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예레미야설교-07] 법정에선 삼대

진실과열정 2006. 5. 15. 04:17
 

예레미야서 강해(7)


본문: 렘 2:4-13

제목: 법정에선 삼대(三代)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개역개정)



말씀에 들어가며

     지난 시간에 우리는 렘 2:1-3을 읽으면서 “기억하시는 여호와”를 발견했습니다(2절). 여기에서 저는 특별히,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를 강조했었습니다(창 8:1; 출 2:24). 즉, “하나님의 기억”이란 성서적 증언은 ‘무엇인가를 잊어버렸다가 생각해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 있는 자신의 백성을 이제 새롭게 구원할 것’이라는 창조적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자 예레미야가 처음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선포했던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자녀들아! 비록 우리들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다. 이제 곧 여호와는 우리에게 새롭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창조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의 핵심에는 여호와의 구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렘 31:31-34). 이 내용은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수용하시고(요 13장), 신약의 교회들이 계속적으로 인용했던(히 8:8-13) ‘새언약’이라는 매우 놀라운 신학적 뼈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예레미야서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여호와의 사랑이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에게 나타났는지를, 그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이제 우리가 읽은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놀랍게도 우리가 읽은 4-13절까지의 말씀은 밝고 화창한 모습이 아니라, 천둥 번개가 몰려오기 전 먹구름이 가득 낀 검은 하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작은 평온한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기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실 ‘시’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시적인 표현으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창 32:28). 야곱과 이스라엘의 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족속들’을 부르셨다는 부분입니다. ‘족속’이라는 말은 요즘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어서, 새번역 성서는 ‘가족’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히, 미쉬파하)’은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명절이 되면 온가족이 다 모이는 그런 대가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족속’이라는 말 속에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상들과 후손들까지도 모두 포함하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5절의 ‘너희 조상들’이라는 단어, 7절의 ‘너희를’이라는 단어, 그리고 9절의 ‘너희 자손들’이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보아야 함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삼대를 앞에 두고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대를 앞에 두고 하실 중요한 말씀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어둡고 험악한 분위기를 벌써 느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아마 2장 13절과 같은 구절에 밑줄이 있을 것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사실 이 한 구절이 모든 말씀을 요약해주는 핵심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씀 자체가 두 가지 악이라고 요약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첫째는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엉터리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합니다. 한눈에 보면 그게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생수의 근원을 버리면 자연히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이 두 가지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렸다’라는 첫 번째 죄목이 오늘의 본문이라면, ‘스스로 엉터리 웅덩이를 팠다’라는 두 번째 죄목은 다음에 이어지는 14-19절에 나타나있습니다. 오늘은 ‘생수의 근원되는 여호와를 버렸다’라는 부분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엄청난 구원의 손길로 자유케 된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 한 장이나 나침반도 없는 무지한 자손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동행하셨던 여호와를 기억합니다. 풀 한포기 물 한방울 없는 광야에서 여호와를 찾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로 언약의 백성들을 먹이시고 입히셨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어느 한 부분에서도 여호와의 불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여호와는 절대적으로 옳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경험했던 조상들은 점차로 여호와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더 이상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은 답답합니다(5-6절):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땅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시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들을 잘못된 ‘땅’에서 끌어내셔서 험악한 ‘땅’을 지나 가나안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상들만 잘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말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선물로 그리고 기업으로 주신 최고의 땅이 최악의 땅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7-8절):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조상들이 죄악을 저지르고 아들도 죄악을 저지르니, 그 후손의 결과는 뻔합니다. 조상들과 아들들의 죄가 당연히 심판으로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정확하게 남유다)이라는 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70년간 수백 킬로 떨어진 이방인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대략 이 70년은 두세대 정도를 뜻하지요. 이 말이 바로 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서 ‘싸운다(히, 리브)’라는 말은 치고박고 하는 몸싸움이 아닙니다. 이 말은 법정에서 쓰는 용어로 옳고 그름에 따라서 형을 언도할 때 사용하는 조금 전문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서는 다음과 같이 잘 번역을 했습니다. 주의 깊게 잘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다시 법대로 처리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 자손의 자손들을 법대로 처리하겠다.


잘 들어 보시면, ‘싸우다’라는 말을 원어의 의미에 가깝게 ‘법대로 처리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주의 깊게 들으신 분은 ‘너희 자손들’이 아니라 ‘너희 자손의 자손들’이라고 한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원래 히브리 성서는 ‘너희 자손의 자손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년 동안 종살이를 한다고요? 70년, 즉 대략 두세대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보면 여호와는 조상들과 아비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 따라서 후손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은 전형적으로 법정에서 재판관이 재판하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의 주된 사역은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그런 신비로운 것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해서 바르게 돌이키는 여호와의 엄중한 사자의 위치였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법정의 모습을 그대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증인들이 나올 차례입니다. 동쪽에서 먼 나라와 서쪽에서 먼 나라가 증인으로 나옵니다. 이들은 여호와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거짓 신을 섬기는 그런 나라지만, 자기들이 섬겼던 신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바꾸지는 않았던 나름대로 지조있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기 나라의 신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배심원으로 있던 하늘(사 1:2)은 놀라 자빠집니다(10-12절):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원래는 ‘나의 영광’ 즉 여호와의 영광인데 바알과 동등시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기 때문에, 서기관들이 ‘그’로 바꿈)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하늘이라는 배심원을 향해서 깊이 한탄을 내 뱉으신 여호와의 근심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메시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첫 번째 죄악인 ‘생수의 근원되는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라는 개념이 바로 여기에서 본래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요 8:38). ‘여호와를 버렸다’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실제적인 삶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바알’이라는 잡신을 섬겼던 것입니다(8절). 5절의 ‘헛된 것’과 7절의 ‘역겨운 것’ 그리고 11절의 ‘무익한 것’이 바로 이 바알을 빗대어서 표현한 것입니다. ‘바알’은 풍년을 상징합니다. ‘바알’은 넘치는 밥상, 넉넉한 창고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조상들과 아들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진짜 ‘생수의 근원’이었던 여호와를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지금까지 저는 우리가 읽은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이를 전문적으로 주석[What?]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 말씀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켜야 할 차례입니다(이를 전문적으로 해석[So What?]이라고 합니다). 사실 새벽예배에 나오실 정도의 분들이라면, 본문처럼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과 아주 거리가 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칭찬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언제나 한결같지 못했던 우리의 신앙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광야 같은 우리 인생길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동행하셨던 분임을 깨닫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잠깐 힘들다고 어렵다고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밟고 삶의 터전으로 살기에 언제나 좋은 ‘땅’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남의 터전이 더 좋다고 하면서 불평하지는 않았는지요. 어쩌면 순간의 부유함을 위해서 정말로 잠깐이지 여호와 하나님을 뒤로 숨겨놓고 돈의 힘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는지요. 바로 이런 생각이나 행동들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반성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호와를 버린 것’에 대해서 보다 깊이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바로 6절과 8절에서 똑같이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이 말은 ‘여호와가 어디있냐? 없네!’라는 빈정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는’ 신뢰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는 말입니다(너희가 ...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저는 이 말을 ‘매시간 전심으로 여호와의 뜻을 찾는 신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매시간 매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겸손히 뜻을 묻는 삶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매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버린 것’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린 것’은 불교를 믿거나 우상을 섬기는 외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뜻을 찾지 않는 교만’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벽의 기도를 통해서 하루를 시작하는 여러분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아무쪼록 새벽의 그 겸손한 신뢰가 점심에도 이어가고 저녁까지 끊이지 않는 모습으로 계속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