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로버트 쿠트, "신명기적 역사가의 주요 관점"

진실과열정 2005. 10. 2. 21:26
신명기사가적 역사의 주요 특징들

    R. Coote.  Main Features of Deuteronomistic History.


신명기 역사서의 주요 특징들

여호수아서는 신명기 역사서로 거의 400여 년에 걸쳐 편집되어진 다양한 자료이다.  성경 세계에선 국가, 정치, 종교는 분리되지 않는다.  여호수아서에서 나오는 용어들을 종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성지와 제의란 용어가, 현대영어에서 사법권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지만 고대 성경의 세계에선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역사는 약속된 땅이 유지되려면 순종과 특별한 성지와 제의가 지켜져야만 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신명기 역사는 모세에 의해 율법이 전달되어진 때 시작된다. 율법을 지키면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하고, 적들이 백성을 억압하며, 사사들이 비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모세의 율법은 유일한 한 성지(신 12:1-14,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찌니라)에서 제사 드릴 것을 말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나 다른 산당들을 허용하여, 야훼는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다윗의 가계로부터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다윗의 가계에 되돌려져야만 했다. 여로보암이 벧엘산당의 제사를 시작할 때 유다 출신의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후에 나타날 요시아가 이 성전(세겜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왕상13:1-6).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통치권을 앗시리아 왕에게 빼앗기나, 벧엘의 제사는 바뀌지 않고 남는다. 이후, 기다리던 요시아가 나타나 성전 수리 중 모세의 율법을 발견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던 우상들을 파괴하면서, 통치권을 다윗의 영토 아래로 다시 가져왔다.

요약하면, 신명기 역사는 여호수아이래,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들의 땅을 얻었는가를 말하고,  다윗의 가계가 왜 그것을 잃었으며, 요시아 아래서 회복을 본다 는 이야기이다(cf 왕상23:19-20). 만약 실제적으로 요시아의 재정복이 일어났다면, 신명기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명백하게 재정복의 포함을 보여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선언과 모세의 율법과 땅의 정복으로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 회복과 땅의 재정복으로 끝난다. 다윗 가계의 바벨론 추방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요구했다. 여호수아23:15-16(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모든 불길한 일도 임하게 하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 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망하리라)은 추방에 대한 경고이다.

요시아의 재건은 신명기 역사의 목표이고, 여호수아서의 정황을 설명하는 사건이다.  요시아의 재건은 통치자가 성소와 성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개혁한 실제 사건으로 빚 삭감의 개혁 법률을 선언했다. 아테네에서 드라코(Draco, 624 BCE)와 솔라(Solar, 594 BCE)의 개혁은 요시아와 거의 동시대이다. 그러한 개혁법의 중심은 빚 면제였다.  빚 경감의 다른 형태는 빚 노예의 해방, 이자의 제한, 대부에 대한 규율을 포함했다.  이 모든 것이 요시아의 신명기사가적 개혁법에서 발견된다(신 15:1-18; 23:19-20; 24:6, 10-13, 17-18).

개혁법에 관련된 성경 텍스트를 연구한 체이니(Chaney)가 그것들을 요약했다.  고대에서 하층계급은 무거운 빚에 눌렸고 누적된 빚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위협했다는 것이다.

빚 개혁의 목적은,(1)정부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제적 위협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앗시리아와 확대된 상업화는, 대여와 세금과 빚의 조작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서 경작 농지에 집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시아의 개혁에 있어 빚 탕감이 해결책이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2)통치자의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며, 백성과 약자와 장애자들을 잘 돌보는 관리로서의 공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시아의 개혁은 앗시리아의 통치 80년 후 시작되었는데  상업화의 성행으로 가중된 빚에 대해 통치자들은 무감각했으며, 빚 경감 책에 대해 무책임과 강팍함으로 일관하여, 요시아는 정의를 세울 정책이 필요했었다.  

(3)통치자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약한 엘리트계급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 경제적인 통치 계급자들은 경쟁하는 계급이다. 8세에 왕이 된 요시아는 섭정자의 힘을 무력화하기 위하여 엘리트 세력의 힘을 얻어야만 했다. 정치 권력과,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그들의 존속을 위해, 계획된 빚 감면 정책을 공포했다. 

빚 감면 정책은 오늘날 칭찬 받을 만한 정책일지 모르나, 가나안 토착민에 대한 인종 청소에 관한 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윤리적 경계의 바깥으로 여겨진다. 여호수아의 세계는 우리 세계와 일치하지 않으나, 우리 는 고대의 상황에 주의를 요해야 한다.

요시아 개혁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고려는 왕국의 개혁에 대한 전형적인 요소들에 기초한다(왕하22:3-23:24). 성전 수리, 빚 감면 개혁법의 공포, 제사와 재판권의 중앙집권, 국경확장 등 군주의 통치권, 재판권 형성과 강화에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고대 근동에서 성전수리는 왕조의 강한 통치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성전재건과 동일하다.  다윗 왕조에서 성전 수리를 명령한 유일한 사람이 요시아였다(왕하 11:1-12:16). 요아스와 요시아는 공통점이 많다. 그들의 아버지는 암살 당했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요아스의 유년기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다윗가의 적극적 복구로 시작되어서 오므리 왕조의 남은 세력에 대항했고, 요시아의 왕정의 회복은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외국의 절대군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되어졌다. 이 두 절대군주는 성전중심의 빚 개혁에 대한 필요를 제시하면서 특수하게 상업발전을 촉진시켰다.

성전수리 과정에서, 힐기야는 모세의 오랫동안 잊혀지고 폐지된 율법을 발견한다. 이 율법은 여호수아서(수1:7-8,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이 율법첵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와 매우 유사하다. 신명기사가적 역사 안에서 “율법의 기록”은 군주적 요소를 갖고 있다. 개혁에 있어서 율법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요시아 아래서 구성되어졌을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정복하려고 하는 땅을 지키기 위해서, 근본이 되는 율법을 소개했다. 모세의 율법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땅도 없다. 율법을 거역했을 때, 이스라엘은 땅을 잃는다. 땅을 회복하는 유일한 희망은 율법의 회복이다.

다윗가는 야훼 성전을 포함하여, 불법의 다른 성소들을 만들었다(신12:2-12; 12:29-13:18).  야훼의 존재는 야훼의 이름을 통해서 표시되는데, 야훼의 이름은 종교적이고 재판적인 면을 포함한 정치적인 성격을 의미하며, 예배와 경배를 불러일으키고 판결에서도 중요하다.  4경에 언급된 E 자료에서(출18:13-27,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았고... ) 재판관으로서의 모세에 대해 요시아는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다윗적인 재판과 통치적 목적을 위해 완전히 지배된 백성을 10 가정마다 복종된 그룹들로 조직했다(신1:9-18, 신16:18-20)

요시아는 앗시리아인에 의해 수입된 우상에는(왕하17:29-31) 모호한 입장을 취하지만, 불법한 성전을 섬겼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들을 파괴할 것을 명했다.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취하는 것은 요시아에 대한 군사적 폭동까지도 염두 했던 분명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요단 저편에서 모세가 죽을 것이라는 선언뿐만 아니라 “이날에 모세의 매장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신3:4-6)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요시아와 그의 세력이 관리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 모세에 대한 관점을 앞세운 통치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보여진다.

중앙 성전의 중요 의식은 육축을 드리는 희생의 제사다. 신명기사가는 어디서, 어떻게 고기를 먹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다(신12:13-27; 14:3-29). 이 주제는 신명기(15:19-23)에서 회복된다. 그리고 중앙 성전에서 세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율법의 명시로 계속된다(신16:1-17). 덧붙여서, 중앙화를 고려한 율법의 선언에서 예루살렘 이외의 성전에서 관할하던 유다지파의 제사장의 배치를 다룬다. 그것은 중앙 성전의 감독 하에 만들어졌으며 왕국 전역에서 실행되는 것이 기대되어졌다.(수:21)

신명기15장에서 역사가는 두 번째 중요한 강조를 하는데 그것은 빚 감면이다. “7년의 끝에 너희는 모든 빚을 감면할 것이다”는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기로 언약했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지켜졌다.  프릭(Frick)이 지적한 대로 신명기사가적 역사는 사경과 같이 “국가적인” 동일성을 제시한다.  첫 번째 신명기외의 역사에서 빈곤 개선에 약간의 흥미를 갖는다.  성서 역사속 통치자의 개혁에서 유사한 법들이 있었으나(출22:25-27; 레25:8-55; 느5:1-13), 빚 감면이 예언적 신탁(사3:13-15; 암2:6-8; 렘34:8-22 신15:1-18)과 왕의 개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15:11에 기술된 조건은 자주 오해되어진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이 구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마26:11; 막14:7; 요12:8); “가난한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려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신명기의 히브리 텍스트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자들이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라고 말하고있다.  가난한자에게 꽤 많은 수입을 율법의 공식화한대로 주었고, 풍부한 땅의 소출을 주었다(신15:4). 대신, 그것은 너희가 땅에 들어갈 때.  “가난한자가 여전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를 말한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예외적인 이 입법에 대한 특징은 낙천주의와 그것을 표현하는 동정이다. 이스라엘인은 빚을 삭감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빚진 노예를 풀어주는 것과 빚 탕감의 또 다른 형태로 특별히 표현된다.  신명기사가적 관점에서 이집트로부터 구원을 되풀이한다(출2:1-6:27의 주석을 보라).

요시아의 개혁은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유다의 장로, 귀족, 제사장, 관리들과 초급사관에게 명령한다.  요시아 자신도 성전에서 발견한 모세의 전 율법을 읽고,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킬 것을 언약한다.  그리하여 조직된 나라와 백성들은 그와 결합한다(왕하23:1-3).

율법에 대한 복종으로 한 성전과 한 야훼께 대적되는 다른 모든 제사를 제거한다(왕하23:4- 14).  바알 신전, 태양, 달, 별들의 우상, 아세라 등을 파괴하거나 소각한다. 이들은 다윗왕조의 무역 지속과 확장을 돕는 가나안의 신들이었다. “게바에서 브엘세바까지” 유다에 있는 모든 성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산당을 파괴한다. 요시아가(왕하23:8) 모든 제사를 폐지하나 제사장들은 그들의 지역에 남겨져, 모든 헌물이 소유되는 중앙제사에 의존하게된다(왕하 2:9). 이것은 제사의 중앙 집중화에 수반되는 경제적인 착취의 표현이다.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다윗 성전의 감독으로 강제 임명된다. 학자들은 오지에 있는 제사장들이 다윗가에 의해서 임명된다는 이론을 세운다(수21:1-42). 유다에 대한 요시아의 정화의 절정은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산당의 파괴로 이어진다(23:13-14).  개혁자들의 관점에 있어서 다윗가가 이스라엘을 빼앗긴 이유는 산당들 때문이었다. 이처럼 유다를 정화하면서, 요시야는 다윗가를 탈환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의 제단에서의 유다로부터 온 사람에 대한 고대의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그 제단은 수대에 걸친 이스라엘 열왕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미움을 받는 구역들- 다윗 성전에서 발견된 문서에 기록되었듯이 처음부터 비난받던 구역들 - 에 대해 허가해 주었던 제단이다. 요시야는 벧엘(23:15-18)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하에서 설립된 산당들을 파괴해 나간다.  요시야는 유다에 있는 산당들의 제사장들은 살려두지만, 이스라엘에 있는 제사장들은 학살한다. 요시야는 이스라엘 지역 내(왕하 17:34) 앗시리아의 종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왕들이 만들어 놓은 산당들을 공격했다(왕하 23:19).  

요시야 때의 사가는 고유 종교들과 외래 종교들의 명백한 구분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의 중요성은 요시야가 앗시리아인들의 저항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시야는 앗시리아의 구역을 정하고, 이 지역에서의 앗시리아 정책을 수용하고, 이들의 토지소유와 재산들을 보호했다. 요시야의 관심은 가나안 사람들과 여호수아가 얻고자 싸웠던 땅에 사람들을 정착시킨 구분된 그룹들에 해당하는 동시대의 거주자들 모두이다. 이들은 가나안, 히타이트, 히위,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족속(수 3:10; 9:1; 11:3; 12:8; 24:11; 후에 그들은 이상적으로 숫자상 열한 개로서 간주되었다)의 조합으로 불리는 가나안의 “민족들”이었다. 후대의 구분은 아모리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고지대의 원주민이고 가나안인들이 저지대의 원주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민 13:29;수 11:3; 13:2-5).

북 이스라엘 멸망후 지도자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해산, 추방당했고, 백성들은 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신명기사가에 의하면 이들은 벧엘의 종교와 토지 소유와 특권들을 넘겨받기 위해 그 법규들과 관할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왕하 17:24-28). 그리고 이것들은 요시야가 벧엘을 약탈했을 때 폐지되었다. 벧엘과의 협정 이후에 만들어져서 요시야의 재정복에 뒤이어 계속해서 행해졌던 그들의 종교는 지주들의 충성에 대한 부담을 예루살렘에게 거의 주지 않았다. 사가들이 왕하 17:24-41에서 설명하고 있듯 이 백성의 후손들이 더 이상 야훼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벧엘이 파괴되었기에). 그리고 이스라엘 지방에서의 토지소유의 범위를 벗어난 대부분은 다윗가의 관할권 아래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시야의 개혁을 가능하게 만든 사건은 일시적인 권력의 공백을 남긴 기원전 7세기 말엽의 앗시리아의 멸망이었다.  앗수르바니팔은 627년에 죽었고 니느웨는 612년에 멸망했다.  609년에 이르러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벨론에 의해 빠르게 대체되고 있었다.  여기에 바로 요시야의 개혁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견해들이 바뀌었다.  앗시리아인들은 앗시리아 신들에게 예배하는 민족들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고, 요시야의 성전 정화와 유다의 종교들이 반 앗시리아적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신명기사가는 지방 사람들과 토착민들과, 앗시리아인들에 의해 새로이 들어온 사람들, 즉 바빌론, 구스, 하마스의 사람들을 구분한다. 요시야는 토착종교들을 공격한 것이지 앗시리아에 의해 새로이 이주한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요시야 시대의 사가는 앗시리아에 관해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앗시리아인들은 히스기야 시대에 상당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취급받는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에 대항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신명기사가적 관점은 사마리아의 멸망을 다루는 데서 잘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설명보다 우선한다. 여기서 앗시리아의 왕은 단순히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왕하 17:1-34).요시야는 아마도 그의 통치 말기까지 명목상 반 앗시리아 쪽에 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요시야의 개혁이 반 앗시리아적이란 증거는 신명기사가적 역사에 있어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북쪽의 종교에 대항하는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중요하게 보아야한다. 새로운 이주자들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요시야시대의 사가들은 요시야의 재정복을 위한 원형으로서 여호수아의 시대를 삼는다. 재정복 안에서 장기 거주자들인 “아모리”와 “가나안”의 농사꾼들과 장사꾼들이 정복의 주요 대상이다.  

요시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두개의 최종적인 행동으로 그의 개혁을 마무리했다.  

첫 번째는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왕하 23:21-23).   신명기사가적 모세의 율법은 절기가 중앙 산당에서 지켜질 것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개혁법안처럼 이것은 급진적인 혁신이다.  사경에 묘사된 바와 같이 유월절은 본래 지역적이고, 가정적인 의식으로 확장된 가족에 집중되었다. 이미 신 16:1-17에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요시야가 그러한 확장된 가족의식들을 억압하고자 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신명기사가적 개념으로 보면 유월절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모형론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 다윗의 “나라”로서 그 나라의 역사는 유월절과 함께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첫 번째 유월절은 민족의 요단 도하에 의해 나타난다(수 3:1-5:10). 그 땅에서 첫번유월절의 두 번째 날에 만나가 그치고, 온 민족이 그 땅의 소산을 처음으로 먹는다(수 5:11-12). 두 번째 유월절은 요시야 때 그의 개혁을 결정할 시점에 찾아온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한 역사상 첫 번째 유월절이다. 단지 이것 때문에 요시야는 신명기사가적 측면에서 이스라엘 열왕들 중 으뜸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 것일 것이다.

두 번째는 유다로부터 “신접한 자들, 박수들, 드라빔, 우상들, 그리고 모든 가증한 것들을...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제거한 것이다(왕하 23:24). 이것은 신18:9-14에 언급된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찌니라”(18:15)라고 말하는 본문과 함께, 금지에 대한 부담은 분명하다. 신명기사가적 역사에 있어서 실제로 모세처럼 보이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가 다시 나타나는 유일한 방법은 요시야의 선동에 의해 성전에서 발견된 문서 안에 존재한다. 이 문서의 신빙성은 선지자 훌다에 의해 확인된다. 그래서 심판, 지혜, 혹은 진리를 위한 더 이상의 조사가 필요치 않다.  

요시야 개혁의 정치적인 정황

요시아 개혁의 정치적인 정황은 여호수아 이야기를 위한 주요 배경을 형성한다.  요시야의 후원은 두 가지 정치적인 세력들로부터 기인했다.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와 그 동맹국인 앗시리아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 깊은 뿌리를 가진 비 예루살렘계 가족인, 특별한 지방의 가족과 그 동맹들과 예속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성원은 예루살렘의 북쪽 벤야민 지파에 속한 아나돗 출신의 예레미야였다. 이 가족은 실로로 돌아가는 계보를 따랐다. 그리고 민중교정을 진척시키려고 갈망했다. 엘리야, 엘리사는 모세의 모습에 가까웠다. 실로의 산당으로부터 나온 선지자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 붓고 사울의 지위를 찬탈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선지자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다윗가 찬탈을 허가한 사람이다(왕상 11:29-39; 12:15).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서, 이스라엘의 종교를 회복했을 때 실로를 지나갔다. 여호수아서에서 베냐민으로부터 온 전통들의 중요성과 이집트 혹은 앗시리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요시야를 위한 이중 자료들의 직접적인 반영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후원자들조차도, 요시야의 요구에 열성적이지 않았다. 신명기 역사는 적들을 폭넓게 다룸으로써 중앙화를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적들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은 여호수아서를 해석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다양한 ①가나안인들은 요시야의 재정복과 여호수아에 의해 시행된 땅의 소유권들에 대한 재배치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 다음으로 사사기의 “구원자들” 혹은 “사사들”에 의해 대표되는 ②지역적 영웅들이 있다. 이것은 사울왕 때 최고조에 이르는데, 적법한 왕의 부재 상황하에서 이스라엘은 신명기사가의 중앙 집중적인 법과는 반대로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다음은 사울의 집안과 지지자들로부터, 다윗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나온 ③다윗의 대적자들이 있다. 그 다음은 동맹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가의 요구들과 예루살렘의 종교를 거절한 ④이스라엘의 몇몇 왕조들(특히, 여로보암 1세와 아합)이 있다. 만약 그의 정복과 정치적 지배 계획이 성공했다면, 이 모두가 요시야의 전성기 때 그가 정복해야 할 대적들의 유형을 나타낸다. 벧엘의 히엘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리고와 같은 전략적인 장소들을 요새화 한다.(수 6:26; 왕상 16:34) 이들은 벧엘의 규범들을 따르는 이스라엘과 앗시리아 지방들의 본토 지주들과 상인들, 인기 있는 지역 군사, 정치지도자들, 무법자들, 다윗가를 지지하지 않는 예언자들, 라이벌인 엘리트 집안들로, 다윗가로부터 이스라엘의 주권을 적대적으로 요구하는 자들이다.  

요시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가나안인들-이들은 지주들과 도시 엘리트에 의해 선두에 서게 된 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의 대적자들이다-은 학살당할 만 하며 그들의 모든 재산은 군주에 의해 파괴될 만 하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 인종정화정책(a policy of ethnic cleansing)을 폈다. “민족주의”라는 면에서 “가나안”이라는 범주는 “이스라엘”이라는 범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구조였지, 불변하는 역사적 실재가 아니었다. 성경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가 그 용어를 이해하는 바와 같은 동일한 나라들은 없었다. 실제로 모든 인종차별, 민족 정체성과 같이 “가나안”과 “이스라엘”과 같은 범주들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었다.  

신명기사가적 역사 전체에 다루어진 요시야에 대한 대적들은 여호수아서(수3:10; 신7:1; 수11:3; 행13:19)에 명명되었듯이 일곱 개의 “크고 강한 나라들”로 나타난다.  신명기사가적 개념으로 이들은 가나안 땅의 본래의 거주자들로서, “가나안인들(Canaanites)”은 이들 가운데 단지 한 그룹이었다. “가나안”은 남동부 지중해 해안과 그 후배지(後背地)를 일컫는 불특정한 기원을 가진 일반적인 용어였다. 현대의 인문학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땅”이라는 용어들이 사용된다. “가나안”이라는 용어는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이스라엘 여인들의 전쟁노래들에서 “가나안의 거주자들「즉, 땅을 소유하고 있는 엘리트」”(출15:15)과 “가나안의 왕들”(삿 5:19)이라는 구절들에 등장한다. J 문서에서는 다윗의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될 운명에 대해 언급한다. J 문서는 다윗을 가나안 정복을 위한 후기 신 왕국 전투(post-New Kingdom struggle for Canaan)에서 이집트 왕과 경쟁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의 부족 전통들을 그처럼 함축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J 문서에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서 신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거대하게 경작된 땅(사 7:18-25 참고)이며, 그 인구는 함(창 10:15-18)으로부터 계승된 “가나안” 엘리트인 도시 거주자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었다. 성경의 몇몇 본문들에서는 “가나안인(Canaanite)”은 “가나안 왕들”의 관리들인 “상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본문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이 습 1:11(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인데, “가나안 사람들”은 장사하는 사람으로 저주를 받는다. 아마도 요시야 시대에 기록된 것 같은 이 본문에서 “가나안 사람들”은 요시야가 억압하기로 결정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신명기사가적 사가(史家)는 초기 이스라엘의 다윗가의 역사로부터 “가나안”이라는 용어를 가져다가 거기에 “상인”이라는 뉘앙스를 덧붙인 것 같다.

여전히 전통적인 원천들을 사용하면서 그리고 그 자신의 독립적인 지식도 없이(예를 들어, “민족들” 가운데 여섯 개가 아마도 본래의 J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출 3:8에 제시되어 있다.) 신명기사가적 사가(史家)는 일곱 “민족들”(가나안족속, 아모리 족속, 헷 족속, 히위족속, 기르가스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맛소라 본문에서는 일곱이라는 숫자의 그룹은 신 7:1; 수 3:10; 24:11에서만 나온다) 가운데 고대 엘리트계급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살게 한다.   몇몇은 성경 밖의 역사적 기록에서 나타난다. 특히 “히타이트”와 “아모리”의 경우인데, 이것은 셈족의 용어로서(“서부지방사람”을 의미) 지리적 명칭으로 “가나안”과 같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오늘날 지중해 해안과 가나안 북쪽의 후배지에 해당한다.  현대의 사가(史家)들이 이러한 “민족들” 가운데 적어도 아모리 족속, 헷 족속과 같은 민족들과 히위 족속까지도 요시야의 시대보다 훨씬 전에 살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사가가 다윗가의 서기관들처럼 이 모든 “민족들”이 가나안의 토박이인 “이스라엘”과는 다르다고 믿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본래의 엘리트들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의 아들들과는 구분되는 함의 아들들인 “민족들”에 대한 J의 족보상에서 모두가 “가나안인들(Canaanites)”이였다.

요약하면, 역사에 있어서 사울과 다윗 이전에만 두드러진 “가나안(Canaan)”과 “가나안인(Canaanite)”에 대한 이해로 인해, 신명기사가는 더 많은 조사를 할 필요 없이, 단순히 그가 속했던 다윗가의 기록된 전통을 따랐다. “고대의 가나안 땅”은 다윗가에 의해 통치된 이스라엘에 소유될 운명이었던 영토였으며, 가나안의 본래의 “거주자들” 혹은 “왕들”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고, 수 12:9-24에 있는 가나안의 31명의 왕들(소도시 군주들)의 목록은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가나안의 왕들”의 땅으로서의 다윗 이전의 가나안에 대한 개념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런 가나안에 대한 개념은 다윗보다 훨씬 이전의 가나안의 소규모 국가들에 대항했던 부족 적 이스라엘 가운데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가나안"에서의 다윗의 주권이라는 정황 아래서는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이 아닌(not Israelite)”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동시대의 정치적인 정체성의 허구적 표현으로서 그것은 “다윗가의 주권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요시야의 개혁에 반복된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는 신복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압제 정치와 협박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한다. 요시야는 소작농들과 저항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협박하여 순종 할 것을 명하며, 순종이 민족적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정복 내러티브의 주된 목적은 내부적인 적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다. 영향력 있는 요시야의 사가(史家)는 조직의 이상적인 포괄구조와 정부의  권위에 순종케 하기 위해 격려와 협박으로서 전쟁과 민족주의의 수사학을 사용한다. 폭력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쟁문학이라는 역학(dynamics)은 나 자신과 남, 우리와 그들 사이의 구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호수아서에 있어서의 가치들

여호수아서에 관한 상당 부분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민족정화란 명목 하에, 잔혹한 강탈과 본토인들과 여자들, 아이들의 대학살 등이 하나님에 의해 눈감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지시되었다는 것은 용납이 안되는 것이며, 정당성의 문제가 있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자행되었다는 것은, 평화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자신들의 신앙과 조화될 수 없기에 여호수아서를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호수아서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성구집 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거슬리는 구절들은 무시되고, 단 세 개의 구절들만을 제시하고 있다 - 요단 도하(3:7-17),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킴(5:9-12), 세겜에서의 언약(24:1-3,14-25)- 반면 “나와 내 가정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는 두 번 포함되고 있다. 이처럼 “가족의 가치들”에 맞추어 내용을 선택, 삭제하는 것은 여호수아서와는 독립적으로 나가려는 경향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긍정적인 가치들을 추출하기 위해 여호수아 내러티브를 추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실패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은혜의 중요성, 성실, 권위에 대한 복종, 공동체의 단결, 가족, 성급한 복수의 제지와 중요성을 말한다. 이것은 여호수아서의 본문을 삭제 처분하는 것으로부터 구조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회피식 접근을 통한 연구는 필요치 않으며, 주석적인 것 또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여호수아서에 대한 연구의 목적은 여호수아서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를 위해 순전한 가능성과 개연성들, 불확실성들, 난제들, 그리고 틈새들을 모두 이용해야 한다. 역사적 정황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가치들은 다양하고 혼합적이며 애매모호하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본문 내에서조차도 해석상의 이슈들이 발생한다. 요시야는 그의 가난한 신복들을 위해서 부채경감 프로그램을 공표함으로써 중앙집중화의 힘들을 끌어 모았다. 그것이 실행되었다면 신복들의 가난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의 동정심들을 동원한 것인가? 어디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는가?  확신할 수 없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서에서 발견이 된다면 반드시 파악이 되어야만 한다.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사회적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서 흉악성, 폭력성, 압제 등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의 유사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통찰력의 요점은 우리의 죄악들을 과장하거나 그것에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고, 보다 위대한 현실에 직면하라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는 우리로 하여금 신화화된 의식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