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바울 다시 보기

진실과열정 2019. 10. 24. 10:13

문득 드는 생각을 좇아가면서, 나의 읽기를 곰곰히 되집어보는 것도 공부의 좋은 A/S라고 생각이 듭니다. N.T.Wright의 '바울'에서, 그 탄탄한 토대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세뇌적인 서술이 되어버린 것이 있는데, 바로 신약시대의 구약이해입니다. 그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지속적으로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과연 제2성전시대 유대교라는 것이 그렇게 대중적이며, 한마디로 지배적이었던가?'라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지요. 정말 1세기 유대인은 하루에 두번 쉐마를 외웠을까? (개인적으론, 무엇보다 바벨론 포로이후, 왕권을 상실한 집단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들의 세계관이라고 표현된 것들에서, 일종의 '저항문학'으로서의 사회적/종교적 기능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함께 급박한 종말론의 분위기 역시 축소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는 계속됩니다.)


아무튼 라이트는, 이방인을 위한 '파격적인 복음사역'의 흔적이었던 바울서신들을 분석하면서, 그 배경에는 창세기와 신명기 그리고 이사야서등 다양한 히브리성서가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 얇은 바울서신에, 이렇게 두꺼운 설명이 따라오게 되었겠지요...) 저의 물음이 이거였습니다. "정말, 바울은 로마제국 각 주요도시에 세미나리를 세우려고 했는가? 날마다 지역의 가정교회에서는 히브리인들의 신앙-구약성서-을 연구했어야 했단 말인가?" 오! 바울 사도, 역시 대단한 통찰력이야! 라는 감탄사가 소아시아 교회들을 밤잠 들지 못하게 했단 말인가... (개인적으론, 사실 '편집'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막상 '사용자' 측면에서는 구전이든 문헌이든 관계없이, 사용하는 입장에서 원자료들을 문맥보다는 현실에 맞추어서 '이용'하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구전과 관련해서, 흔히들 구전전승의 정확성을 신봉하지만, 인류학자인 잭 구디에 의하면, 구전은 전수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무엇보다도 상황과 발화자의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이용'된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그의 소신은 생각보다 깊습니다: "In any case, Paul's letters were hardly meant to be read once and once only; and the context for further readings would inevitably have included discussion between audience, reader and local leadership, and above all teaching, in which the teaching of the scriptures must have been prominent if not central. Paul certainly assumed that his letters would be read within the context of local church life, to which they would contribute and from which further readings of them would gain. Local scripture-teaching would help people begin to grasp what was going on; the letters themselves would direct the development of that local teaching, as new converts, eager to discover more both about Jesus and about their own new 'identity', realized they needed to spend time with Genesis, Deuteronomy, Isaiah and the rest." (N.T.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1452)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설령, 라이트의 주장과 같이, 초대교회처럼 깊이있게 히브리성서를 읽은 시대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점은, 바울의 여러서신들 그 자체가, '구약 다시 풀어쓰기'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구약의 '메시야적 성취의 이해'가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알았지만, 그것 자체를 위해서 펜을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바로 '메시야를 통한 십자가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중요한 것들(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제2성전시대 세계관이해)이 분명 있었지만, 그것들보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실제'를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던 것은 아닐까요? 들어도 또 들어도 귀찮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구원의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구원의 의미만을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흐뭇해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