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협소한 지평엔, 종교가 있지만, 존재는 없는듯>

진실과열정 2020. 2. 13. 09:29

<협소한 지평엔, 종교가 있지만, 존재는 없는듯>

 

구문론적 해석에 만족했던 M.Div 시절을 마치고, Th.M을 공부하면서 선생님은 '철학적 해석학'을 제시하였다. 딜타이부터 시작하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청출어람이라 할 수 있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그리고 리꾀르까지, 머리가 터지도록 서구 지성의 해석학적 고뇌를 맛보면서, 새로운 '세계'로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 소쉬르의 언어연구는 텍스트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버렸다. (개인적으론 시슬튼은 관통하려고 시도했고, 밴후저는 관통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은 것 같다.)

 

하나의 낱말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포함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석의 선천적이며 주관적인 전제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완전한 해석의 불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해석하는 존재가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진정한 세계 속에서 실존으로 일어서고, 서로 다른 세계를 융합하기 위한 다리 놓기의 과정으로, 어떤 면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구체화된 행동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는, 해석적 틀은 바로 이들의 노고의 결과이다. 이러한 틀을 나의 표현으로 말하면, "해석은 먹이 피라미드를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바이러스이다."

 

먹이 피라미드는 생태계의 질서이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먹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질서, 혹은 '진리'를 역전시킨다는 것은, 정말 '바이러스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성육신이야말로 최고의 바이러스가 아니었는가?(막 10:42-45). 그리고 바울이야말로 이 바이러스의 최대 유포자가 아니었는가?(고전 9:19).

 

전에 봤던 '레버넌트'라는 영화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그림들이 자꾸 떠오른다. 사실 이 영화는 지극히 미국적 가치관의 또 다른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요약하면, "우리, 미국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의가 살아있음을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만을' 위한 정의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침략자이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에서 가죽을 싸그리 약탈하며, 여자들을 납치한다. 영화의 처음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롱테이크로 묘사했던 '인디언의 공포'는, 추장의 딸을 찾기 위한 목적도 들어있다. 비록 영화는 톰하디의 죽음으로 디카프리오와 인디언 추장 모두를 위한 '정의회복'으로 귀결되지만, 역사는 일방적이었다. 침략자는 새로운 주인이 되었고, 본토인은 말 그대로 '멸절'했다. (이들이 '신약의 여호수아'라고 자평했다는 사실은 이제 덤덤할 뿐이다.)

 

바울이 한번도 자기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정말 그는 신과 통했나보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을, '성도'라고 많이 불렀다(롬 1:7; 고전 1:2). 비록 제3의 인물이 쓴 기록이긴 하나,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을 규정할 때, 마치 요세푸스가 '철학'으로 종교라는 개념을 이해했던 것처럼, '도'라고 불렀다(행 22:4). 그렇다. 예수님도 '기독교'라 부르신 적 없다. 차라리, '예수교'가 더 솔직하지 않았을까?

 

기독교는, 본래 어떤 것이든 시간이 가면 더욱 정교해지거나 혹은 더욱 기괴해지는 것처럼, '삶의 철학'에서 '앎의 철학'으로 변화되었다. 그 과정의 주역은 바로 사람이며 운영 메카니즘이다. 처음교회가 글을 읽지 못한 사회의 약자들이 구전을 중심으로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삶으로 주의 날을 기다렸던 새로운 가정이었다고 한다면, 중간교회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무엇을 아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인지 가르치는 학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 달리 부를만한 표현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여, 기독교는 이미 수많은 해석을 거친 '메시야니즘'의 현상이다. 이것은 왕실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시온신학의 후손이며, 현실을 포기하지만 회의주의로 빠지기는 싫은 묵시신학의 아들이다. 한마디로 반쪽짜리 역사의식의 표출이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서 구약의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경험하게 하셨고, 기독교는 신약(의 부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레고화했다(LEGOnization).

 

나사렛 예수가 야훼 하나님의 메시야이심을 믿는다. 그러나 성서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써놓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읽는 접근은 앞서 언급한 "침략자"적 방식이다. 이미 그들은 강한 존재가 되어서 '다른 의견'을 충분히 불태울 수 있었다(슈테판 츠바이크). 학문적으로도 역시 가능하다.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를 읽으며, 지평이 확 좁혀짐을 느낀다. 왜 저자는 스스로(와 독자)를 'New Testament people'이라고 부르는 일까? NT에 그리스도가 있으니, OT의 도덕적인 설교가 의미없다고 말할 때(p. 3), 야고보가 천상에서 웃는다(약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