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등반일기[02]-시편 24편

진실과열정 2005. 8. 25. 10:06

“누가 감히 이곳에 설 수 있는가!”-예배: 영광과 은혜의 장소

준비운동

오늘 우리는 짧은 성서본문을 선택해서, 합당한 질문(4가지)과 엉뚱한 질문(4가지)을 제기할 것이다. 무작정 성서를 읽는 것에서 벗어나, 성서와 대화하고 씨름하며 설득당하고 결심하는 신앙의 참맛을 경험해보도록 하자.


0. 시편 24편

   일단 오늘의 본문이 되는 시편 24편을 읽어보자. 속으로 읽든지, 입으로 중얼거리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한 마음으로 읽어보라.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을 그대로 타이핑 친 것으로 먼저 읽어보자.


1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5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이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어떤가? 무슨 내용을 전달하려고 했는지를 알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의 형태를 ‘산문’의 옷을 입혀서 내놓았기 때문이다. 시편은 무엇인가? 그렇다! 바로 ‘시’이다. 이번엔 ‘시’의 형태로 고쳐서 읽어보자.


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이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정말로, 성서를 읽는 것보다 더 즐거운 기쁨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시 119:70). ‘산문’의 형식으로 읽던지 ‘시’의 형식으로 읽던지, 일단 이것을 읽으면 우리는 어떠해야 될까? 읽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두는 소극적 신앙인은 잠깐 배제하고 생각해보자. 성서를 읽자마자 우리는 감동을 받아야 하는가? 그럼, ‘감동’은 무엇일까? 마음에 뭉클한 어떤 것? 혹은 가슴을 불태우는 뜨거움? 아니면, 성서를 읽자마자 우리는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걸까? 그래서 깨달음이 없다면, 깨달아질 때까지 몇 번이고 읽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많은 분들이 경험하듯이) 전기가 오르듯 찌릿하는 ‘그 구절’을 찾을 때까지 직관에 의존해야 할까? 예를 들면, 5절의 ‘여호와께 복을 받는다’라는 구절. 혹시 불행하게도 이러한 감을 잡지 못하면, 잡을 때까지 이곳저곳을 읽으면서 ‘말씀의 사냥꾼’으로서 최선을 다해야하는가?

   아무튼, 우리는 성서를 읽고 나서 제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쩌면 우리의 반응은 일관되지 못할 수도 있다. 정말로, “그때 그때 다르다.” 성서를 보는 눈을 훈련시키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것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며 최소한의 가이드일 뿐이지만, 진정한 등산인일수록 산행법칙에 충실하듯이 우리들도 이 가이드에 귀를 기울여보자.



1. 아! 시편 24편은 ‘시’구나! (1st question: 왜 시일까?)

   시편을 ‘시’처럼 읽는 것에서부터 이번 성서등반을 시작해보았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중요한 질문이다: “성서에 시가 있네! 왜 시일까? 그렇다면, 시가 아닌 것도 있겠네?” 그렇다. 성서를 읽으면서, 성서에 시, 편지, 이야기, 사랑이야기(아가), 슬픈 탄식(애가), 역사나열, 모가 뭔지 모를 황당한 이야기(묵시), 족보의 나열(역대상 1-9장), 의식 규칙서(레위기)와 같이 참으로 다양한 형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다양한 형식에 따라서 읽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건 마치 등반하는 자가 오를 산이 돌산인지, 흙산인지, 혹은 겨울의 눈덮인 산인지를 구별해서 장비를 갖추는 것과 같다. (불행하게도) 스파게티를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민족은 우리 한민족뿐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다양한 형식을 사람들은 ‘장르(genre)’라고 한다. 성서에도 ‘장르’가 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신성한 성서에 감히 ‘장르’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흥분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도 이해하는 사랑이고, 우리 사람도 이해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이해 못하는 그것은 ‘사랑’일 수 없지 않는가? 우리가 어린 아이(자녀)를 사랑해서 어린 아이의 언어표현으로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성서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 성서에는 분명 ‘장르’가 있다.

   시라는 장르에는 그 장르의 ‘법칙’이 있다. 이런 법칙은 성서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통하는 시의 법칙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법칙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는 ‘반복법’이 있다. 즉, 시는 어떠한 내용을 한 번에 말하지 않고, 두 번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이다(A A). (성서에서 이러한 반복법을 찾아낸 사람이 ‘로버트 로우드’라는 1750년대 분이라니, 선인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시는 두 번 반복하면서 조금 구체화되어간다. 즉 ‘집중’되어간다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A A),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좁혀간다는 것이다(A A').

   이렇게 보면, 시편의 많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풀려진다. 1a절의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1b절의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2a절의 ‘바다’가 2b절의 ‘강’을 뜻하는 것이다. 3a절의 ‘여호와의 산’이 바로 3b절의 ‘그 거룩한 곳’이며, 4a절의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 4b절의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치 아니함’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5a절의 ‘여호와께 복을 받음’은 (찌릿하며 감 잡은 그 느낌과는 다르게) 5b절의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의’롭게 되는 ‘구원’을 얻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이 아니겠는가!

   성서를 읽을 때 필요한 것이 하나있다. 바로 “꼼꼼하게 읽는 것(close reading)”이다. 많이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깊이 읽는 것이다. 손에 펜을 잡고 꼼꼼하게 읽어보라. 성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언제나 속삭이고 있다.



2. 더 자세하게 들어가기 (2nd question: 그렇다면 ‘셀라’는 무슨뜻이지?)

   위의 시편을 읽어 내려가면서 많은 분들이 6절과 10절에 나오는 괄호안의 황당한 단어에 눈을 찌푸린다. ‘셀라?’ 그렇다. 성서를 읽으면서 어떤 단어는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한자어가 많은 우리말 성서가 더욱 그러하다. 4절의 ‘허탄’이 무엇일까? (앞에서 반복의 원리에 감동받은 분들은 대번에 거짓 맹세와 연관시키는 센스가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허탄’이라고 했을까? 원래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라는 외국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말로 이해되기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말 성서로 번역하신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새삼 감동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물론, 완벽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기에, 지금도 개정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잠깐, 번역에 대해서 두가지만 실습해보자. 한가지는 영화제목이고, 한가지는 영화의 대사이다(영화만큼 번역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1) BATMAN BEGINS (“배트맨 비긴즈” 아닌가?)

     (양쪽 화살표를 마우스로 구역잡으면 답이 보인다)

     => ‘박쥐인간 시작하다’ (^^;) <=

(2) It's tough to be a bug. (‘터프’와 ‘버그’의 발음을 잘 생각해보라.)

     => 곤충고충, 너흰 몰라.(이건 번역의 최고의 경지이다!) <=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강조해야할 부분이 생긴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쓰였다는 사실이다(성서의 원본과 번역과 같은 내용은 다음에 다룰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시 24편에서 앞서 언급한 세가지 중요한 부분을 다루어보도록 하자.

   첫 번째는, ‘셀라’이다. 이 단어는 시편 150편중에서 39편에 나오고 있는데, 그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히브리어(그 사전적 뜻은 ‘찬양하라’이다)와 시편이라는 특수성에서 생각해볼 때, 시를 낭독하다가 ‘셀라’가 나오는 부분에서 잠깐 쉬고 대신 음악으로 연주하면서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 얼마나 멋있는 예배가 아닌가! 교독문에서 사회자와 예배자가 시합하듯이 빠르게 읽어내려갈 때(그것도 무미건조하게), ‘셀라’가 있다면 말이다!

   두 번째는, 6b절에 나오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이다. 사실, 히브리어 성경(이를 약자로 MT[마소라본문]라고 한다. 이는 다음에 다룰 것이다.)에는 ‘야곱의 얼굴’로 되어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약자로 LXX라고 한다)에는 ‘하나님’을 넣어서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로 만들었다(그들은 MT를 해석한 것이다!). 결국, MT를 번역해서 한글성서로 내놓으려했던 분들이 (쫌 이상하니까) LXX을 참조해서, 결국 이 부분은 LXX을 따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번역의 본질이며, 성서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져왔던 방법이다(역시, 다음에 다룰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1원칙인 ‘시’의 반복과 집중의 원리에 LXX은 충실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6a절의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 누구라는 말인가? 즉 6b절의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얼굴(이 보다 확실한 표현이 어디있겠는가!)을 구하는 자’가 아닌가?

   세 번째는, 4절의 ‘허탄’이다. 이것은 한문을 잘 아는 분이라도 쉽게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허탄이라는 단어에 바르게 접근해야 하는데, (1) ‘시’이기 때문에, 4절의 단어들(거짓 맹세)과 연관시켜야 하며, (2) 시편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또한 알아보아야 한다(똑같은 단어라고해서 바로 ‘신약’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시편 31편 6절(“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과 시편 119편 37절(“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하소서”)만 생각해보자(시편 1권인 1-41편에 들어있는 31편이 더욱 가까울 수 있다). 시 31:6은 ‘허탄’을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즉, 여기서 ‘허탄한 거짓’은 말 그대로 여호와가 아닌 거짓 신(우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 24:4절의 ‘허탄’과 ‘거짓 맹세’를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도 알게 된다(반복의 원리). 4절은 도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만을 믿느냐”라는 신앙적 측면인 것이다. (그래서, 시 24:4의 표준새번역의 번역은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라고 되어있다.)이것이 시편 24편 전체 맥락에 맞는다.

   이제, 시편의 전체 내용을 잡아볼 수 있다: 1-2절은, 여호와가 세상을 창조했으며(원래 MT는 ‘여호와의 것이다!’로 시작한다), 그 중에서 가장 거룩한 성소(이는 나중에 밝혀진다)를 선택하셨음을 찬양한다. 3-6절은, 그 성소에 누가 감히 들어갈 수 있는가를 밝히는데, 바로 우상숭배하지 않고(4절) 여호와만을 찾는(6절) 사람이니,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복을 받게 됨을 말한다. 7-10절은, 거룩한 성소와 그 성소에서 미리 들어와 있는 성도가 진정한 주인공인 왕이신 여호와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승리의 용사라고 소리 높여 찬양함을 보여준다.



3. 배경을 재구성하기 (3rd question: 어떠한 상황이길래?)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의 배경을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떠한 글이건 그 배경이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배경을 무시하고서 나의 입장에서만 읽는다면, 그 또한 오해하지 않겠는가?(‘미워~ 죽겠어~’라는 연애편지의 맥락에서의 말을 경찰서에서 살인사건의 증거물로 채택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배경 상황을 알면, 보다 더 합당하게 본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1-2절처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즉 ‘우르릉’거리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3절의 ‘여호와의 산, 거룩한 곳’과 7절의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라는 것에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눈물과 무릎으로 본문을 연구했던) 학자들은 이 상황을 다윗왕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오는 장면일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사무엘하 6장을 읽어보면서, 24편의 감동에 그대로 빠질 수 있다.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앞에서 기뻐하는 예배의 순간이 바로 이 시의 배경이 아닐까 한다.



4. 이제 살아가기 (4th question: “So, What?”)

   이제, 우리는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들어야한다. 성서는 목소리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외침이다. 감정의 변화에서 행동의 변화까지, 우리는 성서앞에서 끝없이 결심해야 한다. 성서의 목소리를 직접 말해주는 부분도 있다. 특별히 서신서가 그렇다. ‘항상 기뻐하라’는 성서의 요구에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이지?’라고 묻지 않는다. 우리는 순종할 뿐이다. 그렇지만, 성서의 요구는 대부분 숨어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부분도 있다.

   우리는 시편 24편에서 성서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서를 겸손하게 읽을 때 들리는 음성이며, 묵상하고 연구하며 토론하고 의심할 때 확실해지는 외침으로 다가온다. 나는 무엇보다도 두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첫 번째는 ‘아무나 예배할 수 없도다!’이다. 제목에서와 같이 ‘누가 감히 이곳에 설 수 있는가!’라는 자각이다. 예배당엔 문턱이 없지만, 십자가로 예배당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깨달아야한다. ‘오! 감히 내가 이곳에 서있다니!(창 28:17)’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다. 쉽게 말해서 다윗의 그 예배를 드리는 행동이 필요하다. 스스로가 신나려고 박수치는 것이 아니라, 감미로운 멜로디에 흠뻑 빠져서 목청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가사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바로 그분이 ‘구원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변화된 예배이다. 시간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안해도될 엉뚱한 질문들

1. “물위에 떠있는 세계?”

    시편 24편은 물위에 떠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성서 그대로의 표현을 빌리면, 물위에 기둥으로 떠있는 것이 이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적인 표현임에는 틀림없지만, 성서에 들어있는 기원전 사람들의 세계관에 우리는 어떠해야할까? 우리는 (성서이기 때문에) 그대로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쉬지 말고 기도하라”)? 아니면, 우리는 (성서이기 때문에!) 그 의도를 파악해서 받아들여야 하는가(“쉬지 말고 기도하라”)?

2. 무엇이든지 뚫는 창, 그 어느 것도 못 뚫는 방패.

    1절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 거룩하지 않을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여호와의 것이 될 수 있을까? 3-4절은 아무나 여호와의 산에 올 수 없음을 말한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만이 올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5절은 그 사람에게 ‘의’인 구원을 주신다고 한다. ‘여호와의 산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또 무엇이 필요할까?’

3. 나는 평화주의자!

    그동안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으로 알아왔던 분들에게, ‘전쟁에 능한 만군의 여호와’라는 부분이 얼마나 충격적일까? 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24편을 외우면서, 팔레스틴 난민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4. 꼭 이렇게 예배드려야만 하는가?

    왜 우리의 예배는 앉아서 길고도 긴 설교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