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경전(scripture)'으로 숭상하는 내러티브를 헬라적으로 믿어라.

진실과열정 2020. 2. 23. 12:35

"Scripture interprets itself. ... [W]e stand by the principles of the essential clarity of Scripture and its self-interpreting nature."
G.G., Preaching, 128, 136.

 

종교개혁은 중세가톨릭의 해석의 폭력에 저항한 인문학적 사조의 한 방향이다. 르네상스의 영향 아래 '클래식 열풍'은 신학계에도 불었고, 히브리어를 비롯한 고대언어가 재발견되었고, 이에따라 '고대 텍스트'로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교회의 전통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오직성서'라는 기치는, '무에서 탄생한 아이디어/텍스트 자체의 성격'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발명품이었던 것이다.

 

텍스트가 그 자체로 해석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찍이 20세기 초반 자료비평가들의 문헌상의 상호충돌 현상에서 문제가 충분히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서기관집단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 스스로가 고대히브리 신앙전승의 전달자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평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M.Fishbane; K.van der Toorn; W.Schniedewind): 평가의 결론은 텍스트가 스스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러티브만으로는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전승의 축적/수정 과정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예는 내러티브는 '시대착오'를 집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W. Schniedewind(A Social History of Hebrew, 2013)는 "위(pseudo)-고전주의"라고 부르는 예를 소개한다. 바로 사극에 나타나는 어색한 옛말이다. 옛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색할수도 있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 전문가들이 집어낼 수 있는) 옛어법에 맞지 않게 사용할 때, 위고전주의가 들통나게 된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단어만 가져가 붙인다고 고풍스러운 옛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셈이다. 슈니디윈드는 "후대의 저자가 옛 본문을 부지런히 연구해서 옛사람의 언어와 문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면서(149), 이러한 현상이 '역대기, 느헤미야, 다니엘'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왕상 13:33의 "제사장을 삼았/임명하다"라는 표현인데, 원래 히브리어의 표현은 '헤핰페쯔 예말레 에트_야드 위히 코하네 바모트', 곧 '(여로보암이) 즐거이원하는 자라면 그 손을 채워, 산당의 제사장이 되게하였다'이다. 우리말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성서에서도 '제사장을 삼다/임명하다'라는 표현의 원어는 '그 손을 채우다(말레[피엘형] 에트_야드)'이다. 유사한 표현이, 출 28:41에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그들의 손을 채우고(마레 에트_야드)"로, 레 8:33에 "칠 일동안 위임을 하다/그들의 손을 채우다(예말레 에트_야드)"로, 삿 17:5에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손을 채우다(예말레 에트_야드)"로 나온다.

 

그래서 왕상 13:33의 여로보암의 일을 말하면서, 포로후기의 역대기를 기록했던 서기관은 '위고전주의'를 보여주게 된다. 즉, 역대하 13:9에 의하면, 한글성서와 영어성서에서는 (열왕기의 선이해가 있기 때문에!) "무론 누구든지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와서 장립/임명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라고 되어있는데, 원어를 보면 '말레 야도 베파르 벤_바카르 웨에림 쉬브아흐'라고 하면서 "제물을 드리기위해 소나 양을 '손에 잡고' 끌고오는" 모양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진화된 언어의 간략화 현상 때문에 '에트'는 상실하여 '마레 야드'가 되었다.) 사실 역대기를 기록했던 서기관들은 출,레,삿의 리얼리티를 몰랐던 것이다. 단지 언어의 흔적만 남았기 때문에, 본래 그 어휘의 용례에서 벗어나서, "제물을 이끌고 오다"라는 오용을 하고 말았던 셈이다. 그렇지만, 열왕기의 기록은 알고 있기 때문에, '옛것처럼 보이기'를 위하여 흉내를 내었고, 결국은 '위고전주의'가 되고 말았다. 아리러니한 것은, 저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역대기 '언어'의 위고전주의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한글/영어의 번역자들은 "제사장 임명"이라는 놀라운 번역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신약에서는 아마 마 2:23와 마 21:1-7을 들 수 있겠는데, 전자의 경우는 아직도 당시에 LXX번역본이 표준화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예가 되며, 후자의 경우에는 마태는 고대히브리 시의 평행법을 모르는 '유대인'임을 스스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종교개혁의 기치였던 '성서가 스스로 해석하게 하자'라는 주장을 신앙고백적 진리로 요구하는 것일까? 다른 방법론 자체를 거부하는 정치적 바운더리일 뿐이다. 사실 이 주장은 성서신학의 재발견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혹은 아주 지혜롭게) 조직신학의 꼭둑각시로서 성서학의 자리잡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조직적으로 설정된 '신론' 아래에 '성서의 성격과 본질'이 세워지기 때문에, 텍스트의 특징을 도저히 볼 수 없게 된다.

 

결국 GG의 의도는 전적으로 옳다: '경전(scripture)'으로 숭상하는 내러티브를 헬라적으로 믿어라.

 

그러나 '성서적(biblical)'이라는 수식을 붙인다면, 그 본질적인 책으로서의 성격을 충실하게 인정한다면, 고대서아시아 문헌의 비교연구는 필수적으로 제시되어야하며(이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원죄론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고대왕실의 비문들과 연대기를 통해 고대이스라엘의 역사관이 차별성이 없음을 발견해야하며(J. van Seters), 8세기 이후 고대이스라엘의 사회상을 복원함으로써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이 수백년 이후를 위한 '성취론자들'의 퍼즐맞추기를 위한 희미한 불빛이 아님을 알려야 하며, 인류학적 연구조사를 통해 고대사회의 정결제의 메카니즘을 확인하고 소위 '모형론'이라는 해석적 폭력앞에 본연의 위치를 자리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놓을 때, 마치 제래드 다이아몬드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서구인의 해석적 틀의 오만함을 내던지고 오히려 '타자'를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21세기의 성서학은 '율법이냐 은혜냐'라는 낡은 색깔논쟁에서부터, 그리고 더 나아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적인 해석현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