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열정 2020. 1. 30. 22:43

히브리성서(TNK)에서 성문서-케투빔(K)-에 위치한 룻기는, 역사를 사랑하는 헬라어번역본(70인경)에서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로 들어오게 되었다. 쿠간은, '현숙한 여자'(에쉐트 하일, 잠 31:10; 룻 3:11)를 열쇠로 보면서, TNK의 순서에서 잠언-룻기로 이루어졌다고 본다(2005: 226). 사실 그리하여 (유대인의) TNK의 원역사가 (이방인의) 룻기의 삽입으로 불편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문화와 종교가 구분이 없었을때(아마도 오늘날도 그렇지 않을까?), (상징적인 차원에서) 다른말을 쓴다하여 악으로 규정되어 강제로 생이별을 당했던 사람들에게(느 13:23-27), 바로 그들이 착각하고 있던 일종의 엘리트적 세계관에 대하여, 아마도 상식이 기본이 되는 땅의 사람들은 예언자로 시작하여 새로운 세계를 고대했을 것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행위,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행위, 주린 자에게 자신의 식물을 주는 행위, 유리하는 빈민을 자신의 집에 들이는 행위, 자신들의 골육이기에(!) 피하지도 숨지도 않고 그들을 맞이하는 행위가 야훼종교의 기쁨이되는 세계(사 58). 야훼께 연합한 이방인을 절대로 갈라내서는 안된다고, 야훼는 쫓겨난 자를 모으시고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이방인까지도!)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는 분이심을 고대하는 세계(사 56). 이들은 문화적 차이를 절대시하지 않았다. 다름이 기준이 아니기에.


당시에 자신들을 '떠는자(하레딤)'이라고 불렀던, 소위 신실했--혹은 종교적 강경보수파--던 사람들(스 9:4; 10:9)에 맞서, 저 어두운 그늘에서부터 하늘의 음성이 선포된다. 누가 진정한 '떠는자'인가(사 66:2)? 성전에서 결집해야 한다는 사람들인가? NO!(66:1) 소나 양을 잡고 예물과 분향을 드리는 사람들인가? NO!(66:3-4)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내세울것 없는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신앙적 열정까지도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사람들. 상대적 문화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 엘리트적 운동에 의해 오용되는 현실 앞에 통회하는 사람들. 종교가 땅을 밟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내세에 입국하기 위한 자격증으로 존재하는 지식이 되는 것에 항의하는 사람들.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이러니는 반복된다. 버린돌은 모퉁이 돌이 되었다. '그것은 죄'라는 이유로, 세리와 창녀, 거지와 병자들의 친구인 예수(눅 7:34)는 처참히 버려졌지만, 하나님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그것은 죄'라는 이유로, 내버려진 이방인의 전승을, 하나님께서 원역사의 중앙에 박아 놓으셨다.


종교개혁의 산물인 일종의 '엘리트적 청교도 정신'이, 다시, '그것은 죄'를 강조하고 나설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유무가 혹은 죄의 많고 적음이 핵심이 아니라고 하신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아버지-아들/딸'의 "관계"이다(눅 15:11-32). 구원이 관계가 아닌 죄에 맞추어질때, 종교는 반-창조적 자기거부(그리고 이웃거부)으로 인한 영원한 저주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지금도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설득하신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