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어? 바울 사도! 당신이 인용하는, 혹은 당신이 암송하는 말씀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다른데?"

진실과열정 2019. 7. 3. 09:09

바울 사도가 '구약'을 활용하는 방식은 당시의 유대교 랍비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그가 '구약'을 이해하는 깊이는, 예수를 종말론적인 메시야로 인식함으로써, 세상에 둘도 없는 통찰로 나아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구약을 히브리어판본이 아니라 헬라어판본인 칠십인경을 사용한다.


칠십인경의 사용이 현실적이며, 그것이 자신과 자신이 대상으로 삼는 교회들에게 '경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가 히브리어를 특별히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낳게 한다. 로마서의 경우, J. Ross Wagner (Heralds of the Good News: Isaiah and Paul in Concert in the Letter to the Romans)의 말과 같이, 칠십인경 이사야가 프레임이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롬 9장 33절을 보면, 바울은 칠십인경을 인용한다(사 28:16). 그래서 믿는자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히브리어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부끄러움'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얼마만큼 의도했을지는 모르지만, 바울 자신이 고대수사학의 초보가 아닌 이상[예를 들면, 롬 11:11-12의 '넘어짐'과 '충만함'이 언어유희라고 한다면], 의의 법이 아닌 행위의 법을 의지하는 사람의 부끄러움을 꼬집는 결과가 나왔을 법하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누군가가, "어? 바울 사도! 당신이 인용하는, 혹은 당신이 암송하는 말씀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다른데?"라고 걸고 넘어지는 경우이다. 과연 바울은 칠십인경을 암송함으로, 어느 정도 실수를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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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구절 중에서, 예레미야 33장 2절이 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암송의 경우, 개역판이 입에 잘 붙는다.) 해설성경엔 엉뚱한 직역이 떡하니 소개된다: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그 이름을 여호와로 확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일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이다' 하나님만이 오직 역사의 과거,현재,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정말 그러한가?


כֹּֽה־אָמַ֥ר יְהוָ֖ה עֹשָׂ֑הּ יְהוָ֗ה יוֹצֵ֥ר אוֹתָ֛הּ לַהֲכִינָ֖הּ יְהוָ֥ה שְׁמֽוֹ׃


사실, 이 짧은 구절은 한글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사본들이 다르게 읽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짧은 구절을 직역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번역을 자연스럽게 혹은 말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여러가지 히브리어 사본들은 조금씩 단어들을 고쳤다는 말이다. BHS의 비평각주는 렘 33:2에 4개의 다르게 읽을 가능성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격 여성접미사'이다. 동사 '아사'에 목적격 여성접미사가 붙어있다(이후 두개나 더 나온다). 사실, 이러한 표현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면, '그것을 만드는'이 되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성형이기 때문에, 그리고 렘 33:6을 근거로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WBC:169; 그리고 칼빈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렘 32:31은 그러한 논리에 반대이지 않은가?(ABC:528). 그래서 BHS의 제안은 문제가 되는 목적격 여성접미사 자체를 없애고 두번째 나오는 '야웨'를 '베하야흐'로 고쳐서, "만드시고, 그렇게 되게하는"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눈을 잠깐 다른 곳에 돌리면, 칠십인경이 나온다. 그 번역은 '목적어'를 '땅'이라고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칠십인경은, "땅을 만드신 야웨, 그것을 지으시고 (결국) 이루어내시는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이 이해가 된다: "땅을 지으신 주님, 그것을 빚어서 제자리에 세우신 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이름이 '주'이신 분께서 말씀하셨다."(새번역); "땅을 만든 나 야훼가 말한다. 땅을 빚어 든든히 세운 나의 이름은 야훼다."(공동번역). 새번역이 칠십인경에 도움을 받았고, 공동번역은 히브리어성경에 없는 '땅'을 두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칠십인경의 '땅'이 맞는 번역인가? 예레미야서의 경우 MT와 LXX의 차이는 그 순서와 분량에서 매우 심하게 나타난다. 문제가 되는 점은,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과거의 인식, 즉 MT가 우선된다는 무조건적인 'BHS 정경파'의 주장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즉, 사해사본에서 발견된 예레미야서의 경우 MT와 차이를 보이며, 오히려 LXX이 대본으로 삼고 있었을 원-히브리어 본문에 더 가깝게 되었다. 그러므로 LXX에서와 같이, 원-히브리어가 '땅'을 가졌을수도 있지만, W.McKane(ICC: 855)같은 학자는 LXX가 '땅'을 넣은 것은 동사의 접미사에 대한 설명의 차원일 뿐, 이 부분에서 MT와 본문상에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어번역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영어번역본들도 칠십인경을 선택한다고 보여진다(NRSV, NJB, ESV): "Thus says the LORD who made the earth, the LORD who formed it to establish it-- the LORD is his name".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이 칠십인경을 충실하게 따른 반면에, 영어번역본들은 절반만 따랐다는 점이다. 즉, 칠십인경은 '땅'을 넣었고, 대신 두번째 나오는 '야웨'를 생략했다. 결국,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야웨(주)가 한번만 나오지만, 영어번역본은 LORD를 두번 등장시킨다.


그런 측면에서, TNK만큼은 독보적이다: "the LORD who is planning it". 타나크는 렘 33장 자체가 말하려는 일종의 '감춤의 미학'을 번역으로 보여주는 정공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와 평행하여 랍비 로젠버그는,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시며 무엇을 지으시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이, 단지 숨겨진 용어(it)를 가지고 풀어내시는 분이라고 해설했다. 이것은 일단 정경으로 내려온 텍스트를 충성스럽게 읽어내는 신앙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J.Lundbom과 같이, 렘 32장과 렘 33장이 구조적으로 평행하고(32장과 33장은 각각 8개의 신탁들이 있다), 내용적으로 심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봄으로써, 문법적 문제를 시적허용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용납되는 것이다(ABC: 528).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하면, 렘 33:1에서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두번째'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신다. 이것은 앞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찾아보게 만든다(당시엔 장과 절이 없었으므로!). 멀리 렘 32:2에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있다. 그리고 가까이 렘 32:26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다'. 그리고 이어진 27절에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한다. 그것은, 멸망이 눈앞에 빤히 보이지만, 능치 못함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비록 예루살렘 성을 파괴할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그들로 영영한 계약을 세우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매매증서를 보관했던 이유이다. 그러므로 렘 33장에서 내용적으로 같은 것이지만(렘 32:44; 렘 33:26),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역사의 선택이 있음을 가르치는 차원에서 2절은 기능한다고 하겠다(그래서 W.Holladay의 번역은 동시에 철학적이다[Hermeneia: 221]).


(사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땅'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집어넣은 번역은, 비록 그것이 창세기의 창조를 후광으로 삼고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쉽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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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칠십인경으로 된 이사야 28장 16절을 암송했을 때, 어떤 히브리 전통의 그리스도인은 약간의 차이를 인식했을수도 있다. 그들은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번역은 신을 이해하는 더 넓은 세계로 인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예레미야 33장 2절의 말씀을 정확하게 암송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든 단어들을 정확하게 암기하는 것을 뜻할까? 한글자라도 잘못 암기하면 큰일이 나는 것일까? 이미 공공의 대상이 되어버린 정경의 차원으로 본다면, 한획 한글자가 그 자체로 신성시되어버린 그러한 대상으로 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사실 그러한 접근은 구시대적인 아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