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정치는, 성서읽기의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진실과열정 2019. 10. 27. 09:08

<정치는, 성서읽기의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시드기야의 해방선언과 번복: 시드기야의 정치적 카드"


B.C.E. 597년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과 포로압송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군사적․행정적 기능은 완전 마비되었다(왕하 24:14-16).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였던 맛다니야를 선택하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서 왕위에 앉혔다. 시드기야의 모친은 립나(Libnah) 출신 예레미야의 딸인 하무달(Hamutal)이었다(왕하 24:18). 하무달은 B.C.E. 609년 지주(ץראה מע)들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의 모친이기도 했다. 립나는 유다의 중요 도시였는데, 대규모의 포로압송 이후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에게 있어서, 시드기야의 선택은 유다의 신흥 지주세력들을 포섭하며, 동시에 형제 살룸(여호아하스)을 잡아간 이집트에 적대적 행보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에게 좋은 선택이었지만, 기존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권력가들에게는 악재였다.


특히나 여호야긴의 지지 세력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여호야김의 죽음 이후 세력을 얻은 예루살렘 권력가들에게 여호야긴의 통치는 너무 짧았던 것이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에 대해서, 느부갓네살 성의 비문은 유다의 왕의 직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여호야긴의 지지자들은 시드기야의 왕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 분명하다. 성서 본문에 의하면, 이들은 혼란된 분위기를 틈타 종교적인 측면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상황으로 인해서, 시드기야는 주도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전혀 제공받지 못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수잔 에커만(Susan Ackerman 1992)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커만은 겔 8:1-17의 연구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내의 지도층들에 의한 ‘마르제악(marzēah)’ 제의를 다루었는데, 이를 통하여 유다 왕국 말기의 혼동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마르제악 제의에 참여한 이들은 ‘왕실 친인척은 물론이고 제사장과 선지자, 행정 관료, 그리고 각종 기능인이 회원으로 포함된’ 집단으로, 일종의 ‘무장(武將)들의 형제단’이었다. 이들 권력가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והינזאי)”를 언급하고 있다(겔 8:11). 야아사냐는 B.C.E. 586년 이후 유다 땅에 세워진 그달리야 정부에 가담한 유력자로 등장한다(왕하 25:23; 렘 40:8). 한편, 사반은 요시야의 개혁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사반의 조부 므술람(םלּשׁמ, 왕하 22:3) 역시 아몬 왕의 모친 므술레멧(תמלּשׁמ, 왕하 21:19)이 등장한 이후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에돔을 배경으로 예루살렘에 권좌를 차지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한 정통적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1차 포로에서 제외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의 빈자리를 차지하기가 그 누구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아무튼, 마르제악 제의에 참여한 예루살렘 권력가들은 가문의 전통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이어가기를 바랐다. 이는 특히 현재 왕권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권력가들이 암암리에 의식을 치루면서 “야웨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겔 8:12)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재 왕권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드기야를 거부했던 세력으로, 여호야긴의 모친이었던 왕후(רבג) 느후스다의 영향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는 이때까지도 왕후의 힘이 예루살렘에 끼쳤다는 고고학적 근거에서도 뒷받침된다. 앗수르의 지배를 받은 이후 급진적으로 아세라 제의가 증가했는데, 앗수르가 자국의 종교를 강제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는 결국 유다 왕실의 선택이었을 것이며, 특별히 왕후의 주도적인 영향이 컸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세라는 왕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고대근동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왕후가 ‘왕의 보호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때, 유다에서도 왕후와 이를 뒷받침하는 아세라 제의가 충분히 존재했을 것이며, 이는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한편, 아세라는 하늘의 여왕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세라를 비롯한 하늘의 일월성신 제의는 중앙집권을 막는 커다란 장벽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시야의 주된 개혁의 대상이었다.


렘 19:13에 의하면, “하늘의 만상(םימשׁה אבצ)”에 분향했던 계층이 왕족과 예루살렘에 집을 가지고 있는 부유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엘리트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왕하 21:5). 예레미야의 일월성신(םימשׁה אבצ) 제의 비판은 렘 8: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이한 사항은 ‘하늘의 여왕(םימשׁה תכלמ)’으로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렘 7:18; 44:17-25).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왕과 왕후’를 동시에 비판한 것은 쉽게 설명이 된다(렘 13:18).


한편, 포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렘 29:1-9), 거짓 예언자들이 여호야긴의 편에서 왕권의 회복을 선포하며 선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B.C.E. 595년 엘람과 바벨론 간의 전쟁으로, 바벨론 내의 유대인들은 큰 동요를 하게 되었고,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다(렘 29:21). 여기에 거짓 예언자들의 역할이 주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렘 29:15). 예레미야는 국제적 정세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합당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헛된 기대를 버리라고 선포했지만, 이는 예루살렘 내에서 예언자간에 갈등만을 야기할 뿐이었다. 하나냐와의 대결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헛된 기대를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렘 28:1-17).


어쨌든 국제적 정세는 시드기야와 주변의 나라들에도 흔들어 놓았다. B.C.E. 594년 암몬과 모암, 그리고 에돔은 사신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사태를 주시했다. 사실, 이는 여호야긴의 지지자들에 의해 떠밀려 반란 음모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별다른 행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의 반대 선포가 시드기야에게 통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렘 27:3-9). 아마도 예레미야는 기존의 기득권층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시드기야와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하나냐와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 인해서 신적권위를 확인받고 시드기야에게 참 예언자로 인정받았었을 것이다(신 18:19-22). 이렇게 볼 때, 시드기야에게 있어서 예레미야의 위치는 상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세력에 의한 쿠데타를 두려워했다(렘 38:14-23). 왕은 조금도 그들을 거스를 수 없었다(렘 38:5).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와 함께 백성을 지도하려는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를 상당히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렘 22장에서부터 시작한 역대 왕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신탁이, 23장으로 이어져서 시드기야의 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렘 23:1-6). “야웨 우리의 공의(YHWH נכדצ)”라는 구절은(렘 23:6) 분명히 시드기야의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별히 시드기야 이전의 왕들을 “양 떼를 명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라고 평가하는 반면(렘 23:1), 새로 세워진 왕을 “그들을 기르는 목자”라고 언급하는 것(렘 23:4)은, 고대근동의 경우와 같이, 정의의 실행자로서의 왕권을 나타내는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개 새로 왕이 즉위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노예를 해방하는 것처럼, 시드기야에게 정의를 실행하라고 예레미야는 요구했을 것이다(렘 34:4). 그러나 시드기야는 정의를 실행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의 견제세력을 규합해야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행여나 그들의 눈에 벗어나는 일을 시도하다가는 그 역시 암살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렘 38:5). 하지만 시드기야는 다른 누구보다 예레미야에게 속내를 내보일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에(렘 37:17; 38:16), 시드기야는 눈앞에 보이는 정략적인 이익보다는 야웨의 정의에 순종해야만 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면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렘 38:17). 즉,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정책 결정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지도자들을 꼽았으며(렘 37:19), 이들의 힘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임을 자각했을 것이다(렘 38:5). 결국, 시드기야는 노예해방이라는 정치적 카드를 선택하면서, 바벨론의 포위 상황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외형적으로 종교적인 면(렘 34:18-19)이 부각된 의도로 지도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경제적인 속박을 풀어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Realpolitik)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