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세미나(2008.10.14)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2학기)
Joel Marcus, The Way of the Lord (1992), 1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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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Joel Marcus 박사는 Duke 대학교 신학과에서 ‘신약과 기독교 기원’ 교수로, 복음서와 함께 1세기 유대교 상황에서의 초대 기독교 맥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Anchor Bible Commentary 시리즈 중에 마가복음을 담당하고 있는데, 첫 권인 Mark 1-8: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는 2000년에 출간되었고, 두 번째 권은 2009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저자는 이 책의 부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마가복음에서 사용된 구약본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마가는 구약본문을 ‘마가공동체를 위한 기독론적 주해’로써 인용했다고 주장한다. 즉, 저자는 ‘편집비평’을 통해서 구약본문 해석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며, 동시에 ‘내러티브’에도 눈을 돌리면서 마가복음서 내에서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p. 8). 그러므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일관된 방식으로 인용구절을 각각 분석하고 있다: ① 인용된 본문을 제시한다. ② 편집의 성격을 묻는다: 마가의 것인가(마가 특유의 어휘를 분석한다)/마가이전의 자료인가(요한과 관련)? ③ 마가의 것이라고 한다면, 기존 유대인 전승과 비교하면서 구약해석의 궤적을 이해한다(대체로 ‘종말론적’ 해석이다). ④ 그렇다면, 구약 자체의 거대 맥락에서 마가는 구약을 온전히 이해했는지를 평가한다(마가는 구약에 정통한 사람으로, 이것은 인용본문 전후관계의 내러티브에서도 드러난다). ⑤ 마가의 구약 인용에 있어서의 특이점을 조사한다. 이는 마가공동체를 드러내주며, 이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기독론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7장(다윗의 자손에 대한 인용; 막 12:35-37)과 8장(수난 내러티브; 슥 9-14; 단 7; 시 22; 제2이사야)의 인용과 결론을 다루고, 평가와 질문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7장: 다윗의 자손인가? 다윗의 주인가? (막 12:35-37 인용의 문제)
막 12:35-37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계속된 논쟁의 결정타라고 할 수 있는데(11:27-12:40), 이 구절은 “가르치실새”(35절)와 “많은 사람”(37절)이라는 마가만의 어휘가 들어있는 편집구절로, 전체적으로는 교차대구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핵심은 인용구절인 시 8:7과 110:1로, 이러한 본문의 융합은 마가의 특별한 기술이기도 하다).
당시에 시 110편은 유행했던 바대로 종말론적으로 해석되었다. 예를 들면, 쿰란의 11QMelch 문서는 멜기세덱이 종말의 전투에서 하나님 우편에 있으며,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시편은 신적인 통치를 말하고 있는데, 마가 역시 앞선 구절(28-34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논하면서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가는 “유대인들과 기독교 해석자들처럼, 시편을 우주적인 전쟁과 같은 종말론적인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서 보았다”(p.137).
문제는 다윗과의 관련성이다. 막 10-12장에는 세 번의 ‘다윗의 자손’이 등장한다(10:47-48; 11:9-10; 12:35-37). 갈릴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표현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마가의 의도적인 편집이었음을 나타낸다(특정한 장소[예루살렘]를 언급한 것은 마가의 기술이다). 더군다나 세 개의 구절이 생각의 발전을 보여주기 때문에(개인->무리->예수 자신), 이는 초대교회의 정립되지 못한 기독론의 반영일 수도 있다. 결국 마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시도하는 셈이 된다. 사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다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구약 전통에 비추어볼 때(막 14:61-62[단 7:13; 시 110:1])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아들’과 ‘다윗의 자손’ 그리고 ‘인자’는 동일하게 “왕적 메시야”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예수 부활 이후에 다윗을 언급하는 것이 마가에게 있어서 적합하지 않은 것이 된 셈이다. 따라서 결국 단 7장의 ‘인자’ 표현을 선택하게 된다(막 14:61-62; p.144).
예수는 하나님의 신적 대리인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통상적인 ‘다윗의 자손’보다는 높은 위치에 놓여진다. 이렇게 마가는 고등기독론을 표현하면서, 28-34절의 하나님의 왕적 권세와 함께, 35-37절의 하나님 오른편에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유대전쟁이라는 분위기 가운데에서, 서민들이 느꼈을 모호한 기대감(요세푸스가 전하는 므나헴과 시몬의 반란운동)에 대한 신학적 반응이 될 수 있었다(이러한 10-12장의 분위기는 13장과 이어지는 셈이 된다).
8장: 수난 내러티브(막 14-16)
여기에서는 4개의 구약본문이 인용되고 있다: 슥 9-14; 단 7; 시 22편; 사 53이다. 우선 스가랴를 인용한 것은, 막 14:24-28에 매 구절 등장하는데(‘언약의 피’[24//9:11], ‘그날에/하나님의 나라’[25//14:4,9], ‘감람산’[26//14:4], ‘목자를 치고 양은 흩어지다’[27//13:7], ‘부활과 흩어진 양의 회복’[28//14:4; 13:8-9]), 전통적으로 스가랴의 이 구절들은 메시야의 등장과 관련 있는바 기독론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편 스가랴서는 당시의 분파집단(쿰란)에게 적합한 해석본문이었는데, 마가에게도 예수가 당한 수난의 모든 부분이 스가랴 예언의 빛 아래에서 야웨 통치의 ‘날’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분파집단은 유대인 반란 사건을 계기로 스가랴 예언과 같이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성전을 세우는 것이 메시야의 임무였다고 한다면, 마가는 오히려 반대로 부활 이후의 선교적인 차원으로 나간다고 하겠다(13:10). 그러므로 마가는 스가랴를 통해서 예수가 “이끄신다”라는 맥락을 강조하려고 했다.
두 번째 인용인 단 7:13은 막 14:62에 나온다. 전통적으로 다니엘 7장은 하나님의 거부세력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는데, 중요한 점이라면 “지극히 높은 자의 성도(공동체)”가 심판자의 모습으로 신원되고 있다는 점이다(7:22). 그러므로 본문은 전통적으로 역전의 주제를 보여주는데, 이는 단 7:13을 이어받은 에녹 1서 45:3에서도 나타나는 주제이며, 특별히 ‘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지금 예수는 심판을 받고 있지만, 단/에녹1과 같이 역전시킬 것을 암시하게 된다. 이는 마가공동체가 핍박받고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즉, 예루살렘 봉기라는 위기의 시기에 열심당의 문자적 행동강령 본문이 된 다니엘서가 마가공동체에게 있어서는 신적인 신원을 기다리라는 공동체의 결집력 강화 구절이 된 셈이다.
세 번째 인용 구절은 시편의 ‘의인의 고통’이라는 표현으로, 사실 시편에는 상당히 많은 표현들이 있어서 일일이 나열하기는 곤란하다(p.174-5). 한편, 이 부분은 마가와 마가이전의 자료를 구분해야 하는데, 요한과 비교해서 기존의 보편적인 전승인 의인의 고난이라는 주제가 마가에게서 두드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었는데, 즉 현재의 의로움으로 인한 고난은 종말에 복권되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쿰란). 이러한 점은 마가에서도 동일하며, 특별히 막 15와 시 22편은 상당 부분에서 유사점을 보여준다(고난[20-37//1-21], 이방인의 숭배[39//27], 하나님의 나라[43//28], 부활[16:6//29], 하나님의 백성의 선포[16:7//30-31]). 결국 이 구절은 부활을 믿은 마가공동체가 하나님의 왕국 건설이라는 종말론적인 말씀(시편)을 받고, 예수의 “그 길을 따르는” 순교자 정신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마지막 인용은 제2이사야의 ‘종의 노래’로(50:4-9; 52:13-53:12), 이는 마가이전의 전승을 이어받아 마가가 편집한 본문이다(14:10-11; 15:10). 전통적으로 종의 노래는 집단적인 개념으로 종말론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었다(솔로몬의 지혜서; 쿰란). 그러나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종의 노래가 메시야와는 연결되지 않았다(p. 193). 그러므로 마가의 고난받는 종이라는 소재를 이용한 것은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공동체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한다(그들도 ‘넘겨졌다’). 시편에서와 같이 이사야에서도 고통 속에서 종말론적 승리의 약속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사야의 특징이라면 ‘고난의 목적이 구원적인 측면’에 있다는 점이다(이는 역시 공동체의 ‘남은 고난’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골 1:24]). “그들은 예수의 사역을 죽음의 차원에서까지 재연했던 것이다(막 8:34-35)”(p.195).
이렇게 볼 때, 수난 내러티브에서 구약인용은, 종말론적이었고, 집단의 차원이었으며, 고난과 변호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유대인 반란이 공동체의 삶의 자리였는데(p.197), 계속된 유대인 저항세력이 ‘왕’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려야 함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또한 묵시론적 전쟁의 새로운 이해로 변화되었는데, 자민족중심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포용성으로 탈바꿈되었다. 이는 부활한 예수로 인해서 구약의 ‘열방의 제사장’이라는 핵심메시지의 올바른 이해라고 하겠다(창 12:1-3).
2. 요약과 평가
1) 저자는 편집비평을 중심으로 마가의 구약인용이 결국엔 마가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가는 문장결합 기술(랍비들도 그러했다)과 적합한 구절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자신만의 본문을 정할 수 있었다. 종말론적 해석이라는 면에서는 당시의 분파들의 해석과 공통점을 보이지만, 차이도 있었다: ① 인용한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요점을 집었다. ②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하나님의 승리를 주장했다. 이는 공동체의 태도의 변화를 잘 보여주며(이방인 선교), 반대로 이를 이유로 유대인에게 핍박받음을 뜻한다. 마가의 기독론은 왕의 길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핵심에 위치한다(1:11; 9:7; 15:39).
2) 저자는 편집비평이 무엇인가를 구약과 관련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비교해서 마가복음의 편집비평으로 구약의 본문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저자는 마가가 무작정 구약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해석적 궤적을 따르고 있다고 했으며, 중요한 점은 부활 체험 이후의 ‘십자가의 참된 승리자’라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읽었다는 점에 독특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으며, 오늘날의 설교가들이 맥락을 초월해서 아무 구절이나 인용하는 태도에 좋은 경고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p.199), 마가의 인용은 예수 자체를 설명하기 보다는, 유대인의 구약사용(또는 오용; 편협한 민족주의적 이해)에 대한 ‘교정’으로 들리며, 상당 부분 무게중심이 마가공동체에 편중되고 있는바 ‘역사적 예수의 발화’(ipsissima verba)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미도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