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시작(사무엘상 18:1)
본문: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말씀을 준비하며
믿음의 공동체를 시작하며…
2004년 3월은 새로운 기록이 쏟아져 나왔던 달로 역사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기록은 점수와 관련된 것입니다. 한국프로농구(KBL) 사상 최초로 한경기 최다 득점기록이 세워졌습니다. 우지원 선수가 한경기 최다인 70점을 넣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70점 중에서 3점 슛이 22개나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록은 길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관측사상 하루에 눈이 50cm나 내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저도 지난 월요일 대전에 내려가서 여기저기 승용차를 완전히 뒤덮어버린 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 번째 기록은 우리나라 헌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대통령 탄핵이 실제로 눈앞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이제부터 말바꾸는 정치인들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3월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새로운 기록들이 쏟아져버렸습니다.
새로운 기록들 중에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기록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토요 예배의 장소를 지하기도실로 바꾼 것입니다. 어떻게 볼 때, 이 일은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10살짜리 아이에게는 그 만한 크기의 옷이 필요하고, 20살짜리 청년에게는 그 만한 크기의 옷이 필요하듯이, 우리에게 지금 맞는 옷은 지하기도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새로운 예배처소에서 새로운 시작을 이루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지하기도실은 여름만 되면 수영장으로 돌변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지하기도실을 사용하지 못해서 다시 본당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지하기도실은 우리의 몸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본당으로 올라가야한다는 대의명분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에게 새로운 예배의 장소, 친교의 장소, 영적성숙의 장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이곳을 사랑하고, 여기저기에 우리의 신앙성장의 흔적을 열심히 남기도록 합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는 공동체를 위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청년부의 다섯가지 존재목적중에서 두 번째인 ‘이웃 사랑’과 네 번째인 ‘참사랑의 교제’에 해당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설교의 제목은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말씀의 중심에서
1) 공동체: 무엇이 하나되게 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말씀은 매우 짧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짧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를 위한 ‘공동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인 18장 1절에서부터 다윗이라는 사람과 요나단이라는 사람, 이 각각의 인격체는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동체’하면 ‘이익공동체,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상호협력공동체’처럼 많은 세속적 수식어들이 떠오르겠지만, 우리가 잘 알고있는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공동체에는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없는 순수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순수한 젊은이들이 만들어냈던 지상최고의 공동체가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아끼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저는 과연 무엇이 이들을 공동체로 만들었는가를 나누기 원합니다.
안타깝게도, 본문의 말씀은 “무엇 때문에 이들이 공동체가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에베소서의 말씀처럼(2:13), “이제는 전에 멀리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간단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묵상이라는 신비의 영역으로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무엇이 이들을 공동체로 만들었는가?”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은,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된 것”은 본문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처럼,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이루어졌다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다윗이 과연 무엇을 말했단 말인가?”를 되집어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원어성경을 보게되면, 더욱 확실히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17장 58절을 연결시켜줍니다: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18장 1절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놀라운 순간에는 17장 58절의 이 고백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 고백이 과연 어떠한 것이길래, 이 말이 마치자 요다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묵상의 힘과 상상력의 자유를 마음껏 사용해보았습니다.
2)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
우선, 다윗의 등장에서부터 오늘의 본문까지의 상황을 잠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16장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초대 왕인 사울이 버림을 받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새로운 왕을 세우시게 됩니다. 사무엘이 만난 이세의 일곱 아들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들판에 있던 막대 다윗이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속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에, 다윗은 사울왕을 보좌해주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그는 수금을 잘 탈줄 알았기 때문에 사울이 악신에게 고통받을 때에, 누구보다도 곁에서 음악치료를 해주었던 것입니다(16:16). 게다가 다윗은 사울의 병기든 자라는 직책까지 줍니다(16:21). 사무엘상 16장 21절에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7장에 와서는 분위기가 싹 바뀝니다. 17장에는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장수가 등장하면서 일대 위기가 발생합니다. 모두가 겁에 질렸던 상황속에서 다윗이 등장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라고 의분을 터트리고는 자원합니다(17:26).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싸웠던 다윗이기에 적장 골리앗은 한덩어리 물매돌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후에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고, 사울왕에게로 걸어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는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바로 17장 55-5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왕은 다윗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다윗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까 16장에서 17장으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싹 바뀐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6장까지만해도 다윗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었으며, 특별히 사울왕의 큰 사랑을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17장에 들어와서는 다윗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말 그대로 New Face였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논리적이지 않는 오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단순하게 풀어집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건 그 자체를 전달하는 신문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만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것입니다. 사무엘상은 17장부터 새로운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에서 다윗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New Face였다는 것이 성경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나단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라는 상상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인 여러분은 얼마전 큰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요나단은 자기의 병기든 자 한사람만 데리고 적진으로 뛰어들어서 순식간에 이십명을 해치웠습니다(14-15절). 이 작전의 성공으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칼한자루만 들고도 적진으로 들어가서 이십명을 순식간에 헤치울 수 있는 용사입니다. 요나단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는다”라는 투철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14:6). 그렇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가의 자손이었지만, 동시에 믿음의 용사였던 것입니다.
3) 믿음이 우리를 공동체로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인 요나단에게도 차마 덤빌 수 없는 장벽이 생겼습니다. 바로, 골리앗입니다. 키만 2m 90cm에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했던 오리지널 싸움꾼입니다. 그 골리앗이 매일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을 놀려댑니다. “나와 맞장 뜨자!” 저는 여기에서 왜 요나단이 나서지 못했는가를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이 상황속에서 요나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도 상상해 봅니다. 아마도 백성들은 지난 번에 있었던 요나단의 용맹성을 다시금 은근히 바랬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왕족인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요나단은 어떤 젊은 소년을 보게 되는 겁니다. 소년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도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실 것이다!”(17:47) “나는 지금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17:45) 아무런 무장도 하지않고서, 단지 돌맹이 하나로, 가슴 떨리게 했던 골리앗이 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꿈에서조차 마주 볼 수 없었던 골리앗의 머리가 다윗의 손에 질질 끌려오는 것을 요나단은 보게됩니다. 그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지금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다윗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해보십시오. 아마 요나단은 사울왕과 같이, 다윗의 족보가 어떠한 것인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자신의 전 시대인 사사시대만 해도 전국에 유명한 지파들의 위대한 용사들이 있었던 것처럼, 다윗 역시 유명한 지파의 대를 잇는 사람일 것 같았을 것입니다. 유명한 가문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무술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묻습니다: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그런데, 놀라운 대답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 한마디에 18장 1절의 놀라운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단은 다윗의 이 한마디의 말을 듣고 마음이 하나로 묶여졌습니다. 저는 상상력을 이용해보았습니다. 제가 요나단이 되어서 다윗의 말을 듣습니다. 저는 다윗의 이 말을 이렇게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명한 지파의 유력한 자손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58절의 다윗의 이 고백이 바로 이런 뜻 아닐까요? 요나단의 기대는 무너집니다. 만약 다윗이 유명한 집안의 사람이었다면, 그의 용기를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무엇인가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신비로운 감정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가 만난 다윗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가지는 사람을 만나게될 때, 요나단은 다윗의 믿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원어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 놀라운 순간을 조금이라도 맛보게 됩니다. 우리말에는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어에는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어있습니다. 바로, “영혼(네페쉬)과 영혼(네페쉬)이 묶였다(카솨르)”는 것으로 이 놀라운 공동체 탄생의 순간을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신앙 공동체로 묶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믿음이 스파크가 일어날 때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공동체, 즉 한몸이 되게 하는 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같은 취미도 아닙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의식수준이 맞아서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는 한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를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것은 믿음에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 말이 마치자 그의 ‘믿음의 영혼’은 다윗의 ‘믿음의 영혼’과 하나로 굳게 묶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저는 이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해야할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젊습니다. 그래서, 아직 순수합니다. 우리는 외모에 집착하지 않을 순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능력에 메이지 않을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학연과 지연에 움직이지않을 정신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청년사역팀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명다해 사랑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믿음뿐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공동체는 성경에서 가장 견고한 생명체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생명의 공동체는 오늘 교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젊은동부공동체 역시 견고한 생명체라는 인식이 생겨야 합니다. 공동체에는 힘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레드 우드라는 참나무가 있습니다. 이 참나무는 수령이 2,3천 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나무입니다. 이렇게 큰 나무가 어떻게 비바람을 이겨내는가를 연구하다가 나무 밑을 파보고는 중요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덩치 큰 나무는 뿌리를 깊이 박고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에 어떤 기상 변화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일년 365일을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견고한 신앙의 나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지금이 그 시간입니다. 지금이 바로 여러분이 믿음을 보일 때입니다. 지금 전화로 형제, 자매에게 격려해 보십시오. 지금 이메일로 형제, 자매에게 축복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믿음으로 우리가 한가족임을 잊지 말고,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