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참된 용기(여호수아 1:1-18)

진실과열정 2005. 10. 14. 17:32

본문: 여호수아 1:1-18

제목: 참된 용기


1. 용기에 대하여

 

     청년부를 새롭게 맡게 되면서 많은 기대와 고민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기대와 고민의 시계추 사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청년부에게 여호수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를 생각하면, (실상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그는 광야에서만 40년을 지내온 중년이거든요) 왠지 청년의 느낌을 들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던 말이 여호수아에게는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여호수아는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총 8번에 걸쳐 여호수아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풀어드리려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 청년부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는 저와 우리 청년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용기’라는 단어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용기하면 참 많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영화의 많은 소재가 용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멜 깁슨의 Brave Heart가 떠오릅니다. 자유를 외치며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윌리암 월리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제가 최근에 본 TV 드라마에 용기있는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야인시대였습니다. 하야시패거리들이 김두한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김두한의 부하들이 그만 하야시의 오른팔 ----의 궤계에 빠져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김두한이 도전받은 것은 40명대 40명의 싸움이었는데 김두한에게는 부하가 없었던 것입니다. 드라마는 내내 칼을 든 일본 무사들이 한 무리져 있는 장면으로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약속된 싸움 전날 저녁, 김두한은 엘리트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졌다. 내일 싸움은 없다.”저는 내심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더군요. 새벽 안개가 자욱히 깔린 으슥한 공원에 김두한 홀로 나타난 것입니다. 칼을 맞아가며 40명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저게 바로 17대 1의 원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며 저는 용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용기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우리는 용기하면 무엇보다 먼저 나보다 힘이 센 상대방을 고려한 상태를 생각하곤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인류의 많은 역사가 그러한 상태에서의 적극적인 반응을 용기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한 사람들의 인구밀도가 높았던 나라라면 바로 스파르타라는 나라였을 것입니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에서 최강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엄격한 교육을 통해 용감한 전사를 배출했는데 그것을 '스파르타 교육'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스파르타 교육 중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짧은 검을 지급 받은 한 청년이 지휘관에게 "제가 가진 검은 매우 짧아 전투에서 불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은 전사의 어깨를 잡고 힘주어 격려했습니다. "검이 짧다면 한 발짝 더 빨리 적진 속으로 들어가라. 문제는 검이 아니라 한 발짝 더 앞서는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야 말로 참으로 적극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제 남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얘기를 해 봅시다. “우리는 용기있는 사람인가?”하는 점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는 용기있는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4천만 대한국민을 ‘태극전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스파르타 이후로 전사(soldier)들의 최고 인구밀도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과연 정말로 우리가 용기있는 사람일까요? 불행하게도, 서양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플루타르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아 민족은 '아니오'라는 단 한마디를 못 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예속되었다.”이 말의 배경이 어떠한 역사적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떠한 역사에서도 이 말은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겁쟁이 개는 절대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힘차게 짖는다고만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회복되어야 할 용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부디 이 말씀이 우리의 심장을 찔러 쪼개서 하나님의 용기를 배우는 시간으로 드려지기를 소원합니다.


2. 본론

 

     어떤 책이든 시작하는 첫 페이지는 우리를 기대하게 합니다. 스토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설명들이 필요하고 화려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끌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시작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준비하고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여호수아”라는 작은 책의 시작은 어떨까요?


1-2절: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여호수아의 첫페이지는 아주 우울합니다. 첫페이지부터 시작하는 단어는 ‘죽음’입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1,2절). 그런데, 이 죽음은 어떤 소소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무리 전체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리를 대표했던 대표자가, 그 무리를 이끌었던 인솔자가, 그 무리 그 자체였던 사람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제가 말한 것보다 더 심각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가 죽었다.”처럼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 신앙의 거인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출 33:20).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만’ 못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인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등을 본 유일한 사람입니다(출 33:23). 그래서,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광채가 났고,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34:29-35). 그는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유일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죽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죽음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이 때 만큼 당황스러운 시간이 또 어디 있었을까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차기 지도자로 이미 인정을 받기는 받았습니다(민 27:18). 당시의 여호수아에게 요즈음의 호칭을 만든다면, 아마 ‘여호수아 지도자 당선자’일 것입니다. 요즈음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속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면 당선자라는 딱지를 떼겠지만, 앞선 대통령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부담이 될까요. 요즈음 인기가 뚝 떨어진 직업이 생겼답니다. 바로 DJ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여호수아가 바로 이 마음이 아닐까요? 물론 지금과 그때의 상황은 다릅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된다는 것에서만큼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여정이 이제는 본궤도를 잡아야 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점점 속력을 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앞에 두고 흔들리는 핸들을 볼 때마다 부담이 생기지 않습니까?


(1)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시는 것입니다(1:1-6).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5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여호수아가 ‘지도자 당선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까지 주어로 등장한 ‘내가’라는 단어는 7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주어는 여호수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성경의 주인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나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나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고민합니다. ‘내가 어떻게?’ ‘내가 무엇으로?’ ‘내가 왜?’ 이런 고민중에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야. 이 일에 주인은 네가 아니야. 이 일에 주인은 나 하나님이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 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잊어버리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땅은 이스라엘이 얻은 획득물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을 향하신 약속의 성취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6절). 하나님의 의지는 이미 완료형입니다. 3절의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영어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I have given to you.”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실 때, 이미 그 일은 완료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즈음 당신에게 여호수아의 고민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의 길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매일 발견되는 나의 무능력 때문에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첫 번째 진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의 주도권을 가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내가 굳게 잡고 있던 내 인생의 핸들을 풀어야 합니다. 내가 핸들을 푼다고 내 인생의 자동차가 굴러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이 더 확실하게 내 삶의 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2) 참된 용기를 가지십시오(1:7-9)


7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선물은 그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언급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요구가 항상 함께 수반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귀한 꽃나무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선물을 내가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이 귀한 꽃나무를 선물로 준 사람을 생각하여 최선을 다해서 받은 선물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름아닌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무엇보다 귀하게 다루어야 할 ‘요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7절)” 이것이 바로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용기는 적을 무찌르는 용기가 아닙니다. 아까 우리가 생각했던 적앞에서의 적극적인 반응이 참된 용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용기란, “여호와의 가르침(율법)을 지키는” 용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맞서 싸워야 하는 주요 적은 가나안의 거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주적은 율법을 망각할 가능성입니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그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깜빡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싸워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나의 ‘영적 건망증’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가 세상에서 율법을 잊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용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란 무엇일까요? 왜 그들은 전쟁을 앞에 두고 전술훈련 교과서가 아닌 율법을 들고 서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율법을 생각하면 ‘해야되고 해서는 안되는 자질구레하고 딱딱한 조항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토라(torah)’의 원뜻은 “지켜야 할 규칙이나 규범”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의 “가르침”입니다. 모세오경을 보십시오! 모세오경의 핵심이 셀 수 없는 규칙의 나열입니까? 아닙니다. 모세오경의 핵심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의지(뜻)의 구현입니다. 그렇습니다. 토라(율법)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성공주의적인 처세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라(율법)는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자신을 기억하게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라는 말씀은 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으로써 자신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붙들을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제가 양복을 입으면 행동이 점잖아 집니다. 제가 케쥬얼을 입으면 행동이 방방 뜹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련된 투피스 정장에 예쁜 구두를 신은 자매는 ‘호호’하고 웃습니다. 그런데, 힙합바지에 파란 셔츠를 입고 있으면 ‘깔깔’하고 웃습니다. 저는 변하지 않았지만, 제가 입는 옷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갈 때, 세상속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사단의 원리’대로 우리도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여호수아도 그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습니다. 농사짓는 가나안땅에서 잘 살려면 농사가 잘되게 도와주는 신(이게 마귀아닙니까?)에게 빌어야 한다는, 가나안에서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사단의 원리’앞에 여호수아가 서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돈이다! 주일 놀아서 너 어떻게 먹고 살래?’ ‘인간관계가 사회생활에서 생명이다! 술 먹지 않고 어떻게 인간관계가 생기냐?’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이 모습에서 만큼은 여호수아와 같습니다. 우리 청년의 시기는 이제 막 사회로 진입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불기둥과 구름기둥처럼 느껴졌던 보호막은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여호수아가 보았던 광활한 가나안만 남겨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우리가 들어야 할 두 번째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가나안에서 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따르며, 붙잡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이 세상에서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따르며, 붙잡을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용기있는 비결은 단 한가지 입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당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9절).


(3) 이제 우리 청년부를 바라봅니다(1:10-15)


10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11“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만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12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13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4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당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15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 지니라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드리고, 자신은 하나님을 붙들을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변화되었습니다! 1-2절에서 느꼈던 우울한 분위기가 이제 사라진 것입니다. 환경이 바뀐 것입니까? 돈이 생겼기 때문입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의 힘 아닐까요? 참된 용기의 힘이 아닐까요? 이제 1절부터 9절까지의 하나님과 여호수아와의 관계가 바뀝니다. 여호수아와 장정만 60만이 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로 바뀐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유사(지도자)들을 부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을 ‘부를 수 있는’ 지도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계획을 움직여 나갔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쥐던 핸들을 하나님게 내어드리니까 자연스럽게 생겨지는 지도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으로 주십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했습니다(11절). 이것은 여호수아가 그들을 다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도력으로,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12지파중에서 3지파를 부릅니다. 그들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절반을 의미합니다) 지파를 부릅니다. 부름의 목적은 ‘함께 함’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려면 요단강을 건너서 강 서쪽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 3지파는 요단강 동편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신 3:20). 그들에게는 구태여 요단강을 건널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일 아닙니까? 괜히 자신들이 피 흘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들을 도우라!”(14절) 이 말은 우리만 피흘리며 손해볼 수 없다는 여호수아의 잔꾀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는 이 일이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말한 것입니다(13절). 어느 지파도 요단을 건너는 일에는 열외됨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에는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부분을 놓고 우리 청년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여러분을 다스리라고 청년부 담당의 직분을 맡겨주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섬기며, 가르치고, 권면하고,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기 위해서 이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우리 청년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청년부에 무엇보다 유사(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청년부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섬기며, 봉사할 ‘리더’의 필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리더로 키우기 원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영향력있는 참 신앙인”으로 만들기 원합니다. 여러분! 저는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을 부를 때, 그 자리에 포함된 유사(리더)들을 상상해 봅니다. 참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여호수아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고, 나를 부르시다니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 리더로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을 기대합시다!

     두 째로 저는 “하나되는 청년부”가 되어야겠다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청년부 일이라는 것이 알고보면 참 힘이 듭니다. 상처받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남몰래 눈물 흘리는 것이 바로 청년부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회생활하는 것도 참 힘이 드는 일인데, 교회에서까지 피곤한 일을 맡아야 합니까? 교회일에 열심인 몇몇의 극성파들만 있어도 되는데, 꼭 내가 필요한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이 피곤한 일을 맡아야 합니다. 극성파가 있더라도 꼭 당신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이 없으면, 우리 청년부는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환경을 몰라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휴가를 내기도 참 버거운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상처받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 갈등하다가 두가지 일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왔던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함께 하기 싫어서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함께 할 수 없어서 함께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만은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는 청년부가 못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 청년부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4)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합시다(1:16-18)

     한 세대 전인 40년 전만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다른 반응을 하나님께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이라는 천성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아니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라고 뭐 다른게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예!’였던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원래 쓰여진 히브리어를 보게 되면, 이 짧은 구절속에 '다'(all)라는 단어가 5번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굵은 글씨로 표시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입으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온전히 하나되는 참 연합을 이루는 청년부를 꿈꾸었으면 좋겠습니다.


16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18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3. 말씀을 마치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녀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자녀에게 숲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자녀의 담력을 키우게 했습니다. 토끼나 강아지와 함께 밤을 지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눈만 감으면 나를 덥치려는 듯한 늑대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 그런 밤을 지세우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런 밤을 지세우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밤을 지세우는 것입니다. 눈물나는 혼자만의 밤을 지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고 점점 날이 밝아오면서 아이는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녀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자녀는 밤이 무섭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늑대의 울음소리가 무섭지 않으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떨지 않습니다. 눈물나지 않으며 혼자만의 깊은 밤이 이제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젊음의 때가 용기가 훈련받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디 우리 모든 청년들이 하나님을 굳게 붙들며, 삶속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참된 용기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