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일기[03]-출애굽기 3장
“나는 너와 함께 있다”- 야웨의 자기 선언
|
준비운동 |
|
|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구원신앙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세가지 핵심 키워드를 가지고 접근한다. 즉, 생활의 재발견, 말해주는 이야기, 역사의 흔적이라는 생각을 성서를 통해서 얻게 된다. 오늘도 본문과 씨름하며, 고민하고, 갈등하며, 결심하는 신앙의 역동성을 경험하자. | |
|
0. 출애굽기 3장
일단 오늘의 본문이 되는 출애굽기 3장을 읽어보자. 지난 시간과 달리 오늘의 본문은 산문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특별히, 본문은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를 보여주고 있다. 아래와 같이 대화내용에 형광색을 칠하고 읽게 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 4b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 9“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15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 1, 4b, 6, 9-15)
1. 생활의 재발견: 이스라엘의 ‘신앙’은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중하게 위의 본문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펄펄 끓었던 젊은 피를 억제할 수 없어서, 자기 민족(출 2:11에 의하면, ‘자기 형제’로 모세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을 억압했던 애굽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도망자의 삶과 은둔의 깊은 터널을 이제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시작점이 바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운명이었다면, 그 절정(클라이막스)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모세(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모든 인류를 의미할 것이다)에게 알려주시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선포사건일 것이다. 그 이후의 되어지는 일들은, 즉 실제적인 출애굽 사건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들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 이후에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명한 결과였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본격적인 등반의 첫코스로 출애굽기를 선택하게 되었다. 성서라는 거대한 산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누구며, 그분은 어떠하다’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본문보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3장의 본문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물론, 모세이전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며,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강조에서도 그렇고(출 6:2-3),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인식에 있어서도 그렇고, ‘신앙’의 시작은 출애굽 사건이었음이 분명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박국 3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왜 느닷없이 하박국인가? 하박국은 남유다가 멸망을 눈앞에 둔 시대에 부름받은 예언자였다. 하박국은 여호와께서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셨음을 깨달았지만(합 1:6), 그 바벨론 역시 여호와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호소한다(합 1:13). 결국, 여호와는 새로운 일을 일으킬 것이라고 신앙인들을 위로하신다(합 2:14,20). 그런 다음에, 하박국이 기도한 내용이 바로 3장에 나와 있으며, 그 중에 3절이 바로 위의 내용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3절의 상반절이다. 시편 24편을 공부하면서 살펴본바와 같이, ‘셀라’라는 표현이 사이에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처음 두 줄은 하나의 시였음을 알게 된다. 이는 3장 1절에서 ‘시기오놋’에 맞춘 하박국의 기도라는 언급에서 확실해진다. ‘시기오놋’은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식가욘’의 복수형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형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박국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겨 불러왔던 부분을 인용하면서(3:3a), 자신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합 3:19). 결국,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라는 노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이스라엘의 신앙의 표현이었다는 말이다.
이제 관심을 ‘데만’과 ‘바란 산’에 두어야할 차례이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일, 즉 구원하심이 ‘데만’과 ‘바란 산’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왜냐하면, 이들 지명은 한마디로 ‘남쪽’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오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남쪽에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이 있었더라고 기억했던 것이다. 기원전 약 600년경에 와서 하박국은 동시대 사람들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읽은 ‘호렙산’의 정확한 위치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대로 기억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오늘날 ‘호렙산’ 혹은 ‘시내산’은 그 누구도 모른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인식이 바로 출애굽에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이스라엘 자신들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희미한 기억의 시작은 바로 신명기 26장 5-9절에 있다:
(모세가 말하되) “너(이스라엘 후손들)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위의 본문은 죽음을 앞둔 모세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명심해야할 말씀으로 가르쳐 준 것으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대대로 지켜야할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출발점이 출애굽에 있다는 신앙고백이었다.
위의 두 가지 예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자들이 잘못된 이스라엘의 신앙을 바로 잡으려고 할 때,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시키려고 했다(왕상 8:53; 왕하 17:7; 렘 31:32; 호 11:1; 암 2:10; 미 6:4).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를 비롯해서 다른 사건들(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어떠한가?)을 제쳐두고 왜 ‘출애굽’이 가장 기억에 남아야만 했을까? ‘출애굽’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출애굽’이야 말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에게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사건에서부터 모든 것(과거, 현재, 미래)은 새로워지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는 나의 구원받음과 같은 원리이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바로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확신이라는 경이로운 경험이 아니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의 중요한 특성을 깨닫게 된다. 성서는 하나님을 경험한 증인들의 증언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경험들은 어떻게 보면 매우 주관적이며 선택적으로 남겨져왔다(‘위대한 총리’ 요셉은 창세기 이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 성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대대로 전수되는 일기와 같다. 그래서, 성서는 생활의 재발견이다. 성서는 생활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 성서의 주제이다.
2. 말해주는 이야기: 문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깨닫게 된다.
성서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귀를 잘 기울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목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을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가면서 그 목소리를 들어볼 것이다. 하지만, 번역(한글성서 자체가 ‘한글로 번역된’ 성서임을 기억해야할 상황이다)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관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하면서 읽고 들어야한다.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본문에 접근할 것이다.
우선 1절을 보자:
1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게 되었을까?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모세는 ‘호렙산’이 하나님의 산임을 알고서 갔다는 뜻인가? 그러고 보면, 1절은 모세 자신의 의지가 많이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독자인 우리[혹은 이 말씀을 읽었을 사람]가 이미 알고 있는바와 같이) 호렙산에 도착해서 보니까 여기가 하나님의 산이었음을 알았다는 뜻일까?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해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산’이라는 말 자체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즉, 우리는 ‘하나님의 산’이라고 하면, 우리가 믿는 ‘그분’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아닌 다른 차원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호렙’은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황폐한 곳’이라는 뜻이다. 호렙산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가지 않는 산을 뜻한다. 왜 가지 않겠는가? 쉽게 오를 수 없는 높은 산이기 때문이다. 항시 구름에 덮여 있어서 정상도 알아 볼 수 없는 그런 산을 생각해보라. 그런 산이라면 어떤 수식어가 붙겠는가? 그 누구라도 신령한 산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떨쳐놓아야 할 선입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단어인 것이다. 이렇게, 선입견을 떨쳐놓고 보면 다음과 같다: 모세가 평소와는 다른 길로 양을 이끌고 매우 큰 신령한 산에 도착했다.
이제, 4절을 생각해보자:
4b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처음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매우 간단하다. 원어인 히브리어를 보면 정말 그러한데(하나님은 ‘moshe’라는 한단어를 두 번 반복하고, 모세 역시 ‘hinneni’라는 한단어로 대답한다), 우리말 번역과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즉, 1절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읽었던 것처럼, 하나님과 모세는 너무나 익숙한 만남(“네! 하나님! 절 부르셨습니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가 않다. 모세는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있다. 바로, 그들 간의 대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모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모세! 모세!” 그런데, 모세는 이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누구지?”
이제 6절을 살펴보자:
6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신령한 음성은 자신의 정체를 한꺼풀 벗기신다. 범상치 않은 음성의 주인이 바로 모세 자신의 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신비는 조상들의 하나님(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요셉은 없나?))이었다. 즉, 모세 자신과 상관없는 분이 아니라, 모세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듣고 ‘두려워 얼굴을 가리우게’ 된다. 여기에서 원어인 히브리어 본문의 포인트가 강조된다. 즉, 모세는 신(god)으로 인식했던 것을 자신의 신(God)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4절의 ‘하나님’은 원어로 ‘엘로힘’, 즉 그냥 신이다(아직 정체를 모르는 신령한 음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6절에서 정체를 알고 나서, 모세는 ‘그 하나님(원어로 하엘로힘)’ 뵈옵기를 두려워한다. 이제야, 모세는 조금이나마 상대를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모세는 모든 것을 척하고 알아챘을까?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것을?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9-15절까지는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놀라운 점은 설득의 방법에 있는데, 바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완전히 나타내시는 정공법을 선택하신다.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화를 보여준다. 9-15절은 팽팽한 대화이다:
9“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15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위의 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괄호는 히브리어 원어이다):
(a) 조상의 하나님(9-10절): “네 민족의 고통 내가 다 봤다. 이제 내가 너로 그들을 구원하려고하니, 바로에게로 가거라”
(b) 모세(11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c) 조상의 하나님(12절): “왜냐하면(키) 내가 함께 있잖아(에흐예). 장차 여기서 구원받은 백성들과 함께 있을거야”
(d) 모세(13절): “당신은 나에게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당신만의 이름은 없단 말입니까?”
(e) 조상의 하나님(14절): “나는 너와 함께 있단다(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f) 여호와(15절):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함께 있었던 것처럼, 모세 너와도 함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와(YHWH)야. 절대 잊지마라.”
차근차근 접근해보자. 우선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를 논리적으로 평가해보는 것이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a)에 대하여 모세의 반응(b)은 이해할 수 있다. 모세는 애굽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던가! 양치기 모세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c)은 마치 동문서답과 같다: “왜냐하면(한글성서에는 이를 번역하지 못했다), 내가 함께 있잖아” 아마도 모세는 ‘내가 네게 능력을 주리라!’라는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냐하면(키)’이라고 시작하면서 분명한 대답을 주시고 있다. 사람이 원하는 것보다 더 큰 비밀을 하나님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언급하자(c)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확신 없음을 교묘하게 위장한다(d). 조상의 하나님은 처음 모세의 질문에 대한 대답(c)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선언한다(e): “나는 너와 함께 있단다” 여호와(‘에흐예’로 쓰인 히브리어의 의미는 ‘있다[to be]’로, 이 ‘에흐예’의 3인칭단수표현을 한글성서는 ‘여호와’로 읽고 있다)는 드디어 나타나셨다(f). 왜 여호와인가? 조상들에게 늘 함께 있었던 것처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늘 함께할 분이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의 속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름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까? 하나님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생님, 대통령과 같은 직분(위치)을 말하는 것이다. 즉 ‘신’이라는 위치를 말하는 단순명사가 바로 하나님(‘엘로힘’)일 뿐이다. 예를 들면, 미국사회에서 “Do you Believe in God?”하면, 거의가 “Yes”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서로 제각각의 신의 이름을 부른다! 모세는 ‘신’을 믿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조상들이 믿었던 ‘엘로힘’, 즉 ‘신’이다.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자. 신의 이름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이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 자신을 제한하는 약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웅(智雄)’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보라. 말 그대로 ‘지혜있는 수컷(남자)’를 뜻한다. 좋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약점이 있다. 지혜만 있지 힘과 돈은 없다. 과연, 그러했다. 출애굽기 6장 3절을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자신을 알렸다고 말한다. 이 말은 히브리말로 ‘엘(신)+샤다이(산)’인데, 이게 바로 신의 어떤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신을 말하는 방법이었다. 조상들의 하나님은 ‘산신’처럼 신비롭고 위대하는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 바다에서는?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름의 절대적인 한계이다. 애굽은 사막의 땅으로 그 영향력의 근원은 자연히 태양이었다. 그래서, 애굽인들이 믿었던 신의 이름은 ‘레(Re)’ 즉 태양신이었다. 그러니, 밤이 되면 애굽의 신은 어떻게 되겠는가(실제로 애굽에 내려졌던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출 10:21]은 태양신을 잠재우는 여호와의 능력을 말한다)? 한편, 가나안의 농경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비’였다. 가나안 인들은 태풍의 신으로 ‘바알’을 섬겼으니, 엘리야 예언자가 비도 못 내리는 바알에게 ‘언제까지 잘 것인가?’라고 했던 풍자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왕상 18:27). 바로, 이것이 이름의 내재적인 한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실까? 우리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이 어떠하다고 설명하시는가? 과연, 어떤 면이 부각되겠는가? 한글성서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이신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만물이 생겨나도록 하는 창조자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영향력에 무의식적으로 침해당하고 있으며, 본문 14절의 ‘스스로’라는 단어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어인 히브리어를 보면 ‘스스로’라는 단어는 어느 곳에도 없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처음이신 분’이라는 철학적인 사고는 본문에서 전혀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 “I am who I am” 이제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나는 나다.’ “모세야! 네가 감히 나의 이름을 묻다니? 나는 나다. 누구도 나를 제한할 수 없다.” 어떤가?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것일까?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없는 것이며, 소위 말하는 그냥 ‘그 분’으로만 통하는 것일까? 이것이 ‘여호와’라고 알려진 이름의 비밀이란 말인가?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4장 1절에서 이름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면 어쩌지요?” 모세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을 알았다. 즉, 여호와는 ‘지금 함께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모세가 여호와, 즉 ‘나와 함께 있는 분’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는데, 실상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 이름의 증표로 지팡이를 주신다.) 그렇다. 이제 ‘에흐예’(I am)의 의미가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무서운 밤길을 걷는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돈 많고, 힘이 쎈 외국에 있는 아버지’가 아니다. 바로 옆에서 같이 걷는 아버지이다. 12절이 바로 그 의미이다. 그리고, 조상들의 하나님 역시, 그들과 동행했던(함께 했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가 모세의 이 말을 듣고 비웃었다(출 5:2): “여호와가 누구냐?” 다시 말하면, “모세, 너와 함께 있다고? 어디에 있다는 거냐?” 그러나, 점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확인시키신다. 하나님이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칠 때에, 여호와의 백성들은 화를 모면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다. “나는 너를 구원하리라!” 어떻게? 구원이 뭐기에? 구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 영원한 교제(에덴의 회복)가 바로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뼈대이다. 그 하나님이 독생자로 오신 것이 예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among)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우리 속에 함께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했는가? 그러면 이제 여호와를 누려라!
3. 역사의 흔적: 본문의 문제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는다.
기독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글성서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는데, 개역(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새번역), 그리고 공동번역(공동번역개정판)이 그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서 개역성서는 ‘여호와’라고 하며, 표준새번역은 ‘주’라고 하고, 공동번역은 ‘야훼’라고 한다. 한편, 대부분의 영어성서는 LORD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고대언어인 히브리어의 자연적인 문제 때문이다. 즉, 14절에서 나온 “에흐예(I am) 아쉐르(Who) ‘에흐예(I AM)’”에서의 ‘에흐예’가 15절에서 3인칭 단수표현으로 ‘이름화’되었는데, 문제는 고대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이 없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잠깐만 생각해보자. 과연 모음없이도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일까? 사실 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종류의 시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a smpl tst 'f ths srt shw ths qut wll
(=> a sample test of this sort show this quite well)
좀 더 설명하면, 고대어인 히브리어는 자음만으로 기록되었고, 전통에 따라서 읽혀져 내려왔다. (사실, 아주 먼 옛날에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3%도 되지 않았고, 기록할 수 있는 도구가 열악했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서[즉, 모음까지도 아낀다!] 글을 남겨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글을 읽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모음 없이 읽어내려 오다가, 주후 500년 이후에 마소라 학자들이라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읽어왔던 모음을 드디어 기호화하여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으니,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신의 이름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감히 부를 수 없어서, ‘나의 주인님’(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이라고 했던 것이다. (성서를 많이 읽었던 사람이라면, 다윗의 아들이었던 아도니야(왕상 1:5)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아도니+야)의 뜻은, “나의 주인은 ‘야’입니다”가 된다. 여기에서 ‘야’는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즉, 마소라 학자들은 하나님의 이름만은 모음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신성한 4문자(왜냐하면, 그 자음을 영어로 표현하자면, YHWH이기 때문이다)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럽의 학자(독일)들이 연구하면서, ‘아도나이’(adonai)의 모음(a o a i)과 신성한 4문자 자음(YHWH)을 결합시켰다. 결국, YaHoWaHi로 해서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발음이 편하도록) 히브리어의 언어원칙에 따라서 모음을 수정하니, ‘여호와’가 되었다(독일식 발음으로는 제호봐가 된다). 한글개역 성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른 것이다. 한편, 영어성서는 대부분 LORD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유대인 전통인 ‘아도나이’를 그대로 영어화한 접근이다. 이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이 선택한 접근이기도 하다. 이를 표준새번역이 ‘주’라고 하면서 따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15절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여호와’와 ‘주’는 완전한 표현이 못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번역의 ‘야훼’는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된다. 즉,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흐예’는 1인칭단수표현이다. 이 말은 자음에 모음이 문법에 맞게 맞춰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5절에서 3인칭 단수표현으로 주어져 있는 YHWH에도 문법에 맞도록 모음을 붙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는 계신다!”라는 것이 바로 ‘야훼’, 영어로는 Yahweh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야훼’라는 발음은 영어발음을 따른 것(즉, Ya+hweh)이기에 정확하지는 않다(공동번역은 미국에서 공부한 분들의 영향력이 컸다!). 오히려, Yah+weh, “야(ㅎ)웨”가 바람직한 발음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웨’를 표준화한다. 이렇게 보면, 아도니야에서 ‘야’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아도니야는 “나의 주인은 ‘야웨’입니다”이다. 이젠, 성서의 인물들과 여러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파악된다: 엘리야(엘리+야: 나의 하나님은 ‘야웨’입니다), 히스기야(히스기+야: 나의 힘은 ‘야웨’입니다), 할렐루야(할렐루+야: ‘야웨’를 찬양하라!)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 다른 성서에서 서로 다른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평가해 본다면, 표준새번역의 ‘주’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출애굽기 3장에서 자연스럽게 읽어 내려왔듯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자기표현이었던 그 이름을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간과 가까이하려하심인 ‘야웨’ 즉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이름이, ‘주’ 즉 ‘주인님’으로 오히려 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신약 시대에 통용되었던 헬라철학이 구약 성서에 파고든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며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예수님은 가까이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어떠한가? 예수께서 지상에서 강조하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것이라는 선포였으며, 하나님 야웨를 우리와 만나도록 길을 열어주심이 아니었는가? 예수님의 존재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서구사회나 그 서구사회에 영향을 받은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아직도 남았음을 ‘주’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로 익숙한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야웨’라는 새로운 이름은 거부감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allergy를 ‘엘러지’로 하면 목에 기름낀 것 같아서 그냥 ‘알레르기’라고 읽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렇지만, 점차로 많은 사람이 ‘엘러지’가 맞는 발음임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려고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성서는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다. 즉,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의 손을 거친 상처들이 성서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라는 인간본연의 심성에 들어와서는 화석화되어질 때 문제가 된다. (혹자는 원래부터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부르지 말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음을 뺀 G-d라고 표현하면서, 읽을 수 없는 이름을 만들기도 했다. 이 얼마나 본문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인가!)
야웨가 우리안에서 ‘생동감’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성서에 대한 열린 자세를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이다. 기도할 때, 즉 그 분과 대화할 때, 당신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주여!” 즉 “주인님!”하면서 이것 저것 요구하는가? 생각해보면, 주인님 앞에서 종이 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 바로 겸손이 듣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주여!’라고 외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는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하라. 그동안 익숙했던 ‘여호와’이건 조금 생소하지만 이름의 뜻이 분명한 ‘야웨’이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대화는 당신과 바로 함께 있는 참 하나님(One God)과 이야기하는 지상최대의 사건이라는 사실뿐이다. ‘야웨’ 그 이름을 이제는 불러야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