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과연 마태는 어쩌자고 예수의 족보에 여인들을 집어 넣었던 것일까요?

진실과열정 2019. 12. 20. 09:12

과연 마태는 어쩌자고 예수의 족보에 여인들을 집어 넣었던 것일까요?


마태복음에서 느끼는 반유대주의적 분위기는 본문상으로나 역사적 추정상으로 충분합니다: 시종일관 마태는 유대인모임을 '저희 회당'이라고 하면서 유대교를 예수님의 '천국 복음'과 대조하고 있으며(4:23; 9:35; 한편 7:29), (복음서가 기록되는 시대정황상) 예루살렘 멸망 이후 기독교유대인이 유대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있는 씁쓸한 현실에 비판적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M.Borg 2001:196). 그렇다면 유대인 마태는 자신의 역사에 ‘스스로’ 침을 뱉는 기분으로, 본래 남자들만이 언급될 수 있는 족보에, 여자들의 이름을 넣었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비록 족보의 원칙상 여자들이 제외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자들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무슨 큰 일인양 생각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인 남자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또한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구를 계수하는데 남자들만 고려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자들이 들어간 족보 그 자체가 유대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종의 모욕이었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수 있다는 거죠.


주석가들은 여러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U.Luz 1989:109f): 구원역사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변칙플레이’, 또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또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열정. 이러한 견해들은 모든 경우를 포함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변칙플레이를 하셨던 것인가? 그 여인들은 정말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죄인들이었나? 그들은 정말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는가? ‘우리의 생각’이 아닌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을까요? 이해를 위한 여러가지 시도들은 그래서 계속되어야 하겠지요. 그러한 시도들 가운데 ‘수용사(reception history)’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분야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서의 본문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는, 일종의 ‘영향의 궤적’을 연구하는 시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족보에 언급된 여인들에 대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여기에서, 비록 엉뚱하며 시대착오적일 수 있지만, 루이스 긴즈버그(Louis Ginzberg)의 유대인 전설모음집을 연결시킬 수 있겠습니다. 집단적 개념으로, 그들이 어려움없이 받아들였던 구약의 여인들에 대한 위치를 잡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태가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의 고집(모세오경을 중심으로 한 바리새파의 재건운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으로 제시한 것이죠. 그러므로 물론 유대인들에게 날을 세우기는 하지만, 그들을 돌이키기위한 궁극적인 목적이 있으므로 그에 걸맞는 수사학적 수단을 최대한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E.Freed 2004 연구가 이 글의 기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에 대해서 집중해보도록 해요. 3절의 다말에서 시작해서(“유다는 다말에게서”), 5절의 라합(“살몬은 라합에게서”)과 룻(“보아스는 룻에게서”), 그리고 6절의 우리야의 아내(“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14절, 마리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자! 그렇다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여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봅시다. 다말에 대해서는(창 38:6-26),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다말은 그녀가 다윗과 메시야의 조상이 될 것으로 점지되었음을 알고,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성취시키고자 결심한다. 결국, 성령이 유다가 다말에게 갈 것이라고 가르쳐 주게 되자, 그녀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유다가 지나가자 다말은 ‘이 의로운 사람의 집에서 내가 무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결국 임신을 하게 되자 하나님은 천사 미가엘을 보내어 유다로 하여금 다말의 무죄를 인정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마태의 족보 이야기와도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1:18,20). 그리고 유다와 같이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19절). 성령이 유다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바와 같이, 요셉의 마음도 변화시키십니다(20절).


이번엔 라합을 살펴봅시다(수 2:1-24). 전설은 “기생 라합을 소유했던 그 어떤 왕이나 지도자가 없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있었던 40년 동안을 매춘을 하며 살았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오자 회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덟 명의 예언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거룩한 분은 이렇게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의인(이드로, 라합, 룻)을 찾으신다.” 이것은 마리아가 받았던 음란에 대한 모함을 생각하게 합니다(요 8:19).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라합을 통해서 예언자를 세우시듯이, 마리아에게도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 될 수 있죠. 유대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마태가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은 어떨까요? 룻 역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역할을 맡은 운명의 여인으로 그려집니다. 일단 그녀는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퍼준 것에 대해서, “여섯 명의 경건한 사람의 조상이 될 것인데, 이들 중에는 다윗, 다니엘, 그리고 메시야가 있다. 룻은 정절이 있는 여인으로 다른 여인들과는 행동 면에서 탁월했다. 의로운 사람인 보아스는 ‘주가 살아있는 한 나는 오늘밤 이 여인(룻)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라고 룻과 보아스 사이의 ‘정절’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사실 룻기서 자체의 주장(룻기는 이들이 성적관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룻 3:14])을 유대인들이 완곡하게 돌려 표현했으며, 이것을 마태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마태는 보아스가 룻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던 것처럼’ - 그리고 그것이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정말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 요셉 역시 마리아와 관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살펴봅시다(삼하 11-12장). 이제 눈치를 챘겠지만, 밧세바 역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고 유대인들은 해석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솔로몬이 이집트의 여인들로 타락한 삶을 살게 되자, 밧세바는 솔로몬을 꾸짖고 “너의 아버지(다윗)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네가 이러면 사람들이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이다. 그가 잘못된 것이 그녀의 엄마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솔로몬이 ‘밧세바의 아들’이라고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로; 표현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6절의 표현이 “마리아에게서 ... 예수가 나셨다”라는 중요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 표현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단순히 구약만 알고 있던 우리가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족보의 여인들이 ‘수치의 여인’으로 생각합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실상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태는 바로 이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볼 때, 유독 구약을 많이 인용합니다(마 1:22; 2:15). 다시 말해서 마태는 성서의 해석자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니라, 예수의 탄생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반대로 마태복음을 받아야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도저히 믿지 못하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반증하는 좋은 예입니다. 사실이지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을 ‘메시야’라고 어떻게 인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마태복음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변증적’ 성격이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변증’보다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턱대고 믿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접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증 곧 설명(이해)은 부정적인 모양이 되곤 합니다. 무엇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순수하지 않다는 거죠. 소위 ‘머리로 계산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논리입니다. 그렇지만 변증과 믿음은, 성서가 보여주는 두마리 토끼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이 족보를 통한 신앙의 변증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선언을 통한 신앙의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스스로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는 것(요 20:29)”과 마찬가지로, “기록함을 통해서(이해입니다!) ... 믿어 ... 생명을 얻게 하려함(요 20:31)”도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변증과 믿음을 둘 다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1세기의 잡다했던 종교의 블루오션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아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믿음’에 기초한 ‘변증’ 말입니다. 사실 당시의 수많은 종교들은 ‘막가파’였습니다. ‘변증’도 없이 좋으면 따라오고, 싫으면 관두라 식이었죠. 그렇지만, 초대 교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올바르게 세상에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지런히 구약을 인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이해에 맞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섭리로 설명하면서, 마태는 자신만의 변증에 충실하였던 거죠.


21세기에 필요한 변증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지 100여년이 지난 후에 기록된 어떤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미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 ‘옛변증’이지만, 그 핵심에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짧은 글은 아리스티데스의 ‘변명’(Apology)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의 마음을 풀어 주고, 친구로 만든다; 그들은 원수들을 선대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과부들을 무시하지 않고, 고아를 가혹하게 다루는 자로부터 구해낸다. 가진 자는 가지지 않은 자에게 나누어 주면서 조금도 뻐기지 않는다. 낯선 사람을 보면, 그들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서 마치 형제처럼 그를 환대한다; 그들은 서로를 육신에 따른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및 성령을 따라 형제라고 부른다. 그들의 가난한 자들 중 한 사람이 세상에 떠날 때마다, 그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그에게 신경을 쓰며 세심하게 그의 장사(葬事)를 돌본다"(N.T.라이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에서).


이러한 변증이 21세기에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 탄생을 오해했듯이, 오늘의 사람들은 교회의 필요성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마태에게서 배워야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