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ous Attempts at a Synthesis of Textual and Artifactual Data on Early Israel [W. Dever]
제8장: 초기 이스라엘에 대한 본문자료와 유물자료를 종합하려던 기존의 시도들
Ch. 8 “Previous Attempts at a Synthesis of Textual and Artifactual Data on Early Israel”
in Who Were the Early Israelite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129-51
by. William G. Dever
초기이스라엘 세미나(담당교수: 우택주)
2006년 4월 17일, 발표자: 양지웅
1. 번역
[129]내가 지금까지 본문상으로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자세하게 조사했던 자료들에 대하여 나 자신의 종합을 내리기 전에, 약간의 배경 이해를 위해서 기존의 관점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한물간 학계의 의견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오래된 이스라엘의 성서학자
카우프만Kaufmann
예헤츠켈 카우프만은 현대 이스라엘 계열의 성서학계에서 원조격에 해당한다. 8권으로 된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이스라엘 종교사History of Israelite Religion」는 1937년에 첫 선을 보였는데, 아쉽게도 히브리어로만 출판되었다(단권으로 된 영어판은 1960년에 나왔다). 카우프만은 전통적인 정통 유대교인으로, “이스라엘 종교는 이스라엘 민족이 창조되면서 그 기원이 시작하며, 그것은 다른 이교도 세계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독특한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논지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히브리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신적 부르심과 유일무이한 기원이란 내용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그 시작부터 기록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할 일이란 단지 성서를 부연하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언급해야할 또 다른 이스라엘 학자로는 스무엘 예빈으로, 그는 1971년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The Israelite Conquest of Canaan」이라는 기발한 소논문을 출판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단지 빛바랜 골동품일 뿐이다.
[129/130]“독일 학파”
독일 학계의 위력은 올브라이트와 마자르 그리고 그 동시대 학자들의 그것에 버금간다.
알트Alt
우리는 알브레이트 알트가 1920년대에 창안했던 평화적 정착 모델 혹은 내부적 유입 모델에 대해서 이미 논의한 바 있다.
노트Noth
알트의 수제자인 마틴 노트는, 그 역시 출중한 사람으로, 1930년대에 사사 시대 동안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델을 발전시켰는데, 지금까지도 그의 주장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트는 12부족 연맹에 대한 성서 기사를 암픽티오니라고 알려진 후대의 그리스 부족 연맹과 관련하여 해석했다. 즉, 이들은 공동선을 위해서 느슨하게 묶인 “성스러운 연합체”로, 중앙 성소에서 정기적인 언약-갱신 의식을 집행하면서 유지해갔다는 주장이다. 노트의 암픽티오니 이론은 성서의 부족 전승과 잘 맞아떨어질 뿐만 아니라, 실로와 세겜과 같은 고대의 제의 중심지를 언급하고 있는 성서의 기사와도 합치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의 암픽티오니 이론은) 1960년대에 매우 영향력있는 주장으로 지속되어왔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학자들은 그 주장을 단념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근거가 되는 성서 본문들을 해석하는데 너무나 상이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그러한 암픽티오니를 뒷받침해줄 고고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바이펠트Weippert
독일의 젊은 성서학자인 맨프레드 바이펠트는 1971년에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 부족들의 정착The Settlement of the Israelite Tribes in Palestine」을 출판했다. 바이펠트는 전형적으로 독일계열을 따르면서, 1970년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고고학적인 근거들을 조사했다. 그러나 그는 알트와 노트의 이론에 대해서 근본적인 수정를 하게 된다. 그는 “후대의 이스라엘인의 조상은 중기와 후기 청동기 시대의 완전한 유목민”이라고 말하면서, 오늘날의 베두윈과 유사점을 찾는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멘덴홀과 갓월드의 견해와 비슷하다. 그러나 바이펠트는 후자들이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아피루=“히브리” 등식을 거세게 부정한다. 오히려 그는 목축유목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미국 학파”를 거부하는데 특별히 독창적인 인물은 못된 듯싶다:
알트 ‘학파’의 ‘주관적’인 방법론은 내게는 ‘더욱 객관적’인 것 같으며, 그를 비평했던 자들의 자료들보다 더 합당한 것 같다... 역시 올브라이트와 그의 추종자들 모두는 자기들의 자료를 실제보다 너무 신뢰했던 셈이다...(1971:145)
“미국 학파”: 성서주의자들
우리는 4장에서 정복모델을 이끌었던 올브라이트, 브라이트 그리고 라이트라는 유명한 삼총사에서부터, 그들의 비평가였던 멘덴홀과 갓월드도 다룬바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미국 성서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할펀Halpern
바룩 할펀은 하버드에서 올브라이트의 영향력 아래 훈련받은 젊은 학자로서, 1983년에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출현The Emergence of Israel in Canaan」을 출판했다. 할펀은 그의 스승의 정복 모델을 분명하게 거부하는데, 멘덴홀과 갓월드의 노선도 따르지 않는다. 빛나는 아이디어와 급진개혁파적인 관점을 가진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할펀은 그 자신의 결론에서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성서 자료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그는 “이것을 설명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히브리인 혹은 이스라엘인의 침략에 이어 침투했던 전승들을 찾아내는 것이다”(1983:90)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침투까지 이어졌던 원동력은 다음과 같다:
13세기에서 12세기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에는 민족적 자의식과 단결력이 동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드보라의 노래(삿 5:13-18)가 가리키는 12세기 이후의 일이 아니다. 그 때에는 이미 완전한 부족 연합이 존재했었다(1983:91).
[131/132]보다 최근인 1991년에, 스미스 소니언 협회1) 세미나에서 (나 역시 초기 이스라엘에 관련된 연구논문을 제출한 바 있다), 할펀은 기원에 관한 주제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출애굽 이야기가, 호머의 「오디세이」처럼, “상상력과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적절히 혼합된 것일 뿐”이라고 논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억했다는 말인가? 할펀은, 이집트의 억압과 결과적인 해방에 대한 성서 이야기의 배경엔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트랜스요르단을 통과하는 여정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편다. 그러나 그 방향은 바꾸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방랑자들은 이스라엘의 친사촌관계에 있는 서부 셈족의 아람인과 관련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란 단지 그들이 그 당시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는 점뿐이다. 그러므로 초기 이스라엘은 출애굽 전승-아마도 어떤 기간에는 목축생활을 했을 것이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즉, 광활한 가나안의 다른 곳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섞였던 것이다. 이들 두 그룹이 어떻게 접촉했고 공통의 생활 방식을 만들어 갔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철기 I 시대의 가나안 고지대에서 나타난 문화유물에 따르면, “이스라엘인은 평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그들은 기원전 13세기와 12세기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가축으로 전환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1992:106).” 할펀은 “출애굽 이야기의 상당수는 형식론적typologically으로는 사실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는데, 달리 말하자면,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할펀의 시나리오가 도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체이니Chaney
1983년, 할펀의 책이 소개된 같은 해에, 일군의 성서학자들이 “고대 성서시대의 사회상Social World of Biblical Antiquity” 시리즈-이것은 제목에서부터 멘덴홀과 갓월드가 주창한 사회학적 학파에 의해서 점차로 두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라는 주제로 소논문을 묶어 한권의 책을 출간했다. 정말로, 이들 두 학자는 이 책에 소논문을 실었으며(멘덴홀은 갓월드를 실랄하게 공격한다), 그 제목은 「전환기의 팔레스틴: 고대 이스라엘의 출현Palestine in Transition: The Emergence of Ancient Israel」이다. 그 중에 가장 혁신적인 소논문은 마빈 체이니가 쓴 것으로, “고대 팔레스틴 소작농의 해방운동”에 관한 것이다.
체이니는 오래된 정복 모델과 평화 정착 모델 모두를 거절하는데, 특별히 후자에 대한 바이펠트의 견해를 비평한다. 오히려 그는 멘덴홀과 갓월드가 제안한 사회 변혁이라는 개념에 매달리는데, 그러나 그들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여겼던 야웨 종교에 대한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체이니에게 있어서, (고대 팔레스틴 소작농의 변혁적인-역주) 행동을 이끌어냈던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면, [132/133] 즉 발붙일 곳 없는 소작농이 가나안 사회의 토지 억압 정책을 철폐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최초의 “이스라엘인”을 기원전 14세기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다루기 힘든 “아피루” 전승에서 찾은 것이다(이는 멘덴홀, 갓월드 그리고 다른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체이니는 “반란” 모델에다가 새로운 개념인 “개척/변방frontier”(이는 보다 나중에 해당된다)과 “토지agrarian”라는 것을 첨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소작농과 변방 주민에 의한 반란 모델이 아직은 논의 중에 있는 가설이라 하더라도, 그 모델은 아마르나 문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그리고 성서전승에서 나타난 자료와 부합되고 또한 잘 설명되어지며, 농경사회에 관한 사회과학자들의 비교연구에서 규정된 변수들과도 잘 맞아떨어짐을 발견할 수 있다(1983:72).
그 당시에 체이니의 논문은 상당히 혁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정말이지 최고의 견해였다.
쿠트와 휘틀렘Coote and Whitelam
정확히 4년 후에, 같은 시리즈(“고대 성서시대의 사회상”-역주) 안에서 쓰인 것으로, 로버트 B. 쿠트와 키스 W. 휘틀렘은, 이 둘은 모두 고고학적 경험이 없는 성서학자들로, 좀 더 혁신적인 작품을 출판했으니, 그 제목은 「역사적 관점에서 본 초기 이스라엘의 출현The Emergence of Early Israel in Historical Perspective」이었다. 이 책에서 충격적인 것은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 I 시대로의 변화를 고대 팔레스틴의 보다 긴 정착의 역사 안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쿠트와 휘틀렘은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페르난드 브로델과 소위 아날Annales 학파2)라고 알려진 학자들의 견해에서 논지의 시작점을 잡는다. 그들은 장기적-주기의 역사(장기지속la longue duree)라는 관점을 선택하는데, 이는 곧 역사란 우연적인 사건들이나 영웅들의 행위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이다3); 이것들은 단지 “파도의 거품”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수천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자연 조건, 즉 “심해의 융기deeper swells”에 문화적으로 적응했던 결과들이 바로 역사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원리를 기원전 3천년대 중반에서부터 팔레스틴의 청동기 시대에 적용한 것이며, 더 나아가, 철기 시대의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쿠트와 휘틀렘은 자신들이 이해한 바대로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주로 사용하면서, 성서 본문에 대해서는 단지 근거수단으로만 사용했다. 그들은 초기 이스라엘의 특성이 고지대와 초원지대steppe에 있다고 보았는데, [133/134]이는 기원전 1200년 즈음 청동기 시기 종반에 이르러 가나안 도시 문화가 쇠퇴하고 교역도 내리막길을 걷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가나안 내부에서부터 기원한 것이었다. 신뢰할만한 것이 별로 없는 수준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점과, 이들 저자들이 고고학 분야에서 전혀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역주) 이들의 작품은 신선하며 놀라울 정도로 전문가 뺨친다. (그들은 나의 견해를 비중있게 실었고, 또 잘 봐주었다.) 책의 결론에서 쿠트와 휘틀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조사하면서, 특별히 그 출현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 기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새로운 고고학적 업적들의 결과에 의해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받게 되는데, 특별히 초기 단계에서의 지역 측량이 그러하다. . . .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복잡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최근의 고고학 탐사와 같이, 역사 연구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협동 조직을 필요로 한다. 대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국면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1987:177)
이러한 결론은 정당한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저자들이 기대했던 대화는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쿠트Coote
1990년에, 쿠트는 휘틀렘과 공동으로 출간했던 것을 좀 더 확장해서, 「초기 이스라엘: 새로운 지평Early Israel: A New Horizon」을 내놓았다. 이 책은 비록 강경하고 간결하며 그리고 빼어나게 명쾌한 문장으로 되어있기는 하지만, 이후의 견해들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는 못되는 것 같다. 그 책은 이스라엘 사람이 조사한 첫 번째 완전한 보고서를 활용할 수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에는 핑켈스타인의 기념비적인 「이스라엘 정착의 고고학Archaeology of the Israelite Settlement」(1998)이 있다. 쿠트의 대범한 가설은 초기 이스라엘이 처음엔 부족 연맹으로, 아마도 준(準)군사 연합 정도의 수준일 것으로, 이집트가 제국의 지배력을 점차 상실해감에 따라 그 지역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비록 그들이 잠시 동안 이집트 권위 아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고지대로 이동하게 되었고 결국 촌락을 세운 농부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쿠트의 근본적인 논쟁점인, 초기 이스라엘인은 애초부터 가나안인이었다라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우리는 아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대 정착인들의 기원에 관하여, 나는 더 이상 쿠트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쿠트는 고고학적인 증거에 대해서 자신의 이해를 기초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134/135]증거는 무엇을 기대해야할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저지대 변방에서부터 고지대 변방으로 생계를 위한 농업은 이동하게 된다. 저지대에서의 건지 농업에 의존했던 사람들이 고지대로 이동했으며, 거기에서 같은 농업을 계속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촌락 군집은 저지대와 문화적 연속성을 보이는데, 고지대 상황에 적응해야만 했던 지역들은 예외이다. (1990:127)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쿠트는 일군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주창될 “공생symbiosis” 모델을 이미 예견했던 셈이다.
알스트룀Ahlstrom
스웨덴에서 학문을 시작했지만, 미국 성서학풍을 이어받은 괴스타 W. 알스트룀은, 1986년에 어느 정도 대중적인 종합을 시도하면서, 이 책의 제목과 유사한 「이스라엘인들은 누구인가?Who Were the Israelites?」를 출판했다. 알스트룀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괴짜로 인식되었는데, 그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기본 논지는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용어가 본래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지 않았고, 그 보다는 지리적인 지역,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가나안 고지대를 의미한다는데 있다. 그는 이러한 개념을 고고학적인 자료(그 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에서 도출하지 못했고, 기원전 약 1210년경의 것인 파라오 메르넵타의 유명한 “승전 비문”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에서 이끌어 냈다. 나중에, 이 고지대에서 거주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알스트룀은 가나안 저지대 주민들 가운데에서 “고지대의 개척자들”의 기원을 찾았던 것이며, 바로 이들은 청동기 시대 말기의 대격동으로 인해 쫓겨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어떤 “아피루와 같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왕조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그 어떤 사람들에게라도 “이스라엘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를 거절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들”
지금까지 나는 특별히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제시되었던 몇 명의 성서학자들의 견해들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고대 이스라엘의 전역사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기도 했다. 지그프리드 헤르만의 간략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A History of Israel in Old Testament Times」(1973)4)는 알트와 노트의 견해를 뛰어넘지 못했는데, 이는 역시나 갓월드의 획기적인 연구가 소개되기 이전에 출판되었다. 더 나아가, [135/136] 헤르만은 독일 성서학계에서 기원한 진부한 견해를 계속 고집했는데, 즉 그는 고고학은 “말이 없다”라는 견해를 이어받아 “벙어리 고고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1973:36). (내 견해에 따르면, 고고학은 벙어리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역사가들이 귀머거리일 뿐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유럽인 가운데 이탈리아 학자인 J. 알베르토 소긴이 있는데, 그는 1985년에 「고대 이스라엘 역사: 시작에서 기원후 135년의 바 코흐바 반란까지A History of Israel from the Beginnings to the Bar Kochba Revolt, A.D. 135」를 출간했다. 소긴은 (나는 1960년대에 세겜에서 그와 함께 작업한 적이 있다) 고고학의 긍정적인 면을 보다 많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 역사는, 아무리 적합한 자료라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기원전 10세기의 것에서부터, 그러니까 성서적으로는 통일왕조 기간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의 저작은 기원(초기 이스라엘-역주)이라는 주제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오늘날 영어권 세계에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J. 멕스웰 밀러와 존 H. 헤이스가 공저한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1986)5)이다. 고고학 자료들을 해박하고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밀러가 상당 수준 현장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요단에 대한 그 자신의 탐사가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를 정리하면서, 밀러와 헤이스는 다양한 견해들을 요약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어떤 것을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자 한다.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비평적 역사서술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과 유다의 기원에 관한 자신있는 글을 쓰기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솔직히 불가능하다. 이 분야는 역사가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들은 대체로 추측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면 안되는 분야들 중에 하나이다. (1986:78)
(이 시점에서 나는 성서문학협회SBL 연례 회의를 회상하는데, 그 모임은 이 책을 출판을 축하하고 약간의 토론을 위한 자리였다. 그 때 나는 방 뒷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참석한 고고학자라곤 나 혼자 뿐이었다. 끓어오르는 불만을 삭히지 못한 채, 소위 배웠다는 성서학자들이 하나같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더 이상 기록할 수 없는 이유들을 나열하는 것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었다. 나는 일어섰고 나의 오랜 친구인 밀러를 향해서 크게 항변했다: “만약 당신네 성서학자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역사를 쓸 수 없거나 쓰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고고학자들이 그 일을 하겠소!”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고,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밀러는, 초기의 회의론적인 입장에서 돌이켜, 이스라엘인의 기원에 대한 주제로 회귀했는데, 1999년에 출간된 「아브라함부터 로마인의 성전 파괴까지의 고대 이스라엘Ancient Israel from Abraham to the Roman Destruction of the Temple」(허셜 섕크스 편집)6)이라는 훌륭한 대중적 안내서에서 조셉 켈러웨이가 맡았던 부분을 개정하는데 참여하게 된다. [136/137] 단지 9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초판은 1992년에 나왔다-역주), 개정판은 초판과 큰 차이점을 보였다(이는 학계가 정말로 발전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옛 자료들과 이론들을 훌륭하게 개괄한 이후, 밀러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 부족들과 연관된 자료들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데, 그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 “역사적인 기억들이 깊숙이 새겨져 있다”라고 말한다. 밀러의 말대로(켈러웨이의 초판을 참조하라),
어쨌든, 최초의 이스라엘은 아마도 부족들과 씨족들의 느슨하게 동맹에서부터 비롯되는데, 이들은 그 땅의 대다수의 주민들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출현emerged”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다양한 기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트랜스요르단에서부터 온 이주자들이었고, 이집트에서 온 사람들도 혹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은 철기 시대 초부터 가나안 땅에서 이미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인종적 도가니로부터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방식과 물질문명은 본질적으로 “가나안”의 것일 수밖에 없다. (1999:82)
이 부분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점차적으로 의견일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파한 독자가 있다면, 아주 잘 읽은 셈이다.
성서 수정주의자들
“초기 이스라엘의 성서적 역사들”이란 주제를 끝내기 전에, 우리는 비록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리고 그들은 논쟁적이다) 유럽의 성서학자들이 최근에 제안한 ‘무(無)-역사’라는 것을 다루어야만 하겠다. 그들은 종종 스스로를 수정주의자들revisionists이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최소주의자들minimalists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그들이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허무주의자들nihilists이라고 말하고 싶다-왜냐하면 초기의 역사이건 후기의 역사이건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작성하면서, 우리들이 역사라고 여길 그 어느 것도 전혀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근본적인 결론이라고 얻어낸 것이라고는 (혹은 그것은 편견이 아니던가?) 그 누구도, 최소한 성서의 기록들만을 가지고는, 더 이상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다라는 것뿐이었다.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회의적이었는데, 물론, 그 출발점은 현대적 성서비평 방법이 시작된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학자일지라도 성서 본문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최근에 출판한 여러 책들을 통해서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해왔었다(특별히 「성서의 기록자들은 무엇을 알았으며, 그들은 언제 그것을 알았을까?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and When Did They Know It?」, 2001).
[137/138]데이비스Davies
많은 사람들은 지금에서야 성서가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고 있지만, 사실 대소동은 셰필드 대학의 필립 R. 데이비스가 1992년에 내놓은 「“고대 이스라엘”을 찾아서In Search of “Ancient Israel”」에서 시작했다. 짧게 정리하자면, 데이비스는 자신이 분류한 세 개의 “이스라엘들”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1) “역사적” 이스라엘로, 철기 시대 팔레스틴의 사람들; (2) 성서적 혹은 “문자적” 이스라엘; 그리고 (3) “고대 이스라엘”로, 이는 앞선 두 개를 가지고 현대 학자들이 창조한 것이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나중의 두 개는 단지 사회적인 고안품social constructs일 뿐이다-다시 말해서 허구라는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역사적 이스라엘은 재구성할 수는 있지만, 고고학의 한계를 포함해서 신뢰할만한 자료가 터무니없게 부족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데이비스는 표준적인 연구서인 마자르의 「성서지대의 고고학Archaeology of the Land of the Bible」조차도 인용하지 않았는데, 각주를 통해서 마자르가 (기원전 586년까지 다루지 않았으므로7)-역주) 데이비스가 생각하는 “헬레니즘적” 성서라는 개념과 그 자체로 고대 이스라엘이 발명되었다라는 것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라고 논평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 점을 지적했을 때,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심지어 최소주의자들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떠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의 방법론도 그러했다.)
휘틀렘Whitelam
데이비스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분 풀이가 되지만 순진할 뿐인 (이는 또 다른 괴짜 영국인의 것에서도 나타는데), 소책자를 시작으로 다수의 글들이 다른 수정주의자들을 통해서 쏟아져 나왔으며, 그 중에 많은 책들이 셰필드 대학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 후 스코틀랜드에 있는 스털링 대학(지금은 셰필드가 되었다)의 키스 W. 휘틀렘은 1996년에 상당히 과격하며 도발적인 제목으로 다음의 책을 내놓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침묵하는 팔레스틴의 역사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이것으로 인해서, 수정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측면은 숨김없이 드러나게 된다. 휘틀렘의 견해를 따르면, 현대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경건한 기독교인들과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이 그들의 이스라엘을 “발명invented”해 낸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팔레스틴을, 즉 그 지역의 실제 거주민과 그들의 역사를, 침탈했던 것이다. 휘틀렘의 전형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성서 연구에 있어서의 ‘고대 이스라엘’은 성서 전승을 잘못 해석한 것에 기초해서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역사적인 실제는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1996:3)
[138/139]
성서 학계는 ‘후퇴한 제국주의’에 단지 말려든 수준이 아니라, 침탈이라는 행동에 실제적으로 협력했고 . . . 초기 철기 시대 팔레스틴에 살았던 내부인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침묵해왔었다. (1996:222)
휘틀렘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팔레스틴 사람”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반-이스라엘적 수사법에 가득찬 동정심에 따르면, 현재 갈등 중에 있는 팔레스틴 사람들은 고대 팔레스틴 땅에 존재하지 않았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현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전혀 “민족people”을 형성하지 않았었다. 이는 잘못된 역사적인 방법론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학자적으로도 비양심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정치학을 근동 고고학으로 불필요하게 끌어들였으며,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선동적인 학문이 아닐 수 없다. 고고학자들은 그가 소위 말했던 “팔레스틴의 역사”를 100년 동안이나 써내려왔다-이것은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오스만 제국8)의 시대까지, 모든 사람들의 역사이다. 휘틀렘은 로버트 쿠트와 합작했던 1987년의 일들을 회상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는 고고학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아는 척을 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휘틀렘은 셰필드의 「구약 연구를 위한 정기간행물JSOT」에 논문을 기고했는데, 그 제목은 “후기 청동기-철기 시대 팔레스틴의 재편성과 변화the realignment and transformation of Late Bronze-Iron Age Palestine”였다. 그 논문은 현대 고고학 이론을 서투르게 모방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로 인해 나는 그 간행물에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성서연구에 잠깐 적을 두었던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고고학에 잠깐 적을 두었던 성서주의자들 역시, 자신들만의 장광설에 빠져있는 것이라고 단언했다-그러므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역주] 이 둘의 대화는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렘케Lemche
코펜하겐이 수정주의자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거기에서 닐스 피터 렘케라는 성서학자가 도발적이지만 널리 인정받은 책을 내놓았는데, 1985년도 판으로 제목은 「초기 이스라엘: 왕조 이전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역사적 연구Early Israel: Anthropological and Historical Studies on the Israelite Society Before the Monarchy」였다. 그 책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웠던 것 같은데; 후에 나는 렘케가 나의 동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던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서 1990년대 초반에 그는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채택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 성서는 철기 시대, 즉 왕조 시대의 문헌이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2세기에 와서야 거의 전반적으로 만들어졌다(단지 편집된 수준이 아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성서는 철기 시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한 적합한 자료로써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히브리 성서는 시대의 산물로써, [139/140] 헬레니즘 시대 팔레스틴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정체성 혼란을 막고 자신들의 혈통을 지켜나가려는 “경건한 선전문구pious propaganda”로서의 기능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정통적인 역사를 주기 위해서 허구적인 이스라엘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휘틀렘과 같이, 렘케는 성서의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가 신화라고 주장한다.
1998년에 렘케는 자신의 수정주의자적인 역사를 출판하게 되는데, 자신의 1985년 작품과 거의 완벽하게 반대 입장을 취한다(지금에 와서 그는 옛 이론을 거부했다). 그 제목은 「역사와 전통에서의 이스라엘인The Israelites in History and Tradition」이다. 히브리 성서가 더 이상 알맞은 자료가 못되므로, 고고학이 렘케의 극소주의적인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말이다) 역사의 부족한 부분을 매꿔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전형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문학적 상상의 결과물임을 보여주었다. 그 역사는 실제 세계의 것이 아니었고, 두 개의 토대를 이루는 신화들을 기반으로 생성되었으니, 첫째는 출애굽이요 둘째는 바벨론 포로시기였다. 이러한 역사가 일부분이라도 ‘실제’ 세계에서 일어났었는지의 유무는 실체가 없는 역사를 형성시켰던 자들의 마음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1998:129)
남겨진 것이라곤 철기 시대 팔레스틴의 두 개의 작은 국가들의 전승뿐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사라진 오랜 후에, 그러니까 포로기 이후 기간에 팔레스틴 국토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선택된 기초 역사가 되었다. (1998:155)
결국 우리는 (기록된-역주) 이스라엘이 (실제의-역주)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예루살렘도 예루살렘이 아니며, 다윗도 다윗이 아니었다. 어떻게 우리가 고대 팔레스틴의 유물들을 마음대로 외곡하든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철기 시대의 이스라엘 바로 그때의 성서 이스라엘을 얻을 수 없다. (1998:166)
내가 렘케를 역시나 허무주의자라고 여기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고대 이스라엘에서 무-역사를 만들어내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는 나의 비평들에 날카롭게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대답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가장 최근에 그는 나를 “시온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의 입장이 나와 반대되는 “나치”-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140/141]톰슨Thompson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수정주의자라고 한다면, 미국인이지만 지금은 코펜하겐에서 렘케와 같이 강의를 하고 있는 토마스 톰슨이 아닐까 싶다. 1974년에 그는 「족장 네러티브의 역사성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을 썼는데, 이 책은 올브라이트의 “실증론자positivist” 체계를 와해하는데 활약했다;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점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에 이르러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기록된 것에서부터 고고학적인 자료들에까지Early History of the Israelite People from the Written and Archaeological Sources」를 출간하게 된다. 이 거대한 작품에서 그는 “팔레스틴의 세속 역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수정주의자들과 (나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애써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도는 단지 밑그림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 어떤 고고학자들조차도 주목할 만한 그런 역사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5년 이내에 톰슨은 그러한 시도들을 포기해버리게 되며, 매우 후기라고 언급했던 헬레니즘 시기에 와서야 히브리 성서가 (역사로써) 이용될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2년 후에 그는 수정주의자적인 입장에서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를 다시금 다루게 된다: 바로 「신화적 과거: 성서 고고학과 이스라엘의 신화The Mythic Past: Biblical Archaeology and the Myth of Israel」이다. 책의 부제와는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고고학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보다 심각한 것은, 톰슨은 고고학자들과 거의 모든 성서학자들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 성서까지도 풍자했다는 점이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철기 시대 팔레스틴의 역사란, 단지 예루살렘 북부와 이즈르엘 계곡 남부에 해당하는 작은 고지대만을 다룰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제의 신이었던 야웨조차 성서가 이해하는 신과는 별 관련이 없다. (1999:xv)
계속해서 톰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서의 많은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기원 전승을 다루고 있다는 점 자체가 아마도 흥미로울 것이다.”(1999:34)
그러므로 톰슨이 “실제”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412페이지나 되는 자신의 책에서, 왕조시기(기원전 9-6세기에 해당한다)를 기록하면서 단지 7페이지만을 할당하고 있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그리고 정착 시기에 대해서는 4페이지도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 톰슨은 그 어느 곳에도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써먹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남부 시리아 외각의 주민들”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원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인 탐구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오히려 신학적이며 문학적인 질문의 차원이며, 의미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그러한 물음에 역사적인 형식을 부여한다는 것은 [141/142] 우리 자신의 의미 찾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기원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기원에 관한 물음은 대답 가능한 차원이 못된다. (1999:xv)
1997년에 유럽의 수정주의자들은 소논문을 모아서 「“이스라엘 역사”를 쓸 수 있을까?Can a “History of Israel” Be Written?」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질문은 많았지만 정작 답은 별로 없었다. 저자들 중에는 성서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고고학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편집자는 “성실한 대화”를 시도했다고 평했지만, 사실 수정주의자들의 담론과 같이, 이 책은 독백수준이며 어떤 것은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 책은 (내가 이 책에서 개괄한) 고고학적인 혁신을 전혀 알지 못했고, 초기 이스라엘에 관하여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가르쳐 주지 못했다.
많은 독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 읽도록 수정주의자들이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말도 안되는 엉터리인 것 같다. 과거를 이해하려던 그들의 접근법은 요즈음에 와서 더 이상 특별한 것이 못된다. (그들이 이해했던 접근법으로-역주) 거대하며 영향력있는 “역사” 학파가 있는데, 그 시작은 프랑스인으로 후기구조주의postmodernist 철학자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로, 그는 “모든 역사기록은 허구이다”라고 주장한다.
후기구조주의의 근본 가정은 절대적인 지식은 불가능하며, 특별히 단지 본문상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에 한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후기구조주의적인 관점에 의하면, 본문은 단지 “사회적 산물”일 뿐이며, 그렇기에 해체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달리 말하면, 저자의 의도를 분석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사용된 언어의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 진리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본문은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대로 의미가 부여되는 대상이 될 뿐이다. 후기구조주의는 특별히 “메타네러티브”-즉, 본문은 사라져버리고, 고차원적인 광범위한 지식만을 요구하는 것-를 믿지 않는다. 명백하게 말해서 성서야말로 그러한 메타네러티브이다; 정말이지, 그것은 서구문화 전통 속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었다. 그러므로 성서를 비신화화할 뿐 아니라 진리인 양하는 가면을 벗겨버리는 일은 적법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필요하기도 하다. 키스 윈즈슈틀은 자신이 쓴 「죽이는 역사: 문학비평과 사회이론가들이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모살했는가The Killing of History: How Literary Critics and Social Theorists Are Murdering Our Past」의 서문에서,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지 서구문화사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논평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문화적 상대주의와 후기구조주의가 역사에서 메타네러티브를 없애려고 하는 시도-즉, 당시의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네러티브를 제거하려는-는, [142/143]우리의 문화가 어떠하건 상관없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빼앗아버리고 말 것이다. (1996:281)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역사 철학을 바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서 수정주의자들이 성서의 고대 이스라엘은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할 때, 우리는 크게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중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질문은 여전히 남게 된다. 후기 청동기-철기 I 시대의 지평에 새로운 사람들이 출현했다면, 과연 가나안에서는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일까? 정말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현대적 비평 방법을 가지고,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고고학자들
이제 나는 대표적인 성서학자들로부터(이들은 단지 본문 연구에 탁월할 뿐이다) 고고학자들에게(이들은 “어떠한 사물에서부터 역사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다) 관심을 옮길 것이다.
렙Lapp
폴 W. 렙은 처음엔 올브라이트의 제자였다가 후에 라이트의 제자가 된다. 그는 1970년에 3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성서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분야에 있어서 (다소 괴짜같기는 했지만) 미국의 가장 총명한 젊은이로 인정했다. 그는 1967년에 후기 청동기/철기 I 시대의 범위를 정해놓고 아주 세밀한 고고학 탐사결과물을 출판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지도가 낮은 교회관련 저널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널리 읽혀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미국 고고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성서학자들에게 충분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전반적으로 렙은 그의 스승인 주장했던 “정복” 모델을 지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단층에 의한 증거에 따르면 . . . 해안 도시와 이즈르엘 평야의 바깥쪽에서는, 13세기 후반에 중요한 도시가 거의 완전하게 파괴되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1967:295)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 그 어떤 훌륭한 고고학자라도 그런 주장은 하지 않는다. “파괴 영역”은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143/144]벤쟈민 마자르Menjamin Mazar
고인이 된 벤쟈민 마자르는, 그가 사망한 92세의 일기까지, 현대 이스라엘 성서 역사연구에 있어서 일인자로, 상당히 많은 실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니, 지형학topography과 고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이스라엘의 올브라이트였다. 그의 방법론은, 올브라이트가 했던 것과 같이, 방대한 자료에서부터 정보를 취합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주요한 역사적인 뼈대 안에서 작업했다. 그의 접근법은 적당한 수준에서 보수적이었는데, 그렇다고 올브라이트처럼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독창성이 넘치는 마자르의 초기 연구들은 단지 히브리어로만 소개되었다가, 1981년에 그 중 한 개의 논문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관점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산간 지대의 초기 이스라엘 정착을 다루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산간 지대에서 이스라엘 부족이 정착하게 된 것은, 그들의 국가-신(神)에 대한 의식과 가나안과 트랜스요르단을 넘어 뻗어있는 목축업자로서의 삶의 방식에 의해서 애초부터 결정되었다. 초기 이스라엘인들은 이후에 단지 점차적으로 정착생활의 조건들, 즉 영구적인 촌락에서 거주하며, 그들로 하여금 정착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며 점차적으로 농경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로 변환하도록 동기부여를 한 비-이스라엘 계열의 이웃들과의 접촉에 적응하는 것뿐이었다. 이스라엘 부족들과 연합단체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이웃들에 동맹을 맺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처절한 싸움도 파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구 확장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또한 이는 토착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흡수해서 이스라엘 부족의 뼈대를 삼았으며, 결과적으로 정치적인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981:78)
그러므로 마자르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걸쳐서 이스라엘 정복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본문상의 증거를 다룸에 있어서, 그는 진지하지만 문자적 방법이 아닌 접근법을 취했으니, 역사적인 세부사항과 기억들 속에서 후대의 전승을 캐내는 방법을 취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초기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많은 인종 그룹이 뒤섞인 것이라고 강조했다-이들 그룹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바와 같이 “헷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등”이다.
야딘Yadin
이갈 야딘은, 후에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한 고고학자가 되는데, 마자르의 제자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그의 기본적인 접근법을 이어받는다. [144/145]비록 스타일에 비해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말이다. 이 책의 4장에서 우리는 야딘이 1956-1958년 하솔에 대한 탐사를 기반으로 이스라엘 기원을 주장했던 바를 살펴본 바 있다.
아하로니Aharoni
요하난 아하로니는, 마자르의 또 하나의 꼬봉protege이었는데, 1957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이스라엘 부족의 상부 갈릴리 정착The Settlement of the Israelite Tribes in Upper Galilee」(히브리어로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에 영어로 요약되었다)을 통해서 이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남기게 된다. 나중에 그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았다: 이스라엘 정복 다시 쓰기”라는 도발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글을 1976년에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성서지리The Land of the Bible」(1966년 초판, 그가 죽은 이후 1979년 레이니에 의해 개정)라는 널리 사용되는 논문집의 한 장을 통해서도 발표한다. 기본적으로 아하로니는 전반적인 침투 과정을 옹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알트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곳에 머물러 살던 이스라엘인들이 요단강의 양편에 있던 산간 지대의 여러 장소들을 파괴했음을 믿었다. 그리고 북부지역에 대해서는, 특별히 상부 갈릴리에 대해서, 그는 대규모의 접전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1950년대에 실시했던 탐사를 기초로 해서, 그는 자신이 “정복 토기”(가장자리가 접힌 항아리와 유사하다)라고 불렀던 것을 연대설정하는데, 13세기 중반 혹은 약간 이른 시기로 잡았다. 그러나 정복은 최소한 기원전 1150년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하솔이 파괴된 시기이다(이 시기를 놓고 아하로니와 야딘은 심하게 논쟁했다). 지역 연구와 프로젝트, 즉 브엘세바 계속과 갈릴리에서의 탐사라는 아하로니의 개척자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론은 오늘날 쓸모없는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의 연구는 자신이 세운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 협회(이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의 학생들을 통해서 주로 행해지고 있다.
프리츠Fritz
우리는 브엘세바 근처인 텔 마소스 발굴에 대해서 이미 논의한 바 있다. 이 발굴의 공동 감독자였던 독일 학자는 탁월한 성서학자로, 이스라엘에서 고고학 분야엔 아주 오랜 경험을 쌓아왔던 관계로 딱히 명칭을 정할 순 없겠다(그는 1960년대부터 현장경험이 있다). 발굴의 근거에 기초해서, 내가 여기에서 정리했던 바와 같이, 볼크마르 프리츠는 기존의 정착민 기원 가설(즉, 농민 혁명이나 내부적 유입과 같은 이론을 말한다)을 획기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는데, 이는 바로 앞으로 종종 불리우게될 “공생symbiosis” 모델이다. [145/146]그는 청동기 후기 가나안 문화와의 연속적인 요소들을 언급했는데, 이는 토기와 금속공예에서 드러나고, 심지어 뜰과 기둥이 있는 가옥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이러한 것들이 보다 이전의 지역들이나 심지어 이집트 안뜰 가옥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철기 I 시대에 나타난 텔 마소스와 다른 곳의 가옥양식과 도자기가 보여주는 철기 I 시대의 수용은, 새롭게 정착하게 된 삶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철기 I 시기에 서로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왔었음을 나타낸다고 프리츠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공생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이며, 이에 대해서 프리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주 오랜 공존의 기간을 통해서만이 얻어질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문화적 접촉이 있었던 것 같다. 12세기 본격적인 정착이 있기 전에, 그들 자신의 유목민적 삶의 양식을 철저하게 그만두지 않고서, 정착민들은 아마도 가나안 도시 주변에서 몇 세대를 걸쳐 살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최초의 정착인들이 초원지대에서 곧장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13세기나 혹은 아마도 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정착된 지역을 이미 통과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나안인과 공생의 형태를 이루며 들어왔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1981:69,70)
더 나아가:
정착인들은 단순히 초원지대에서부터 온 목축유목민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가나안 도시 주변에서 반(半)유목민으로 아주 오랫동안 살았을 것인데, 아마도 그들이 새로운 정착을 위한 기초를 세우기를 마치고, 청동기 후기인 기원전 1200년경에 일어난 도시국가의 대대적인 붕궤 이후에 최종적으로 정착생활의 삶의 양식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정착이라는 삶으로의 변환은 달리 말해서 그러한 삶의 스타일에 맞는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보다 넓은 문화와 접촉했던 이 기간에, 상당한 수준의 이동 방목은 여전히 존재했을 것인데, 이는 우기 동안 가축을 이끌고 정착지에서부터 스텝지역의 목초지까지 몰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지역의 “정착”은 외부로부터의 강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이것은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 시대로 옮겨가면서 나타났던 하나의 발전인 셈이다. (1981:71)
프리츠의 모델은 충분히 진전되지 못했으며, 명백히 공생 모델이라는 명칭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이 맞다면, 그 모델은 상당히 가치가 있어 보인다.
[146/147]켈러웨이Callaway
나는 1970년대 아이'Ai에서의 발굴을 검토하면서 조셉 켈러웨이를 언급한 바 있는데, 이후에 그는 초기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1차 자료로서의 고고학 연구에 더욱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85년에 그는 확장된 내용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알트의 침투 이론을 지지하면서,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면에서는 중요한 차이점을 보였다: 철기 I 시대 고지대 정착인들은 유목민이 아니었고, 그들은 “두개의 새로운 생존전략을 보유했던 고정된 형태의 촌락 생활”을 영유했다.(1985:33) 이러한 전략이란 계단식 농업과 바위를 깎아 만든 수조의 사용이었다. 켈러웨이의 견해에 따르면, “고지대 정착인들은 전쟁과 폭력을 피해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그들은 풍족한 평야지대에서 벌어졌던 투쟁과 분열에 대한 피난처로서 멀고 고립된 산꼭대기 촌락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1985:33) 철기 I 시대의 고지대 촌락이 보여주는 융화된 물질문화와 사회구조는 그 구성원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보여준다:
[거주민들은] 가나안 전반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반적인 인구 이동의 일부분이었는데, 이들은 유목민이거나 혹은 반(半)유목민이라기보다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정착주민을 배경으로 한다. (1985:43)
코차비Kochavi
켈러웨이의 책이 출판된 같은 해에, 몇 명의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 중 한사람이 텔 아비브 대학의 고참격인 모세 코차비이다. 코차비는 위에서 제기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기반으로 그의 작업을 진행했는데, 특별히 그는 지역적인 차이가 있으며 정착과정은 점진적이었다는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고지대에 관해서, 코차비는 핑켈스타인(그리고 아래에서 다루게 될 제르탈)을 동의했는데, 이는 목축유목민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해 오면서 점차적으로 정착했다는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래의 고고학자들에게 “이 기간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있는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1985:58)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
코차비가 편찬한 「현대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 국제협회 회보Biblical Archaeology Today: Pre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Biblical Archaeology」(1985)에서 아미하이 마자르는 [147/148] 1981년의 자신의 견해를 확장했는데, 나는 위에서 길로의 발굴을 설명하면서 요약한 바 있다. 마자르는 그 때까지 알려졌었던 고고학적 증거들을 완벽하게-포괄적이며, 균형 잡혔고, 적절한 판단력에, 이데올로기적인 면도 없었다-정리해 주었다. 마자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최근에 고고학 연구는 다양한 물질문화 요소들을 보여주는 가나안의 기원에 점차적으로 집중되고 있는데, 특별히 건축물, 토기 생산, 예술적 전통 그리고 제의 행습과 같이 자세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의 물질문화는 이전과 동시대의 가나안 문화와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집터 분포와 위치 그리고 계획, 토기류의 성분, 그리고 경제 사회적 구조와 같은 다양한 부분에서는 확실히 비-가나안적이다. 그러므로 관측과 발굴을 통해서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물질문화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비로 가나안 전통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지라도, 이스라엘 자체의 독립적인 발전도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1985:70)
스테이거Stager
로렌스 E. 스테이거는 앞에서 찬사를 보냈던 1985년판 회보에서 한 장을 맡았는데, 그 제목은 “고고학으로 본 가족The Archaeology of the Family”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논문에 따라 기초를 세웠는데, 지금에 와서는, 철기 I 시대 촌락에 있어서 지역적인 다양성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서 전승에 나타난 이스라엘인들이었다고 관련을 짓는 것은 너무 단순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는 핑켈스타인의 범(汎)-유목민 이론을 반대한 셈이다. 다시금 그는 인구통계분야를 주목했는데, 청동기 후기 가나안의 소작민들이나 유목민들은 단독으로 철기 I 시대 고지대의 인구 확장을 충분히 뒷받침해줄 수 없음을 지적했다(이는 결정적인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스테이거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면서 글을 맺는다: “본문이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떠한 고고학자라도 홀로 남은 문화유물만을 통해서 철기 I 시대 촌락민들의 인종적 정의를 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적이다.”(1985:86) 나는 곧, 스테이거의 결론적인 언급뿐만 아니라, 이 주제를 언급할 것이다.
[148/149]버니모비츠Bunimovitz
1994년에 출간된 가장 중요한 소논문집인 「유목생활에서 군주제까지: 초기 이스라엘의 고고학적 역사적 관점From Nomadism to Monarchy: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Aspects of Early Israel」 안에서, 텔 아비브의 젊은 학자 슬로모 버니모비츠는, 핑켈스타인의 정착화된 유목 모델을 받아들여, 장기적인 거주 역사를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이동하는 개척자shifting frontiers라는 관점을 특별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버니모비츠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심지어 청동기 후기의 개척자들이 팔레스틴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장했다고 할지라도, 흥하고 쇠하는 기간은 있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정부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것과 발을 맞췄을 것이다. 철기 I 시대 초기에 저지대에서부터 들어온 목자/유목민들 (그리고 다른 비-거주 요인들), 그리고 그들의 고지대 정착화는 이동하는 개척자 모델에 의해서 합당하게 설명될 수 있다. (1994:200)
그러므로 버니모비츠는 목축유목민이 (그리고 다른 이들) 고지대에 정착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핑켈스타인이 주장하는 바대로 압도적인 숫자의 사람들이 동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왔다는 견해를 부정하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핑켈스타인의 관점으로 나아가기 전에, 두 명의 다소 “외톨이” 견해를 살펴보자.
스티에빙Stiebing
1989년에 윌리엄 H. 스티에빙은, 그는 고고학을 전공했지만 대부분 대중적 작가로 알려졌는데, 「광야를 벗어나? 고고학과 출애굽/정복 설화Out of the Desert? Archaeology and the Exodus/Conquest Narratives」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 그는 그 당시에 널리 알려졌던 다양한 토착민들에 의한 기원과 개척자 이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핑켈스타인의 정착화된 유목민 이론은 확실하게 거절한다. 스티에빙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의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얼굴이었던 반면, 지중해 세계 전 지역을 뒤흔들었던 사람들로, 즉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청동기 시대의 끝을 알렸던(철기 문화를 인도했던-역주)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그는 소규모의 성서적 출애굽이 아마도 일어났었으며 그들이 몇몇의 집단을 궁극적으로는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엉뚱한 결론-단지 아무런 증거없이 주장할 뿐, 문서화하지 못했다-은 기원전 13세기와 10세기 사이에 지중해 전지역을 황폐화시킨 대규모의 가뭄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부터 유입해 들어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에 “이스라엘”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149/150] “범(汎)-지중해 가뭄 이론”은 고전학자 라이스 카펜터가 40년 전에 주장했던 이론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자들은 그 이론을 별로 주목하지 않으며, 심지어 거의 인용되지도 않는다. 아마도 정기적으로 지역적인 가뭄은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스테이빙의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고고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증거들은 전혀 없다(예를 들면, 화분분석[花粉分析]9) 방법). 이처럼 전해들은 내용에 고고학적 자료들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서, 그의 이론은 현재의 논의에 있어서 거의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레드포드Redford
도널드 B. 레드포드는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방면에서 때때로 풍운아와 같은 존재지만, 이집트학에 있어서는 탁월한 학자 중에 한사람이다. 1992년에 출간된 「고대 시대의 이집트, 가나안, 그리고 이스라엘Egypt, Canaan, and Israel in Ancient Times」는 이집트를 제외한 다른 주제에 대하여는 독특하며, 논쟁적이며, 격앙시키는 작품이다. 그 책은 도발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다. 레드포드는 종종 성서와 성서학자들을 얕보며 무시해왔는데, 자신의 이론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모든 논의들을 무시해버렸다. 레드포드에 따르면, 초기 이스라엘인은 남부 가나안에 살았던 샤슈 베두윈의 작은 파견대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는 이집트 18-19왕조의 기록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이 기록에는 샤슈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기록이 여럿 있는데, 이들 샤슈는 이집트 국경의 반건조 지역에 주로 위치해 있었으니, 구체적으로는 모압과 에돕 그리고 네게브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이집트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정기적인 나귀를 타고 돌아다녔던 목축유목인으로 여겨졌고, 그러나 또한 산적때-대체로 멀리 떨어진 이집트 정부에 있어서 매우 귀찮은 존재였음이 분명하다-로도 인식되었다. 몇 개의 흥미로운 본문들에서 “샤슈 땅(에 있는) Yhw”이란 신의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야웨를 알게 되는 성서의 전승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정말로, 이러한 본문은 이스라엘인의 야웨와 관련된 가장 이른 정보이며, 성서 밖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중요한 자료이다. 레드포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팔레스틴 고지대에서 샤슈의 정착은, 우리가 의심할바 없이 미성숙한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리고 남쪽인 유다 산지에서 연합을 시도했던 그룹들의 정체와는 상관없이, 고고학적인 기록으로는 거의 찾아볼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조야하고 단순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 냈다. 기원전 13세기가 끝나갈 무렵, [150/151] 그들은 촌락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니, 대부분에 있어서 그들은 저지대 가나안 마을에서부터 거주 형태와 건축 양식을 모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1992:279)
우리가 상상했던 이스라엘인과 샤슈를 결합시킨 레드포드의 견해는 다른 학자에 의해서 제안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성서학자들과 골치하픈 고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의 뜻대로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 심지어 레드포드 자신도 그가 책을 썼을 때, 고고학적 자료들을 인용할 수 없었다(그는 핑켈스타인의 1988년 작품, 「이스라엘인 정착의 고고학Archaeology of the Israelite Settlement」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샤슈 이론을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폐기처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정말로, 이집트 분야에 있어서 권위있는 이스라엘 학자 안손 레이니는 최근에 레드포드의 의견을 찬성하고 있다). 때때로 비전문가, 즉 그 어떠한 보편적 사고 구조(이런 경우엔 종종 신학적인 것)에 의해서 침해받지 않는 그런 비전문가들이 짜증나는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버리기도 한다.
2. 요약
저자는 기존의 견해들을 ‘성서본문(성서학자)’과 ‘유물자료(고고학자)’로 나누면서, 크게 세 부분으로 종합한다: (1) 성서학자(이스라엘-독일-미국), (2) 이스라엘 역사, (3) 고고학. 다음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서학자 |
이스라엘 역사 |
고고학자 |
[이스라엘] 카우프만(1937), 예빈(1971): 본문 충실
[독일] 알트(1920): 평화정착설 노트: 본문해석 탁월, 고고학 근거부족 바이펠트(1971): 고고학으로 목축유목제시
[미국] 삼총사(올브라이트,브라이트,라이트): 해석오류 맨덴홀, 갓월드: 이상주의자 할펀(1983): 성서전승의 형식론적 의미 추구 체이니(1983): 개척과 토지의 개념부각 쿠트&휘틀렘(1987): 장기지속 역사관, 비고고학자 쿠트(1990): 고고학 이해부족, 공생모델 알스트룀(1986): 지리적개념의 고지대 개척자론 |
[이스라엘 역사] 헤르만(1973): 알트와 노트의 연장선, 고고학부정 소긴(1985): 고고학 인정, 기원 제시 불가 밀러&헤이스(1986): 한계인식→가나안내부의 출현
[수정주의자]: 푸코의 ‘역사기록의 허구성’ 데이비스(1992): 고고학 신뢰부족, 허구 휘틀렘(1996): 역사가의 이데올로기 부각 렘케(1985,1998): 헬레니즘 편찬설, 허무주의자 톰슨(1974,1992): 극단주의, 신학적/문학적 차원 윈즈슈틀: |
렙(1967): 정복모델 B.마자르(1981): 산간지대초기정착, 오랜 역사성 야딘: 마자르를 따름 아하로니: 침투와 정복 프리츠: 기존정착민 기원(공생모델), 문화의 연속성 켈러웨이: 테라스와 수조, 정착주민의 고지대 침투 코차비: 목축유목의 점진적 정착(←핑켈스타인) A.마자르(1985): ‘비-가나안적’ 물질문화 스테이거(1985): 인구통계, 가나안으로만은 불충분 버니모비츠(1994): 장기적 거주역사, 이동개척자 스티에빙(1989): 범지중해가뭄이론 레드포드(1992): 소규모 샤슈 베두윈 수준 |
저자가 3부분으로 기존의 견해들을 정리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존의 성서학자들은 절대적으로 고고학에 무지했음이(혹은 오용?) 드러났다. 더 나아가, (기록된, 그래서 비교적 문화유물보다는 더욱 확실한) 성서본문을 통한 실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상대적인) 수정주의자라고 불리운 학자들은 ‘헬라시대의 정치적 문서’ 정도로 성서를 이데올로기화하고 말았다(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 같다). 결국, 저자는 12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고고학자들을 소개하면서 (물론 엉뚱한 소리도 있지만) 이스라엘 기원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30여명이나 되는 다방면의 학자들을, 그들의 주요 이론과 평가를 아울러 소개받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3. 질문
1) 저자의 소제목처럼, 과연 ‘성서학자와 고고학자’는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가: 수정주의자에 대한 데버의 평가는 정당한가?
저자는 본문자료와 유물자료를 종합하려 했던 기존의 시도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특별히, 이스라엘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의 영향력은 파괴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는 성서를 ‘고대적 사료(실제로 일어난 사건들)’로 보는가와 ‘후대적 문학(누구의 역사인가?)’으로 보는가의 차이를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즉, 방법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학문에 문제가 있다(저자는 수정주의자들의 ‘역사철학’ 자체를 부정하고, 심지어 모든 현대적 비평방법들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놓기까지 한다[p. 143]). 저자가 데이비스에게 초기 이스라엘에 대해서 물은 질문(p. 138) 자체가, 마치 리무진에 경유를 들이댄 초보 주유원의 모습을 비추는 것은 아닐까? 사실, 최근의 학계는 성서 ‘기록’의 후대성을 인정하는 것 같다(그래서 이 책이 나왔는지도 모르지만).10) 그렇다면, 저자가 ‘본문자료와 유물자료를 종합하려 했던 기존의 시도들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평가는 옳을지 몰라도, 본문자료 자체만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지 않을까?(어짜피 저자에 의해서 ‘비전문가 주제에...’라는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1) Smithsonian Institution: 통칭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스미스슨(1765~1829.6.27)의 유산으로 건립된 연구기관. 이 기관은 1846년에 국회법에 의해서 워싱턴 D.C.에 설립되었다. 이사회는 미국 부통령, 대법원장, 3명의 상원의원, 3명의 하원의원 및 6명의 일반인들로 구성된다.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관리를 받는 부서로는 미국예술기록보관소, 쿠퍼-휴이트 장식미술 디자인 박물관, 프리어 예술미술관, 허숀 박물관 및 조각공원, 국제환거래소, 존 F.케네디 공연예술 센터, 항공우주박물관, 미국육군박물관자문위원회, 국립미술관, 미국예술박물관, 역사기술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초상화미술관, 동물원, 방사선생물학연구소, 과학정보교환소,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연구소, 스미스소니언 열대연구소, 우드로윌슨 국제과학자 센터, 아서 M. 새클러 박물관, 국립 아프리카 예술박물관 등이 있다. (브리테니커)
2) 장기적인 경향과 변화에 대한 자세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좀 더 일시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 방법론을 말함. 특히, 브로델은 영향력있는 역사학 잡지 “경제·사회·문명의 연보 Annales : economies, societes, civilizations”의 편집자로서 기후·지리·인구·교통·통신 같은 역사의 요인들에 대한 조사를 장려했다. 브로델을 비롯한 사회역사가들은 또한 일정 시대의 교역과 일상생활을 자세히 조사할 때 통계분석과 수량화에 크게 의존했다. 브로델의 업적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20세기 후반에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경제적·사회적·지적 요인들을 과거의 역사가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3)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대답으로써, 경험적인 사실들을 축적하는 방식-지나친 낙관주의적인-의 역사기록에서 현대적인 역사연구는 그 시작점을 잡는다. 더 나아가 “영웅 사관”식의 구식모델이 폐기되어지면서, 당시 역사가들의 당파적 견해로 역사는 축소되어진다. 결국, 고고학의 리얼리티가 최후의 재판관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상황이다. 콜린스(John J. Collins)는 핑켈스타인과 함께 데버의 견해(본서의 내용)를 성서역사서술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고 있다(The Bible after Babel: Historical Criticism in a Postmodern Age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5], 27-51).
4)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방석종 역 (서울: 나단출판사, 1989) 이 책은 수정․증보 2판(1980년)을 번역한 것임.
5) 「고대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6) 「고대 이스라엘: 아브라함부터 로마인의 성전 파괴까지」 김유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7) In Search of ‘Ancient Israel’, p. 24, n. 4.
8) 14세기 비잔틴 제국의 쇠퇴로부터 1922년 터키 공화국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이 세운 제국.
9)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 화분에 의하여 이탄층(泥炭層)이나 호수 바닥 퇴적물의 양상, 퇴적 당시의 식물의 종류나 생태를 해명하는 학문의 한 방법. 퇴적물에서 나온 꽃가루를 통해서 연속된 기후와 식물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대적 연대설정 방법’의 한가지이다. 폴 반,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박범수 역 (서울: 동문선, 2003), 35.
10) Joseph Blenkinsopp, ‘The Pentateuch’, in John Barton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특별히 184-6; Collins, The Bible after Babel,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