어지는 읽기를 조금 긴장하게 만든 것은 감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그러한 3명의 등장인물을 두었다는 것 때문에, 그의 붕궤가 너무 허무하다. 우시카와의 공기번데기 대변신은, 마치 어느 장르에서건 사방이 막혀 있는 갑갑함을 풀어내는 일종의 초월자의 작가 정신의 면모란 이런 것이라고, 그래서 ‘뭐야!’ 하는 독자들의 첫인상을 몇 줄 읽어 나가면서 오히려 ‘아 이런 신비로움이!’라는 어찌해도 이해할 수 없어 단지 빈틈을 풀어내는 데 감탄사만 연발하게 만들어낸다. (사실 이런 대변신이 뭐 필요한 것인가? 그가 대변신한 것이 두 개의 달을 본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3박자를 잘 맞추어 활약했던 그의 집착에 가까운 은신에 대한 작가적 보답인 것인가?)
나의 짧은 읽기를 정리하면, 저자의 문제는 현시대의 수동성과 고독인 것 같다. 부모 세대에 의해 자아가 손상된 수동화된 ‘아이어른’의 늦었지만 그렇기에 시의적절한 “주체회복”이 필요하다(585, 651). 내가 주체가 될 때, 나는 고독하지 않다(586). 그리고 우리의 고독은 적극적인 만남이라는 움직임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고독의 세계는 필요 없다. 그러므로 이 완전한 듯하지만, 사실 불완전한 이 세계는 벗어나야만 하는 장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소에 우리가 던져진 이유는 있으니, 바로 ‘서로를 만나기 위함’이다(712). 아직도 자신이 밟은 땅에서 자신이 남긴 발자국에 확신이 서지 않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서 있는 대지의 존재를 확정짓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읽기는 충분한 공명을 남긴다.
“우리는 이제부터 고양이 마을(혹은 1Q84년)을 떠나.
깊은 고독이 낮을 지배하고, 큰 고양이들이 밤을 지배하는 마을이야.
(비록 그곳엔)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오래된 돌다리가 놓여 있지만,
그곳은 우리가 머무를 곳이 아니야.”(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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