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eption/[파격] 틀을 깨는 이야기

오르한 파묵, '검은책'

진실과열정 2019. 10. 8. 10:42

오르한 파묵, '검은책'


사건은 단순하게 시작한다. 주인공(제랄)이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과거를 추적한다. 그 단초는 유명한 칼럼니스트 삼촌이었다. 왜냐하면 아내(뤼야-빛이라는 의미)와 삼촌(갈립)이 동시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익숙한 장면과도 같이, 이야기는 방향성을 잃은 한 남자가 여기저기 탐문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찾아게된다는 전형적인 장면을 그려낸다. 참으로 재미있거나 혹은 당황스러운 점이라면, 이 책의 저자가 설정한 저작 기법을 처음엔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주인공의 활동과 삼촌의 칼럼이 교대로 나타난다. 삼촌의 칼럼이 말하고 있는 환타지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이 아내를 찾아가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사실 이러한 점을 너무나 뒤늦게 파악한 터라, 내가 또 하나의 [악마의 시]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주인공이 아내를 찾으면서 이스탄불의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터키의 영화와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오르한 파묵의 공헌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책에서는 지도도 포함하고 있으나, 읽기와 별개로 진행되는 것 같아서 아쉽다.) 이스탄불이라는 세계사적인 도시가, 한 때 "비잔티움, 비잔트, 노바 로마, 안투사, 차르크라드, 미크라그라드, 콘스탄티노플, 코스폴리, 이스틴폴린"(I:271)으로 불리웠던 문명의 대명사가, 지금은 초라한 영화 만을 추억 삼으며 시간을 씹고 있다니! 이것이 바로 터키의 현재이자, 우리의 언제나 초라한 지금을 반영하리라.


그러므로 책은 운명을 거스르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대로 살아갈 순 없다:


그들은 영원히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집, 자신의 조국, 자신의 과거,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린 자만이 알 수 있는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 길을 잃고 집에서 멀리 와 버렸다는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서, 더 이상 그 신비를, 그들이 찾으러 온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자신을 신에게 맡긴 채, 영원의 시간을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립은 지상으로 올라갈수록 그들의 숨 막힐 듯한 기다림을 함께할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찾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절대 평온도 찾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형편없는 모조품이 되는 것이, 과거와 기억과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I:275f).


개인의 운명 역시 바꾸어야만 한다.


삶의 초반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나 자신이 되지 못했고, 중반은 나 자신이 되지 못한 그 세월을 후회하며 또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낼 거라는 생각이었지. 이 생각이 얼마나 우습게 느껴졌던지, 웃음밖에 나지 않았어. 나의 과거, 나의 미래라 생각했던 공포와 불행이, 한순간 모든 사람과 나누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운명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전혀 의미 없이 확신하게 되었지(I:290).


그렇다. 주인공 제랄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바로 갈립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갈립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왔던 터라, 그의 생각을 흉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II:124,135). 갈립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내가 그가 되면 될터! 어찌보면 우리가 쉽게 우리자신을 찾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우리는 모방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현실을 혐오하므로, 누군가를 모방하게 될 때, 불행하게도 우리의 모델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면? 작가는 그러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약간 비튼다. 만약 내가 되고 싶어 안간힘을 썼던 그 다른 사람도 또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죽이십시오. 당신의 비밀을 당신 자신이 만드십시오."(II:222)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과거로 삼아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일까? 작가는 이러한 삶의 반복을 지리하게 말하면서, 독자로 고민하게 한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이제 내일을 확신하게 된 제랄이 맞이한 현실, 곧 갈립과 뤼야가 불의의 총격을 받고 서글픈 주검으로 남겨졌다는 그림은, 결국 현실이란 주체적인 자아의 결단으로 완성된 것임을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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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이란 제목이 암시하는 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가 말하는 이스탄불의 복잡한 현대사에 그리 관심을 가질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찾아가는 인류의 보편적인 고민의 장으로 우리를 초청한 것 만으로 만족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갈립의 두 칼럼은 아름답다 못해 훌륭한 단편이다. 첫째는 신비스러운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어떠한 골목의 좌우에 각각 화가 한명씩 배당시켜서 그림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의욕을 품은 두 화가 사이로 막이 쳐있고 그들은 작업을 한다. 드디어 막이 해체되고 그림이 공개되는 순간, 한 쪽 벽은 그림이 있고, 맞은 편은 '거울'이 있다! 놀랍다! 누군가를 닮아간다는 작품의 설정을 기가막히게 비유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벽에 그려 놓은 붉은 입술, 게슴츠레한 눈빛, 긴 속눈썹을 지닌 우리의 영화배우는, 거울에서는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넓은 가슴을 지닌 어머니가 됭 국가 전체를 위로하고 있었다. 흐릿해진 눈길을 첫 번째 벽을 돌리면, 그녀가 어머니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잔 아내라는 것을 공포와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알아채게 된다."(II:236)


두번째로는, 왕자 이야기로, 이 역시 자신을 찾는 긴 시간을 보냈던 우리를 보여준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책에서, 그 모든 작가에게서, 그 모든 이야기에서, 그 모든 목소리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러는 데 십 년이 걸렸다."(II:269) "'자신이 되지 못한 모든 종족, 다른 문명을 모방한 모든 문명,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행복해하는 모든 민족'은 몰락하고, 사라지고, 잊힐 운명이다."(II:274)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이 되는 것. 일단 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중요하리라. 비록 그 엔딩이 자칫 이기적인 것일 수 있겠으나, 읽기를 마치며 감동적인 만남 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자신과의 조우가, 역시 멋진 마무리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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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란 세계는 다른 사회가 가늠하기엔, 너무 깊은 역사의 시간과 너무 넓은 철학의 공간이다. 그들이 보유한 이야기거리는, 마치 고고학의 수많은 '텔'들이 차곡차곡 방대한 유물들을 품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그 어떤 도서관도 담아낼 수 없을 것 같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다(II:316): "나는 삼십이 년간 하루 평균 열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해 왔다. 노벨상은 나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열매라 생각한다."


회색빛 사막에서 끝없이 밭을 일구는 농부가 땀의 대가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