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6:13 (마치 저 들판위를 수놓은 서로 다른 꽃들의 찬란한 빛깔처럼...)
<마치 저 들판위를 수놓은 서로 다른 꽃들의 찬란한 빛깔처럼>
사실 히브리성서에서, 고대히브리인들의 이름은 어머니가 짓는다(그 이유는 인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패쓰~). 우리말과는 다르게, 히브리어 동사는 남성형과 여성형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하다(창 4:25에서 '그'는 아담이 아니라, '그의 아내'이다; 특별히 창 29-30장의 '야곱 아들들'의 이름은 모두 어머니/여자의 작품이다; 한편, 이름에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해석지점은 삼하 12:24의 서기관의 수정[이를 '케티브-케레'라고 한다]인데, 쓰여지기는 '남자(다윗)가 불렀다'이지만, 유대서기관전통의 읽기는 '여자(밧세바)가 불렀다'이다).
וַתִּקְרָ֤א שֵׁם־יְהוָה֙ הַדֹּבֵ֣ר אֵלֶ֔יהָ אַתָּ֖ה אֵ֣ל רֳאִ֑י כִּ֣י אָֽמְרָ֗ה הֲגַ֥ם הֲלֹ֛ם רָאִ֖יתִי אַחֲרֵ֥י רֹאִֽי׃
(창 16:13)
<그녀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를, "당신은 (여기에서 나를) 보는 신이요"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전히 여기에서도 자기를 보는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종을 통해 자녀를 얻고 가문을 잇고 신의 약속을 성취하려했다는 창 16장의 내러티브는, 20세기 초반 고대서아시아의 문헌들이 다량 발굴되면서 인류학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했다. 구약학자들은 비교문헌학적 방법으로 성서내러티브를 역사화했던 것이다(오래전 E. A. Speiser의 AB 창세기 주석처럼). 그러나 '성서-역사학자'는 비교문헌이 역사를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문제제기를 했고(J. van Seters 1968; T. L. Thompson 1974), 이것은 맹목적으로 ANET에 의존했던 구약학풍에 건강한 전환점이 되었다. 비교문헌학적으로만 본다면, 중기청동기 시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원전 7세기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하갈은 여주인의 눈을 피해 도망을 했고, 광야의 샘물에서 야훼의 사자를 만난다. 야훼 자신이 아닌, '그의 사자/천사'라고 해서 그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 야훼의 임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관심은 이것이다: 고대 히브리 신앙전승이 보여주는 '신경험'의 보편적 차원이다. 야훼는 하갈의 아들 이름을 지어주었다(창 16:11). '야훼, 그는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갈은 "여주인을 피해 도망했다"라고 말한다(8절). '여주인'으로 소개되는 히브리어 '게비라'는 신명기적 역사서에서 '황후'로 번역되는 꽤 의미심장한 단어이다(왕상 15:13; 왕하 10:13; cf. 렘 13:18). 보통 여자가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 대하여,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주신 것이다(한편, '이삭'이란 이름의 기원은 상대적으로 아이러니하다[창 18:12-15; 21:9!]). 이러한 시적 구원의 사건에서, 왠만하면 창 16장은 12절로 끝맺음할 수 있다. 그러나 13-14절은 고대히브리 신앙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말한다: 이번엔 '여자가'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신경험의 실존적 주관화가 바로 '여종 하갈'의 입에서 나왔다! "당신은 (여기에서도) 나를 보시는 신이군요!" 하루 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고독한 광야길에서 하갈은 '야훼의 함께 계심'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고대인들의 신개념은 '지역신'으로 통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무소부재'의 유일신론이 언급되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야훼는 나를 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 이름을 '브엘(우물)랔하이(여기에)로이(보시다)'라고,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다(14절). 진짜 아이러니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거주했다는 점이다(창 25:11).
창세기는 신적 경험을 매우 '실제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사실 창세기에서 '보다'라는 히브리어 '라아'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주는 단어이다. 그 중에 한 텍스트가 창 22장이다. 바로 '여호와 이레'라는 익숙한 표현의 배경이 되는 본문이다. 놀랍게도, 여기에서도 '야훼의 사자'가 나온다. 창세기에서 '야훼의 사자'가 나오는 부분은, '하갈'과 '아브라함' 이렇게 단 2곳 뿐이다. 창 22장에서 아브라함은 고독한 길을 걷는다. 왜냐하면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비밀'을 알고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한가지 행동을 보인다. 하나님이 지시한 그곳을 '보았다'(4절). 히브리어 '라아'는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번제할 어린양이 안보인다고 말하는 이삭에게, 아버지는 "하나님이 그 양을 보실 것이야"라고 말한다(TNK).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이삭 사이에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사랑의 차원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보다(창 15), 하나님 자신을 선택하는 것은 '두려움/경외'이다. 히브리어는 묘하게 비슷한 자음으로 '보다(라아)'와 '경외(야레)'를 섞어놓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14절의 '야훼 이르에흐'가 여호와가 준비/제공한다는 번역자의 해석을 따르기 이전에(ESV, NRSV), 문자 그대로 '야훼는 보시는 분/야훼가 보시는 곳'(TNK)이라는 창세기 읽기를 따르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제3일에 그것을 보았던 그때(4절), 아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신발끈을 묶었을 그 때, 야훼는 이미 그를 보셨다. 사실 창 22장의 모리아 산은 '시온'이다(대하 3:1). 거시적으로 야훼가 예루살렘을 보신 이유는, 그곳이 요새였기 때문이 아니라(삿 1:21), 신앙의 참된 유산으로 가득한 장소였기 때문이다(창 14장). 한편, 이것을 '모형론'이나 '거대서사'로 볼 수 없는 것은, 창세기의 일화가 하나의 큰 프레임을 보여주지않고, 일종의 기원론(why)에 대한 설명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6장과 창세기 22장은 상당히 평행하다. 비평적 학자들은 16장에서 J전승의 특징을, 22장에서 E전승의 특징을 발견하였다. Richard E. Friedman의 여러 연구서들은 구체적인 자료의 차원에서, Walter Breuggemann, Vitality of Old Testament는 신학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준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참여한 성도님들의 구원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게 지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성도님들의 구원간증은 솔직했고 놀라웠으며,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요 그분께 영광이었다. 참을수없는 우리 죄성의 발견과 예수의 십자가가 유일한 공통점이었고, 여러 부분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왔다. 마치 저 들판위를 수놓은 서로 다른 꽃들의 찬란한 빛깔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신경험이라는 보편적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어느 하나의(혹은 어느 누구의!) 잣대로 맞고 틀림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하갈이 부른 야훼 경험의 이름과 아브라함리 부른 야훼 경험의 이름 모두, 그 둘 모두가, 성서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