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에도 족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도 족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서부터 38절의 족보입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31절의 다윗은 왕이라는 직분이 없으며, 아브라함이 출발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많이 다릅니다. 사실 누가는 '족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지요. 어쩌면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23절), 사실은 22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말하려는 걸겁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 익숙한 편이어서, 누가의 명단을 볼 땐, 무언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41명이 있다면, 누가복음의 족보에는 (사본마다 72명에서부터 78명까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배나 가까이 되는 77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마태가 예수님을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와 다윗 왕을 거친 자손이라고 소개한 것에 비해서, 누가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위로(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쓴 것이고, 누가는 헬라인들을(데오빌로 각하[눅 1:3]) 대상으로 복음서를 썼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누가에게 예수님은 단지 유대인으로 제한되는 분이 아니라, 온 인류를 포함하는 세계인으로 그려진 셈입니다. 또한 아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내려오지 않고 거꾸로 올라온 이유는, 죄인 된 아담과 정반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즉, 역사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았다면,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죄성이 전혀 없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사이에 두고 (앞부분) 예수님이 침례를 받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22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리고 족보 이후에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깨끗하게 물리치신 죄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4장 1-13절). 23절에서처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단지 요셉의 아들이었지만, 누가의 진실은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마태가 7의 배수인 14명으로 족보를 묶었던 것과 같이, 누가도 일곱 명씩 묶어서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에 족보를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77명을 기록하면서, 7 × 11이라는 모양으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를 [23-26절과 29-31절이 상당히 평행하지만]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일곱 명씩 묶어 보면 조금 그림이 잡힙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33절에 아미나답과 아니 사이에, '아드민'이라는 이름을 넣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드민이 들어있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실 헬라어 성서에는 아드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번역과 쉬운성경도 아드민이 있습니다. 권위있는 영어성경 대부분에도 아드민이 있습니다[NJB, NRSV, GNB]. 단지 NIV하고 개역(개정)성서만 아드민을 빼놓고 있습니다.) 이 역시 신학적인 의도가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7은 한주를 의미합니다. 이를 우리말 성서에서는 ‘이레’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레’라는 것은 꼭 7일이 아니라, 상징적인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와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9:25). 그런데 누가의 시대에는 이러한 전승이 있었습니다(4 Ez. 14:11): “11 이레가 끝나고 12 이레가 시작할 때 구원자가 오신다.” 물론 이것은 구약성서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누가가 개의치 않은 것은, "자세히 미루어 살핀" 정황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정황도 해당되죠.) 중요한 것은 누가는 예수님이야말로 참 메시야임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다윗 메시야 전통(사 9:7; 겔 37:24-25)은 제2성전시대를 거치면서 왕실권위의 실종과 함께 종교적 공동체로서 명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두 명의 메시야(dyarchy)'로 변하게 됩니다(슥 4:14): 제왕적 메시야와 종교적 메시야. 사해문헌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고대하던 새질서의 밑그림이 다윗자손과 아론자손이 함께하는 세계였습니다.
누가는 그러한 세계관에 도전한 것이 아닐까요? 눅 1:5에 "(로마의 앞잡이)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아론 자손)"으로 그려진 세계에 대하여, 예수님이야말로 허울뿐인 로마의 평화를 진정한 평화(눅 1:32-33; 2:10,14)로 대체할 수 있는 분이며,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이 성취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몸으로 나타내실 수 있는 분(눅 1:54-55; 1:72-73)이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찌 되었건 아론의 후손인) 침례 요한을 "혹시 메시야?"는 아닐까 하고 여전히 헛된 기대를 가졌던 현실을 바로 잡기 원했을 것이고(눅 3:15-16; 행 13:23-25), 또한 동시에 로마 제국의 신화에 메여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파워를 보여주기 원했을 것입니다(눅 2:32; 4:18,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