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0편은 '우리'의 노래이다
공동번역-시편 100편
1. 온 세상이여, 야훼께 환성을 올려라.
2. 마음도 경쾌하게 야훼를 섬겨라.
기쁜 노래 부르며 그분께 나아가거라.
3. 야훼는 하느님, 알아 모셔라.
그가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
그의 백성, 그가 기르시는 양떼들이다.
4. 감사 기도 드리며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 노래 부르며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 기도 드려라. 그 이름을 기리어라.
5. 야훼님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그 미쁘심 대대에 이르리라.
공동번역의 영성엔 생명력이 있다. 그것은 마치 기득권의 오만함이 싹 빠진 민중의 생명력이다. 오래전에 문익환 평전을 읽었는데, 힘들게 흘린 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문목사님의 거짓없는 흑백사진에서, 시편 번역의 넘치지 않는 왁자지껄과 푸근한 야훼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시편 100편은 '우리'의 노래이다.
BHS는 3a절에서 '다른 읽기'를 제시한다. 즉, 원래 마소라학파가 전수한 히브리어는 이렇다: "그분이 우리를 내신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쪽짜리 전통이다. 다시 말해서, 쓰기는 이렇게 썼지만, 읽기는 다르게 읽는 '반쪽짜리' 전통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케티브-케레'라고 부르는데, 쓰기는 '베로(welo') 아나흐누'(그러나, 우리가 [만든게] 아니다)이지만, '베로(welow) 아나흐누'(그리고 우리는 그의 것)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문 번역의 경우, NASB같은 역본은 BHS의 '쓰기'를 그대로 따라서, "It is He who has made us, and not we ourselves;"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번역들은 '읽기' 전통에 따라서, "It is he that made us, and we are his"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쓰기'와 '읽기'의 의미상의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다. 사실 두가지 모두 비논리적이지 않다. 단지 뉘앙스가 '건방짐'과 '겸손함'으로 차이가 날 뿐이다. BHS를 이렇게 썼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길래, '우리가 우리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서(히브리어로 '아싸흐'인데, 이것은 창조[바라흐]와 차이가 있다) 된 것이 아니다'라고 쓸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런 질문 자체를 던지는 것이 '시대착오'이다. 다시 말해, '이신칭의'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성서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 자체가 '건방짐' 혹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간과 전통은 '신앙'을 '종교'로 만들면서, 신 앞에서 '겸손함' 밖에 없음을 주입시킨다: "우리는 그의 것"
놀라운 점은 LXX 역시 '건방짐'의 번역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LXX가 번역을 잘못했을 수도 있거나, 혹은 그들의 가지고 있었던 히브리어 본문이 BHS와 다른 것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BHS를 어떻게 읽어내는지 몰랐거나, 아니면 그 때는 정말 그렇게 쓰인대로 읽혔거나, 그들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흥미롭다. 궁금한 것은 NASB가 과연 무엇때문에 '쓰기'를 고집했던가 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