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2009-1: 구약 역사기술 세미나 04]-John J. Collins(1979)

진실과열정 2009. 3. 31. 11:49

구약역사  세미나(2009.3.31)

담당교수:   우택주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3학기)

John J. Collins, 최근의 성서신학에서 구약의 “역사적 성격,” 150-69.

 

원제:  "The "Historical Character" of the Old Testament in Recent Biblical Theology," V. Philips Long ed., Israel's Past in Present Research: Essays on Ancient Israelite Historiography (SBTS 7; Winnona Lake: Eisenbrauns, 1999), 150-69.



      1787년에 있었던 요한 필립 가블러의 그 유명한 취임 연설 이래로, 성서신학이 교의학의 교훈적이며 철학적인 관심으로부터 자신만의 “역사적 성격”을 나타내어야만 한다는 일치된 견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성서신학과 성서연구는 일반적으로 역사비평적 방법론에 의해서 주로 다루어져왔었으며, 그뿐 아니라, 성서신학이 이스라엘 종교사와 초기 기독교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반복적인 논쟁이 있어왔다.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발흥이, 과학적인 비판적 탐구에 대한 전반적인 현대의 관심과 종교적 권위의 몰락에 연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성서자료는 그 자체로 이미 역사적인 조사를 충분히 받았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이것은 특별히 구약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 구약은 의심스러운 역사적 사건들을 상당한 수준으로 부각시켜 놓았으며, 〚151〛몇 백 년의 기간에 해당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폰 라트가 “구약은 역사책이다”라고 짧게 단언한 것은 확실히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며, “역사를 통한 계시”라는 신학적 카테고리는 모호하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의 상당한 부분이 의심스러운 역사적 사건들에 관여하고 있으며, 구약의 그 어떠한 신학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실을 반드시 다루어야만 하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로 남아있다. 심지어 아마도 “역사를 통한 계시”라는 신학을 가장 고집하고 있는 비평가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바James Barr조차도, “구약 안에 엄청난 양의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핵심적이고 현저한 중요성”이 있다고 확언하였고, “종교적인 전승 안에서 이러한 자료들이 나타나고 또한 유력하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종교적이며 문화적인 전승들과 대비할 때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상당히 확고하게 차이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또한 이러한 내러티브 자료가 “역사에 해당되는 어떠한 특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질들 가운데 두 가지는 특별히 중요한 것들이다: “이야기는, 넓게 말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그 어떤 시대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관한 서로 다른 일화들과는 다르”며, 또한 “이야기는 연대기적인 기본 틀로 나타나는데, 이 틀은 시대 구분표와는 다른 것이다.” 바는 예언적 자료들, 그러니까 좀처럼 내러티브 형태를 보이지 않는 이러한 자료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연대기로 통합되고,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 해당될 수 있다는 점을 추가하려는 것 같다. 역사적 내러티브가 구약에서 유일한 계시의 매개체로 선정된다는 주장은 올바르지 않으며, 오경의 내러티브가 역사보다는 “이야기들”로 기술되었다는 것이 보다 합당한 반면에, 사건들의 연대기적인 전후 관계가 구약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구약에 대한 그 어떠한 신학적인 평가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 과제는, 바가 “역사 같은history-like” 자료라고 불렀던 것의 “중심적이고 현저한 중요성”을 밝혀내고 설명하는 것이다.

      최근의 성서신학에서 이러한 점을 논의하는 일은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대한 주장에서부터 그것의 문학적 형태를 감상하는 것으로 점차 옮겨가고 있다. 구약의 내러티브가 신앙을 확고하게 해주며 기초가 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놓은 하나의 보증된 전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점차로 확실해져가고 있다. 〚152〛바가 “이야기”라고 분류한 것은 “역사”라고 한 것보다 더 적절하다 하겠는데, 그것[“이야기”라는 분류]이 그 다루려는 바를 허구적인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문학으로써 평가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는 이러한 내러티브의 성격이나 관점에 대하여 그리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야기들이라는 게 워낙 다양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논의를 바가 기여한 점 너머로 옮긴다고 한다면, 그것의 “역사 같은” 성격에 주의함으로써 구약 이야기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소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논의의 핵심 사항을 다시 검토하는 것이며, 어떻게 “역사 같은” 구약의 성격을 보다 잘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제안하려는 것이다. 첫 부분에서는 구약을 “역사”로 보려는 신학적인 시도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볼 것인데, 바로 드 보de Vaux, 라이트Wright 그리고 폰 라트von Rad의 저서를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제임스 바의 공헌점을 생각해볼 것인데, 그는 성서 내러티브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야기 혹은 문학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와 마지막 부분으로는, 바를 뛰어 넘을 것인데, 바로 구약 이야기의 “역사 같은” 성격이 암시하는 바를 심사숙고함으로써 이러한 작업을 할 것이다.



역사로서 내러티브

1) 드 보de Vaux

      구약의 “역사 같은” 내러티브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롤랑 드 보에 의해서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났는데, 그는 폰 라트를 비평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드 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폰 라트와 의견을 같이 하였다: “서로 다른 세계가 있는데, 바로 현대의 역사 과학에 의해서 재구성된 이스라엘 역사와 성서의 저자들에 의해서 표현된 구속사 사이의 차이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구속사는 사실에 의존하는데, 이 사실은 역사가가 자신의 긍정적인 방법론으로 검토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성서의 사실성이 검증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또한 어떤 경우라도 그러한 사실성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제안했던 폰 라트와는 달리, 드 보는 “사실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 신앙의 토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드 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그들을 구원하며, 백성들에게 약속을 맺고 또한 그들에게 벌을 내리는 모든 것들은 사실로써 전해진 것들이다. 신약 성서에서, 성육신은 사실이며, 부활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진실이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했던 바와 같이 〚153〛“만약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진술이 과연 구약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드 보가 주장하는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어떤 것들은 반드시 진짜여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일단 믿음으로 시작하고, 성서 내러티브의 역사성은 연역적으로 따라온다. 비평적 역사가의 귀납적인 방식은 거듭 확인하고, 명료하게 하며, 심지어는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역사적 질문들은 논의의 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신학은 “믿음의 과학이다; 그것이 다루는 대상(즉, 그것이 연구하는 것)과 그것이 다루는 방식(즉, 연구되는 대상의 양상) 그리고 그것이 사용하는 기준lumen sub quo,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인 것이다. . . .”

      드 보의 입장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전통적인 “이해의 윤리morality of knowledge”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의 비평적인 역사기술 분야에서는 이미 전제가 된 이해의 윤리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반 하비Van Harvey에 의해서 명쾌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는 “믿음과 신앙을 미덕으로 기리며, 의심을 죄악으로 치부한다.” 새로운 윤리는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높이 산다. . . . 구식이 된 윤리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라는 슬로건을 선호한다; 새로운 윤리는 모든 가부의 문제가 양심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에서 대안이라는 것이, 한쪽 편에서 볼 때, 신의 개입 가능성을 인정하는 열린 우주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폐쇄된 세속적인 세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겠다. 종교적인 교리와 세속적인 역사가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견해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사건의 역사성이 믿음으로 보장될 수 있는가 그래서 있을 수 있는 비평적인 논쟁의 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역사가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함락했다고 믿으면서 단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신앙이 고고학이나 다른 증거에 의해서 의문시된다고 하면, 유일한 이성적인 반응은 그러한 증거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단지 역사가가 여호수아 6장의 기사를 진실로 믿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단언은 그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이러한 요점은 하비가 아주 잘 보여주었다: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이 결백하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의 논증은 이러한 확신과는 논리적으로 무관하게 제시되어야만 한다. 변호사는 자신의 주관적인 확신이 왜 옳은 것인지를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동일하게 확신하고 있는 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료들과 이유들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 . . 〚154〛믿음에 호소함으로써 가장 빈번하게 혼란케 되는 것은 단언과 그것의 증명 사이의 명쾌한 구별이라 하겠다.” 짧게 말해서, 믿음은, 논리적으로도,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용될 수 없다.

      드 보는 비평학자들이 폰 라트가 허용한 것 이상으로 성서의 기술을 보다 더 지지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평학자들의 서로 다른 평가는 단지 부차적인 논의일 뿐이었다; 그의 주요한 요점은 역사적인 정확성이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요 논제가 누군가의 믿음이 사실에 기초해야만 하는가-다시 말해서, 믿음이 감정이나 의지보다는 지식에 기초해야만 하는 것인가 만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사실에 기초해서 시작해야만 하며, 그런 다음에야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런 것과 달리, 드 보는 전통적인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특정한 성서의 진술을 권위 있는 그러한 믿음에 기초해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드 보의 입장에 “고백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도 타당하다 하겠다. 드 보는 많은 고백적인 신학자들과 차별성을 두었는데, 바로 그의 믿음이 정말로 이해를 추구하며(quaerens intellectum) 또한 그의 믿음이 비평적인 역사기술에 부합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그러하였다. “고백적”이라는 말에 이성적인 지식에는 무관심하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 보다는 오히려, 드 보의 신학에서 비평적인 탐구의 영역이 명백히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모순됨은, 바로 그 본연의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러한 사실의 역사가 역사적인 방법론으로는 붙잡을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방법론으로 붙잡을 수 없는 그것”을 과연 “역사적인 사실”로 부를 수나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드 보의 입장은 그의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비평적 역사가들에게는 그 어떠한 대화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비평적인 역사학은 믿음이라는 교의를 지지하는 한 환영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경우라면 드 보는 비평적인 방법을 종심법원(최종결정권)으로 여기지 않는다. 내러티브가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는 드 보의 주장이 궁극적으로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한, 그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비평적인 방법론에 의한 객관성을 요구하지는 못한다 하겠다.


2) 라이트Wright

      드 보의 입장과 상당하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견해가 G.E. 라이트의 글에서 발견된다. 라이트는 드 보의 고백적인 접근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올바르게 인지하였고, 성서신학이 반드시 교조적인 믿음이 아닌 역사가가 기술하는 저작에서 시작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인, 「활동하시는 하나님God Who Acts」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55〛이제 성서적인 믿음에서 모든 것들은 중심적인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하였는가에 달려있다. . . . 그것들이 사실인가의 여부가 그리 별다른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다. 혹은 이러한 사실들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관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조차도 성서적인 태도를 불신앙적이며 매춘하는 행위로 만드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결과적으로, 성서적인 관점에서 사건들이 실제로 사건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성서의 핵심적인 사건들의 역사성을 믿음으로 보증할 수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비록 어떻게 신학자가 증거들을 비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우리는 매우 의문스러울 것이지만 말이다. 즉 예를 들면, 불신앙적이고 매춘을 한다고 위협하면서 사람들을 목매달 때, 과연 출애굽의 증거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라이트는 주요한 성서의 사건들의 역사성이 역사적인 방법론에 의해서, 특별히 고고학의 도움으로 세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가를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보증을 위해 믿음에 호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믿음의 기초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서신학의 측면에서 가능한 틀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는데, 바로 학자들의 합의점이 성서 기사의 기본적인 신뢰성을 지지하는 것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제시되는 견해는, 그러한 합의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 관해 제시될 수 있는 것들은 이제는 완전히 말소되고 말았음이 널리 확실시 되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견해를 이끌고 있는 입장으로) 톰슨Thompson과 반 시터스Van Seters의 회의적인 견해는, 당연한 얘기지만, 결정적인 것으로 취급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은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그 어떠한 재구성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증거의 결함이 있고 또한 부서지기 쉬운 약점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는 할 수 있겠다. 만약 성서 신학자가 “보증을 답보해 줄 수 있는 증거 자체보다 확신하는 태도에 더 치우친 상태의 그 어떠한 진술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 그러한 비평적인 이상향을 따라서 길을 간다고 한다면,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증거는 깊은 확신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성서적인 믿음으로 볼 때, 모든 것이 핵심적인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는가에 따라서 달려있다고 한다면,” 최소한 구약의 믿음은 그 기초가 매우 취약한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156〛그러나 역사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믿음의 긍정적인 기초를 세우려는 시도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를 통한 계시”를 가장 굳건하게 수호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연구로 증명될 수 있는 종류의 간단한 역사가 아니라, “믿음이 사건으로 투영되어서 사건의 참 의미로 여겨지는 것”으로써의 “믿음에 의해 해석된 역사”라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짧게 말해서, 어떠한 사건을 하나님의 활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해석자의 관점에 달려있는 것으로, 문제를 삼고 있는 해석자가 개인인가 전체 공동체인가에 따라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제시되는 그 어떠한 것들은, 예를 들면 출애굽과 같은 것은, 다른 관점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데, 달리 말해서 신적인 개입을 끌어다 쓰지 않고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계시에 대한 이러한 차원의 관점은 이미 허용되고 있으며, 실제로도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문제시되고 있는 사건들이 특별한 믿음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활동으로써만 보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그러한 비평적 역사서술로는 분명하게 세워질 수 없을 것이며, 그렇기에 그것들은 독립적인 증명을 이끌어내는 객관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사실의 역사Facts of history”는 오직 역사적인 방법론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으로 확증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면 그 무엇이건 역사적인 사실로는 불릴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오직 역사가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들만이 실제로 발생했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역사 비평주의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거나 혹은 초자연적인 것이거나 간에) 발생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요점은 단지 가능성만으로는 “역사적인 사실”로 분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의 내러티브를 신뢰할만한 역사적인 정보로 취급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거기에는 비평적인 역사기술로 확인될 수 있는 것과 성서 본문에 중심을 두고 있는 신적 활동이라는 고백 사이에 놓여있는 큰 간격이라는 난관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떠한 역사적인 기초 위에 있다고 보일 수만 있다면, 그러한 성서 기사가 역사적이라는 가능성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중심이 되는 것이 단지 어떤 히브리인 그룹이 이집트에서부터 탈출했다는 것이 아니라, 야웨가 그들을 이끌었으며, 이러한 주장이 역사적인 방법론으로는 절대로 확증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약의 중심 사건들이 역사적이라는 라이트의 단언은 따라서 궁극적으로 고백적인 것이며, 그 어떠한 신앙 고백적인 면에 호소하지 않으려던 그의 결연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드 보를 비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단언은 결국 고백적인 것이었다. 라이트와 드 보 모두의 경우에, 역사적인 입증에 호소하는 것은 단지 신학적인 문제를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구약의 핵심적인 주장들은 그러한 입증으로는 분석될 수 없는 것임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57〛3) 폰 라트Von Rad

      성서신학 분야에서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의 많은 공헌들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현대의 비평적 견해와 구약 자체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견해 사이의 간격에 학자적으로 관심을 집중시켰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서 생겨난 광범위하면서도 열띤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목하였던 그 간격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된 초점은 “두 개의 이해 사이에 얼마나 많은 불일치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도 존 브라이트John Bright의 「역사」는 마틴 노트의 것보다는 성서의 내용에 덜 벗어나고 있는데, 이는 최근에 헤이에스와 밀러가 편집한 논문집이 연대설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브라이트와 같은 다소 보수적인 입장에서 재구성을 하는 것에서조차 여전히 성서 기사를 다소간 수정하고 있다는 점이며, 보다 중요한 것으로써, 그러한 재구성으로도 신적 활동을 역사적으로 확증해줄 수 없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더 나아가, 두 개의 이해에 대한 폰 라트의 이분법은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완성된 현대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미리 가정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견해들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고백적인 기사들이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비평적으로 수용할만한 역사를 제공해주지 않고 있다는 그의 기본적인 지적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서 내러티브는 역사적인 정보를 위한 신뢰할만한 사료로써 여겨질 수 없는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구약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자료 자체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성서 내러티브가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없으며 그것들이 역사적인 정도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논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건으로, 예를 들면 출애굽과 같은 사건은, 역사적으로는 전혀 확고한 증명을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신적인 활동을 단정하고 있는 한, 그 사건은 어떤 면에서도 역사적인 확증을 해낼 수 없다. 결과적으로 구약 내러티브를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신뢰할만한 사료로써 취급하고 있는 그 어떠한 성서신학도 기껏해야 제한된 수준에 그리고 분명치 않은 정도의 정당성을 보유할 뿐이며,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확증될 수 없는 그러한 내러티브의 양상을 적절하게 다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이해 사이를 폰 라트가 명쾌하게 구분한 것은 성서적인 믿음을 “역사적”인 것으로 기술하려던 방식의 문제를 부각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 같은” 자료들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점은 “구약의 역사적인 이해가 우리 자신의 이해와 같이 열정적”이라는 것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현대의 비평적인 차원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상으로는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역사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다소 상이한 견해를 마주하게 하는 일이다.” 〚158〛폰 라트는 여기에서 성서신학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를 옳게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을 들을 순 없었다. 자신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써 “구속사”라는 것을 계속적으로 사용하면서, 폰 라트는 “역사”와 “역사적”이라는 용어에 들어있는 혼란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가시켰을 뿐이다. 비록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드 보의 반응은 이해할만 하다: “그의 견해에서 ‘구속사’는 ‘참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 역사가가 관여하는 한 - 변경되고 잘못된 해석으로, 그 해석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사람들이 역사적 사건들을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 . . 이스라엘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폰 라트는 성서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반대하였다. “케리그마적인 이해 역시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역사적인 이해로부터 상당히 멀리 벗어나는 지점에서조차도) 실제적인 역사에 기초하고 있으며 발명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진술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케리그마적인 역사 이해와 비평적인 역사 이해 사이의 날카로운 이분법을 조화시키기란 분명히 어렵다. 케리그마적인 이해가 “실제적인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단언은, 만약 그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역사적 이해”와 들어맞기만 한다면 옹호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비평적인 재구성과는 어떤 면에서라도 조화될 수 없다고 한다면, “실제 역사”에 대한 그것의 관련성은 순전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여겨져야만 할 것이다. 사실, 폰 라트는 여기에서 “역사”라는 용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는 현대적인 기준으로는 비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케리그마적인 진술이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써, 혹은 “거짓된” 것으로써 취급받지는 말아야 한다고 올바르게 이해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진정한 실제 역사”와 관련된 용어로 “참” 혹은 “거짓”을 판단하려는 것 같다. 그는 “역사 같은” 내러티브가 역사적인 사건들과 관련된 것보다 다른 방식에서 “참”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셈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보았던 세 명의 신학자들은 구약 내러티브의 “역사 같은” 성격에 대한 세 가지 방식의 접근을 보여준다. 드 보와 라이트는, 자신들만의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면서, 내러티브의 역사적 신뢰성에 엄청난 무게를 두었다. 이러한 강조가 가진 문제점은, 신적 활동이라는 성서의 핵심적인 주장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이 말하고 있는 역사성이라는 것은 신앙고백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고 만다. 고백적인 믿음의 장점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역사적인 증거로서 무게를 실어주지 않으며, 〚159〛그 어떠한 객관적인 차원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확증하는데도 사용될 수 없다. 구약의 핵심적인 계시 사건들은, 그러므로, 객관적인 역사로 취급될 수 없다.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취급하려는 시도는 단지 그것의 진면목을 감추는 일이 될 뿐이다.

      폰 라트는 성서 내러티브의 실제적인 정확성이라는 부분에서 라이트와 드 보보다 훨씬 덜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라는 용어를 자신의 신학에 핵심적인 분야로 계속 사용함으로써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은 “역사”라는 용어가 불가피하게 실제적인 정확성이라는 개념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보여주는 진보는 “역사”를 이러한 내러티브를 위한 적합한 카테고리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문학으로서 내러티브

1) “이야기”라는 카테고리

      폰 라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서 볼 때, 성서신학이 핵심 카테고리로서 “역사”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차이는 제임스 바의 주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데, 그의 이론에 따르면, “구약이라는 긴 내러티브로 된 집적물이 내게는, 하나의 완전한 문학으로써 보이기 때문에, 역사라는 제목을 붙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서, 전반적으로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단지 부분적인 경우에만 역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혹은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스 프라이Hans Frei가 사용했던 용어를 채택할 수도 있겠는데, 그는 내러티브를 “역사 같은” 것이라고 불렀다.” 바는 “이야기”라는 카테고리가 내포하고 있는 바를 완전하게 발전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사람들은 성서를 문학으로 논의하려했던 그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그는 구분하기를:


두 가지 종류의 기록방식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정보전달이 주된 목적이다; 그것의 가치는 바깥세상에서 존재하는 실재(관련된 것)에 관해 보도하는바 그것의 정확성에 달려있다. 두 번째 것은 의미와 가치에 관한 조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이야기의 구조와 모양에 달려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이미지에 달려있다. 그것은 문학으로 평가받으며, 미학적으로 분석된다. 그것은 정보로써 평가받지 않는다.


〚160〛“역사”라는 카테고리가 주로 첫 번째 종류의 기록방식에 연관되어 있는 반면에, “이야기”는 분명히 두 번째 것에 관련한다. 바가 자세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부분의 문학은 허구이다.” 구약 내러티브를 이야기로서 읽는다는 것은 실제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볼 때, 그것을 허구로 읽는다는 말이다. 허구적인 내러티브는 물론 실제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할 수도 있다. 호머의 서사시를 자극했던 트로이의 공격은 정말로 있었을 것이며, 시저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연극을 쓰기 전에 확실히 암살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머와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연관성은 그들의 저작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리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같은 차원에서 일부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부터 탈출했다는 사실이 출애굽 이야기에서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예를 들면, 창세기의 시작 부분, 욥기, 예수의 비유-은 이미 허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것들의 가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는 소위 “역사적”이라고 불리는 책들까지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만 한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주로 이들 책들이 역사적으로 보일 수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외부적인 실체들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답해지기 이전에 어떤 식으로건 자기의 주된 효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질문이 대답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의 효력에는 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우리가 구약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드시 지적해야만 하겠다. 성서 내러티브가 역사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인가 아닌가 혹은 얼마나 역사적인가 라는 질문, 즉 그 내러티브들을 정보전달용으로 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필수불가결적으로 생겨난다. 성서 기사가 사실적이라는 만연된 억측에서 볼 때, 역사성의 문제는 단순하게 무시될 수 없다. 바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경고하였다: “성서를 문학으로 연구하는 것은 결국 한 쪽으론 상당히 세속적이며 비신학적인 연구라는 것과 다른 쪽으론 종교적인 동기 때문에 생겨난 편견으로 인해 역사적인 비평을 적대시하는 것 사이에 생겨난 거룩하지 못한 동맹과 같은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최근에 칼 바르트Karl Barth가 성서를 (역사적인 방법과 반대되는 차원에서) 문학-신학적으로 접근하는 모델로써 종종 회자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켈세이David Kelsey는 다음과 같이 썼는데, “비록 바르트가 성경을 방대하고 느슨하게 짜여진 비-허구적 소설이라고 여기기는 했지만, 최소한 바르트는 성경을 비-허구적인 것으로 취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 내러티브가 비-허구적이라는 단언은 역사적인 근거를 불러일으키며, 이러한 것들은 오직 역사적인 기준으로만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161〛본문을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역사적 가정을 비평적인 조사로부터 막아내는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성서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바가 옹호했던 방식으로, 이러한 접근은 이러한 자료를 다루는데 있어서 정당한 유일한 것도 아니며,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역사가들이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한 역사적인 재구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증거라고 한다면 어느 것이라도 끌어다 써서는 안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러티브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그것들을 신뢰할만한 역사적인 정보로 취급하는 방식보다 더 열려 있고 견고한 정당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과거에 문학적 접근은 주로 욥기와 같은 책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역사로 분류되지 않은 책들에만 해당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 같은” 부분에서 도드라지는 핵심적인 구원의 사건들 혹은 “하나님의 행동”이 역사적인 카테고리 안에서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봐왔었다. 문학적 접근이 성서신학을 위해서 가장 희망적일 수 있다는 것은 구약 계시의 이러한 핵심적인 양상 안에서 분명하다 하겠다. 특별히 말해서, 출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행동”의 본질은, 패러다임적인 이야기로 혹은 신화로 여겨질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이러한 이야기와 신화의 의의는 인간 생활의 어떠한 반복적인 양상에 대한 그것들만의 표현에 들어있다고 하겠다.


2) 패러다임적인 이야기로써 “사건들을 구원해내기”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성서 내러티브의 역사적인 신뢰성이라는 부분을 가장 철저하게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행동”이 단순한 역사, 즉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서 검증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역사는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고는 있지만, “사실에 믿음이 투영된” 것을 포함하고 있는 “믿음으로 해석된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부터 탈출했던 것과 같은 사건은 신적인 인과 관계로 해석된다. 비록 거기에는 “자연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설명될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바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렇게 된 이상, 성서 내러티브의 ‘사건’을 그것이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적인 구원의 사건에 대한 신화적인 재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성서가 본연의 상태에서 볼 때 ‘구원적인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바와 같이, 문학으로써 혹은 신화로써 가지고 있는 성서의 기능을 사그리 없애지는 않는다. . . . 실제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건 간에, 성서가 의존하는 효과적인 지위라는 것은 이러한 형태로 나타나는 이야기 발화양식인 것 같다.” 〚162〛구원적인 사건이 “상당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바의 진술은, 성서 기사가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불필요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 같으며,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그는 “실제 사건”과 그것의 해석 사이의 장담할 수 없는 구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시적이거나 신화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공들인 작품이 증명 가능한 순전히 사실적인 기록보다 더 적절하게 사건의 “참된” 성격을 종종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을 틀림없이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공들인 역작이 그것의 세부적인 사항에서의 역사적인 정확성을 답보하는 차원에서의 정보로써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구조와 모양”을 평가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출애굽과 같은 사건을 기술하는 성서의 방식은 그 사건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시도임에 분명하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의 관점에서 본 의미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사건이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성서의 설명은 그것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를 위해서는 영속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사건의 의미는 단지 그것이 발생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만을 묻는 것으로 적절히 평가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그 사건이 공동체의 결과적인 경험들에 빛을 비추어주었는지를 또한 물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인류에게 있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자유롭게 물을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초점은 역사를 계시의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오랫동안 시도되어져 왔었다. H.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계시가 사건으로써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그렇기에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험 전반을 고찰하려는 그 공동체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다른 모든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조명으로서 공동체를 깨우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사건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알랜 리차드슨Alan Richardson에게 있어서, 성서의 핵심적인 사건들은 “숨김없이 털어놓은 이야기라는 맥락disclosure situations”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라는 특별히 곤란한 상태에 기초하고는 있지만, 모든 세대에 걸친 모든 민족들의 곤경과 관련된 진리를 조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이러한 접근 방식을 따른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와의 관련성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며 더구나 항구적인 요인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창조와 타락 이야기가 보여주는 계시적인 효력은 그것의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특성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역사적 기초는 참으로 불확실하며, 심지어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조차도 격렬한 논쟁 중에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 어떤 것이라도 그것의 역사적인 개연성에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리고 역으로 말해서, 그것의 계시적인 입장은 이미 용인된 역사성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짧게 말해서, 공동체의 상상력은 사건을 통해서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재고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야기가 역사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는 본문에서조차, 그것은 여전히 공동체의 삶 가운데 존재했으며 영향을 끼쳤던 이야기였던 것이다.

      〚163〛이제 우리는 구약의 “구원적인 사건”이라는 이야기가 신화 혹은 문학적 패러다임의 역할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는다는 바의 결론을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 각각의 경우에 이야기의 기능은 경험의 다른 차원을 조명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기능은 이스라엘 제의에서 “구속사”를 다시 표현하는데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예언자적 기대에 있어서도 분명하다 하겠는데, 그들은 광야와 출애굽의 이야기를 미래를 예견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하였다. 역사적인 패러다임과 신화적인 패러다임의 유사성은 가나안 신화에 들어있는 이미지가 출애굽과 상당 부분 연결된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제2이사야는 놀라운 사례를 보여준다:


깨소서, 아주 먼 옛날, 옛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바로 당신이 라합을 쳐부수지 않으셨나이까?

누가 탄님(용)을 찔렀나이까?

바로 당신이 바다를 말려 놓지 않으셨나이까?

끝없이 깊은 심연의 물을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깊은 바다에 길을 내어서

구속된 자로 지나가게 하였나이다.

야웨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 돌아올진대

기쁨으로 외치며 시온으로 들어오리라(사 51:9-11 by F.M. Cross, CMHE, 108).


예언자는 포로민들이 즉각적으로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올 것과 주로 관련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그의 이해는 두 개의 패러다임을 적용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순전하게 신화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출애굽에 대한 “역사적” 연관성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출애굽의 역사성이 조금이라도 관심의 대상이었다고 가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야웨가 실제로 바다를 말려 놓았는지의 여부는 그가 실제로 라합을 때려 죽였는지에 대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수준의 문제이다. 각각의 경우에 예언자는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사건을 위한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상의 부분에서 우리는 바가 “이야기”라고 불렀던 카테고리가 구약의 “역사 같은” 내러티브에 무엇인가를 조명해주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이야기”라는 용어는, “역사”와 같지 않게,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구약을 이야기로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문학으로 읽는 것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체계와 이미지를 읽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정보 혹은 다른 방식에 의해서 입증될 수 있는 사건의 기록물로써는 접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출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행동”은, 역사적인 범주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이것은 전형적인 이야기 혹은 신화로 적절하게 취급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인간 생활의 반복되는 양상에 빛을 비춰주는 것으로써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164〛그러나 구약 내러티브를 평가함에 있어서 “이야기”라는 범주의 가치는,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특이성의 부족이라는 점에 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을 담으며, 고대의 신화, 동화, 서사시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는 것과 같은 그럴듯한 이야기realistic fiction와 같은 다양한 자료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고대근동의 신화와 구약의 역사 같은 내러티브 사이에 나타나는 잘 알려진 차별성과 관련되어 집중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부분에서 구약의 “구원적인 사건”이 신화로 합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성서의 이야기와 고대근동의 신화 사이에는 최소한 명백한 차이점differences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와 이야기라는 종류 상의 차이는 아닌지 고려해야만 할 것이며, 구약 이야기의 “역사 같은”이라는 말뜻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역사 같은” 내러티브와 표현의 시간성

1) 신화와 원형Myths and Archetypes

      구약의 “역사적인” 성격을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신화적” 세계관과 대조했던 것 말고는, 고대 세계에 관하여 보다 널리 용인되는 일반화라는 것은 (심지어 성서신학의 영역 밖에서조차도) 거의 없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다음 진술이 전형적인 것이었다: “유대 민족의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의 동양적인 신, 원형적인 몸짓의 창조자가 아니었다. 그분은 쉴 틈 없이 역사에 간섭하고, 자신의 의지를 사건들을 통해서 계시하는 하나의 인격이시다.” 문학 비평가인 허버트 슈네이다우Herbert Schneidau는 단언하기를, “성서의 ‘영향력’은 외부적인 자료들로 끊임없이 채워질 수 있는 그러한 장르나 원형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그 어떠한 의미를 획득한다는 일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를 깨닫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슈네이다우는 성서의 역할을 “비신화화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 역할을 통해서 그것의 “역사화한 문체”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에 관해 히브리인들이 가지는 독특한 개념을 논하려고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이스라엘과 다른 근동의 민족들 사이의 대비는 이 시점까지 상당히 과장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위의 차이점에 관한 문제에 관여할 것이 아니라, 〚165〛그러한 차이점 내에 암시되고 있는 “역사 같은” 성서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것이다.

      엘리아데와 슈네이다우의 주장에는, 구약의 “역사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다시 말해 고대의 신화와 차별을 둘 수 있는, 하나의 일반적인 방식이 강조되고 있다. 신화는 끝없이 보충되는 원형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들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역사적인 내러티브는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패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일회적인once-for-all 성질의 것으로 특정한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우리는 슈네이다우가, 최소한, 성서 내러티브가 “실제적인 역사”라는 착각에 빠져있지 않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초점은 바로 이것이다: “역사화한 문체는 . . . 의심할 바 없이 비역사적인 구절들에서조차 두드러지는데 . . . 왜냐하면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히브리인의 특징 때문으로 . . . 그것들은 그 자체의 [비역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외관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 섹션에서 다루었던 우리의 논의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구분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출애굽은 재현되는 방식의 패러다임으로써 반복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토를 달았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기권자들에게 “고대 이스라엘의 정기적인 축제에서 ‘재-현re-presentation’되는 것은 어떠한 무시간적 신화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하나의 유일한 역사적인 사건이다”라는 말을 더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출애굽의 원형적인 역할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출애굽의 유일회적인 성격이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서 티아맛Tiamat이 패배한 것 이상으로 더 명확한 것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이 둘 모두의 경우에서, 진위가 의심스러운 고대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은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해석의 패러다임으로써 사용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 이야기와 이스라엘의 역사 같은 이야기 사이의 차이는, 어느 하나는 반복적인 패턴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표현된 방식 그 자체의 본질에서 찾아야만 한다.


2) 반(反)구조적인 이야기Stories of Anti-structure

      신화와 역사 사이의 대조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가정을 염두하고 있다. 즉, 신화적인 원형은 고착화되고 변하지 않는 상태로 주어지며, 따라서 정적이거나 주기적인 세계관을 양산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가정이 고대근동의 신화에 대하여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는 논쟁적인 질문으로, 이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이야기와 다시 반복하는 방식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고착화되고 변하지 않는 상태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인류학자인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다음과 같이 장황하게 주장하기를, “구조의 상징이 있고, 반(反)구조의 상징이 있다.” 세계가 변함없는 질서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166〛어떠한 질서도 영구적이거나 변화를 초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구약 내러티브의 “역사 같은” 성격은 궁극적으로 그 자체를 질서와 영구적인 면에서라기보다는 반-구조와 변화를 상징하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 에세이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구약 내러티브는 그것이 (고립된 단편과는 반대 개념으로) 얼마간 연속적이며 연대기적인 개요를 따르는 이야기를 말해준다는 측면에서 “역사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예를 들면, 출애굽) 초점은 그 문체에 있어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이 신적이거나 초자연적인 활동을 기술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한 그러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으로 통합되게 되었고, 결국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별한 민족이 경험했던 것이었다고 일컬음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모든 경험이 가지고 있는 상대성이라는 점에서는 취약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역사의 서광이 비취기 전에는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것의 영향력은 결정적이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인 시간 안에 그 자리를 잡는다. 랭던 길키Langdon Gilkey의 말에 따르면, “제시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세계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날마다 변화하는 순간에 종속하는 것이며, 우리의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사물들 사이에 있는 새로운 관계들에 종속하는 것이며, 우리들 주위에 있는 것들의 새롭고도 놀라운 조합에 종속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절대로 완전하게 혹은 명확하게 알아낼 수 없는 “숨어있는 하나님”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의 요지는, 구약에서는 어떠한 신화나 고착된 구조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구조라도 그것이 역사적인 변화라는 맥락에서 보면 상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슈네이다우가 쓰기를:


히브리 역사에서 신화가 언제 발전했든지 간에, 그것은 주변 문화에서 나타나는 신화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문화에서 나타나는 신화보다는 내재적으로 더 변하기 쉬운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반발하려는 경향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 . . 각각의 신화적인 형식은 그것에 대한 비평가-즉, 예언자들-의 초래를 이르거나 혹은 늦거나 간에 야기하였다. 율법과 같은 그러한 제도조차도, 즉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만들고 또한 신성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신화로 대체시키려는 시도임에 분명한 그런 율법과 같은 제도도, 결국엔 비신화화를 면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이 율법의 거룩함이 부수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정을 내렸을 때, 그의 저작은 오랜 과정을 거친, 사실상 문화를 의심하는 전통이었던 문화적 전통 안에서 생겨난 하나의 절정인 셈이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의 보증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예언자들은 그러한 신화를 정면으로 배격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을 광야에서부터 이끌어내었던 하나님은 그곳으로 다시 되돌릴 수도 있었다. 〚167〛다윗과의 계약은 다윗 계열에 대한 영원한 안전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은 바벨론 포로기의 빛 안에서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었다. 만약 계시가 역사적인 경험 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특정한 계시는 어디에도 없다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심화된 경험에 의해서 인정이 되거나 혹은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화한 문체”가 가지는 의미는 단지 이러한 상대화된 효과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의 예측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 야웨의 초월적 권능의 계시로써 경축되고 있다. 죽이고 살리는 분은 야웨이며, 가난하게 하고 부유하게 만드는 이도 야웨이다. 그는 점치는 자를 미치게 하고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친다. 특별히 출애굽은 변화의 가능성이란 면에서 강력한 상징으로써 기능한다. 제2이사야가 그것을 형식화한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만든 주가 말하노라. . .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 43:16-18) 예언자에게 있어서 출애굽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었다. 기정 사실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야웨가 어느 시간에라도 “새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는 하나의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출애굽은 오경 내러티브 안에서 역사적으로 차례차례 발생하는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절대적인 기원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출애굽 전에 히브리인들이 애굽 당에서 노예로 살게 되었고, 그들의 구원이 예기치 않는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며 결코 그들이 어찌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는 두 가지 면에서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첫째, 징벌에 대한 개념으로, 이는 예언자들이 종종 환기시켜 주었던 것인데, 바로 그들에게 독립을 주었던 하나님이 그것을 돌이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만약 그들이 이전에 노예였다고 한다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될 수 있었다. 둘째, 소망의 기초에 대한 것으로, 어느 상황에서건,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가에 상관없이, 그 상황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은 인간 피조물을 역전시킬 수 있으며, 이것은 즉각적으로 있을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168〛근동신화와 성서 역사 사이의 잘 알려진 대조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형식에서 볼 때,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성서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은, 고대신화와 같이, 인간의 상황을 독특한 것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이고 반복 가능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가 “역사 같은” 형식으로 전달되고 연대기적인 순서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지적하고 있는 진실이란, 무시간적이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진실임에 틀림없다. 즉, 즉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의 우발성과 인간의 소망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결론

      구약의 내러티브는 사실이라고 보증된 집대성을 제공해주는 차원에서는 결코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의 “역사 같은” 성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 경험의 시간적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신적인 계시가 시간적인 면에서는 전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 공유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야웨가 숨어 있는 하나님이며 또한 그 어떤 계시도 절대적이거나 최종적일 수 없다는 인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의 존재를, 즉각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시간의 변화에 좌우될 수 있으며, 또한 희망적이라는 견해를 나타내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그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황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갖는 신학적 의미는 다양하며, 이는 이 에세이의 영역을 초월한다. 우리는 단지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주목함으로써 글을 맺을 수 있겠다. 첫째, 성서신학의 옛 방식은 구속사에 기원했던 것으로, 이것은 지혜문학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지혜문학이 역사적이며 예언적인 문학에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유형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역사, 선택 혹은 계약이라는 분명한 개념도 없고, 발전도 없으며, 교의 같은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격언적인 지혜는 어느 누구도 내일을 자랑할 수 없으며,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시기가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의 시간적인 변화 용이성 안에서, 경험을 하나의 표준적인 방침으로 세워놓는 일은 구약의 지혜와 “역사적인” 책들 사이에 확대된 공통적인 기초를 놓아준다 하겠다. 시간적 경험의 그러한 방침이 고대근동의 국제적인 지혜의 특징이었다는 사실은 구약을 “역사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그 차이를 어떻게든지 확대해석하려는 견해에 대하여 강력한 주의를 주는 것이다.

      〚169〛둘째, 성서를 문학으로 접근하는 비교적 최근의 입장은 문학과 역사 비평적 연구 사이에 일종의 안티테제를 만들어놓고 말았다. 역사적-비평적 연구가 실제 역사를 확립하려는 비교적 협소한 면에 관련하고 있는 한, 그러한 안티테제는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비평적 연구의 주요한 효과가 역사적인 결과물을 정확하게 입증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구약이 전체적으로 그리고 모든 면에서 역사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정경조차도 “역사적으로 다양한 상황에 나타났던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문학 비평가인 슈네이다우가 역사 비평이 “견고한 성서적 전제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경험들이 갖는 역사적인 성격을 평가하는 일은, 그것이 계시를 포함해서도,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구약이 근본적으로 “역사화한 문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