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에베소서 강해-10] "교회의 확산"(5:21-6:9)

진실과열정 2010. 6. 18. 13:16

꼼꼼하게 읽는 에베소서(11) 


 

교회의 확산(5:21-6:9)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예전에는 TV광고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TV를 보면 광고가 딱 하나입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월드컵/박지성’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월드컵/박지성을 내놓지 않으면 광고가 안 될 정도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천안함 사건과 지방선거를 통해서 어수선했고 뒤숭숭했던 사회분위기가 ‘월드컵’을 계기로 하나로 뭉쳐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잠시입니다. 채 한달도 되지 못해서, TV광고는 예전처럼 다양한 광고로 바뀔 것이고, 월드컵 열풍은 또 4년을 뒤로하고 작별을 고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왔다 사라지는 유행이라고 하지요. 이 세상에 잠깐 반짝이는 것은 있을지 몰라도,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비밀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이 위대한 비밀을 깨닫고, ‘교회’의 비밀이라는 거대한 주제로 에베소서를 관통하는 놀라운 가르침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일찌감치 바울은 1:9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은 교회이며, 바로 하나님의 회복운동으로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유일한 통로이자 완전한 열쇠가 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교회라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핵심 키워드’를 가지고 모든 신학을 통일시키고, 또한 더 나아가 실제적인 현장으로까지도 교회로 묶습니다. 정말 서로 별개처럼 보여서 우리가 그냥 간과하고말 부분들을, 바울은 ‘교회’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비밀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할 때도(1:9) 교회의 비밀로 시작하고, 에베소서를 마칠 때도(6:19) 자신이 이 비밀을 계속해서 담대히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이 비밀이 교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교회라는 영원한 가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에 목숨을 겁시다. 그 비밀이 얼마나 위대하며 영광스러운지를 깨달아, 목숨을 걸고 또 걸을만큼 교회에 대한 확신을 품도록 합시다. 바로 이러한 확신을 품게하기 위해서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읽게 하신 것입니다.

   지난 여러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들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적인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목표는 성도를 온전케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옛사람의 허망한 상태로 돌이키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교회에 대한 소극적인 면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라는 한 몸을 지키는데 무게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오늘과 다음의 마지막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적극적인 면을 말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로 바울은 교회의 영역을 확장시킵니다(5:20-6:9).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기에,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창조의 회복에 유일한 열쇠입니다. 두 번째로는, 영적 전쟁을 말합니다(6:10-20).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 영역을 확장한다는 말은 결국 기존에 사단이 지배하던 세계를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시킨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교회는 영적 전쟁의 현장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 첫 번째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동안 평범하게 ‘가정’으로만 알고 있던 세계에 대해서 바울은 교회의 영역으로 확장 아니 회복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래 교회였던 가정이 사단에 의해 정복된 이후 역기능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에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교회라는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 혹은 더 나아가 우리의 세계를 ‘교회’로 확산시켜야 하는 영적 도전을 품게 될 것입니다.

 

1.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고, 집사와 성도가 있듯이, 에베소서라는 이 편지도 성도들이라고는 하지만, 보다 깊이 살펴보면 그 수신인이 다양합니다: 에베소의 성도들 가운데에는 ‘아내들’이 있고(22절) ‘남편들’이 있으며(25절), ‘자녀들’이 있고(6:1) ‘아비들’이 있습니다(6:4). ‘종들’이 있고(6:5) ‘상전들’이 있습니다(6:9). 이 각각에 대해서 동그라미를 쳐보도록 합시다. 아마 거의 모든 나라가 근대화되기 이전에 이러한 가정의 모습을 띄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한 눈에 봐도, 오늘의 말씀은 가정의 달 5월에 살펴봐야 마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울은 ‘교회’라는 핵심키워드로 가정의 본질을 회복시킵니다. 오늘의 본문은 놀랍게도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정가운데 과녁이라고 할 수 있는 5:32을 읽어봅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지금 바울은 ‘아내들/남편들/자녀들/아비들/종들/상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누가 보더라도 “바울은 가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지요. 교회는 당연히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를 책임집니다. 즉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자 자신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사랑하시고 결국 교회로 흠도 없고 티도 없게 만드십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끝까지 보호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간격이 없어지고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그것과 똑같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있어서 머리가 되기에, 아내는 당연히 남편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또한 남편은 아내를 책임집니다. 남편은 자기 몸을 책임지듯이 자기 아내를 책임지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동양적 사고에서 무촌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바울이 가정의 본질을 말하면서 남편과 아내만을 중점적으로 다룬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가정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기초조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가정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과 관련된 창조 중에 최초의 것임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5:31을 봅시다(“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말씀은 그렇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조직이요,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봐도 창세기엔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가정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비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또한 교회를 위해서 하신 그 모든 일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최초의 조직이요, 바로 가정의 모습이요,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전엔 이 비밀이 풀어지지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이 ‘비밀’이 풀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 단지 생명을 이어주는 기관으로써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시기에서부터 그 예정과 경륜을 가지고, ‘교회’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온전히 ‘한 몸’을 이루는 곳,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자라나는 곳, 창세기 2장이 바로 교회가 기획된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1절에 창세기 말씀을 인용한 바울은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물리적 차원으로 제한된 세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만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달은 것을 수용하고, 보다 확대시킨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피조물의 모든 세계를 교회로 통합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우리의 가정을 교회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학교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직장을 교회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사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소망이 그러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 2:2-4).

   신학자들은 이러한 교회를 우주적 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말에 ‘불가능성’을 숨겨놓습니다. 이론적이라는 거지요. 가정이 가정이지 어떻게 교회냐? 회사가 회사일 뿐이지 어떻게 교회냐?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우주적 교회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론에 그치는 것입니까?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으며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단지 이론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실제로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보혈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는 참된 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성경이 이점을 강력히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최초의 교회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물론 다양한 발생이론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고전 16:19은 바울의 안부인사로,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위대한 선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사단이 다스리는 세계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교회로 만드신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사단 때문이지요. 인간의 최초 조직인 가정에 교회의 본모습이 사라지고, 단순히 유전자(DNA)의 보존/전달에 국한된 기능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이로 인해서 파생된 사회의 모든 조직 역시 교회로서의 모습이 아닌, 약육강식이라는 혹은 황금만능주의라는 역기능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원죄를 무효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사람이 잘못 끼운 단추를 되돌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대로 끼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단의 질서가 파괴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일 에베소서의 마지막에서 바울이 클라이막스로 전달하는 기독교인의 궁극적 사명, 영적전쟁입니다.

   

2. 교회된 가정

   그렇다면 교회가 된 가정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바꿔 말해서, 사단이 지배하던 가정과 교회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앞 장에서 계속해서 교회의 대원칙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 됨’이고, 그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서로가 사랑하고 용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원리가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의 본문의 시작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21절).

   이 “피차 복종함”이 기존의 가정과 교회화된 가정과의 큰 차이입니다. 사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볼 때, 어떤 분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성운동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잘하면 서울 시장도 여자가 될 뻔한 시대인데!”라고 할지 모릅니다. 교육전문가라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는게 더 낫다”라고 할지 모릅니다. 또한 투철한 노동운동가라면, 바울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사측입장을 옹호하고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2000년 전의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아쉬운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지만(예배 시간마다, 5:22을 낭독하면 어떨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당시의 통상적인 견해에 비해 매우 파격적인 원칙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차 복종함”이라는 대원칙입니다.

   고대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말합니다: 고대 사회는 일방적인 사회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일방적이었으며, 아비는 자녀에게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주인은 종에게 일방적이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여자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남편에게 보여줍니다. 남편이 아이를 들어올리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아내에겐 권리가 없으며, 아이에게도 권리가 없었습니다. 또 단적인 예를 들면,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즉 사람과 물건 그 중간이 바로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주인의 소유가 되고, 그렇게 처분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이 아니라는 것이 뻔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회 속에서 바울의 이 가르침, 곧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는 이 명령은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정을 가정으로 만드는 선언이 아닙니다. 가정을 교회로 만드는 선언인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정신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온 몸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가정 역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형제’로 변화됨을 주목하십시오; 몬1:16.)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우리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왔습니다. 진정한 교회가 되도록 그 실천을 부단히 해왔던 것입니다(“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32). 이러한 실천이 우리의 가정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가 하는 일을 하십시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가르치며, 전도를 하고, 교제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에서 교회가 하는 일을 하십시오. 역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를 하고, 교제를 나누십시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가 확산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적극적인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