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eption/William G. Dever

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 When Did They Know It? -5장

진실과열정 2019. 6. 14. 21:26

<< 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 When Did They Know It?

What Archaeology Can Tell Us about the Reality of Ancient Israel >>

<저자: William G. Dever; 번역: 양지웅>

** 각주는 생략하였음을 알립니다**



5

 

분열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의 일상사

 

 

 

히브리 성서를 수집편찬했던 사람들의 역사적 구조에 따르면, 이스라엘 역사는 솔로몬의 죽음과 왕조 계승에 대한 문제를 놓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두 영역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상당 부분 수렴이 이루어진 사항들을 이미 살펴본 바 있으며, 이러한 수렴을 통해서 기원전 약 1020-925년경의 통일 왕국 혹은 최소한 초기 국가이라는 성서적 개념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실재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약 925-586년의 분열 왕국시대로 넘어가려고 한다. 이 시기는 예루살렘에 통치기반을 세운 다윗 왕가의 길고 긴 왕들을 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은 유다에서 수도로 계속 남아있었다. 반대로 북왕국은 불안정하게 계승된 왕가가 다스렸는데, 수도를 처음엔 세겜과 티르사에서, 다음엔 오므리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자들이 주로 사마리아에서 다스렸다.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의 계승자들은, 10개의 옛 부족들이 합병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735-721년에 있었던 신-아시리아의 진격 앞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유다라는 남왕국은, 그 역사가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인들에게 대단한 호의를 받았는데, 계속 살아남았다가 587/586년에 있었던 느부갓네살 II세와 신-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10세기에 범-이스라엘 국가7세기 중반 이전에 유다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에 관해 수정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품고 있는 회의주의를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나는 첫 번째 주제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그 어떠한 실제적인 증거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거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두 번째 것도 역시 처리해보고자 한다 상당 부분 성서 본문과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 사이에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렴을 다시금 지적함으로써 말이다.


확실히 말하면, 수정주의자들은 9세기 중반 이후에 사마리아에 수도를 둔 이스라엘이라는 북왕국의 실재를 정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지 성서 외적인 신-아시리아 연대기가 이제는 처음으로 그러한 존재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대신 성서 본문은 의심의 눈으로 취급받았던 반면, -아시리아 본문은 액면 그대로 합당한 역사적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어찌 되었건, 수정주의자들은 북이스라엘 국가의 역사적 골격 정도로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아시리아와 신-바벨론 연표에 들어있는 왕들에 대해서만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증거가 있으며, 이것들에 대해서 수정주의자들은 일상적으로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고고학적 자료는 다음과 같은 표준적인 안내서들에 요약되어있다: 헬가 바이펠트(Helga Weippert),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 그리고 암논 벤-토르(Amnon Ben-Tor)의 저작을 보면, 수백페이지의 자세한 정보들을 알 수 있다.


위의 참고 저작들에 들어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반복하는 대신에, 여기에서 나는 몇 개 정도의 수렴되는 것들만 선택하려고 한다. 즉 이러한 수렴이 열왕기서와 예언 문학에 있는 성서 내러티브의 핵심 사항들에 대한 확고한 철기 시대의 맥락을 확립해준다. 이는 동시에 헬라-로마 시대 맥락이 명료하게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왕위 목록과 국제 정세와의 연계성

 

역사적 내러티브로 여겨지는 열왕기상하서(와 대부분 열왕기에 의존하고 있는 역대기서)의 일련의 작업 방식은 열왕기서에 언급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목록을 편집하면서 일단 발전시킬 수 있다. 성서의 기록자들은 이들 두 지배 권력의 모든 왕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인 순서로, 각 왕들의 통지 연대를 언급하면서, 통상적으로 상호간 가리키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정형어구인 유다의 왕 A가 이스라엘의 왕 B의 통치 제 몇 년에 그의 통치를 시작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완전하고 정교화된 왕위 목록은 절대적으로 후대의 창작일 수 없으며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편집자에게로 전해져 내려왔었음에 틀림없는데, 종종 그 시대의 왕실 기록물, 연대기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성서에 나온 왕위 목록은 생소한 것도 아니며, 분명히 말하면 독특하지도 않다. 고대 근동의 다른 곳에서, 예를 들자면, 우리는 너무나 유명한 수메르의 왕위 목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홍수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내용을 취급하고 있는 (마치 성서의 족보와 같은) 하나의 연대기이다. 또한 이집트 왕위 목록도 있는데, 이것은 30개의 왕조가 거의 3000년을 통치하고 있는 기간을 담고 있다. 이들 모두의 왕위 목록은 그 현재 상태가 어떤 점에서는 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은 여러 개의 조각들을 하나로 묶은 것으로, 이 중에 어떤 것들은 상당히 후대의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보다 상당 부분 통일성 있으며 정확한 순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상대적 연대기라고 부르는 것을 충분히 제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3천 년 전의 이러한 왕위 목록에 대하여 절대적인즉 역법에 정확한 날짜를 잡아내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며, 이는 탄소 14 동위원소법과 같은 현대의 정교한 도구를 활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첫 번째 왕조의 시작 연대는 서로 다른 자료들로 인해서 약 3200년에서 약 3000년까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2천 년대로 오게 되면, 왕들의 통치기간은, 특별히 이집트의 경우에 있어서, 10-20년의 오차 범위 안으로 좁혀서 잡아낼 수 있다. 그러한 정확도는 하늘의 특별한 표식들을 준수했던 고대인들의 행운 관습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특히나 개기 일식과 같은 천문학적인 현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왕이 등극하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종종 통합된다. 현대의 천문학은 일식 현상을 매우 정확한 날짜까지 집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자료를 기초로 전체 왕위 목록에서 특정한 왕조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매우 자세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연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전체 순서를 결정하는 일종의 연대기적 말뚝인 셈이다. 2천 년대 첫 오백년에 대한 이집트 연대기의 절대 연대는 대략 20년을 오차로 놓고 여전히 변화가 있는데, 이는 고대의 천문학자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관찰하였는지에 따라 그 정확도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일찍이 2천 년대 중기에서부터 높은” “중간의” “낮은체계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는 다양한 자료들로 인해서 그 연대를 설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1천 대로 오게 되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연대기는 아주 근소한 차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연대를 설정할 수 있으며, 어떤 것들은 정확한 해까지도 집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900년 전부터 고레스 대왕이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을 건립하기까지, -아시리아와 신-바벨론의 일련의 오랜 왕위 목록의 이름들과 그들의 정확한 연대를 확신하며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 일은 지난 한 세기 반 동안의 고고학 발견이 있었기 때문이며, 여기에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조사 작업이 더해졌기 때문이고, 또한 여기에 천문학과 자연과학까지도 포함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 덕분에, 이제 우리는 고대 근동 역사를 위한 상당히 신뢰할만한 연대기적 틀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으니, 특별히 첫 번째 천년인, 팔레스타인 지역의 철기 시대인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이 믿을만하며 또한 자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정당한 역사를 구성하지는 못한다. 우연적인 사건 사고를 말해줄 수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하나의 시작점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연대기는 그 어떠한 역사라도 반드시 그 위에서 세워져야만 하는 기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연대기적인 틀은 우리에게 하나의 뼈대를 주며, 그 안에 우리가 어떤 정황 가운데 사람들과 사건들을 집어넣어 결국 그것들이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믿을 만한 연대기가 존재하지 않으면, 역사는 완전히 무질서하게 보일 것이다.


잘 정리된 국제적인 사건들의 연대적 배열이 가져다주는 방대한 사항은 독자들에게 극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고대 근동 연대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20세기에 이르러 그 모양을 잡아감에 따라, 성서 학자들은 재빠르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소위 성서 외적 자료를 통해서 열왕기서의 연대기를 수정하려 했다. 일단 19세기 중-후반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성서에 나오는 왕위 목록이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얻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어진 정보가 과연 신뢰할만한 것인지에 대해 그 여부를 알아낼 방법조차 없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왕위 목록을 통해서 성서에 나오는 왕위 목록을 조율해낼 수 있었던 실제적인 계기는 에드윈 R. 딜레(Edwin R. Thiele)히브리 왕들의 신비로운 연대기(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와 같은 초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요즘 소개되는 연구서들에도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성서의 연대기는 엄청나게 복잡한 작업이며, 이와 관련한 방대한 연구서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을 여기에서 살펴볼 필요는 없다. 보다 단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에 언급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표의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는데, 특별히 아시리아와 바벨론 왕과 관련해서 성서와 성서 외적인 자료 모두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왕들을 그 연대까지도 확정해서 나타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연관된 대조 역사 연표를 나타내 주는 본문 자료만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중요한 역사적 상관관계를 언급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첫 번째 자료로, -아시리아의 앗술-나시르-2세와 그 후계자들의 연대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오므리 가()”로 나타나고 있다. 오므리는 그들이 시리아를 거쳐 지중해를 향해 종종 시도했던 서부 원정에서 맞닥뜨렸던 첫 번째 왕으로 나온다. 수정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아시리아와 관련된 자료가 기껏해야 9세기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한다. 참으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에, 이러한 자료들로 엄정하게 생각해볼 때,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히 침묵으로부터 나온 논증일 뿐만 아니라, 또한 수정주의자들은 아시리아 문헌의 언급이 9세기 초-중반에 와서야 시작하고 있는 이유가 사실 간단하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그들의 서부 원정이 그 때에만 시작했기 때문이며그렇기에 그들은 서쪽 지역의 그 어떠한 약소국들-아람이나 이스라엘 국가와 같은-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고 또한 신경 쓰지도 않았다아시리아 문헌은 10세기 혹은 심지어 9세기에도 위와 같은 이유로 유다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다가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아시리아가 처음으로 상당히 떨어진 남부지방인 유다와 마주하지 않았음을 나타낼 뿐이다



이스라엘

 

오므리, 876-869

 

아합, 869-850

여호람, 849-842

예후, 842-815

므나헴, 745-738

베가, 737-732

호세아, 732-724

(사마리아 몰락, 722/721)

유다

 

 

 

 

 

 

 

 

 

 

히스기야, 715-680

요시야, 640-609

여호야긴, 598

(포로지에서 죽음)

메소포타미아

 

아술-나시르-2,

883-859

 

살만에셀 3, 859-824

 

티글랏-빌레셀 3, 745-727

살만에셀 5, 727-722

사르곤 2, 722-705

 

산헤립, 705-681

느부갓네살, 605-562


아시리아는 735-721년의 원정으로 북왕국이 파괴된 이후, 그 유명한 산헤립의 원정이 있던 701년까지는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아시리아 본문은 오므리 ()라고 올바르게 언급하고 있는데, 서쪽 지역의 왕들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는 853년에 시리아 베카(Beqʿa) 계곡에서 벌어진 카르카르 전투로, 그 자료는 잘 문헌화되어있다. 아시리아의 연대기는 보고하기를, 아합이 다른 어떤 왕들보다 많은 군사력을 제공하였다. 심지어 다메섹의 벤-하닷 1세는 2000개의 전차와 만명의 보병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제 고고학자들이 지방의 중심지인 므깃도에서 발견된 그 유명한 솔로몬 마굿간을 올바르게 연대설정하게 되었는데, 바로 9세기로 아합의 통치시대로 잡은 것이다(비록 일부 학자들은 그것들이 왕실의 보관소였을 수도 있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거대한 수로는, 성벽 근처의 샘에서 나온 물을 운반하기 위해서 기반암을 거쳐 깊이 묻혀진 것으로, 이것 역시 그 연대를 9세기로 잡고 있다. 하솔에서, 이곳은 또 하나의 행정 구역 중심지로, 아합의 왕실 건축물 잔해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엔 요새화된 성채 둘레로 대량의 건축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대한 행정 건축물과 일련의 창고 혹은 저장소가 있었으며, 또한 수도 시설과 터널이 있어서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찬란한 기술적 업적 중에 하나로 치켜세울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이곳은 수도로, 언덕 위의 성채를 둘러서 매우 인상적인 왕실 건축물들로 가득한데, 여기엔 이중 방벽과 다수의 방을 가진 궁전들도 포함되는데, 거의 확실하게 아합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 오므리, 곧 왕조의 건립자가 기껏해야 7년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만든 상아 상감세공 제품은, 페니키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마지막 파괴 지층에서 발견되었고, 이 시기를 9세기로 잡는다.


이 시점에서 아합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능한 통치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가 남긴 인상적인 유물에서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왕조와 관련해서 적국인 아시리아가 존경해마지 않았다는 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히브리 성서의 기록자들은, 자신들의 남왕조에 대하여 그리고 신명기적인 신학적 개혁 운동에 신실했던 자들로, 아합과 그의 페니키아 아내를 그 어떠한 왕들보다도 더 경멸스럽고 혐오스럽게 대하였으며, 결국 그 자신이 배신을 당해서 몰락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열왕기의 편집자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중에 활용했을 일종의 전설로 취급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아합이 오랫동안 통치했다는 엄연한 사실은 이러한 정황에서 반드시 불명료하지만은 않다. 특별히 만약 고고학적 정보와 성서외적인 본문이 그것들을 연관 맺고 있다면, 그것들은 정말 관련 있는 일이다. 특별히, 사마리아에 바알을 위한 전을 건축했다는 식의 아합 통치에 대한 일면을 보도하고 또한 정죄하는 성서 기록자의 태도는, 매우 아이너니하게도, 그러한 성전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짧게 말해서, 심하게 겹쳐진 선전문구일지라도 어떠한 실제 역사까지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성서 본문의 행간을 읽는방법에 대하여, 우리는 아래에서 보다 더 살펴볼 것인데, 그 때 가서 우리는 대중 종교라는 주제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예후는, 비록 성서 기록자는 예후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종교적 열망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대조적으로 일종의 불운한 왕일뿐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제 초상이 살아남아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 왕으로, 매우 좋지 않는 평판을 얻은 왕이기도 하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는 841년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항복하였고, 엄청난 벌금을 지불해야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유명한, 살만에셀의 검은 오벨리스크에 새겨지게 되었는데, 아시리아의 왕 앞에 굴욕적인 모습으로 절을 하고 있으며 그의 발에 입 맞추고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영국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성서 기록자들은 예후가 벌금은 지불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몰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아마도 그들이 처음에 인정했던 한 때 혁신적인 인물을 퇴짜 놓는 일에 주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하 10:28-32는 단지 다음과 같이 보고하기를,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예후가 기록자들이 보기에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었던 야훼만을 섬기는정책을 포기한데에 따른 비난이었다.


여호람은, 예후를 이어 짧은 생을 살았던 왕으로, 아시리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최소한 현존하는 자료상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위에서 논의한 바 있는 텔 단에서 출토된 아람의 승전 비문의 추가 파편에서 거의 확실하게 추출해낼 수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바와 같이, “이스라엘 왕으로 읽기를 부인하고 있으며, 특별히 다윗 집안이라는 구절도 그러하다. 심지어는 그 비문이 위조품이라고 할 정도이다(4, p.144). 그러나 그들의 동기가 의심스럽고 실제로 다른 모든 학자들은 텔 단 비문을 신-아시리아 문서들과 동등하게 놓으면서까지 그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 비문은 특별히 중요하다 하겠는데, 왜냐하면 이 자료는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다메섹 왕 사이의 연관성을 확정지어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다메섹의 왕은 왕하 9:14-16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사엘이다. 그러나 벤 하닷 1세도 가능한데, 왜냐하면 842년 곧 여호람의 마지막 해는 두 명의 아람 왕이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텔 단 비문은 아람과 접촉했다는 성서 기록을 확증해주는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비문은 성서 기록과 다르게 보이는 새로운 정보들을 추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9세기 중반에 아람이 북이스라엘을 상대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확언하고 있으며, 바로 그 점에 대해서 남왕국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결국 이러한 내용들을 간단하게 언급함으로써, 그 기사는 최종적으로 열왕기하를 기록한 자들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시리아 문헌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들은 위의 표에서 나열되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처음엔 서부 원정을 나섰던 티글랏빌레셀 3세와 마주하게 되었고, 그런 다음 치명적인 사마리아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포위 공격은 살만에셀 5세와 사르곤 2세를 거치면서 아마도 일 년 반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사마리아 파괴에 대한 간략한 성서 기사와 아시리아의 연대기는 상호간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왕하 18:9은 살만에셀에게 승리를 돌리고 있지만, 아시리아의 기록물에 따르면 사마리아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르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위 목록을 보면 722년에 사르곤이 살만에셀을 계승하였음이 분명해진다. 이때는 의심할 나위 없이 포위공격이 한참 진행 중이다. 그러므로 난제는 쉽게 풀려진다. 성서의 기록이 북왕국의 멸망과 같은 중대한 사건을 그리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는 반면, 사르곤의 자료에서 보다 자세한 사항들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점은, 역사가들에게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 각각의 영역이 자신만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서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열왕기서에 대한 유다의 편집자들의 견해로 볼 때, 배교자 이스라엘은 응당 받아야 마땅한 대가를 치룬 셈이기 때문에 그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의 편견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명백성 때문에 그 편견이란 것은 쉽게 제거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는지를 명쾌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만의 방법론적 가설에 기초해서 수정주의자들은 북왕국의 멸망조차 인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관성이란 잣대로 볼 때, 만약 성서-외적 자료들이 없다고 한다면 그 일관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칙은 이렇다: “유일한 증거는 아무 증거도 아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점을 기초로, 누구라도 가장 위대했던 인물들과 고대의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신약 바깥에서는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현존하는 기록물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심지어 예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기록물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나 기독교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방법론적 문제에 대해서 얼마간 후에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산헤립과 히스기야

 

역사-기록을 위한 몇 가지 자료들 사이에 가장 널리 논의되고 있는 수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교적 후기 신-아시리아 왕의 잘 기록된 원정 보고로, 701년 유다를 공격했던 산헤립의 원정이다. 여기에서 상이점들은 주목할 만한 수렴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도움이 될 수 있다. 701년에 있었던 산헤립의 원정에 대한 타당한 자료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왕하 18:13-19:37에 들어있는 긴 구절들(평행본문으로 사 36-37장과, 추가 부분으로 대하 32:1-31)이 있고, 산헤립의 아시리아 연대기로 여기엔 유다의 46성읍을 정복했으며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기술이 있으며, 니느웨의 산헤립 왕궁에서 발견되었다가 이제는 대영박물관에 있는 라기쉬 포위와 정복을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기념비적인 석비들이 있고, 그리고 1935-38년에 영국인 고고학자들이 그리고 1973-1987년에 데이비드 우시쉬킨과 다른 사람들의 지도 아래서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이 작업했던 대규모 발굴 작업 결과물이 있다.


성서의 편집자들이 사실대로 라기쉬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은 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열왕기서는 단 한 절로 산헤립이 한 때 라기쉬에 있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역대기서는 여기에 단 한 절을 추가해서 그곳을 포위했었다고 말한다. 그 곳이 파괴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어떠한 말도 성서에는 암시되어있지 않다. 그렇지만 아시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라기쉬의 정복을 위대한 승리라고 자랑하고 있다-참으로, 이것은 니느웨의 산헤립 왕궁의 현관 전체에 붙여질 정도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비문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아시리아의 예술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특징을 보여주며, 라기쉬의 전투를 시각적으로 그리고 종종 끔찍할 만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라기쉬에서 이루어졌던 고고학적 발굴들이 아시리아의 부조작품이 놀랄만한 중요성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증거들이 모두 거기에 있다: 성문 남쪽의 도시 성벽을 향해 경사면을 따라 세워진 포위진이 있다. 또한 이중으로 세워진 방어벽으로, 오르막비탈과 내리막비탈을 따라 세워졌다. 그리고 성벽을 파괴할 목적으로 만든 아시리아의 철 바퀴를 갖춘 공성기가 있으며, 무너진 도시에 엄청난 파괴의 흔적들이 있다. 그리고 파괴된 성문과 불타오르는 성읍을 빠져나오는 피난민들, 또한 그들을 잡고 포로로 이끌어가는 모습들이 있다. 저항군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며, 어떤 그림은 참수형으로 다른 그림은 말뚝에 박힌 채로, 또는 살아있는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도 있다. 그리고 결국 도시를 아시리아의 수비대로 넘기고 만다.


실제로 아시리아 비문의 자세한 사항들 모두는 고고학으로 확인된 바가 있다. 심지어 산헤립이 전투를 참관했으며 또한 미술가가 그 전투의 생생한 그림을 스케치했을 것임에 분명한 언덕 꼭대기의 가장 전망 좋은 장소도 역시 발굴되었다. 또한 발굴자들이 밝혀낸 것들로 이중으로 된 성벽이 있다. 그리고 복잡한 공성 무기들이 있는데, 이것은 수 백 개의 철로 된 화살촉과 돌로 된 투물기들로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성 안쪽으로 경사로에 대처할 수 있는 기구가 있다. 파괴된 성문은 그 높이가 6피트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성벽에서 출토한 거대한 둥근 돌이 있는데, 이것은 불을 붙여서 경사면을 따라 굴리는 용도였다. 성을 소탕하면서 생긴 1500여구의 해골들은 깊은 수구(water-shaft)에 던져졌다. 잘 보존된 아시리아 양식의 투구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시리아인들이 애용했던 것을 나타내는 돼지 뼈들의 지층까지 나올 정도이다. 이 돼지는 유대인들에게는 금지사항이었다. 누구라도 아시리아 왕들이 자신들의 외국 원정을 일종의 고대 양식의 전쟁 특파원들에게서 얻어내었을 것이라고 단순히 추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기록하는 서기관들이나 간단하게 스케치하는 미술가 말이다. 이러한 전략은 후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 위대한 왕의 전쟁 무용담을 하나의 이야기로 확장시키려는 의도도 만들어지는 것임에 분명하다-그리고 그가 국가의 신에게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또한 그 신이 이제는 다른 어떤 나라들의 신들 보다 강력하다는 점이 증명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시리아의 본문과 전쟁 비문은 그러므로 의심할 나위 없이 정치적 선전문구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가장 노골적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기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이야기가 암시하고 있는 방식 그대로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같은 사건에 대하여 이상할 정도로 길고 자세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히브리 성서로 눈을 돌린다면, 그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극명하게 정치선전적(propaganda)인 것인지를 알고 놀라게 된다. 열왕기와 역대기 모두에서 언급하는 전체 이야기는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 신학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명기적 역사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예루살렘이 산헤립의 포위 공격에서 기적적으로 구원받았던 것을 경축하고 있는데, 바로 야훼께서 아시리아의 진중에 역병을 보내어서 군대를 멸절했고(왕하 19:35에서는 185천명이 죽었다고 자세히 기록한다) 그 결과 패퇴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 판본 모두에 따르면, 불경한 산헤립은 비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리아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자신의 신 니스록(Nisroch)의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자신의 친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히스기야는 아시리아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벌금을 물지도 않는다. 결국 성전은 무사하게 되었고, 그 보물들은 그대로 남겨질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야훼가 강력한 아시리아 군대와 그들의 허약한 신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위협을 당한 유다의 다른 지역들 중에서, 오직 라기쉬와 립나 만이 언급되었을 뿐이고, 그것도 기껏해야 지나가는 정도로만 간단히 언급되었다.


나는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이 산헤립의 원정을 묘사하는 일보다 신중심적 역사에 온통 주의를 기울여서 말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원정은 의심할 바 없이 8세기 후반에 유다의 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유다에게 벌어진 일련의 재앙들의 전초전으로, 유다는 일세기 후에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성서가 말하는 역사는 예루살렘의 구원 밖에는 안중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떠한 실제 역사라는 것이 들어 있는데, 이는 누구라도 그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로, 특별히 성서 본문의 편견들이 성서 외적 증거들로 수정될 수 있을 때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곧 살펴볼 것이다. 이는 성서 본문 하나만 살펴볼 때도 분명하다. 즉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서 다음의 사항들을 읽어낸다면 말이다: (1) 라기쉬는, 유다의 모든 성채들 중에서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로 여겨지는 곳으로, 포위를 당했다. (2) 예루살렘 역시 포위를 당했고 산헤립에 의해서 무시무시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인해 그 성은 정복되지 못했다. (3) 아시리아인들은 퇴각하였고 얼마 후에 산헤립은 죽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에살핫돈(681-669)이 왕위를 이었다.


성서 기사에서 캐낸 이러한 단순 사실들이 아시리아의 기록물에서 말하고 있는 산헤립의 701년 원정 기사와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음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통상 기대하는 바와 같이, 아시리아의 판본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들을 상당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46개나 되는 많은 수의 유다 마을과 성읍들이 어떤 방법으로건 위협을 당했으며 여기엔 예루살렘, 라기쉬 그리고 립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추가적으로, 아시리아 기록물은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산헤립은 자랑하기를, “유대인(, 유다사람) 히스기야를, 내가 새장 안의 새처럼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그 본문은 그 성이 실제 파괴되었는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시리아의 기록물에 의하면, 산헤립은 암살자의 손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아들로, 비록 성서 이야기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신속한 신의 보복) 즉각적인 사건이 아니라 20년 후(681)에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자료들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사건의 해석들 중에 그 어느 것도 성서 이야기의 본질적인 진술과 충돌하지 않는다. 단지 신명기적 역사가들에 의한 해석만이 서로 충돌할 뿐이다-신명기적 역사가들의 편견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어서 그들은 좀처럼 이야기에서부터 다소 쉽게 벗겨낼 수 있다. 우리가 라기쉬(와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비문들과 고고학적 발굴물과 같은 명백한 증거들을 더하게 될 때, 산헤립의 침략에 대한 상당히 정확하고 믿을만한 역사는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를 위한 최적의 가능성은 수렴과 상이함 그리고 균형 있는 개연성에 놓여 있다.

 

 

유다의 마지막 시대

 

백년과 백십오년 이후의 기간에,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본문에 언급된 최후의 유대 왕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이들은 불행한 개혁자였던 요시야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립을 지켰던 유대 왕 여호야긴이었다. 요시야는 갈그미스 전투에 운명적으로 참전했다가 이집트의 공격을 막아내려다가 그만 므깃도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 기록은 609년의 이집트 석비에 잘 나와 있다. 이것은 605년에 시작된 느부갓네살 2세의 신바벨론 제국의 발흥과 이집트 26왕조의 바로 느고 2세의 통치(609-593) 사이의 일들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 왕하 23:29,30과 대하 35:20-24에 기록된 요시야의 최후에 대한 기사는 7세기 중-후반에 있었던 신-아시리아에서 신-바벨론으로의 떠들썩한 권력 이동에 관한 다른 자료들로부터 우리가 알아낸 것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들 두 권력 사이를 중재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이집트 자체가 침략을 간단히 모면하려고 했던 일들도 역시 설명이 된다. 요시야는, 마찰의 사이에서 절망에 사로잡히고 말았으니, 그의 생명과 그의 왕국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서 성서의 해설자는, 비록 이 비극이 그들의 역사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점을 확인하기 보다는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불길한 사건들 모두를 그 표면적 가치로 엄숙하게 기록하였는데, 비록 그들은 요시야를 떠받들었고 몇 년 후의 예루살렘 몰락을 애통하게 여겼지만 말이다. 여기엔 거의 그 어떠한 편집활동이 포함되지 않았다.


유다의 진정한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은 히브리 성서에서 간단한 보고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598/597년에 있었던 바벨론의 첫 번째 포위공격이 있은 지 18년 후에 왕좌에 오르게 되었고, 그런 다음 세달 후에 물러났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결국 죽게 된다. 여호야긴이란 이름의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틀림없이 이 왕임에 분명하다. 더 나아가 562년을 말하고 있는 바벨론 연대기에는 포로 유배된 여호야긴왕을 위해 제공된 지급물품이 언급되어 있다. 이 세상의 영화는 이와 같이 사라져간다(Sic transit gloria mundi).


분열왕국의 종교와 제의

 

내가 지금까지 주장했던 바는, 분열왕국의 300년 기간에 해당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개요가 열왕기서의 핵심 자료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비록 열왕기서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신명기적 역사라는 틀에 사로잡혀있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개요를 채워 넣기 시작해야만 한다. 열왕기서를 확장시켜서 보다 넓은 신명기적 역사와 예언 문학으로 채워 넣어야하고 그런 다음에 고고학적 발견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후자의 경우, 굳이 말하자면 후자만으로도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살을 붙일 수있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고학에는 위대한 전승이라는 엘리트들만의 정통적 문학을 보충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최선의 조건에서 고고학은 일상적인 것들, 정상적인 대다수의 민간 풍습들을 생생하게 구현해 낼 수 있다. 성서 기록자들이 영속성에 집착한 나머지 잊혀지고 말았던 보통 사람들의 단순했던 삶의 양식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침묵되어졌던 그들의 목소리가 현대 고고학의 도움으로 다시 우리에게 들려지게 되었다. 과거에 존재했던 이스라엘을 만든 사람들은 이러한 이름 없는 민중들이었지, 우리가 이름으로 익히 알고 있던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는, 그들이 처한 상황은 성서를 기록했던 자들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세계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참으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결핍된 공통점은, 우리가 일종의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셈인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기록자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상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분열 왕국의 종교와 제의에 일단 집중함으로써 잃어버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그렇게 하는 중에,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점이 있는데, 나의 신학자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내게 주의를 환기시켰던 바와 같이, 바로 히브리 성서가 하나의 마이너리티 리포트(a minority report)”라는 점이다. 지식인이면서 더 나아가 종교적인 개혁자이기도 했던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서기관들에 의해서 거의 전부 기록된 성서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책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에 대하여 실제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그 종교가 어떠해야만 했는지 - 그리고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일은 오직 성서의 기록자들의 책임인 것이다. 더 나아가, 성서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엘리트 집단의 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오직 남자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남자들의 관심사 - 그 시대의 집권자들의 관심사 - 를 표출하여 사실상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는 배제하고 있다. 특별히,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역사,” 영웅의 행적, “공식적인 사건들,” 국가적인 일들, 그리고 위대한 사상이나 제도들에 맞추어져 있다. 성서는 개인적이며 가족적인 종교, 여성들의 제의 그리고 민간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다수(majority)가 행했던 종교적 행습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하게 무시하고 있다.


만약 성서본문 단독으로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하여 증거로써 부적합다고 한다면, 다른 어느 곳으로 우리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현대 고고학은, 다음의 여러 가지 이유로, 독보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첫째, 고고학은 오랫동안 잊혀진 성서의 세계와 특별히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에 관해서 새롭고, 사실에 입각하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방대한 정보에 빛을 비춰준다. 둘째, 이러한 새로운 정보는 엄청나게 다양하며, 실제로 양적인 면에서 무제한 적이며, 그러므로 어떤 측면에서는 본문자료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는, 다시 말해서 덜 의도적으로 편집되었다는, 장점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본문이 말하는 국가 종교에 대조적으로, “민간 종교를 밝혀낼 수 있는 독특한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 유물들은 엘리트 집단에게 국한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유물들은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공식화보다는 실제적인 종교 행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종교라는 것이 신 혹은 신들의 이름 아래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제사장이나 성직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가 어떻게 행해야만 하는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고고학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해서 전혀 다르고 아마도 보다 실제적인 그림을 줄 수 있다(비록 그것이 신학적인 눈으로 볼 땐, 반드시 더 진실하다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아래의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최근의 고고학 자료들을 몇 개 개괄해보려고 한다. 이것들은 내가 믿기로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이전의 역사 전부를 다시 써야만 할 정도로 강력한 것들이다. 그리고 특별히 왕조 시대에 이스라엘이 과연 진정한 유일신적 종교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재고해야만 할 것이다.


고고학으로 밝혀진 제의-장소들 개괄

 

이제부터는 성질상 확연하게 제의적인 유물들이 발견되었던 이스라엘의 최근 발굴 유적지들 몇 곳을 살펴볼 것인데, 이곳들 중에 어떤 장소는 의심할 나위 없이 성서가 저주했던 바모트(bāmôt) 산당이다. 우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 곧 철기 I-II 시대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1) 므낫세 부족 지역의 언덕 꼭대기에 개방형 모양으로 하나의 작은 성소가 발굴되었다. 이것은 아미하이 마자르가 1981년에 발굴한 곳으로, 12세기로 연대 설정이 되었다. 그곳의 특징은 중앙에 포장된 구역이 있다는 것인데, 여기엔 거대한 입석(성서가 말하는 마체바māṣṣēbâ)과 제단처럼 보이는 설비, 울타리로 전체를 둘러싼 벽이 같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일한 유물로는 몇 안 되는 초기 철기 I 시대의 조각들, 금속조각 몇 개, 테라코타로 된 제대가 있으며, 청동으로 된 등에 혹이 달린 황소가 멋지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 황소는, 아마도 봉헌물로 보이는데, 야딘이 하솔에서 발견한 것으로 대략 2세기 전인 후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판명이 난 또 다른 청동 황소와 상당히 유사하다. 여기에서 황소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활동하기 전 시대에 가나안 만신전의 주요한 남성신인 엘의 별칭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므낫세 지역의 성소 혹은 신당 - 사사시대에 발견된 것으로 유일하게 확실한 이스라엘의 제의 시설이다 - 은 아마도 야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옛 가나안의 신 엘과 연관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비록 초기 시절에 야훼는 엘과 유사한 특성을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 레바논 국경에 있는 텔 단은, 이스라엘 북왕국 초기에 여러 중심지들 중에 한 곳인데, 1966년 이래로 아브라함 비란이 발굴하였다. 둔덕의 북쪽 끝에 위치한 가장 높은 지점에서 인상적인 10-9세기의 시설이 발견되었다. 거대한 연단 혹은 제단이 있고, 그 제단으로 오르기까지 훌륭하게 깎아 만든(조각칼로 입힌) 기념비적인 일련의 계단이 있으며, 인접한 3방 구조 - 이 중에 한 곳에서는 돌로 된 낮은 제단이, 근처에는 재를 떨어뜨리는 구멍이, 그리고 세 개의 철로 된 부삽들이 발견되었다 - 의 성소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것은 아마도 성서에서 언급된 리스카[liškâ], 곧 성소의 한 예로 보인다. 그리고 전체 시설들은 아마도 수수께끼 같은 가나안 양식의 바마(bāmâ), 곧 히브리 성서에서 저주의 대상이었던 산당의 한 예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우리는, 사실, 여기에서 왕상 12:31이 언급하고 있는 여러 높은 곳 위의/신전들이라는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경내에 발굴된 것들로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관련 유물들로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제의적 목적으로 사용된 올리브 기름 압착기, 몇 몇 성서 구절들에서 암시되고 있는 형태의 크고 작은 네 개의 뿔 달린 제단, 제사장의 것으로 보이는 훌륭한 홀(scepter)과 같은 청동기로 된 기구들, 일곱 개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는 등잔, 나오스(naos) 곧 가정에서 사용한 성전/성소 모형, 주사위 몇 개, 남성과 여성 신상들, 그리고 다른 품목들이다. 이 제의 시설은 10/9세기에 시작하여 8/7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만약 우리가 본문과 인공유물 정보를 동등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단 지역의 산당에 대한 가장 극명한 특징들이 남쪽의 히브리 성서를 기록하고 편집했던 - 예루살렘 성전에 충성을 맹세한 - 사람들에게서 오해를 받았거나 혹은 전혀 아무 것도 몰랐다는 증거를 얻게 된다. 사실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이 시설은 이방 신숭배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어 저주를 받았다 - 이 경우에는, 의심할 바 없이 가나안-페니키아의 신인 바알과 그의 배우자 아세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기록자들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단에서 나온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정통적제의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그것이 왕조 초기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존재했었음이 아주 극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3) 텔 엘-파라(북부), 성서에 언급된 디르사로, 9세기 초반 북 이스라엘의 임시 수도였는데, 피에르 롤랑 드 보(Père Roland de Vaux)1946-1960년에 발굴하였다. 성문 안으로 막 들어서면, 마체바와 올리브 압착기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단의 시설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이로 보건대 의심할 바 없이 이것들은 성서가 넌지시 말하고 있는 성문-성소의 한 종류이다. 이에 더하여, 텔 엘-파라(북부)에서는 수많은 10/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여성 신상(일찌기 아세라신상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를 보라)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드물게 보이는 테라코타로 된 나오스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비교분석해볼 때 입구에 한 신이 혹은 한 쌍의 신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 중 하나는 확실히 옛 가나안의 어머니 여신인 아세라임이 틀림없다(위의 152페이지를 보라). 이것은 지층 VII-B층의 가나안 성전 모형으로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의 것과 거의 동시대를 이룬다. 바로 성서의 기록자에 따르면 모든 예배를 예루살렘으로 중앙화했다는 바로 그 시기 말이다.


(4) 금지된 지역 예배 장소로 예상되는 또 다른 예는, 솔로몬의 북부 행정 수도로 알려진, 므깃도에서 발견된 10세기 지층의 가정 성소를 들 수 있다. 성소는 다양한 제의적 그릇들과 소규모의 네 개의 뿔 달린 석회석 제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스라엘의 많은 유적지들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양식이었다. 그것들은 아마도 분향 제사를 위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성서 본문에서 언급되는 공식 예배 양식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비록 뿔 달린 제단이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유일하게 언급된 예로는 왕상 1:50,51이 있다).


(5) 므깃도에서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그 자매도시 타아낙(Taʿanach)이 있는데, 이곳은 10세기 제의 유물에 대해서 보다 실속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준다. 여기 에 있는 성소도 역시 거대한 올리브 압착기, 텔 엘-파라(북부)의 것과 유사한 테라코타로 된 - 봉헌물로 보이는 - 여성 신상 모형물, 그리고 신탁을 위한 의식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일군의 복사뼈 즉 관절뼈들 무더기가 있었다. 이중 하나는, 아주 오래 전에 독일인 발굴팀이 발견한 것으로, 층을 이루는 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것으로, W. 렙이 이끈 미국인 발굴팀이 발견한 것으로, 4층으로 된 것이 있다. 이 입상은 아마도 성전을 모형화한 것이라고 가장 적합하게 이해되고 있다. 가장 윗 열 혹은 층은 네발을 가지며 날개달린 태양 모양의 원반을 그 등에 짊어지고 있는 사자 그림이다. 다음 나래로 내려오면 성전의 출입구를 나타내고 있는데, 입구라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텅 빈 상태로, 아마 자신의 ”(히브리어로 베트[bêt], “인데 그 뜻은 신과 관련해서 성전이다) 문에 자리하고 있는 남성 신이 불가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층으로 내려오면 한 쌍의 스핑크스, 혹은 날개 달린 사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그룹으로 솔로몬 성전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마지막 아래층에는 깜짝 놀라게 하는 것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측면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한 명의 나체로 웃고 있는 여성 입상이 그 둘 사이에서 사자의 귀를 잡고 있는 모양이 나온다.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나는 다른 곳에서 제안하기를, 그녀는 가나안의 아세라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그녀는 이 시대에 사자 숙녀, 종종 옷을 입지 않고 사자의 등에 올라타는 모습으로, 레반트 지역 전반에 걸쳐 알려진 신이다. 예루살렘 근방에서 출토된 12-11세기경의 화살촉에 새겨진 글자에 의하면, 한 쪽 면에 가나안 혹은 옛 히브리어로 된 문자로 사자 숙녀의 부하가 적혀 있다. 이것은 아마도 전문적인 궁사의 직함으로, 그의 수호신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화살의 다른 면에는 소유자의 이름인 -아낫혹은 아낫의 아들이라는 글씨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아낫(ʿAnat)은 옛 가나안의 전쟁 여신이었다. 우리는 단지 이 모형 성전이 아마도 불가시적인 야훼와 확실히 볼 수 있는 아세라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종교 관념이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던 타아낙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을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고대 이스라엘의 도상학의 주목할 만한 부분인 셈이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오늘날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아세라 제의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6) 종교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출토된 고고학적인 여러 증거들 가운데, 여기에서 나는 단지 몇 개만 뽑아내고자 한다. 도미니칸 성서 학교(Dominican École Biblique)가 발굴한 대단히 큰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오래전에 발견되었지만 최근에 와서야 그 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8-7세기로 잡고 있으며, 여기엔 어떠한 몸체를 지탱하려는 목적으로 기다란 의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 몸체의 특징으로 유명한 기념비적인 하솔(Hathor) 양식의 가발의 모양으로 조각된 머리 받침대이다. 이러한 독특한 불룩한 가발 모양은 이집트 신왕국에서 쿠드슈(Qudshu)가 썼던 가발인데, 이는 거룩한 분으로 이집트의 암소-여신이었다가 이제는 가나안의 대중적인 여신 아세라와 동일시되고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예루살렘에서조차, 영적인 중심지에서조차, 경건한 유다의 여성들은 자신의 매장지의 머리받침대를 어느 곳에서건 가나안의 여신 아세라와 동일시될 수 있는 가발 형상로 만들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무덤들로, 7세기 후반의 것이, 성 앤드류 스콧츠 교회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유사한 머리받침대를 둔 긴 의자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은으로 된 부적들이 발견되었다. 하나는 특별히 흥미를 자아내는데, 왜냐하면 그것에는 민 6:24-27의 제사장 축복문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연대는 약 600년으로, 우리가 보유한 가장 오래된 성서 본문 조각인 셈이다 - 이것은 사해 동굴에서 나온 그 어떠한 사본들 보다 최소한 4세기나 앞서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성경조각은, 의심할 바 없이 제사장이 기록한 것으로, 편집의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주술적인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즉 이는 이스라엘의 정통 종교가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유한 것은 은 위에 새겨 넣은 성서 본문으로, 둥글게 말아서 끈으로 목에 걸게 되는, 일종의 부적, 다시 말해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인 셈이다. 그리고 거기엔 앞에 말한 마법적이거나 미신적인 제의와 관련된 수많은 고고학적 사례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환경에서 나온 것들로,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은 이집트의 신 베스(Bes)나 오시리스(Osiris)와 같은 이방의 신들을 부르는 것들도 있었다. 성서 학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고고학적 발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널리 행해졌던 민간 종교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성서 기록자들이 그렇게 단호하게 저주했던 그것 - 확신컨대 그들 스스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 저주만 했었다. “민간 종교에 대한 엘리트 집단의 오해에 관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례가 왕상 15:13(대하 15:16)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히브리어로 미플레쩨트(mipleṣet)라고 하면서 저주하는데, 이는 어떤 수준에서 가증한 것이란 뜻으로, 아세라를 지칭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 서서에서 단지 여기에만 등장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 정확한 의미를 확신할 수 없다. 후대의 성서 기록자들도 역시 아마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사람들이 그러한 가증한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말이다.


(7) 브엘세바는, 왕조시대에 최남단의 정착 지역으로(국경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을 쓴다), 1969-1975년에 요하난 아하로니가 발굴하였다. 가장 눈부신 발굴 가운데 몇가지를 들자면, 여러 개의 거대하고 문양이 새겨진 돌 조각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거대한 네 개의 뿔 달린 제단으로, 아마도 레위인의 도피성을 나타내려고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특별히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것으로, 왕상 1:50-53을 보라), 이는 누구라도 제단의 뿔을 상징적으로 붙잡음으로써 피난처를 얻어낼 수 있었던 장소였다. 이곳은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거대한 제단의 두 가지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다른 하나는 단 지역에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는 돌들은 옛 상태 그대로(in situ) 복원되지 못했으며, 후에 성문 근처의 창고(storehouses)” 벽에서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었을 뿐이다 - 부서진 뿔 달린 제단에서 나온 돌들이, 내 던져졌다가 나중에 건물 재료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제단은 본래 어디에 서 있었을까? 그리고 왜 부서진 것일까? 아하로니는 그의 기초 건물” - 이 거대한 건물은 특이하게 아래층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깊이 기초를 파 놓은 상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 이 과거에 거대한 성전 터였을 것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그곳이 제단의 본래 자리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성전은 8세기에 있었던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 때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바로 히스기야가 무너뜨린 수많은 산당과 그 제단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아하로니의 이론을 확증하는 차원에서, 근방에서 큰 (krater) 혹은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엔 히브리어로 코데쉬(qōdeš), (제의적 목적으로) “성스러운/구별된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이곳 브엘세바에서 우리는 아마도 다양한 유다 왕들의 개혁을 확증해주는 첫 번째 실제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가진 셈이 된다 - 그리고 그러한 개혁의 필요성, 곧 성서의 예언자들이 이방 신들을 숭배했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불평했던 내용을 확증하게 된다.


(8) 브엘세바에서 동쪽으로 멀리 안 가서 아랏(Arad)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아하로니는 꼭대기에 위치한 소규모의 성채와 성소를 발굴하였다. 그 연대와 해석은 10-6세기까지 다양해서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잘못된 발굴 기법과 미흡한 최종 보고서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논점은 분명하다. 9-8세기의 벽이 있는 요새의 한쪽 코너에는 세부분으로 된 (혹은 3방 구조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은 동시대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와 상당히 유사하다. 바깥 구역(성서의 표현을 따르면, 울람[ʾûlām], 현관”)은 실제론 거대한 돌제단이 있는 개방형 뜰로, 그 바닥에는 불에 탄 동물 뼈들이 발견되었고, 테라코타로 된 제대가, 그리고 웅크리고 있는 청동 사자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두 개의 얕은 접시가 나왔는데, 여기엔 히브리어 글자로 코프(qôp) 카프(kâp)가 써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코데쉬 하-코하님(qōdeš hā-kōhānîm), 제사장을 위해 성스러운/구별된 것이란 뜻의 약자일 것이다. 그리고 아랏의 몇 몇 제사장 가문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성서에 언급되고 있는 가문과 동일한 이름으로, 실제로 오스트라카나 새겨진 도자기들에서 나타났다. 이 중 하나에서는(18) “야훼의 집/성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가운데 방(성서의 표현을 따르면 헤칼[hêkāl], 혹은 중방으로)은 보다 작은 방으로, 이곳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낮은 밴치가 있는데, 의심할바 없이 봉헌물을 올려놓기 위한 용도이다. 안쪽 방(성서의 표현을 따르면 드비르[debîr], 혹은 지성소)은 상당히 작은 벽감(niche) 수준이다. 그 특징으로는 두 개의 양식화된 뿔달린 제단이 입구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위쪽엔 기름 성분의 물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분향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후면에는 두 개의 돌기둥(성서의 표현을 따르면 마체봇[māṣṣēbôt], 혹은 성스럽게 서있는 돌”)이 빨간 색이 덧입혀진 상태로, 두 개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눈에 띌 정도로 작았다. 이러한 제단들과 입석들이 이 건물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졌고 눕혀졌기 때문에, 아하로니는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가 히스기야 (다른 이들은 요시야) 개혁의 고고학적 증거를 가지게 되었다고 다시금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전을 총애한 나머지 지역의 성소들을 철폐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장을 좀 더 진행하고자 하는데, 바로 청동 사자와 한 쌍의 입석이 아세라, 사자 숙녀가 아랏에서 야훼와 함께 숭배되었다가, 아마도 1세기 혹은 그 이전에 이러한 일이 종교 개혁가들에게 문제시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공공연히 비난했던 일종의 혼합주의를 대면하는 것일까? 혹은 아세라가 이스라엘의 초기 시대부터 철저하게 이스라엘 제의에 동화되어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행습에 토착적인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을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서 야훼와 결합되어서, 아마도 심지어 그의 배우자로써 말이다.


(9) 이러한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세라에 대한 본문 증거가 두 장소에서 최근에 극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ʿAjrûd)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대상인들을 위한 숙소, 혹은 긴 여행 중에 잠깐 머무는 역사(驛舍), 시나이 사막 동부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곳은 1878년에 영국인 탐험가 에드워드 팔머가 발견했고, 1978년에 이스라엘 고고학자 제에브 메셸(Zeʾev Meshel)이 발굴하였다. 다시 한번, 이 발견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단지 예비적인 보고서 수준으로 출판되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이 유물의 충격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을 만하다. 유적지의 주요 건축물은, 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이중 벽에, 모퉁이에 탑이 있으며, 중앙엔 개방형 뜰이 있는 거대한 직사각형 요새 모양인데, 이는 네게브 지역에 알려진 다른 철기 시대 성채들과 유사한 구조이다. 그렇지만 입구 부분에서 독특한 점이 나타난다. 하얀 회반죽으로 덮인 경사진 길을 따라 들어가면, 두 개의 회칠한 곁간으로 뻗은 통로가 나오는데, 이 작은 두 개의 방에는 낮고 긴 의자가 있었고, 뒤로는 찬장과 같은 모양의 구멍이 나 있었다. 이 구멍은 분명히 퍼비사(favissae), 다시 말해 버려진 봉헌물이나 제의 용품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이러한 것은 많은 청동기-철기 시대 성소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긴 의자 역시 단지 사람이 앉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봉헌물을 올려놓기 위한 것으로, 이것 역시 수많은 닮은꼴들이 존재한다. 만약 아주르드 입구, 바로 이곳에 성소가 존재했을 것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이는 충분히 놀라운 점이기는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정말로 이를 의심하고 있는데), 그러한 의심은 발견된 것들을 찬찬히 조사하게 된다면 쉽게 사라져버릴 것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것들로 다음의 것들이 있다: 큰 돌로 만든 봉헌용 사발로, 여기에 히브리어로 다음의 글이 새겨져있다: “오바다의 (소유), 아드나의 아들; 야훼에게 복을 받기를.” 그곳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큰 저장용 항아리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그려지고 색칠되어 있다: 이상한 복장의 인물들이 행진하고 있으며, 친숙한 생명의 나무양 옆으로 염소들이 있었다. 사자들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특별하게 충격적인 장면이 있는데, 이집트의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 베스와 의자에 앉아서 반쯤 옷을 벗은 여성 신이 수금을 타고 있는 그림이다. 이 여성 신은 눈에 뜨이는 사자-보좌에 앉은 것으로, 내가 볼 때 그녀가 여신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우리는 고대 근동의 다른 곳에서, 왕의 옆에서 사자-보좌에 앉은 여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저장용 항아리에 히브리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축복 선언문으로, 다음과 같이 끝이 난다: “X가 사마리아의 야훼와 그의 아세라에게 복을 받기를.” 다른 히브리어 비문에도 역시 아세라가 언급되어 있는데, 야훼의 경우에서와 같이, 엘이나 바알과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 어떤 성서 학자들은 여기에서 히브리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 아세라(ʿāšērâ)의 등장과 관련시킨 최소주의자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 히브리 성서에서 40번 정도 나타나며 그것도 어떤 종류의 나무 형상, 기둥 혹은 나무와 관련해서만 종종 등장하는 이 단어를,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한 여신으로 보는 것이다. 여전히 점점 많은 수의 학자들이 다음의 요점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는 경향을 보여준다: 아주르드의 여신/상징물 아세라가 그 자체로 여신을 나타내고 있는지 혹은 단지 야훼의 곁에 있음으로써 야훼와 함께 기도를 받는 수준의 축복의 전달자정도로 상징적으로 취급되고 있거나 간에, 그러한 상징이 효력을 끼친다는 측면에서 여신이 실재한다는 인식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만연했다는 점이다. 어찌되었건, 옛 가나안의 아세라는 이스라엘의 여러 집단 사이에서 죽지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었으며 그것도 잘 있었다 - 비록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었던 8-7세기의 일부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쿤틸렛 아주르드의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도, 심지어 최소주의자적인 해석을 채용한다 하더라도, 내 생각으론 고대 이스라엘의 규범종교에 관해서, 다시 말해 유일신주의(monotheism)에 관해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연구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고 본다. 히브리 성서가 표방하는 유일신주의라는 형식이 추구하는 바와, 실제 종교적 행습은 전혀 별개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고학을 통해서 그동안 보존되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됨으로써 가까스로 알게 된 민간 종교라는 것이 바로 실제 종교 행습이며, 이는 성서의 그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10) 아주르드에서만 이러한 본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1968년에 발굴한 헤브론 근처의 키르벳 엘-(Khirbet el-Qôm)8세기 유대 무덤에서 발굴된 비문에 따르면, 앞에서 제기했던 것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나온다. 비록 어떤 부분은 읽어 내려가기가 어렵고 논쟁의 소지가 있지만, 가장 그럴듯한 읽기는 다음과 같다:

 

우리야후, 왕자; 이것은 그의 비문이다.

우리야후가 야훼에게 복을 받기를,

그의 대적들로부터, 그가 그의 아세라를 통해 그를 구원하시기를.

 

실제로 모든 학자들이 이제는 세 번째 열의 그의 아세라를 통해서라는 읽기가 확실하다고 동의하고 있다 - 그리고 그것이 아주르드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도,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도 아주르드의 해석상의 문제가 동일하게 있을 수 있다고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덤이나 제의적인 장소에서 손으로 쓴 고대의 히브리어 글씨를 문자적인 차원에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그것들 모두가 축복문의 맥락에서 아세라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 볼 때도 충격적인 일이다. -성서적 본문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통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왕조 시대 전반에 걸쳐서 이스라엘-유다의 야훼신앙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세라는 야훼의 배우자로 여겨졌으며, 최소한 그의 실재(hypostasis)”가 되었고, 야훼의 인격화된 양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마치 ,” 곧 후에 지혜로 되는 것처럼; 혹은 중세 카발라 유대교 세계에서 하나님의 현실적인 임재를 뜻하는 셰키나가 되었던 것처럼). 나는 주장하기를, 정통주의 본문 전승이 사실상 본래 여신 아세라를 가리켰던 성서의 많은 구절들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알아챌 수 없는 여러 곳의 남은 관련 본문들을 경시했을 것이라고 본다.

 

 

인공유물 자료와 이스라엘의 제의

 

위에서 논의했던 제의-장소들(과 몇 가지 유사한 다른 사례들)에 첨가해서, 우리는 이제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 신앙과 행습이 다양했음을 반영하는 수많은 개별 인공유물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1) 우리는 테라코타로 만든, 12-7세기에 이르는, 수 십 개의 고대 이스라엘의 제대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고대 근동 전지역에 걸쳐 청동기 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던 제대들로, 거기에 새겨진 인장과 그림들로부터 신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선사하기 위한 용도였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분향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의식들은 또한 고대 이스라엘에서 표준적인 제의의 일부였는데, 이는 우리가 여러 성서의 본문에서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한때는 상당히 정교화된 제의기구들이 분명 존재했었을 것이다. 여전히 히브리 성서에는 어느 곳에서도 제대라는 것이 암시조차 없다는 사실이 진기하기만할 따름이다. 마치 성서의 기록자들은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 혹은 어쩌면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부정했던 것일까? (성서 본문은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다른 제의적 인공유물들에 관해서 역시 침묵하고 있다.)


이스라엘-유다의 제대들 중에 어떤 것들은 비교적 단순한 모양으로, 명확히 상징적인 특징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위에서 논의했던 10세기 타아낙에서 발견된 제대에서처럼, 완전히 가나안 양식의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가장 특징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는 아이(ʿAi)에서 발굴된 12세기 제대로, 이곳은 확실히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역인데, 수많은 창() 모양의 구멍 혹은 창문들이 나 있어서, 분향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그 하부 주위에는 불쑥 나온 사람 발 같은 것이 있어서, 아주 진기하게 잘 만들어진 작은 기둥처럼 보인다. 발을 숭배하는 제의란 말인가? 어찌 되었건, 이러한 일반적인 제대에 대해서 히브리 성서가 어떤 면으로라도 언급하고 있지 않는 반면, 그 본문이 언제나 희생 제의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확실히 주의깊이 생각해볼 문제임에 틀림없다.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이 기술하고 있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 행습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들 자신만의 이상적이며 신학적인 생각으로, 단지 일어나야만 했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을 재구성했던 것일까?


(2) 우리는 위에서 뿔이 넷 달린 석회암 제단 몇 개를 살펴본 바 있다. 여기엔 브엘세바에서 출토된 실물 크기의 예도 포함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것들은 -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최소한 40개 정도 되는 것들을 보면 - 축소된 것들로, 30센티미터에서 90센티미터 높이이다. 이러한 작은 뿔달린 제단들은, 10세기에서부터 6세기까지의 것들로 다양한데, 이스라엘과 유다 전지역에서 발견되었고, 그 환경도 다양해서 제의적, 가정, 그리고 심지어는 산업적인 환경에서 발견될 정도였다. 각 모서리에 (때로는 양식화된) 네 개의 뿔 달린 모양으로 돌출이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동부 지중해 세계 전반에서 잘 알려진 고대 청동기 시대의 황소 제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가나안의 만신전에 엘(El) 신에게 사용된 이름이 황소라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바 있다. 성서 기록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배교에 관해서 말하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시나이 산의 청동 황소를 세웠던 이야기를 말하거나, 혹은 솔로몬의 죽음과 북쪽 지파의 탈퇴 이후 여로보암이 자신이 새로 건립한 단의 왕궁 성소에 세웠던 황금 황소 이야기(왕상 12:28,29)를 말했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된다.


어떤 경우에서건, 다시 한 번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러한 작은 뿔 달린 제단에 대하여 본문 상으로는 힌트조차 얻을 수 없다. 그것들이 분향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분향 제사들이 종종 성서 본문에서는 상당히 자세한 정도로 기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금, 우리는 물어야만 하는데,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지방의 제단들이 종교 개혁 운동에서 부서졌다라고 성서가 기술했을 때, 그것은 분명히 이렇게 작고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면, 성서의 언급은 과연 무엇과 관련된 것이며, 그리고 또 왜 본문은 우리에게 자세한 내용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일까? 만약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개의 예들과 다양한 모형들에서처럼 좀 더 기념비적인 제단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 발굴물은 완전히 성서의 기술에 부합하지 않으며, 만약 종교적 실제에 대해서 본문과 인공유물이 관여하는 한, 최소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인식이 있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된다.


(3) 우리는 테라코타 식으로 만든 다양한 이국적인 그릇들과 기구들을 발굴해 냈는데, 종종 일종의 예식적인 용도로 이해하는게 제일 낫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 그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제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비록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며 또한 이론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정확하게 나타내기 어려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예식적 그릇 가운데 한 부류로 나오이(naoi) 곧 모형으로 만든 성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논의했던 것으로, 우리는 몇 가지 이스라엘의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고대 청동기 전통을 이어받아,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모형으로 만들어진 성소로, 종종 출입구에 한 신 혹은 한 쌍의 신을 세워놓고 있다. 종종 사자, 비둘기 그리고 하솔(Hathor) 양식의 가발과 관련 맺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형 성소가 아세라 숭배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도 지방의 성소나 가정 내의 제의에서 여성들에 의해서 숭배되었을 것이다.


다른 부류의 제의 도구로 케르노스(kernos, 복수형은 kernoi)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요술-그릇(trick-vessel)”으로, 키프로스 지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아마도 해양 민족이나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이스라엘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작은 사발로, 가장 자리 부분이 텅 비어 있어 액체가 지나갈 수 있다. 그래서 속이 빈 동물의 머리가 가장 자리 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거기로 액체가 나오게 만든 것이다.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와 같은 것으로 채워졌을 때, 이런 사발을 기울여서 머리 부분을 통해 마시거나 부을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게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케르노이가 단순한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러한 복잡하고 이국적인 그릇들이 제의에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의심할 바 없이 전제(奠祭, libation offering)에 해당한다고 여기는 것이 더 합당하게 보인다. 그러한 제물은 종종 성서 본문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실제 고고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던 케르노이 혹은 그 어떠한 다른 전제용 그릇들에 대한 암시가, 성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상당히 일반적인 테라코타로 된 동물 모양의 신상에 주목할 것이다. 특별히 8-7세기 유다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대부분은 (가끔씩 기수와 함께) 말이나, 암소, 혹은 황소처럼 네발짐승이 많지만, 다른 것들로는 사육하는 동물들도 곧 잘 등장한다(어떤 경우엔 재밌게도 다리가 세 개 달린 닭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물 신상 중에 일부는 속이 비어 있어서 전제용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정체를 알기 어렵다. 말과 기수의 신상 혹은 머리에 태양 모양의 원반을 달고 있는 네발짐승과 같은 것은 요시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태양 수레를 철거했다고 기술하는 왕하 23:11,12의 그것들과 관련되어 여겨져 왔었다. 이것은 분명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태양과 천체 숭배를 암시하는 것으로, 8-6세기에 이스라엘과 유다 종교 안으로 심각하게 잠식해 들어왔다고 여겨진다. 이는 예언자들의 비난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다른 수많은 테라코타 물건들이 알려졌는데, 거의 확실히 제의적인 기능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단지 몇 개만을 언급하려 한다. 특별히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축소된 가정용 가구 모형들인데, 예를 들면 의자, 침상, 혹은 침대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확실히 죽은 자의 사후세계에 동반된 차원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반드시 어떤 측면에서 종교적으로 (“마법적인”) 의의가 있다. 같은 원리가 돌로 만든 작은 딸랑이(rattles)”에서도 적용되는데, 이러한 딸랑이가 내는 소리가 제의에서 사용되는 음악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과 다른 그릇들은 때때로 단지 장난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환원주의적 견해는, 내가 보기에, 고대 제의를 다루는데 있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혹은 우리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드러내줄 뿐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서, 진흙으로 만든 어떤 그릇들은, 세 발 달린 구멍난 향로와 같이, 분명한 제의적 기능이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들이 과연 어떤 기능을 했었는지를 이해하려고 반드시 노력해야만 한다.


(4)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이 발견해 왔던 제의적 유물들 가운데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2000개도 넘는 점토로 만든 테라코타 식의 여성 신상인데, 매우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정면에 벌거벗은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초기 것일수록 종종 템버린(혹은 빚어 만든 원형 떡) 혹은 가끔 상체로 아이를 붙들고 있으며, 후대로 와서 유다의 것들에서는 주로 젖가슴이 강조되고 있다. 거대한 엉덩이와 과장된 삼각형 모양의 음부를 가진 모신(Mother Goddess)를 묘사했던 전형적인 후기청동기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상은 일반적으로 양식화된 것처럼 하체가 낮아졌고, 몸체는 단지 기둥으로 묘사해서 종종 아세라와 관련되는 나무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그래서 그 이름을 기둥-받침신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대적인 간소화된묘사는, 가나안 남성신의 오래된 배우자로, 몹시 야한 성적인 특징을 가진 아세라/아낫이, 이제는 주로 대모(Mother)이자 어머니의 수호신이라는 여성 신의 개념으로 대신 자리를 잡았음을 보여준다. 윌리엄 F. 올브라이트는 이러한 신을 젖먹이 신상이라고 불렀는데, 딱 맞아 떨어지는 표현인 것 같다. 보다 최근에, 지오니 제비트(Ziony Zevit)는 이러한 여성 신상을 기도하는 점토 신상이라고 적절하게 불렀다 - 이 경우, 아세라에게 도움을 비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신상의 명백한 모양을 보고서도, 상당히 많은 성서 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앞서 언급했던 것에 관해 그 어떠한 점도 결론 맺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것들은 단순한 장난감정도로 생각한다 - 내가 바비 인형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알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들의 제의적인 함축은 분명하다. 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즉 대중적인 삶과 공식적인 정치 종교적 기능 활동의 자리에서 배제된 여성들이, 반드시 그것들을 가정적인 관심사에 관계하여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심사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특별히 번식 - 임신, 출산, 수유 - 과 관련된 일일 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장례식과 같은 통과 의례에 관여한 일이며,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책임지는 다른 모든 실제적인 문제들에 관련된 것이다. 확신컨대, 아마도 남자들도 역시 이러한 가정적 활동들에 부분적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따뜻한 가정의 종교는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여자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같았다. 만약 야훼 - 주로 독보적으로 남성 신으로 그려지며, 국가의 정치적 역사에 관여된 신 - 가 친밀하게 여겨지지 못하며, 여성들의 필요에 무관한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러므로 고대 이스라엘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여성 신에는 더 가깝게 느꼈고, 보다 쉽게 자신들과 동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그것은 아세라이며, 이 여신은 철기 시대(와 심지어 훨씬 더 후에) 레반트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널리 숭배되었다. 이에 대하여 그리고 대중 종교의 다른 면들에 대하여 이제 살펴보도록 하자.

 

 

민간 종교를 정의하기

 

이 장 처음에서, 나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거의 모든 주석자들이 스스로를 우리가 위대한 전승이라고 부르는 본문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이 경우, 증거는 히브리 성서라는 공시적이며 정경적인 본문에서 나오는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전반적으로 엘리트들의 것이다. 그러한 고대 이스라엘 종교 - 소위 정통종교 - 는 히브리 성서의 최종 편집자들에 의해서 의도된 것일 수 있다. 확실히 그것은 수세기동안 성서 본문을 주석해왔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게나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그림은 인위적이며 심지어는 독단적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대다수의 실제 종교 행습의 엄청난 다양성과 생명력에는 정당하지 않다. 이러한 그림을 올바르게 조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견으로, “민간혹은 대중 종교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일반적으로 기록된 자료에서는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못하는 점들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 종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최근의 몇 연구들은 이 주제를 접근해왔지만, 내 생각에 그 어느 것도 타당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로는 수잔 에커맨(Susan Ackerman)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6세기 유다의 대중 종교(“Under Every Green Tree”: Popular Religion in Sixth-Century Judah)와 캐럴 반 데 툰(Karel van der Toorn)그녀의 요람에서 그녀의 무덤까지: 이스라엘과 바벨론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From Her Cradle to Her Grave: The Role of Religion in the Life of the Israelite and the Babylonian Woman)이 있다.


대중 종교를 정의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고고학적 증거를 조사해서 공식적인 문헌자료와 급격하게 차이를 보이는 점을 찾는 것에 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 성서 본문에서 저주받은 종교적인 행습들을 자세하게 찾아봄으로써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예언자와 제사장들 그리고 개혁자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실질적이며 합법적인 가정을 할 수 있다. , 그들이 불평했던 종교적 상황이 실제 상황이지, 자신들의 수정주의적 메시지를 포장하기 위해 손수 고안해낸 것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이러니는 대중적인 종교 행습을 저주하면서, 성서의 기록자들은 그러한 행습에 대한 기술을 우연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보존하고 말았다. , 원래는 고고학적 대발견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증언이 될 수 있었던 것들이, 성서 안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의 정통 종교에 열정을 품었던 이러한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이 우리가 알기 원하는 대중 종교에 관한 엄청난 정보들을 의도적으로 감추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고고학은 상당한 추가 정보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성서 본문의 행간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어떻게 본문과 고고학적 기록물을 함께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예로, 각각 대중 종교에 대해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면,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7:18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가정 예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비록 예언자가 비난하는 맥락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왕은 아세라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아스타르트(ʿAstarte)이다. 이 둘은 철기시대에 종종 하나처럼 생각되었다. 유다 왕국 시대에 실제로 이루어졌을 일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예는 왕하 23장에 길게 묘사되어 있는 요시아 왕의 개혁으로, 이 개혁은 7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유명한 사건이 거의 신명기적 역사가의 선전용 주장이라는 입장으로 보며, 정확한 역사적 기록물로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이 과연 성공했느냐에 대한 질문은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개혁이 과연 필요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눈에 보이는 증거, 곧 실제 종교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평가에 기초하고 있어야 하겠다. 그러한 필요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로, 내가 최근에 밝혔던 바와 같이, 왕하 23장에서 금지된 종교적 물품과/혹은 행습 그 모든 것들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너무나 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용어는, 본문을 다루는 학자들이 통상 가정해왔던 바와는 달리, 전혀 불가해하지 않다. 오히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실재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다.


나는 다음의 특성들 모두가 이제는 고고학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대중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의 정확한 그림을 그려준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대중 종교는 대안적이며, 비정통주의적이고, 어떠한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 차원의 종교적 표현이다. 그것은 대개 비중앙화되어있고, 제도적이지 않으며, 국가 제사장이나 국가의 지원 밖에 자리 잡고 있다. 비권위주의적이기 때문에, 대중 종교는 배타적이기 보다는 포용적이다. 그렇기에 특별히 소수자들과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엔, 대부분 여성들)에게 호소력이 강하다. 믿음과 행습 모두에서, 절충적이고 혼합적인 경향을 보인다. 대중 종교는 정교화된 공공 제의보다는 개별적인 경건과 비공식적 행습에 더 집중하며, 지적인 형식화(, 신학)보다는 예식에 집중한다. 정의상, 대중 종교는 학식 수준이 낮으며(덜 복잡하다거나 정교화되었다는 것이 증거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자료를 통해서보다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그 배경을 보다 더 잘 추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중 종교는 표준적인 본문보다는 파편도기나 낙서 같은 것에서 발견할 수 있고, 경전보다는 제의나 다른 상징적인 자잘한 물품에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분명한 이분법에도 불구하고, 만약 다수의 종교적 행습들을 우격다짐으로 고려해볼 때, 대중 종교는 중요한 점에서는 공식 종교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대중 종교는 종종 그 자체를 동등하게 합법적으로 여긴다. 그리고 모든 종교들이 그러한 것처럼 동일한 이득을 확실하게 하려고 한다. ,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연과 사회를 결합시키며, 건강과 풍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잘사는 것을 약속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중 종교의 주요한 요소는, 우리가 성서 본문과 고고학의 하위 영역에서 모두 취합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아마도 다음의 것들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중종 등장하는 바못(bāmôt, 산당)과 다른 지역 성소들; 형상을 제작하는 것; 아세림(ʿāšērîm, 성스러운 나무이거나 도상학적인 모형) 숭배와 위대한 숙녀 아세라 예배; 출산과 육아와 관련된 제의들; 순례 여행과 성인 축제; 여러 종류의 파종과 추수 축제; 마르제악(mārzēāḥ) 축제(성스러운 연회); 죽은 자를 위한 전제와 같은 여러 가지 장례 절차; “하늘 여왕”(아마도 아스타르트)을 위한 떡 만들기; 탐무즈를 위한 애곡; 여러 가지 모양의 태양과 천체 숭배; 점술과 마술; 그리고 혹시 있다면 유아 희생 제사. 이러한 민간종교의 요소들은 종종 따뜻한 가정종교를 특징짓는 것들이라고 여겨 왔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분야로 생각되어졌다. 그러한 추측은, 전형적으로 남성 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일종의 남성들의 생색내기에 다름 아니다. 어찌되었건 결국,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성은 거의 전부 문맹이며 주변인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삶과 기구를 형성하는 사회-정치적 과정에서는 중요치 않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 종교에서는 많은 남성들도 역시 참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특별히 예루살렘의 엘리트 집단의 영향이 끼치지 않는 시골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세라, 곧 생명을 가져다주는 이 여신은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수호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은폐된 아세라(Asherah Abscondita)

 

고대 이스라엘의 대중 종교의 역할과 어머니 여신 제의가 대다수의 성서 학자들에 의해 묵살되고, 오해되며, 경시되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바로 이 주제를 다루었던 학생들 대부분이 남성이며, 주류 권력가들이고, 엘리트들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성서 기록자 그들의 편견에 (절대 우연이 아니다)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신교 학자들이 전형적으로 선호하는 경향도 있는데, 바로 이들이 학문분야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어떤 형식으로도 제의(곧 종교적 행습)보다는 신학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만이 우리에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하여 보다 적합한 정보를 전달해줄 수 있다는 관념 - 즉 고고학이나 물질 유물 연구보다는 문헌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기초적인 관념을 뜯어 고칠 수 있도록 문자 그대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별히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옛 가나안 모신 아세라 -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서 삭제되었고, 랍비 시대에서는 거의 전부 잊혀진 존재 - 가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조 시대 전반에 걸쳐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은 이제 진정한 유일신종교(, 기껏 말하는 일신주의수준이 아닌)가 포로기와 그 이후에 와서야 발생할 수 있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후대에 와서 위대한 모신 제의가 다양하게 반영되고 있다: 신격화된 지혜(호크마[Ḥokmah])가 후기 유대교에서 인격화되었다; 그리고 셰키나(Shekinah)라는 개념, 곧 세상에 유효한 신적 임재로, 때로는 매트로니트(Matronit) 혹은 심지어 하나님의 신부라고 불리며, 유대교의 카발라 종파의 중세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기독교 교회에서, 신의 여성적 표현에 대한 원시적 기억으로 되돌릴 수 있을법한 평행되는 교리가 있는데, 바로 거룩한 영에 대한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성령이 보다 내재적이며 또한 영양분을 주는 존재로, 신의 초월성을 보완하는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별히 이와 직접 관련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의 자리로 격상된 것이다. 마리아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여성 중보자로 이해되는데, 바로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 자신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서 전달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주류 집단, 즉 보다 정통신앙을 가진 목회자들은, 유대인들이건 기독교인들이건 상관없이, 표면상 엄격한 유일신론적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이교도적작용에 언제나 저항해왔었다. 그러나 대중 종교에서는 이러한 옛 제의들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없어졌다할지라도, 고고학은 때때로 그것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며 그러므로 보다 균형 있는 종교 역사를 쓸 수 있게 돕는다.


남은 이야기의 요점은 간단히 말해서 바로 이것이다: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은 다시금 이스라엘 종교 발전에 대하여 자신들이 작성한 역사의 많은 사실들에 있어서 틀리지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은 그 사실의 해석에 있어서 한 쪽 편에 서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만의 집단적 사고 - 엄격하게 정통주의적 견해 -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종교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많은 실마리를 우리에게 남기도 말았다. 아마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적 신앙과 예식을 매우 심하게 저주함으로써, 그들은 그러한 이교도적 종교 행습이 널리 존재했었음을 확증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명기 사가와 같은 예언자들과 개혁자들에 의한 계속된 정죄가 나오지 않았을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문학비평이나 수정주의자들과 동의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들의 해체주의적 견해와는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관하여 진실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 성서 본문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만의 이상화된 주장을 역으로 읽는 방법이다. 이것은 성서 기록자들이 염두했던 종교적 진실은 분명히 아니지만, 역사적인 진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바로 그것이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로써 우리의 합당한 목표라고 하겠다. 심지어 여기에서 개략적으로 제시했던 (그리고 상당히 많은 양의) 고고학적 증거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고고학이 보여주는) 그러한 사실이 은폐되기라고 했다면,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유대교이건 기독교이건 상관없이, 한 가지 특정한 성서적 세계관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바로 후기 신명기주의자들과 개혁적 예언자들의 사상 말이다. 그러나 사실, 여전히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수많은 다른 세계관들이 엄연히 존재했었다. 비록 그것들이 어느 시기에 와서는 비정통주의적으로 보였을 뿐이지만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의 실제적 다양성과 생명력에 대한 인식이 우리 자신들의 종교적 생각에 과연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는, 마지막 장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룰 계획이다.

 

 

성서 시대의 일상: 축성기술

 

나는 제4장에서 고대 이스라엘이 이미 10세기에 국가상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수정주의자들도, 북왕국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9세기에 와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을 밝힌바 있다. 나는 국가에 대한 나의 주장을,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에 있어, 10세기에 들어 발전했던 여러 가지 다음가 같은 강력한 고고학 증거들을 그 근거들로 삼고자 한다: 도시 정착 패턴에 있어서 뚜렷한 변동; 상당히 중앙화된 정책기구들의 증거; 그리고 가장 융성했던 철기 시대에 남부 레반트 지역에서 인접한 국가와 민족들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국제적이며 경제적인 세력을 끼쳤던 나라로써 이스라엘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국가를 증명할 수 있는 첫 번째 명료한 증거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들 가운데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히브리 성서의 기록자와 편집자들이, 철기 II시대 곧 분열 왕국 시대에, 다시 말해서 그들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는 시대에, 요새화된 도시로서 국가의 특징들을 실제로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조사할 필요에 도달하였다. 짧게 말해서, 성서 본문과 우리가 고고학을 통해서 알아낸 것들 사이에 수렴되는 어떠한 점들이 있는가? 독립된 자료와 연구 원칙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단 성서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을 조사해보도록 하자.


도시의 벽은 다소 포괄적으로, 특별한 성질이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고고학적으로는 충분히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성서 본문에서 자세하게 기록되었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도시의 문(성문)을 조사하겠는데, 이것들은 다양한 진단 특성들을 보여준다. 그러한 여러 특성들이 성서 본문에서 언급되어 있다. (1) 성문에 대한 일반적인 기술이 여러 본문들에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삼하 18:4, 24에 있다. 이 구절에서는 안문과 바깥문, 안쪽 방과 두 개의 탑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10세기 하솔, 므깃도, 그리고 게젤(위의 140-44에서 논의하였다)의 도시 성문 구획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또한 소수의 9-8세기 라기쉬 성문, 그리고 아시리아 시대의 게젤 성문과도 어울린다. 이러한 형식의 발굴된 도시 성문 중에서 8세기 이후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상당히 후대의 기록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창안해 냈다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2) 히브리 성서에 언급된 성문의 독특한 양식들로 다음의 것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a) 나무로 만든 외여닫이 문(히브리어로 델레트[delet])인데, 일반적으로 금속으로 된 빗장이 있다. 3:5(바산); 왕상 16:34(여리고); 16:3(가자의 삼손)에서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실제 그러한 외여닫이 문에 사용되는 구멍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견되는데, 바로 10-8세기 게젤 성문에서, 9-8세기 단에서 발굴되었다. (b) 이러한 문을 제 자리에 고정시키기 위한 철로 만든 볼트(마눌[manʿûl])가 느 3:3-15에 언급되고 있으며, 강화하기 위한 대들보(코라[qôrâ])와 빗장(베리야[beriyaḥ])이 왕하 6:2, 5; 대하 3:7; 3:5; 16:3; 삼상 23:7; 그리고 대하 8:5, 14:7에서 언급되고 있다. 성문의 문지방 돌에 나있는 구멍들이, 즉 앞서 언급한 볼트를 집어넣을 용도의 구멍들이, 게젤의 성문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c) 성문은 방어 목적 이상의 용도로 활용되었다. 즉 경제적이며 사법적인 용도로도, 그리고 예식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왕하 7:1, 18(일종의 시장”); 21:19,20; 4:1,11; 29:21; 5:12,15(성문에서 베풀어야할 정의,” “재분배,” 그리고 자비”)에서 나타나 있다. 여러 곳에서 발굴된 10-7세기 성문들에서는 도자기로 된 곡물을 푸는 큰 국자, 거대한 저장용 항아리, 청동기로 된 평형 저울, 그리고 글씨가 새겨진 저울추(셰켈-무게추)와 같은 독특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서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몇 가지 것들을 더한다면, 게젤과 다른 곳의 건축물 출입구에는 안쪽 방의 벽을 빙 둘러 자리 잡은 긴 의자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어서 연속적인 매 지층마다 성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재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긴 의자들은 성문 구역에서 이루어지는 법정에서 지역의 재판관들이 앉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성문 건축물의 예식적인 기능은 특별히 텔 단의 성문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곳에서는 외부의 바깥뜰에 현저하게 낮은, 모나게 깎아 쌓아 놓은 토대석이 있었는데,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나무로 만든 보좌를 위한 자리로, 머리 위에 차양을 고정하기 위해서 나무 지지대를 받쳐 놓으려고 고안된 네 개의 우묵 들어간 돌구멍 주위로 둘러 있었다. 이것은 수 20:4과 같은 구절을 설명해줄 수 있는데, 즉 이 구절에는 피고인이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으며, “그 성업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본문들에서는 성문에서 판결을 위해 도시의 장로들이 앉아있는 풍습을 언급하고 있다(21:19,20; 4:1,11). 또한 성문에서 장로들이 훈계하며(29:21), 성문에서 궁핍한 자의 요청을 들을 수 있었다(5:12).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모스의 열정적인 탄원을 회상할 수 있으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할지라;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5:15). 게다가, 9-8세기 텔 단 성문은 그 바깥뜰에 여러 가지 독특한 구조물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저잣거리혹은 성벽 밖의 시장(훗쫕[ḥuṣṣôt], 성밖 시설”)으로, 아합이 아람 다메섹에 건축을 승인받아 세우고, 또한 아람이 호혜적인 측면에서 사마리아로부터 인가받은 곳이었다고 여겨진다(참조 왕상 20:34).


결론적으로, 성문을 언급하고 있는 성서의 여러 구절들 - 그 어떠한 의도적인 정치선전물의 일부분이 아니라, 단지 대수롭지 않게 기록된 것들 - 10-7세기의 여러 유적지들에서 발굴했던 성문들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들어맞는데, 바로 오직 이 기간에만 해당되는 것들이다. 페르시아-헬라-로마 시대에 와서, 그러한 성문은 오랫동안 그 존재와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고고학적 증거에서 이미 나타나 있다. 당시에 살았던 그 어떠한 기록자도, 철기 시대 이전에서야만 오랫동안 알려졌던, 이러한 성문을 고안해낼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읽고 쓰는 능력

 

10세기 이스라엘이 중앙화된 국가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요한 논리 중에 하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관료 정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 어떠한 10세기 증거들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몇 안 되는 초기 히브리어 본문 중에서, 일종의 글씨 연습(abcedary), 곧 알파벳 문자 목록(이즈벳 짜르타[ʿIzbet Ṣarṭah], 12-11세기)과 농경 시절에 만들어진 시문(게젤, 10세기)을 포함시켜왔다. 이 둘은 모두 거의 확실히 어떤 학생의 연습 글이다. 학생들과 다른 이들이 쓰는 법을 배웠다는 말이다. 이들은 옛 가나안 알파벳을 받아들여 글씨체를 히브리어 식으로 발전시켜 한 나라의 언어로 만들었고, 문화적 표현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글쓰기가,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기능적인 차원에서글을 쓰고 읽는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에서조차,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널리 퍼졌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수정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이 진정한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고 인정했던 9세기에는 거의 확실하게 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가 9세기 이래 그 어떠한 종류의 히브리어로 쓴 기록물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며, 진정한 차원에서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성서 외적인 본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을 사실로 남는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문학적 전통을 시작했고 후에, 최근까지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10-9세기에 형성했을 오경과 다른 역사적 작품으로 확장하게 했던 야휘스트와 엘로히스트의 자료 혹은 그 학파를 고려하게 될 때, 이것은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일찍 그러한 기록된 자료들이 존재할 수나 있었을까? 히브리 성서를 제외하고 그 어떠한 중요한 문학적 유물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 히브리 성서 자체가 철기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수정주의자들과 다른 최소주의자들이 알고 있거나 혹은 심각하게 취급하려는 것보다 철기 시대 팔레스타인에서는 보다 꽤 많은 기록된 증거물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를 살펴보기 전에,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히브리 성서 자체에서 글쓰기에 대한 증거가 나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많은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6:6-9 -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 문설주에 (명령들을) 기록하라” - 과 같은 성서 본문이 이른 초기에 널리 글쓰기가 만연했다는 점을 지시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은, 비록 신명기적 편집자에 의해서 모세 시대의 상황으로 놓여있기는 하지만, 사실 거의가 매우 후대의, 아마도 포로 후기의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 철기 시대에 관련해서는 그 어떠한 실제적인 증거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사실, 그 본문은 구전 전승이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여전히 일차적인 수단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가 언급하는 족장시대모세시대의 글쓰기에 대한 여러 다른 암시들은, 17:14의 예에서와 같이, 문화적 진화의 문자 이전의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 구절은, 아말렉과의 전쟁 이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한 내용이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recite).”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과 또한 이와 연관된 본문에서 나오는 글쓰기의 언급은 실제로는 시대착오적이며, 역사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인장들과 도장들

 

특별히 고고학적인 보충 설명을 위해, 보다 높은 개연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성서 본문들이 있다. 상당히 잘 표현된 히브리어로 된 명각 중에 하나는 보석용 원석에 인장-반지 혹은 봉인도장을 위해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손가락에 끼거나 혹은 목에 걸 수 있게 만들었다. “인장”(호탐[ḥôtām])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는 성서에 몇 번 정도 나온다. 38:18,25에 다말은 유다에게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심산으로 준 선물이었던 일종의 담보물로써 도장과 끈을 요구한다. 인장 반지는 그것 자체로 선물이나 하나님께 바쳐지는 봉헌물로 기술되곤 한다(35:22; 31:50). 28:11,21,36; 39:6,14,30에 따르면,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새겨진 도장들을 소유하게 되는데, 일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과 다른 고위 관료들은 자신들의 권위의 상징으로 도장들을 소유했으며, 오른 손에 인장반지를 끼고 있었다(22:24).


인장은 부유함이나 권세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소유주를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왕상 21:8을 보면, 이세벨이 아합의 문서를 봉인하는데, 이는 곧, 둘둘 말려진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 문헌에 끈으로 묶고 둘러서 매듭을 졌던 부분에 밀랍 혹은 약간의 점토를 두고 그 위에 인장-반지를 찍었다는 말이다. 32:10-44는 여러 번 인장행위들을 묘사함으로써 구매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9:38; 10:1에서는, 제사장들이 언약 문헌을 봉인하고 있다. 확실히 도장은 무엇인가를 봉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우리가 보유한 수백 개의 사례들 모두에서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비록 이런 음각 새김이 어려운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솔로몬의 아가서 8:6과 사 8:16 모두에서는 인장이라는 용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후자는 메길라[megillah], 곧 두루마리와 관련이 있다), 바로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나의 가르침을 봉함하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이러한 몇 안 되는 다른 구절들이 다소 널리 보급된 인장의 보유상태를 입증하고는 있지만, 그 많은 성서 본문 자체의 연대는 정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 더구나 그러한 인장을 소유하고 사용했던 모든 사람들이 읽거나 쓸 수 있었다고 반드시 가정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 참으로, 그렇게 읽거나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장을 가져야만 했던 이유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읽고 쓸 수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며,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을 봉인하는 이러한 전반적인 작업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상당히 많은 철기 시대 인장들이 알려져 있으며 - 아마도 천개도 넘을 것인데, 최근에 출간된 책들과 이스라엘 박물관의 해설집을 보면 알 수 있다 - 나는 여기에서 단지 성서 본문과 가장 중요한 수렴을 보이는 것들 몇 가지만을 언급하려 한다.


만약 공간이 허락된다면, 나는 히브리어로 된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수백 개의 9-6세기 인장들을 열거할 수도 있다. 이 방대한 이름 가운데 상당수가 역시 히브리 성서에도 나와 있으며, 여기에는 헬라-로마시대로 가정된 신명기 역사적 자료들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다수의 도장들과 인장 흔적들은 개별적인 성서 본문가 상당히 특별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렇기에 여기에서 반드시 몇 가지들은 선별해서 고려해야만 한다. 공문서 인장 - 혹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나온 점토 조각에 들어있는 인장 흔적 - 중에 가장 최고의 것은 300개도 넘는 7-6세기 것들로, 이스라엘의 금석학 전문가인 나흐만 아비가드에 의해서 1976년과 1986년에 출간된바 있다. 그중에 많은 것들이 히브리 성성에 잘 알려진 통상적인 히브리 사람의 이름을 보존하고 있다(140개의 서로 다른 이름들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일부는 고위 관직을 가진 사람들과 그 직분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왜냐하면 사실 그것들은 중요한 문헌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문서 인장 그룹 중에서 세 개에는, 관직을 집을 맡은 자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사 22:15과 동일한 표현으로, “국고를 맡은 자인 셉나와 동일시되고 있다. 동일한 표현 - 참으로 셉나(Shebna)라는 그 이름으로 - 이 다른 성서 외적 본문에서 나왔는데, 바로 유명한 왕실 집사 비문(Royal Steward Inscription)이다(아래를 보라). 아비가드가 묶어놓은 두 개의 다른 공문서 인장들에서는 왕의 시종이라는 관직이 나왔고, 다른 세 개에서는 왕의 아들혹은 왕가의 왕자들(이 경우엔 네리야후[Neriyahu] 그리고 예라므엘[Yeraḥmeʾel])이라는 표식이 나왔다. 가장 흥미로운 공문서 인장으로는 베랔야후[Berakyahu], 서기관 네리야후의 아들이 있다. 이것은 서기관의 이름으로 찍힌 단 두 개뿐인 히브리어 인장 가운데 하나로, 그 자체로 독특한 것이라고 하겠다. 더 나아가, 아비가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네리야후의 아들, 바룩(Baruch, 짧은 형식의 이름)” 이외의 그 어떤 인장도 될 수 없다. 바로 히브리 성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필기자였던 사람 말이다(36:4-32). 이 사람 바룩은 너무나 중요한데, 어떤 학자들은 그가 예레미야서의 실제 저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명기적 역사서의 첫 번째 판본을 썼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리차드 E. 프라이드만(Richard E. Friedman)의 책, 누가 성서를 썼는가?(Who Wrote the Bible?)은 심지어 현재 상태의 히브리어 성서 대부분을 이 사람 바룩의 작품으로 보기까지 한다. 아비가드가 발굴한 바룩이 새겨진 공문서 인장은 점토 조각에 찍힌 지문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서명이 성서를 기록했던 남자의 것이란 말인가?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그리고 보다 최근에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 왕의 이름이 담겨 있는 공문서 인장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보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으로, 또 다른 성서 본문과 수렴 가능성이 있다. 성서 자료(36:1ff)에 따르면, 유다의 여호야김 왕 제4(605/604), 바룩은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에 관한 예레미야의 신탁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된다. 왕은 몹시 성을 내고, 그 두루마리를 태워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미리 경고를 받았던, 바룩과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에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또 다른 경우, 바룩은 예레미야가 상징적인 방식으로 토지를 구입하는 일에 증인이 되었는데, 이 일에서 예레미야는 봉인한 매매 증서를 바룩에게 주어서 안전하게 토기에 담아 보관토록 하였다(32:1-15). 이 인장이 아비가드가 발굴한 공문서 인장의 반지-인장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서건, 똑같은 인장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아비가드가 발굴한 공문서 인장과 똑같은 반지-인장이 찍힌 또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박물관에 현재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다소 충격적인 수렴 사항에 대하여, 비록 최소한만이라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수정주의자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나? 토마스 L. 톰슨과 닐스 피터 렘케는 최근에 주장하기를, 그것도 매우 심각하게 주장하기를, 그 공문서 인장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날 우리는 최소한 65개의 다른 철기 시대 공문서 인장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들은 고고학적으로 그 시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물들로, 이러한 것들 중에는 예루살렘과 라기쉬에서 출토된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위조전문가가 이러한 인장들을 복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위조자가 고대의 글씨체를 그렇게 확실하게 알아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성서에 나왔던 사람이 아닌 이름을 고안해낼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술적으로 이러한 일은 너무 어렵다. 과연 어디에서 현대의 위조자들이 적합한 파피루스를 얻어냈단 말인가? 그래서 인장 자국을 통해서만 확실히 분간할 수 있는 파피루스 날인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과연 어느 누가, 자신들의 소중한 이론을 위협할지도 모를 증거들을 부정하거나 발표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무모한 수단에 호소할 학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한 가지 요점을 여기에서 언급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300개도 넘는 히브리어로 찍힌 공문서 인장들이 한 때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봉인으로 부착되었건 것이 분명한 반면, 우리는 단지 단 하나의 실제 철기 시대 파피루스 두루마리 조각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것은 상당히 후에 와디 무라밧(Wadi Murabbaʿat) 본문들 가운데 살아남았던 것으로, 그 이유는 단지 사해 지역에서 그 곳이 가장 건조한 기후 지대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철기 시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기록된 유물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들의 이론이 모순이 없으며, 또한 자신들의 견해를 방어하기 위해서, 수정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침묵의 논증일 뿐이다 - 그리고 이 경우, 명백하게 불합리하다. 최소한 초보적인 차원에서 혹은 기능적인수준에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널리 퍼졌음에 분명하며, 그러한 일은, 왕조 마지막 시기인, 7세기 후반의 하룻밤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만약 많은 기록물들이 파피루스에 적혀있었다고 한다면, 앞서 본문과 고고학적인 증거가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상당 부분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진 말아야 한다. 사실은, 모든 고고학자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 대부분의 지역이 축축한 동절기를 보내면, 파손되기 쉬운 파피루스와 같은 유기물질은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린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기록물들은 살아남았다.

 

 

도기 파편(Ostraca)

 

표면상으로 볼 때, 고대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서 - 공식적인 조약들, 토지 소유권 그리고 법적 처리 기록물들, 그리고 작성되었을 모든 종류의 문학들 - 는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비록 파피루스가 썩기 쉽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간단한 거래의 경우엔 종종 깨진 도자기 조각 위에 먹물로 쓰거나 긁어 씀으로써 기록되었다. 이러한 질그릇 조각들은 지면의 모든 곳에서 흩어져 있었고(45:9) 구하기도 쉬웠다. 히브리어 도기 파편이 다른 고문서 자료들만큼 희박하다고 종종 여겨진다. 고고학 활동 초기엔, 그것들은 정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1908-1910년에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하버드의 발굴팀이 8세기 초반의 것으로 판명난 102개의 도기 파편 문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 우리가 가진 가장 초기의 기록물이다(도기 파편 자체의 연도 기록 방식에서 판단해볼 때, 그 시대는 아마도 여로보암 2, 785-740년으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1세기 전인 오므리와 아합이 지었던 왕국 옆에 붙어있던 행정건물의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도기 파편들은, 비교적 큰 질그릇 조각 위에 필기체 히브리어로 써내려가거나 긁어서 흔적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기름이나 포도주와 같은 다양한 상품에 붙은 세금 명세서로, 부유한 지주들이 바쳤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북왕국 수도의 중앙화된 행정조직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가진 셈이다. 더 나아가, 성서 본문과 수렴하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들이 존재한다. 개인의 이름들이 일반적으로 히브리 성서에서 알려진 것들과 유사한데, 심지어 북쪽 지역에서는 시종일관 짧은 형태의 신명, (-yaw)가 결합된 방식으로 나온다. 이는 유다의 야후(-yāhū)와 비교가 된다. 한편 학자들은 주목하기를, “이교도적인북쪽에는 바알이라는 이름과 결합된 개인 이름의 비율이, 야훼와 결합된 것보다 더 높았는데, 이는 성서에서 나온 비율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하였다: , 성서에서는 15중에 6이 바알의 특징과 결합하고 9는 야훼와 결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료는 북왕국에 대하여 성서가 말하는 것과 잘 들어맞는데, 편견이 들어간 기록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는 페니키아 종교에 상당한 수준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다른 수렴은,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인수증에서 알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납세자가 있다는 사실에서, 반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인데, 바로 의심할 나위 없이 거대 농경지가 지주 계급에 의해서 보유되고 운영되었다는 증거를 알 수 있다. 그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은 사마리아 산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게으른 귀족들을 향한 예언자 아모스의 항변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들 귀족들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다”(5:11; 6:1-6). 그리고 미가는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는이들을 고소한다(2:2).


두 번째 중요한 히브리어 도기 파편이 1935-38년에 영국의 탐험가들에 의해서 유다의 거대한 국경 성채인 라기쉬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23개의 도기 파편 기록물이 성문 위병소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587/586년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이루어진 바벨론 군사의 파괴 흔적물 가운데 발견되었다. 이러한 도기 파편들은 파괴 직전에 라기쉬로 보내진 편지들이었다. 편지들 가운데 4번은 특별히 통절한 상황을 묘사한다; 그것은 외진 촌락에서 도움을 구했던 최후의 탄원서로, 자신들이 그 근방에 위치한 아스카의 봉화 신호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으며, 라기쉬로부터 신호를 간절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라고 말한다. 편지 4번은 또한 무명의 예언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편지 6번은 손을 약하게 하는예언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즉 단념시키는 신탁을 주고 있다 - 이 표현은 예레미야에서 나오는 구절과 정확하게 일치한다(38:4). 편지 3번은 글을 읽고 쓰는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역시 관련을 맺는데, 왜냐하면 그 편지 안에서 하시야후(Hawshiʿyahu)라는 사람이, 그와 편지를 주고받는 야우쉬(Yaʾush)가 자신을 글자를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항변하기를, 그가 조력자의 도움 없이도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아무도 내가 글자를 읽도록 돕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읽으며 읽은 모든 내용을 암기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세 번째 중요한 도기 파편 발굴로는, 상당히 거대한 기록물로, 100개도 넘는 8-6세기 편지들이 있는데, 브엘세바 근방의 아랏에서 이스라엘 고고학자인 요하난 아하로니가 발굴하였다.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지만, 소수는 아람어로 기록되어있다. 이 아랏의 도기 파편에는 거대한 항아리 파편에 먹으로 도색되어있다. 지층 제4층에서 나온 것들은 이쉬야후의 아들, 엘리아십(Eliashib)”이 서신 왕래했던 문헌들로, 이 사람은 7세기 후반 수비대 대장이었다. 이곳은 에돔의 광야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었다. 이러한 많은 도기 파편들은 다소 진부한 것들로, 다양한 지급품의 전달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제18번의 것은 유별난 흥미를 자아내는데, 그것은 그것을 읽는 이에게 야훼의 집(곧 성전)이 잘 있다; 그것은 견뎌냈다라고 확신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성전은 아하로니가 발견했던 아랏의 세 부분으로 구획이 된 초기 성전과 연관된 것일 것이다. 혹은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했던 상아로 만든 깨어진 석류조각과 별도로, 솔로몬 성전을 언급하고 있는 유일하게 보존된 성서외적 자료를 가진 셈이다(한편, “야훼라는 이름은 부분적으로 소실되었다).


다수의 개별적인 도기 파편들도 역시 이제는 알려졌는데, 의심할 나위 없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방대한 수준의 기록된 자료들이 공식문헌 이외에도 분명히 존재했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다시 말해서 읽고 쓸 수 있었던 엘리트 집단 외에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읽고 쓸 수 있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이, (비록 엄격한 의미에서 도기 파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위에서 논의한 바 있는, 토기에 도색을 한 8세기 명판이다. 아주르드(ʿAjrûd)에 위치한 8세기 요새는 실제로 산간벽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문명세계와는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혹은 종종 그곳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은, 확실히 한 묶음의 기록자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남겨 놓았다. 성문 성소의 회반죽을 바른 벽에 기록된 짧은 메시지 몇 개는 훈련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다소 낙서수준으로 고려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나는 이러한 생각이 든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보통 사람들조차도 최소한의 차원에서 기능적으로는 읽고 쓸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간단한 수준에서 상업적인 보고서나 그러한 일들을 다룰 수 있었다.


이 시점에 한 가지 독립적인 도기 파편들을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1982-88년에 이츠하크 베이트-아리에(Itzhaq Beit-Arieh)가 동부 네게브 사막의 호르밧 우자(Ḥorvat ʿUza)에서 발견한 것이다. 7세기로 연대를 설정할 수 있는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상형문자로 숫자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이집트 상형문자식의 수식표현 다수가 다른 8-7세기 히브리어 비문과 심지어는 셰켈-저울(아래를 보라)들에서 발견된바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집트 수식 도량법이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선호되었고 또한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나다브 나아만(Nadav Naʾaman)은 최근에 주장하기를, 이러한 숫자 도량법은 10세기에 이집트에서 받아들여졌음에 분명하고 하였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셈족 주변 국가들로부터 빌려올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렇게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량법은 이집트 자체만 해도 8-7세기에는 눈에 띌 정도로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다 이전에 유입되었음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집트 수식 도량법은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가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나아만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이러한 상형문자 기호들은 왕조가 분열하기 전에 히브리어 글자 도량법으로 들어왔어야만 한다 - 간단히 말해 기원전 10세기이다.” 나아만 - 매우 비평적이며, 때로는 과격하기까지 한, “성서학자로 간단히 부를 수 없는 역사가 - 은 이 모든 사항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이제 손에 쥐어진 역사적이며, 기록되고, 고고학적으로 드러난 증거들을 볼 때, 역사가들은 다윗-솔로몬 왕국이라는 성서가 말하는 개념을 심각하게 취급해야할 필요가 있다. , 10세기에,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으로 결정되는 그 왕국 말이다.

 

 

무엇인가 새겨진 물건들

 

독자들은 내가 지금까지 논의했던 무엇인가 새겨진 유물들 상당수가 비교적 최근에 빛을 본 것들이라는 점을 주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발견이 있기 전에는, 수정주의자들과 같은 성서학자들이 침묵의 논증으로 입지를 지켜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 새겨진 물건들 중에 매우 중요한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지난 30년 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지난 10년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했었다. 나는 도자기 용기를 언급하려고 한다. 거기에 개별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우리가 최소한의 수준으로 초보적인 문자능력을 가정하지 못했다면,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정도의 글씨체이다. 첫 번째로 발견된 것은 8세기 유다에서 나온 물을 담는 병으로, 내가 1968년 키르벳 엘-(위에서 아세라와 관련하여 무덤 비문을 논의한 바 있다)의 철기 시대 무덤에서 발견한 그릇이다. 소유자의 히브리식 이름은, 야흐몰(Yaḥmol)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쓴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도자기를 구워낸 후, V-형태의 조각칼로 기다란 그릇의 위쪽에 조심스럽게 새겨넣었다 -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1970년에 상당히 희귀한 발굴이었던 엘-콤의 물병을 발표할 때엔, 이런 발견과 견줄 수 있는 발견은 딴 한 곳이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에서 케틀린 M. 케년이 보다 일찍 발굴했던 유물이었다(이것은 엘리야후[ʿEliyahu,곧 엘리야]의 소유라고 적혀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조각칼로 새겨 넣는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972년 아비가드가 이러한 기술과 관련하여 다른 유다 물병들의 사례를 발표하게 되었다(여기에는 예하즈야후[Yeḥazyāhū]의 소유; (?) 포도주라고 적혀있다). 그런 다음 1981년엔 아하로니가 아랏의 발굴지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8/7세기 층에서 나온 물병들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여기엔 사독의 소유라고 적혀있었다.


보다 최근에, 로버트 더츠(Robert Deutsch)와 마이클 헬처(Michael Heltzer)가 전형적인 8세기 북부지방 또는 이스라엘의 물병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여기엔 가장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맛단야후[Mattanyāhū]의 소유; 헌주(獻酒, libation)를 위한 포도주, 4분의 1.” 첫째로, 히브리 단어 네섹(nesek) 헌주,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전제(libation offering)에 대한 여러 성서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와 같다. 그렇지만 사용된 헌주용 그릇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그 어떠한 그릇과 확실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 예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던 것들은 (몇 몇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값 비싼 금과 은이 재료였고, 그렇기에 오래 전에 약탈되고 녹여졌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많은 통상적인 민간인들 역시 지역 성소 혹은 가정의 사당에서 전제를 시행했을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특별히 신명기적 역사가들인) 성서 기록자들은 그러한 의식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야훼적인것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의식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름이나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제사를 위해 사용했던 그릇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통상적인 가정용 도자기 그릇으로, 아마도 글이 새겨진 대로 특별한 용도를 위해 따로 구별해 놓거나 신성하게여겨졌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전제용 그릇들을 보유하게 되었고, 특별히 포도주-헌주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물병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들어있다: 바쳐진 포도주의 수량이, “4분의 1”이다. 보다 큰 용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것이 잘 알려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출 29:40과 레 23:13의 성서 본문에 완벽하게 수렴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곧 이 구절에서는 전제가 포도주 사분의 일 힌(hin)”이 특별하게 기술되어 있다. 다른 구절에서, 출토된 도자기 그릇들과 그 증거에서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용액 수량 단위인 힌(hin)이 한 바트(bath)1/6과 같음을 계산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바트(bath)가 대략 5.5갤런(20리터-역주)이므로, 한 힌(hin)1갤런(3.78리터-역주)보다 적은 수준인 셈이다. 더츠와 헬처는 보고하기를, 자신들이 발견한 “1/4” 물병은 가득 채웠을 때, 1,270센티미터, 곧 대략 1.3리터 (5컵 정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대략 1갤런인 한 힌의 “1/4”1쿼트(1.14리터-역주)가 된다 - 이는, 5컵의 물병 용량일 뿐만 아니라, 소규모의 헌주를 위한 양으로도 적당하다고 하겠는데, 특별히 우리가 매일 드려지는 가난한 민간의 제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수정주의자들을 위해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밝혀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 그리고 다른 철기 시대의 물병들 역시 날조된 것인가? 만약 날조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8-7세기에 나오는 이러한 성서적인히브리어(, 바트-역주)의 사용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러한 히브리어가 후대의, 인위적이며, 서기관들이 창안해 낸 것으로, 헬라-로마 시대에 성서를 기록했던 학자계층에 의해서 고안된 언어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 시점에 우리의 목적에 들어맞는 마지막 도기 파편은, 7세기 후반의 것으로 1960년 메짜드 하샤브야후(Meṣad Ḥashavyahu)에서 발견된 편지인데, 이곳은 텔 아비브 남쪽 해안에 위치한 작은 성채로, 고대 얌니아 근처이다. 이 본문은, 그 자체로 완벽한 것으로, 가난한 소작인이 자신의 의복 곧 외투(히브리어로 베게드[beged])가 근거 없는 절도죄와 자신의 가나한 처지 때문에 빼앗긴 상태를 놓고, 서기관에게 받아쓰게 한 일종의 민사소송문이다. 이 편지문은 이러한 불공평이 배상될 것을 희망하여 지역 관리에게 보낸 것이다. 혹자는 당연히 놀랄 것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가 빈번했음에 분명했던 상황과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8세기 예언자 아모스가 모질게 비난했던 것으로,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복수형으로, 베가딤[begādîm]) 위에 누워있는자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언했던 상황 말이다(2:8)

 

 

무덤의 비문들

 

히브리어가 기록된 비문들 가운데 어떤 경우엔, 지금까지 발견되어 논의했던 여러 철기 시대 무덤들 보다 더 기념비적인 것들이 있다. 내가 키르벳 엘-콤에서, 성서에는 마케다로 나오는 곳에서, 발굴했던 8세기 무덤들 가운데 한 곳은, “아훼와 그의 아세라라는 글이 있는 비문 때문에 앞서서 논의한 바 있다. 1번 무덤도 역시 두 개의 히브리어 비문이 적혀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세 개의 매장을 위한 작은 방 가운데 한 곳의 입구 주변을 둘러서 적혀 있었다. 첫 번째 글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네탄야후의 아들, 오파이(ʿOphai)의 소유, 이곳은 그의 매장용 방이다.” 두 번째 글은, 문간 위에 적혀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네탄야후의 딸, 웃사(ʿUzzah)의 소유.” 이러한 훌륭한 유다식의 이름들은 히브리 성서에서도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오파이는 거무스레한 사람혹은 흑인을 의미한다), 단일 가족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서, 때로는 연속적으로 여남은 매장의 결과 한 세기도 넘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사용했던, 전형적인 유다의 벤치-양식의 무덤 가운데 가장 좋은 예이기도 하다. 각 방의 뒤편 벤치 아래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깊숙하게 들어간 거대한 구멍이 있었는데, 이곳은 보다 일찍 묻힌 뼈들이 거대한 더미를 이루어 모아놓은 방이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떠한 개인이 죽을 때 조상들과 합치다혹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과 어울리는 이스라엘의 통상적인 풍습임을 생각나게 한다. “최소주의자들은 그러한 구절을 설명하기를, 그것은 단지 죽은 이의 내세를 위한 일반적인 차원의 은유일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신앙이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음이 명명백백하다. 단지 어렴풋한 수준으로 스올(Sheol)이라는 관념만이 존재했었을 뿐이다. “영혼 불멸설이라는 교리는 직접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이며, 히브리 성서에는 단지, 가장 늦게 기록된 책들 가운데 하나로 아마도 헬라 시대에 나온 책인, 다니엘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조상들과 합쳐지는것이란 단지 이러한 것을 뜻한다: 누군가의 유해가 조상의 무덤으로 들어가서, 조상들의 유골과 하나가 되고 영구히 보존되는 상태를 특별히 지칭하는 표현이다. 공통의 매장소가 있는 그러한 무덤들은 철기 시대에 전형적인 것이었지만, 내가 아는 한으로 그것들은 헬라-로마 시대엔 팔레스타인 지역에 등장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행습과 그러한 표현 형태의 배경이 되는 독보적인 철기 시대의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근 30년 전에 발굴했던 키르벳 엘-콤의 유물에 대한 나의 연구보고에 호기심을 자아내는 부가설명을 더할 수 있겠다. 1994년에, 더츠와 헬처는 자신들의 연구논문에 일군의 오래된 돌판들을 추가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본래 엘-콤에서 나온 것으로, 그 당시 나는 그곳에서 도굴행위를 중단하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몇 년 사이에 개인 소장품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거의 같은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이 돌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당신의 석수에게 복이 있기를; 그의 도움으로 늙은 자가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기를!” 이 돌은, -콤 무덤의 다른 모든 석조세공품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뛰어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다 신경을 써야할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글씨를 새겨 쓴 사람이 받고 있는 매우 높은 평판에 대한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 여러 성서 본문에서 암시되고 있는 죽은 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보다 더한 영광이 장인에게 돌려지고 있다.


내가 엘-콤에서 발굴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유다의 벤치 무덤이 1961년에 키르벳 베이트 레이에서 조셉 나브에(Joseph Naveh)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곳은 유다 세폐라에 위치하고 있는 라기쉬로부터 동쪽으로 대략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 무덤은 전형적인 후기 철기 시대 벤치 무덤으로, 페르시아 시대에 다시 사용된 바 있지만, 확실히 7/6세기 즈음에 처음으로 파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깨진 비문들이 나왔는데, 실제로는 낙서 수준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비문은 완성된 것으로 매우 훌륭한 필기체 히브리어 글씨가 적혀 있다. 나브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야훼는 온 지구의 하나님(이다);

유다의 산들이 그의 것이고,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것이다.

모리아 (산을) 당신이 즐겨하시니,

(Yah), 야훼의 거처이시다.

 

이 무덤의 비문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이것은 진부한 축복 선언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 자체로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글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 신학이라는 것이 열왕기에서 발견되는 신명기적 역사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비문은 동시대에 나온 것이다.


가장 유명한 유다 무덤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에도 실완(Silwan, 성서가 말하는 실로암)이라는 아랍 촌락에서 볼 수 있는, 바위를 깎아 정교하게 만든 기념비적인 건축 양식 무덤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남동부의 기드론 계곡을 건너면 바로 나온다. 1870년에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로 무엇인가 새겨진 돌이 조각난 상태로 영국박물관에 옮겨졌다. 그것은 1953년 아비가드가 훌륭하게 해독해내기 전까지 먼지 속에 박혀 있었다. 비문은 다음과 같이 읽는다:

 

1. “이것은 그 집을 관장하는 야후(yahu) [의 묘소]이다.

여기엔 은도 없고 금도 없다.

2. 그러나 [그의 뼈]와 그의 여종-아내의 뼈가 그와 함께 있다.

저주가 있으리니,

3. 이것을 여는 자에게!

 

아비가드는 이 비문의 고서체를 기준으로(글씨체의 모양을 비교하여) 그 연대를 8세기 후반으로 잡았다. 그는 즉시 그 집을 관장하는 이”(히브리어로 아세르 알-하바이트[ʾašer ʿal-habbāyit])라는 구절이 왕상 4:6; 16:9; 18:3 등에서 궁내대신이란 매우 전문적인 용어와 연관이 있음을 파악했다. 22:15-19에서, 우리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의 후손으로, 히스기야 시대에 왕궁 맡은 자, 셉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22:20-25; 36:3; 37:2). 아비가드는 제안하기를, 비문 시작부분에 부서진 히브리 이름은 반드시 셉나야후(Shebnayahu)”로 복원되어야만 한다고 하였는데(신명이 포함된 전형적인 유다의 긴 이름 형식), 이후의 모든 학자들은 그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러한 경우, 이 인상적인 실로암 무덤은, 히스기야 왕의 왕궁 맡은 자였던 셉나의 무덤인 셈이다. 비록 모든 것들이 충분히 수렴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 22:25,26을 통해서 이 무덤이 성서가 말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게 된다. 이 구절에서는, 예언자가 이 셉나라는 사람이 성전을 관조할 수 있는 암벽에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 - “높이 자리 잡은 묘소” - 을 스스로를 위해 마련한 일을 두고 비난하고 있다. 셉나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드러지게 보인다. 그러나 실완이라는 아랍 촌락민들은 그곳을 쓰레기 더미로 사용하고 있다. 확신컨대 이사야는 이를 명백한 신적인 응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비가드가 1953년에 왕실 책임자비문을 출간했을 때, 그것은 정확하게 연대설정이 된 첫 번째 포로 이전 이스라엘의 새겨진 무덤으로 등장하였고, 또한 성서 바깥에서 집을 관할하는 이라는 직함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우뚝 섰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수의 히브리어식의 개인 이름들과 직책들의 인장을 보유하고 있다. 아비가드 자신은 1986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 그동안 몰래 간직했던 공문서 인장들 몇 개를 내 놓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성서에 등장했던 아도니야후(세 개의 사례들에서 나왔는데, 둘은 같은 조각가의 글씨체이다)와 나단이란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이, “왕실 책임자라는 흔치 않는 직함은, 이젠 우리의 성서자료와 고고학적 자료 모두에서 너무나 잘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이름과 직함은 철기 시대에 한정적으로 발생했으며, 그렇기에 헬라-로마 시대의 성서 기록자에게는 전혀 알아낼 수조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만약 그들이 매우 고대의 기록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마지막 비문이 있다. 비록 그것이 매장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피난용 동굴에서 출토되었지만 말이다. 그것은 1974년에 페샤 바르-아돈(Pesah Bar-Adon)이 발견한 것으로, -게디 근처의 사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멀리 떨어진 절벽에 위치한 것으로, 거대한 종유석과 같은 돌기둥에 먹으로 우아하게 써내려갔다. 그 연대는 대략 700년으로 잡는다. 그것은 읽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의 상당 부분은 분명히 저주와 축복에 관련된 정형어구와 관련이 있었다. 그것에 포함된 구절들로는, “야훼여 찬송을 받으소서가 있다. 여기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기묘한 환경(피난처로, 광야에 자리 잡은 도피자가 구원을 갈구했던 것일까?) 뿐만 아니라, 또한 유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바로 이러한 극단적인 장소에 이와 같이 우아한 글씨체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문맹자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상업과 경제: 저울추

 

어떠한 인간 사회이건 경제 관련 문제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저속한 유물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ideology)이 역사라는 것을 형성시키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개인들에게 거할 집과 입을 옷, 그리고 먹을 양식이 없다고 한다면, 그 어떠한 역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탁월한 학자 가운데 한 명인, 노만 K. 갓월드(Norman K. Gottwald)는 자신의 책 야훼의 부족들: 기원전 약 1250-1050년에, 해방된 이스라엘의 종교 사회학(The Tribes of Yahweh: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Liberated Israel, ca. 1250-1050 B.C.E.)에서 말하기를, “고대 이스라엘의 완전한 물성(materiality)이 온전하고 완벽하게 이해되어질 때에야, 우리는 그에 합당한 영성(spirituality)을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일상적인 자료인, 본문과 인공유물이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를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반적인 경제에 대한 성서적 자료들은 너무나 많고 또한 너무나 흩어져 있어서 이 자리에서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요약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고고학적으로 상호연관성이 있는 기초적인 자료 두 부류를 선택하고 집중하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무게와 도량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상업적인 측면의 증거이다.


히브리 성서에서 화폐의 기본 단위는 세겔(sheqel), 이는 무게를 달다라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한 히브리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은의 무게에 해당하는 지불금액인 셈이다. 세겔이란 단위는 많은 성서 구절들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아이를 정복해서 얻은 전리품은 세겔로 계산되고 있다(7:21). 유사하게, 골리앗의 갑옷은 세겔로 평가되고(삼상 17:5; 참조. 삼하 21:16), 또한 압살롬의 머리 무게도 그러하다(삼하 14:26). 다양한 상품의 가격 또한 세겔로 주어진다: 벌판(대상 21:25; 32:9), 수소(삼하 24:24), 보리의 가격(왕하 7:18), 그리고 날마다 주어지는 음식(4:10; 45:12). 수소가 어떤 노예를 받을 때, 그 배상은 세겔로 정해진다(21:32). 게다가 조세 역시 세겔이란 단위로 바쳐진다(왕하 15:20; 아시리아에게 바친 징수금). 세겔이란 무게는 다양한 도량법 중에 하나로, “세겔의 경우에서처럼 다양하다(대하 3:9). 세겔 무게 단위는 다른 것으로 바뀔 수도 있다; 아모스(8:5)는 항의하기를, 장사꾼의 이익을 위해 무게추를 크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성소에서 사용되는특별한 세겔 무게도 언급되었다(30:13,24; 5:15; 3:47,50; 7:13).


세분화된 세겔 무게 역시 히브리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1세겔보다 작은 특정한 무게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세겔(30:13-15; 38:26), 1/3세겔(10:32), 그리고 1/4세겔(삼상 9:8)의 무게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작은 조각 역시 언급되고 있는데, 즉 이것은 게라(gerah), 20게라는 한 세겔이다(30:13; 27:25; 45:12). 여러 가지 특별한 세분화된 무게들에 대한 설명이 성서 본문에 나온다: 베카(beqʿa) 곧 반-세겔(히브리어로 베카[beqʿā], “쪼개다”), 그리고 (pîm, 삼상 13:21에서만 나오는데, 그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세겔과 관련된 기록에 더하여, 우리는, 기대하는 바와 같이, 세겔 무게추와 함께 사용되었던 저울을 언급하는 본문을 알고 있다. 저울에 대한 히브리어 용어는 메오즈나임(meʾōznāyim)으로, 실제로는 를 뜻하는 쌍수명사이다 - 측면에 균형을 잡고 있는 접시들이 두 개의 귀와 닮아 보이는 사실에서부터 생겨났음에 분명하다. 다수의 성서 구절에서 통상적인 저울을 언급하고 있으며, 예를 들면 겔 5:1에서는, 예언자가 엄중하게 자신의 머리를 깎아 무게를 재고 있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19:36은 세겔 무게추와 관련하여 저울을 언급하고 있으며, 16:11눈금과 병행하여 저울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성서 구절들에서는 특별히 거짓 저울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인의 이익을 위해 변경해 놓은 저울을 뜻한다. 그러므로 잠 11:1정의불의를 저울 그리고 무게추로 비교하고 있으며; 20:23속이는 저울한결같지 않는 저울 추를 비난하고 있다. 6:10-11부정한 저울주머니에 든 거짓 저울 추로 엉망이 된 장사 풍습을 고발한다.


위의 본문들은 히브리 성서에서 말하는 세겔 저울추, 조각들의 저울추, 그리고 저울이라는 견실한 도량법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고고학으로 눈을 돌려 성서 본문과 수렴하는 점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할 차례이다. 만약 수정주의자들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동전을 찾기를 기대할 뿐 세겔 저울추나 저울 같은 것의 증거는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들은 모든 나머지 것들과 마찬가지로, 헬라-로마 시대 기록자들의 문학적 발명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우리는 350개도 넘는 철기 시대 세겔 저울추와 더 작은 저울추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저울과 저울의 일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8세기 후반-7세기 유다에서 나왔다.


보다 큰 세겔 저울추들은 둥근 모양으로, 부드러운 석회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눈에 잘 보이도록 세겔”(은을 넣어두는 작은 주머니를 닮았다)과 이집트 상형문자로 표기된 숫자가 들어있다. 현재 상태로, 우리는 글씨가 새겨진 돌 재료의 세겔 저울추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1,2,4,8,12,16,24, 그리고 40으로 구분해낼 수 있도록 그 단위가 표기되어 있다 - , 대부분 4 혹은 8의 배수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숫자 도량법은 의심할 바 없이 이집트 방식으로, 그것은 10세기 초반 이스라엘로 소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글씨가 새겨진 세겔 저울추들은, 그렇지만 모든 것들이, 계층 분석에서 판단해볼 때, 8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의 것들로 연대설정이 되는데, 다시 말해서 분열왕국 시기이다. 이러한 세겔 저울추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었고, 나 자신의 연구도 키르벳 엘-콤에서 발굴한 10개의 저울추들을 기초로 이루어진 바 있다. “표준적인세겔은 대략 11.35밀리그램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비교되는 무거운”(아마도 왕실의) 무게 도량법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 유사한 불일치가 건식과 습식 측량에서도 존재하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상업 사회에서 무게와 부피에 대한 완전한 도량법 논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방식 모두를, 심지어 수를 표현하는 방식조차도, 빌려 왔지만 실제로는 지조 있게 사용하지 않았고 또한 완전히 표준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마지막으로 고대의 과학은 전혀 정밀하지 못하고, 특별히 무게와 용량에서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는 오류의 여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러한 도량법을 교묘히 다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예언자는 이 도량법을 그렇게 깨끗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저울추들이 부정한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다(아래를 보라).


알려진 사례들 대부분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것이, 비교적 작은 1에서 8까지의 세겔 저울추들로, 이것들은 일상적인 용도에서 상당히 보편적인 것이었음에 분명해 보인다. 학자들이 그 무게 도량법이 어떻게 기능했었는지를 분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는 알려진 수 백 개의 저울추들을 실제로 달아보고 비교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연구는 라즈 클레터가 시도했는데, 그의 연구는 전반적인 도량법이 산출된 표준에서 대략 3퍼센트의 오차를 보이는 반면, 보다 일상적인 1에서 8 세겔 저울추의 오차는 겨우 0.5퍼센트에 머물렀다 - 이는 놀라울 정도의 일치를 보여주는데, 거의 확실히 왕실의 도량법 관리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클레터가 조심스럽게 비교한 것을 기초로 볼 때, 표준 세겔의 평균 무게는 11.33그램으로 나온다(정확하게 하자면, 11.33249그램이다).

 

단위

1세겔

2세겔

4세겔

8세겔

12세겔

16세겔

24세겔

40세겔

발견된 유물의 숫자

34

34

47

42

1

3

2

2

이집트식 기호

 

 

 

 

 

 

 

 


보다 작은 세겔 저울추에 대한 세 가지 단위가 알려져 있다: 네쩨프(neṣep), (pîm), 그리고 베카(beqʿa), 뒤의 두 개는 히브리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다(위를 보라). 네쩨프 저울추는, 46개가 알려졌는데, 평균 무게는 9.659그램으로, 대략 5/6 세겔에 해당한다. 저울추는 모두 합하여 42개가 발견되었고, 평균 7.815그램, 곧 한 세겔의 2/3에 해당한다. 베카(히브리어로 절반”) 저울추는, 29개 정도가 알려졌는데, -세겔을 보여주어야 하듯이, 평균하면 상당히 근접한 수치인 6.003그램이 나온다. 더 작은 단위인 게라(gerah) 저울추는 (20개가 되면 한 세겔이라고) 성서에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70개 정도의 고고학적 실례가 나왔는데, 사실 이것들은 보다 덜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치 표현은 다소간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집트식을 기초로 하며, 아마도 이제는 보다 히브리화했을 것이다. 또한 게라 저울추는 11.33그램의 1/20, 이상적인 무게로 계산해보면 대략 0.57그램에서부터, 종종 더 무거운 것들까지 상당한 정도로 까지 편차가 심하다. 클레터는 제안하기를, 20-게라 도량법이 운영되었기는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방식과 유사한 24-게라 도량법도 역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위의 본문과 인공유물 정보들이 내포하고 있는 점은 과연 무엇인가? , 어떠한 수렴을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점들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클레터의 철저한 분석을 보면 다음의 점들이 분명하게 여겨질 것이다. (1) 처음으로, 세겔 도량법은 유다에서는 기껏해야 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53개의 알려진 저울추들 가운데 오직 5개만이 이 시기를 벗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층학적으로 잘 분석되었기 때문에 8세기보다 앞설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상 8세기 중반에서 7세기로 연대설정이 된다. (2) 이제 전반적인 도량법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표준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예외사항이 적으며 전혀 다른 왕실무게 도량법을 제외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3) 숫자 기호는 이집트에서 빌려왔는데, 부분적으로는 이 기간에 이집트가 유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며, 또한 부분적으로는 국제 무역을 촉진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4) 그러한 표준화된 도량법에 있어 왕실의 주도와 관리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하며, 아마도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인 8세기 중후반 유다의 히스기야 아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5) 유다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 세겔 저울추 도량법이 지속적이며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은, 중앙 정부 뿐만 아니라 유다의 전체 인구가 사용했음을 지시한다.


클레터는, 다른 이들이 앞서 주목했던 바와 같이, 몇 가지 수렴 사항들이 세겔 저울추로 대변되는 정보와 개혁정의라는 성서적 개념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렇지만 많은 이스라엘 (“성서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고고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는 평행되는 성서 구절에 대한 논의로는 들어가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성서 자료로부터 상대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저울추는 실제로 성서 본문을 설명해주는데 도움이 되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 이유가 바로 성서 기록자들이 엘리트들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국제적 관계와 정치적인 역사에 매달려있는 반면, “유다의 저울추라는 것은, 이러한 것들과는 정 반대로, 일상적인 매매와 장사를 반영할 뿐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내가 하고픈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녕 반영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는 정확한 정보와 적합하게 고려된 세겔 저울추의 맥락을 통해, 성서 본문에 대한 철기 시대의 역사적 환경에 관하여 실제적인 그 무엇이라도 말해주는 것이 있는가? 바로 이 부분에서 클레터의 과묵함은 그에게서 황금의 기회를 빼앗아가 버리고 만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다시금 고고학자와 성서학자들 사이에 대화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나타내 보여줄 뿐이다.


나는 왕실 세겔을 기초로 한 저울추 도량법의 표준화 작업이 오로지 유다에서만 발생하였고, 그것도 정확히 히스기야의 오랜 통치시기에 나타났다가(715-686), 요시야의 통치 때(640-609)에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들은 예언자들과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승인한 두 개혁왕들이다 - 진실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후 역사에서 등장했던 모든 왕들 가운데 단 두 명뿐이다. 이러한 두 왕들의 통치에 대한 성서의 기술이 모두가 정치선전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도량형을 개혁하는 기초로, 이러한 내용을 왕실 행정기관의 관리 하에 저울추와 도량형을 표준화함으로써 부패한 상거래를 일소하려던 시도로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확실히 호세아, 아모스, 그리고 미가와 같은 예언자들이 항변했던 내용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 그들 개혁가 모두는 8-7세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미가는, 히스기야 통치 동안에 살았던 유다의 예언자로 아마도 종교적인 문제에 대하여 왕에게 조언을 했는데, 다음과 같이 몹시 큰 소리로 탄핵했다(6:11):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클레터는 속이는 추(히브리어로, 에벤 베-에벤[ʾeben we-ʾeben], 돌들과 돌들”)에 대한 그러한 명백한 언급을, 개별 공동체에서 오차라는 것은 똑같은 저울추가 항시 사용될 경우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구입할 때 이기는 셈이고, 또 누군가는 팔면서 지는 셈이라고 단언함으로써, 간단히 해결하려고 든다. 특별히 미 6:11에 대하여, 그는 그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속임수라는 것이 서로 다른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거짓되지않는다고 말한다. 여전히 그 자신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실제 저울추들이 각자의 범주 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그 어떤 부주의한 고객이, 저울의 접시 위에 놓여 있는, 1세겔 저울추에 적힌 “1”2세겔 저울추에 적힌 “11”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할까? 지역 상인들의 날렵함에 대한 클레터의 지나친 관심과 함께, 그는 알려진 세겔 저울추 다수가 아래쪽에 끌로 갈아진 흔적이 보인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렸다. 바로 내가 엘-콤에서 발견한 저울추를 다루면서 발표했던 그 내용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하다: 돌로 된 저울추는 아마도 간단히 그 크기를 줄일 수 있었고, 그런 다음 아래쪽 약간을 깎아 냄으로써 필요한 만큼의 표준 무게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반대로, 상인들에게 유리했던 무거운저울추는 - 옛말에 엿장수 마음대로와 같이 - 상당 부분을 아직 깎아내지 않음으로써 쉽게 제작될 수 있었다. 고대의 저울추가 종종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 부정한 짓을 하다라는 영어식 표현의 어원과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고대 유다에서 이러한 행습은 분명히 미가가 주의를 기울였던 사안이었다: “서로 다르거나다양한 저울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르게 된혹은 고쳐진 저울추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히스기야 혹은 요시야의 개혁이 실제로 발생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표준화된 세겔 도량법이 그들의 경제적인 정책의 부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상황이라고 여겨지며, 그러므로 성서 내러티브에 역사적 신뢰도를 높여준다. 비록 그들의 신학적인 아젠다가 그 어떤 무엇이라고 한들 말이다.


다른 중대한 자료가 클레터에 의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간단히 말해 삼상 13:21에 나오는 (pîm) 저울추의 성서적 언급이 히브리 성서에서 이 용어로 오직 여기에서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이 구절에 있어서, 최종 편집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귀착점(terminus post qeum, 그 일이 있은 후에”)으로 보게 한다. 설령 저작시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8세기보다 먼저일 수 없는데, 이야기가 블레셋 시대를 배경으로 잡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달리 보면, 삼상 13:21은 지나치게 후대로 볼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어떠한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세겔 도량법이 587/586년의 유다 왕국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그 사용이 사라져버렸다는 간단한 이유에서 이다(이는 클레터가 보여주었다). 아마도 유다의 도량법은 바벨론/페르시아의 것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을 두고 있는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삼상 13:21에 나오는 핌 저울추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핌 저울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해진 것으로, 이러한 저울추가 사라져버리고 또한 잊혀진 상태였던 여러 세기 후의 헬라-로마 시대에 살았던 기록자에 의해서 발명될리가 없다. 사실, 고유한 철기 시대 환경에서 나온 이러한 작은 성서 구절은 따로 손을 대지 않은 상태로 전수되었는데, 비록 후대인들에게 (pîm)이라는 것이 이해되지도 않고 수수께끼 같으며 또한 독특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진실로, 20세기 초반까지 만해도 이 단어는 전혀 이해되지 못했다. 최초의 실제 고고학적 실물이 드러나서, 히브리어 (pîm)을 읽을 수 있기 전까지 말이다. 만약 성서의 이야기들이 정말로 헬라-로마 시대의 문학적 창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세한 이야기들이 히브리 성서에 들어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혹자는 핌이라는 부분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신컨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역사란 하찮은 것에서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세겔 저울추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그만두기에 앞서, 우리는 그것들과 함께 사용되었던 저울이나 천칭의 조각들 역시 발견되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가장 좋은 증거들 중에 하나는 라기쉬에서 나왔는데, 바로 이곳에서 1972년에 주거지역에 사용되는 용품들 가운데 8세기 중반으로 계산되는 상아 천칭대가 발견되었다.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분명히 이집트 양식이라는 점으로, 이러한 형태는 신왕국과 철기 시대를 통틀어서 사용되었던 방식이었다 - 또 다른 이집트식 표본이 유다의 중량과 부피 도량형에 영향을 미쳤다. 유사한 상아 (혹은 뼈로 만든) 천칭대가 오래 전에 므깃도에서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10-9세기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철기 시대 저울이 남아 있는 다수의 다른 유역지들도 발굴되었는데, 특별히 청동 (혹은 뼈로 만든) 저울용 접시, 그리고 천칭대와 접시를 이어주는 사슬 약간이 발견되었다. 바로 므깃도, -게디, 아스돗, 그리고 다른 곳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히브리 성서에서 저울과 관련한 표현이 14번이나 등장했던 것이다. 은이 선호하는 교환 매개체였음이 분명하고, 통상적으로 작은 조각의 형태로 만들어서(5:19) 저울판의 한쪽위에 올려지고/무게를 달고”, 다른 쪽에 돌로 된 저울추를 놓았던 방식이었다(32:9-10). 상인들은 한 손으로 저울을 잡고, 다른 손으로 조절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의 노점상들이 하고 있다. 성서의 예언자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위에서 언급했던 저울추를 깎는것을 고려해볼 때) 속고 속이는 것이 쉬웠다.

 

 

 

분열왕국의 부피 단위

 

히브리 성서의 많은 부분은 다양한 액체과 고체 단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그것들은 지나가는 식으로 간단하게 나올 뿐이다. 왜냐하면 성서 기록자들은 주로 큰 그림에 흥미를 두었지, 일상적인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칙상으로, 우리는 단위에 대한 용어를 구분하고 수량을 정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전문용어가, 예를 들어 포로 전기 상황 혹은 포로 후기 상황에, 적합하게 들어맞는지를 검사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전문적인 단위 용어들은 정의상 보편적으로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당히 오랜 기간이 흘렀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변화하지는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이것이다 - “성서 기록자들은 무엇을 알았으며, 그리고 그들은 언제 그것을 알았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특별한 난국에 처해있는 셈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들은 우리 현대인들이 가진 이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도량형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재구성해볼 잔존하는 도량형 사례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전통에 속해있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현대인들이 고대의 증거를 통해 역사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복잡한 정보나 기술 체계들을 다룰 수 없었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만을 다룰 뿐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성서의 자료를 기초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나는 우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려면 오직 고고학이 제공해주는 정보의 도움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한 증거들을 인용하기에 앞서, 우리가 성서 자료만을 가지고 액체와 고체 부피 단위에 대한 도량형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일련의 견해를 먼저 보이고자 한다(일단 대표적인 현대의 미국식으로 표기하겠다[역자는 한국식으로 표기한다]).

 

액체 도량법:

단위

(hin)[45:24]

바트(bath)[5:10]

(log)[14:10]

고르[2:16]/호멜[3:2]

 

 

고체 도량법:

(kab)[왕하 6:25]

오멜[16:18]/잇사론

스아(seah)[왕하 7:16]

에바(ephah)[5:10]

데테크(dethech)

호멜/고르

 

 

다른 정보

잇사론(issaron)1/10

 

 

 

 

 

 

 

에바의 1/10

 

호멜의 1/2

 

 

 

 

부피 근사치

1.14 리터

20 리터

0.23-0.5 리터

189-226 리터?

 

 

 

1.14 리터 이상

2.3 리터

5.8 리터

18 리터

90 리터

180 리터

 

 

이러한 부피들로 사용된 실제 그릇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례들은 매우 드물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만 하겠다. 그렇지만 이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사안인데, 왜냐하면 많은 용기들이 바구니처럼 쉽게 사라져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주로 부피를 측량하기 위해 사용된 통상적인 도자기들로, 문제가 되는 단위의 이름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별다른 부피의 이름이 없더라도) 익숙한 것이므로 당연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짧게 말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록된 증거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여전히 얼마 정도는 존재한다.


오래 전에 올브라이트는 유다 남부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에서 히브리어 bt, “바트가 새겨진 거대한 저장용 항아리 조각을 발견한 바 있다. “바트란 겔 45:11,14와 같은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액체 용량 단위로, 에바(ephah)와 같은 용량이며, 대략 20리터에 해당한다. 또 다른 것으로, “왕실 바트가 적혀 있었는데, 라기쉬의 지층 제3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제는 701년에 있었던 산헤립의 파괴 사건으로 정확히 연대설정이 되었다; 이것은 관청에서 사용되었거나 혹은 다소 큰 단위의 부피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잇사론(issaron), 오멜(omer)과 같은 크기로, 아랏(과 브엘세바)에서 오멜(omer)이라고 새겨진 저장용 항아리의 발견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대략 2.3리터를 넘는 부피이다. 그것은 겔 45:11-14에서 기록된 것과 거의 잘 들어맞는다. 이 구절은 한 오멜(omer)십분의 일 에바(ephah)”에 해당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에바는 거의 18리터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도자기

 

고고학자들은 모든 곳에서 도자기 연구에 열을 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도자기의 매혹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도자기들은 거의가 보편적으로 고대로부터 사용되어왔고, 모든 곳에서 넘쳐난다. 그것은 쉽게 부서지며, 불에 굽는 과정에서 사실상 쉽게 파괴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도자기는 그 시대의 수천 수만 개의 작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도자기의 매우 뛰어난 성형력(plasticity)을 가지고 있어서, 기술 혁신, 미적 수준, 다양한 기능적 고안들, 그리고 심지어 종교적인 관념까지도 잘 보여주는 아주 이상적인 매체이기도 하다. 도자기는, 탁월한 고고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민족 집단을 정의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공유된 미적 전통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민감한 매개체이며, 문화적 접촉과 변화를 지각할 수 있는, 그리고 이주 과정을 추적하고 무역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잘 드러나는 수단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도기를 언급하고 있는 성서 본문에서 시작하자면, 나는 점토(히브리어로, 호메르[ḥōmer]와 도자기를 만드는 점토 반죽 작업과 관련된 본문들(예를 들면, 41:25, “진흙을 밟아 이기며, 진흙을 밟으며”); 그 유명한 렘 18:3-6의 도공 작업실 비유에 나오는, 도공의 물레(아브나임[ʾābnayîm], 쌍수형으로, 왜냐하면 위쪽 바퀴와 아래쪽 바퀴가 있기 때문); 도자기 거푸집(호탐[ḥôtām], 문자적으로는 인장,” 그러나 여기에서는 새겨지거나 조각된 것을 의미); 3:11; 12:38에 나오는, 도자기 가마(탄누르[tannûr], “화덕”); 그리고 사 45:9에서와 같이, 또한 심지어 예루살렘에 도기 조각 문이라는 이름의 문에서 나오는(19:2), 땅에 내던져진, 깨진 도기 조각들(헤레스[ḥeres])을 나열하고자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과 또한 다른 성서 구절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자기 혹은 도기 제작과 관련할 수 있는 것들은 실제로는 거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내용들을 특별히 철기 시대의 맥락에서 그 자리를 둘 수 없다는 말이다. 일례를 들면, 이중의 도자기 물레는, 아래쪽으로 발을 굴려 돌아가게 하고 위쪽에서는 모양을 만드는 구조로 된 것은, 3000년 전부터 알려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다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좋은 질문의 방식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서 다양한 종류의 도기 그릇들에 대한 특정한 히브리 용어들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성서에 30개도 넘게 이러한 히브리 용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독자들(과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과 그 어원을 조심스럽게 분석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발생하고 있는 모든 구절들의 자세한 석의를 해야만 하는, 분명하며, 실로 저항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런 다음에, 철기 시대(혹은 이후의) 팔레스타인에서 출토한 도기 그릇과 실제 도자기에 대한 이러한 기술적인 용어 사이에 그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겠다. 분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그러한 작업이 전혀 진행된 바 없다 - 그 이유는 아마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서학 분야의 전문가들과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제임스 L. 켈소(James L. Kelso)가 있는데, 그는 1920-1932년에 텔 베이트 미르심에서 올브라이트와 함께 작업했고 그런 다음에 이후(1948)에 텔 베이트 미르심의 철기 시대 도자기 연구로 전문적인 도기분야에서 공동 연구를 진행했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켈소는 전문 고고학자는 아니었고, 그의 작업은 철기 시대 팔레스타인 도자기 분야가 비교적 잘 이해되기 전에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내가 하려는 일은 위에서 추천했던 언어학과 주석적 분석을 기초로 진행된다. 전문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 결과를 요약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의 표의 형태로 제시하고자 하는데, 왼편엔 히브리 용어를 두고, 중앙엔 모든 관련 문헌들을 통해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기능적 서술을 명백하게 밝히며, 오른편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그 히브리 용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전형적인 철기 시대 그릇들의 견본을 제시하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분석이, 시초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잠정적이고 예비적인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막연히 어떤 히브리 용어를 사용해서, 히브리 성서의 기록자가 정말 이 그릇만을 지칭했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님을 거듭 밝힌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을 통해서, 히브리 성서의 기록자들이 철기 시대의 일상생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실제로 알고 있었는지를 추론하려고 시도하는 것뿐이다 - 얼마나 많이, 혹은 아마도 얼마나 적게.


여기에서 언급된 가장 맞아 떨어지는 모든 도자기들이 비교적 정확한 8-7세기의 유다 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이러한 그릇들 - 언급된 대부분의 표현들은 J, E, 그리고 D 자료에서 나왔다 - 을 언급하고 있는 성서 본문이, 거의 다 후대에, 그러니까 왕조 후기에 주로 끝에서 두 번째로 작성되고 편집되었다는 주류 성서 학자들의 견해를 강력하게 확증시켜 주는 것이다. 한편 소수의 진기하고 수수께끼 같은 성서 용어들, 예를 들면 튀김-접시와 같은 것들은, 후기 히브리어 혹은 인접한 아람어에서나 증명이 되며, 또한 P 자료 곧 학자들이 가장 늦게 최종 편집되었다고 보는 제사장자료에서만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하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소수의 진기한 용어가, 초기 철기 시대 도기 분류에 있어서 완전히 그리고 특징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그러한 용어는 헬라 시대에 나타나며, 이는 P 자료에서 가장 늦게 편집되어 참고 했음을 확증시켜 준다. 다시 말하지만, J, E, 그리고 D 전승을 기록했던 최초의 기록자들에게 익숙했던 도기에 대한 표현들은 바로 철기 시대 곧 왕조시대의 산물이었다 다른 시기에는 통하지 않는 것들이다. 본문은 아마도 후대에 편집되었을 것이지만그 내용들 대부분은 이른 시기 것들이다.


히브리어 용어

 

아간(ʾagān)

 

 

세펠(sēpel)

 

 

짤라하트(ṣallaḥat)

 

코스(kôs)

 

미쉐레트(mišʾeret)

 

피요르(pîyōr)

 

시르(sîr)

 

두드(dûd)

 

네르(nēr)

 

네벨(nēbel)

 

 

카드(kad)

 

 

아시드(ʾāsîd)

 

바크부크(baqbūq)

 

파크(pak)

 

짭파하트(ṣappaḥat)

 

가비아(gābîʿa)

 

키라임(kîrayim)

 

일반적 기술, 기능

 

손잡이가 있는 일종의 거대한 크라테르로,

일반적으로 만찬을 위한 사발로 사용됨

 

큰 사발, 아마도 손잡이가 있거나 없다.

음식물 혹은 음료를 위해 사용됨

 

음식 혹은 음료를 위한 사발 혹은 접시

 

음료를 위한 작은 사발 혹은 컵

 

빵을 반죽하기 위한 큰 사발

 

요리할 때 쓰는 주전자

 

큰 요리용 단지

 

보다 작고 좁은 입을 가진 요리용 단지

 

기름 램프

 

기름, 포도주 등을 담기 위한 큰 항아리

(아마도 2 “바트크기)

 

물을 뽑아 쓰기 위한 작은 항아리;

물 혹은 기름, 마른 고기를 저장

 

큰 기름 병

 

액체를 담기 위한 병

 

기름이나 향료를 위한 목이 긴 작은 항아리

 

물을 담는 일종의 수통

 

포도주를 담는 잔

 

요리용 단지를 놓기 위한 원형 바닥

일종의 프라이팬(skillet)”

가능한 표본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고대 이스라엘의 예술품

 

고대 이스라엘의 예술을 다루는 일은,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쉬워야만 한다: 예술품이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성서주의자 대다수의 견해는 제2계명 - “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지어다” - 역사적인 사실이어야만 하고 또한 동시에 신중하게 취급되어야만 한다는 고지식한 선입견에 과도하게 영향을 받아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입견은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예술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그리고 왜 전통적으로 성서 학자들은 그 존재를 알고 있지 못한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분열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예술은 주로 조각된 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위에서 논의했던 것들로,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고 거의가 인장의 소유자의 정보(개인의 이름)가 들어있을 뿐이다; 두 번째 부류로는 새겨진 상아 벽널로, 대부분은 나무 재질의 가구에 상감한 것들이며, 시리아와 페니키아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인장들

 

위에서 논의했던 이름이 들어간 증거들을 제외로 놓고, 인장 혹은 조각 예술에 관해서 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서 학자들은 문헌학적으로 (동시에 신학적으로) 입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서인지, 예술사에 그리 흥미를 보이지도 않고 있다.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면 스위스의 프라이부르그(Fribourg) 대학의 오트마르 킬(Othmar Keel)을 선두로 한 일군의 유럽 성서학자들을 들 수 있다. “프라이부르그 학파는 그 예술과 도상학을 통한 이데올로기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를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 매우 인상적인 연구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을 고대 근동 예술과 도상학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에 놓고 작업을 진행하였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고대 이스라엘 예술에 관한 실비아 스코르에르의 작품에 더하여, 이러한 분야에서 최근에 주목할 만한 책이 나왔는데, 바로 우르스 빈터(Urs Winter)여자와 여신(Frau und Göttin, 영어제목으로 Woman and Goddess)이다.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연구로 킬 자신이 쓴 몇 권의 책들이 있다: 인장에 관련한 여러 권의 두꺼운 책들로, 독일어로 썼으며, 여기에는 종합적인 작품인 성서 세계의 상징체계(The Symbolism of the Biblical World)를 포함시킬 수 있다. 가장 기초가 되는 연구서는 킬과 그의 제자인 크리스토프 울링거(Christoph Uehlinger)가 쓴 고대 이스라엘의 신들, 여신들 그리고 신의 형상들(Gods, Goddesses, and Images of God in Ancient Israel)이 있다.


프라이부르그 학파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고대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의 통상적인 예술 소재군은 너무나 방대하고 그 평행되는 것들이 많아서, 나는 여기에서 단지 몇 개의 항목들만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특별히 킬과 울링거는 자신들이 수집했던 수천 개의 인장들이 어떻게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이 논증한 바로는, 예를 들자면, 10-8세기 인장들 대부분의 소재들은 빌려온 것들로, 직접적으로는 애굽에서부터, 혹은 보다 빈번하게는 페니키아 양식의 예술을 매개로 했는데, 이 페니키아 예술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소재를 섞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이 있다. 후에, 8세기 후반-6세기에 와서, -아시리아와 신-바벨론의 소재들이, 충분히 예견하는 바와 같이, 우세하게 되었다. 페니키아화된 인장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로는, 사자, 황소, 성스러운 나무, 말똥풍뎅이, 그리고 자연에서부터 얻은 다른 것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어떠한 종교적인 면을 함축하고 있다. 특별히 자연과 관련해서는 상당수가 천체의 형상들 - 태양, , 하늘의 별들 - 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것은 특별히 메소포타미아의 양식에서 두드러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본문과의 수렴과 동시에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러한 예술품은 제2계명 - “너는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20:4) - 을 비추어 볼 때, 전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수의 소재들이 성전과 그 기구에 대한 성서의 기술들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기구들은 내가 위에서 논의했던 것들로, 문자적으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십계명이 현재의 형태로 자리를 잡았던 때가 언제이건 간에 상관없이(많은 학자들은 대략적으로 8세기로 잡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예술에 관해서 어떤 측면에서는 상반되는 양면 가치라는 것이 항상 존재했었다고 추측한다. 이것은 특별히 이스라엘에는 본연의 예술적인 전통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그 이교도적주변 국가들로부터 예술을 빌려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 유입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집단이 생겨났고, 궁극적으로는 이후에 야훼신앙을 가진 집단이 그렇게도 왕성하게 비난했던 종교적 혼합주의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스라엘 예술을 표현하는 일이 불명확하다 하더라도, 나는 인장에 대한 자료 연구를 통해 두 가지 양상이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1) 이른 시기는 시리아, 특별히 페니키아의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는데, 그 대부분은 북쪽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성서의 중요한 전승과 완전하게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북왕국이 이방 신들에 굴복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 혹자는 특별히 아합 왕에 대한 신명기 사가의 격렬한 반대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며, 특별히 그의 아내인 페니키아 여왕 이세벨이 사마리아에 전폭적인 바알 제의와 그 일을 위한 수행자로 제사장과 여자사제들을 불러 모았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이러한 일치단결하여 내보이는 분노는 솔로몬 성전의 건축과 가구 비치 과정에 있어 페니키아의 영향이 있었음을 깨닫고 조금은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열왕기서의 편집자들도 비난하지 않는다. (2) 7-6세기에 이르면 이스라엘 (이제는 확실히 유다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장들 대다수에서 그 어떠한 형상이나 예술적인 소재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개인의 이름뿐이다. 짧게 말해서, 그것들은, 이후의 신명기 학파의 공식전통과 같이, 이제 엄격하게 우상반대화된 것이다. 이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후대에 일어났던 그림이 새겨진 인장에 대한 엄격하고 -표현적인양식으로의 압도적인 변화는, 내가 볼 때, 신명기적 역사가들에 의한 종교 개혁이라는 것이 완전히 정치문구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만약 여전히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예술에서 외국의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특별히 7세기 후반-6세기에 존재했던 것 같다. 아비가드와 실로의 인장들은 바로 이점을 확증해 준다; 이러한 인장들은 거의 모두가 심할 정도로 어떤 이미지를 담고 있지 않다(여기엔 개인의 이름만이 들어있을 뿐인데, 그것도 대부분 야훼의 이름과 결합된 이름들이다). 나는 이러한 내용이, 요시야의 시기에 철저한 종교적 부흥이 있었음을 뜻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인장들과 공문서 인장들은 예루살렘과 다른 왕실 중심지의 엘리트들을 나타내줄 뿐이기 때문이다. 시골의 대중 종교는, 내가 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아마도 상당할 정도로 혼합주의적인 모습을 지켜내고 있었을 것이다.

 

 

상아와 상아-세공

 

고대 이스라엘 예술의 두 번째 중요한 부류로, 성질상 다시 강력한 페니키아 양식을 힘 입은 것으로, 9-8세기의 일련의 새겨진 상아 세공 기법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북왕국에서 발견되었는데, 하솔과 같은 행정 중심지, 그리고 특별히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발견되었다. 불에 탄 커다란 조각들이 사마리아 왕궁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722/721년에 있었던 아시리아의 정복에서 가져갔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것들이었다. 똑같은 양식으로 된 상아 조각들이 나왔는데, 후면에 히브리어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이것은 바로 아시리아 수도인 님룻(Nimrud)에서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새겨진 상아 벽널은 모두가 국제적인 예술 양식을 띄고 있으며, 대부분은 북부 시리아와 페니키아에서 제조되거나 그 양식을 보인다. 사실 이러한 양식은 9-8세기에 지중해 세계에서는 모든 지역으로 보급된 것이기도 했다. 거대한 저장물이 시리아의 아슬란 타쉬(Arslan Tash), 틸 바르십(Til Barsip),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또한 스페인의 카르모나(Carmona)에서부터 신-아시리아의 수도인 님룻(Nimrud)과 다른 모든 곳들에서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의 것으로 알려진 일군의 상아들은 거의 다 사마리아에서 출토되었다(500 조각이 넘는다). 어떤 것들은 법정 상속물로 보관된 9세기 물건도 있었고, 다른 것들은 722/721년의 이스라엘 왕궁의 최후의 멸망 연대에 가까운 물건들도 있었다. 이러한 작고 개인적인 옅은 부조 새김 대부분은, 어떤 것들은 부분적으로 상감으로 되어 있거나 혹은 금박을 입힌 것들도 있는데, 값나가는 나무 재질의 가구에 끼워 넣어 붙이는 벽널로 구상된 것들이다. 많은 벽널들은 한쪽 면에 그려졌거나, 혹은 한 짝을 이루는 것의 하나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른 편은 위쪽과 아래쪽에 서로를 붙일 수 있는 끈이 달려 있었다. 그것들이 장식으로 박아 넣어졌다는 사실은, 이제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 있는 페니키아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된 딱 그대로의 상아로 박아 넣은 나무 침대와 의자들의 잘 보존된 예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9세기 후반 혹은 8세기 초반의 작품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이스라엘의 상아 장식의 주요한 예술적 소재들은 전형적으로 페니키아의 것들이다: 사자, 황소, 그룹(cherub), 야자나무, 백합, 개화된 연꽃 등. 인장에서와 같이, 우리는 솔직한 성서의 주장과 수렴하는 점들을 발견한다. 곧 이스라엘 고유의 예술이란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솔로몬은 페니키아 해변에 자리 잡은 두로의 왕 히람에게 도움을 청해서 예루살렘에 세울 성전의 디자인과 건축 그리고 그 가구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페니키아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이는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사마리아의 바알 성전에 대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성서 본문이 언급하는 상아와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 사마리아에 있다. 현대에 상아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구절들로, 예언자 아모스는 상아 궁과 큰 궁에 살고 있는 게으른 부자들을 꾸짖고 있다(3:15). 왕상 22:39는 사마리아의 아합 궁전이 상아로 만들어졌다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참조. 45:8). 바로 이 사마리아에서 대부분의 상아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것이 세워졌다는 이러한 성서의 언급은 다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무라도 코끼리나 멧돼지의 이빨로 작은 상아 판벽 집을 건축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왕하 2장의 기록자 혹은 편집자는 상아 장식이 있는 침상과 팔걸이의자를 언급한 것이 아니며, 또한 성전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701년에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바쳤던 코끼리 가죽이나 엄니를 언급한 것도 아니었다. 산헤립 자신의 조공 목록에서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항들을 알고 있다. 한편, 이러한 팔걸이의자는 그 유사한 항목으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이 물건에는 상아 상감 기법이 참으로 적합하다. 우리는 또한 왕상 10:18(참조. 대하 9:17)에서 솔로몬의 상아로 만든 큰 보좌를 읽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아모스의 구절에서(6:4) 우리는 이러한 대목을 발견한다: “상아 침대에 누운 자들에게 화있을진저!” 상당히 놀라울 정도의 수렴이, 단지 그것이 겉으로는 일시적인 언급처럼 보이지만, 아모스 312절에서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예언자는 다가올 사마리아의 멸망에서 야훼의 진노를 피할 남은자들과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들이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자들이, 건져냄을 입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은, 만약 지켜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치품 - 상아로 상감을 한 가구와 같은 - 과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던 침상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뜻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에 맞는 9-8세기 상아 예술품과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하겠다. 예언서들과 열왕기의 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진 편집자들의 성서 자료로부터 인용했던 구절들은, 고고학이 밝혀낸 상아 예술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며 자세한 부분까지 수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9-8세기의 것들이며, 오직 그 시기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독특한 레반트 지대의 철기 시대 상아 예술품은 7-6세기가 되면 사라져 없어지게 되며, 나무 가구에 상감을 넣는 것도 역시 사라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서 관련 구절들이 헬라 혹은 로마 시대에 살았던 작가에 의해서 발명되었다는 주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고대의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고, 이 경우엔 그 기록이 더 앞설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야만 했다.

 

 

2왕실 저택들

 

성서 본문과 고고학적 인공유물 사이의 수렴을 논함에 있어, 당연한 얘기지만, 고대의 두 수도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조사하는 일은 특별히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철기 시대 예루살렘에 관해, 우리는 인정하는 바와 같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그러나 위를 보라); 그리고 우리는 사마리아에서 출토된 도편조각들과 상아, 그리고 오므리와 아합의 궁전을 이미 논의한 바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과 유다 양 국의 왕이 자신의 수도에 일차저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소규모의 여름 혹은 겨울 저택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그것들 중에 우리의 논의와 연관 있는 두 곳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즈르엘

 

수정주의자들이 일종의 허구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바로 왕상 21장에 나오는 잘 알려진 나봇의 포도원에 관한 내용이다. 그 이야기는 어떻게 아합이, 이세벨의 비웃음을 받아, 볼품없는 포도원의 소유자인 나봇에게서 빼앗는 계략을 짰는지를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이즈르엘은 사마리아 왕들이 거주하는 사치스러운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아마도 겨울 궁전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사마리아의 높은 꼭대기가 겨울엔 매섭게 춥지만, 이즈르엘은 이즈르엘 계곡의 남쪽 가장자리인 낮은 산마루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날씨가 좋았고, 온화한 겨울 기후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모스는 상아로 만든 집을 비난했던 그 입으로 야훼께서 여름 궁뿐만 아니라 겨울 궁도 파괴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3:15).


이즈르엘의 옛장소는, 왕상 1장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한다면, 이즈르엘 계곡을 내려다보이는 남쪽 고도에 자리 잡은, 오늘날의 제린(Zerʿin)이라는 아랍 촌락 가까이에 위치한 작지만 전략적인 언덕과 오래 전부터 동일시되어 왔었다. 히브리 성서에서 언급된 이즈르엘은 성서학자들이 여러 번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었지만, 그 장소로 추정된 지역은 1990-91년 우시쉬킨(Ussishkin)과 그 동료들에 의해서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전혀 조사된 바 없었다.


10세기 이즈르엘 꼭대기와 그 근방에는 몇 군데 흩어져 거주했던 흔적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마리아의 경우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지만 주요한 건축물 - 모서리에 탑이 있는 장갑 방벽으로 둘러싸인 대략 10에이커의 담 - 은 단 한 차례 사용되었으며, 그 연대는 9세기로 나타났다. 이 요새화된 성채는 이후 어떤 시기에 파괴되었고, 이즈르엘 터는 두 번 다시 광범위한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크기의 담과, 그 깊이, 정교하게 건축하여 돋아 세운 흙, 방어용 장갑 방벽, 그리고 돌을 깎아 장식한 것으로 하나 걸러서 세운 장식용 벽기둥은 전형적으로 왕실 건축물에서만 발견될 법한 특성들이다. 참으로, 이와 유사한 건축물이 지금까지는 단지 북쪽에서는 하솔, 므깃도, 그리고 사마리아에서, 남쪽에서는 게젤과 라마 라헬(Ramat Raḥel)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다 - 라맛 라헬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10-9세기에 세워진 왕실 건축물이다. 우시쉬킨은 조심성 있게 (그리고 올바르게도) 이러한 장소를 특정한 성서 본문에 일치시키는 일을 미루어 두었다. 고고학자로써 (그리고 성서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구분한다는 면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학자로써), 우시쉬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이즈르엘에 있는 담은 오므리(B.C.E. 882-871) 혹은 아합(873-852)에 의해서 건축되었고, 그런 다음에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852-851)와 여호람(851-842)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담이 파괴된 것은 B.C.E. 842년에 있었던 예후의 쿠데타 때문임에 분명하며, 이 사건이 아마도 호 1:4에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증으로 제시한 자료를 통한 나의 요지는 간단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러한 직접적인 연관성은 열왕기서의 신명기적 역사가라는 최종 편집자가 아합 시대에 이즈르엘에 있었던 겨울 궁전을 상상력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상당히 이른 자료들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알았고, 이 경우엔 그 자료가 9세기보다 그렇게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맛 라헬(Ramat Raḥel)

 

왕실 궁전 사유지에 대한 또 다른 예가 성서에 나오는 벧-학게렘(Beth-Haccherem), 포도원의 집/왕궁은 베들레헴 북쪽으로 멀리 안가서 위치한 라맛 라헬이라는 작은 둔덕과 동일한 곳이다. -학게렘은 이름으로는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렘 22:13-19에 암시되고 있으며, 이곳은 예언자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가나한 자들을 사취하여 불의로 그 집을 세웠다고 해서 공공연히 비난했던 장소이다. 그렇지만 이 왕궁은 예루살렘에서는 중요한 왕실로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이즈르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토지이거나 은신처로 보인다. 이 왕궁은 넓은 다락방이 있는 큰 집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도려내어 만든 창문붉은(주홍) 빛으로 칠한백향목 판벽으로 만들어졌다(22:14).


라맛 라헬이란 장소는, 돌출한 언덕 꼭대기로 층을 지어 만든 포도원을 내려다보이며, 범위 안에 예루살렘이 들어오는 곳으로, 1954년과 1962년 사이에 요하난 아하로니(Yohanan Aharoni)가 발굴하였다. 이 장소는 9세기에 세워졌고, 그런 다음 철기 시대 후기와 페르시아 시대에 주로 거주지가 되었다. 중요한 건축물들은 8세기인 지층 제V-B층과, 7세기 후반-6세기 초반인 지층 제V-A층에 속하였다. 그 자체로 문이 달려 있던 거대한 초소용 벽은 대략 800평방미터로 담이 둘러져 있으나, 대부분은 확실히 말해서 건축되지 못했다. 벽 안쪽으로 유일하게 있는 건물은 많은 방이 있는 거대한 요새로 그 자체로 방어성벽과, 거대한 중앙 뜰, 그리고 여러 인접한 방들이 있었다. 그 건축형태는 전에 없이 훌륭했으며, 수직수평(header-stretcher) 양식으로 깎아 무늬를 장식한 돌기둥의 특징을 보여준다 - 10-9세기 이후 이러한 왕실 석공술은 이것이 유일한 사례이다. 모나게 깎은 돌을 사용한 다른 지역의 건축물의 경우와 같이, 라맛 라헬에서는 종려나무 혹은 -에올리아식(Proto-Aeolic)” 기둥머리를 사용하였다. 독특한 발견으로 돌로 만든 창문 난간이 있는데, 수그러진 잎이 가득한 짧은 종려나무 기둥 여럿이 난간 아래쪽을 받치고 있다. 이것은 본래 전형적인 8-7세기 페니키아 양식의 상아 공예에 나타나는 창문 그리고 난간과 거의 동일하다 - 종종 난간 너머로 한 여자가 기대고 있으며, 이는 왕궁이나 성전의 이층 창문을 말하려고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의미심장한 점은, 기둥과 기둥머리가 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22장이 말하는 왕실 궁전의 묘사와 라맛 라헬의 고고학적 증거 사이에 나타나는 수렴은 매우 놀라울 정도이다. 지층 제V B-A층에서 발견된 담과 주요한 건축물은 확실히 대궐 같았고, 그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게 세워졌으며, 너무나 값진 구조물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어떠한 가정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돌을 깎은 석공술 하나만 보더라도, 이것이 왕실의시설임을 확실하게 해준다. 창 모양의 구멍이 있는 창틀과 난간은 잘라 만든 창문이라는 성서의 기술과 놀랄 만큼 잘 들어맞는다. 또한 빨갛게 색이 칠해져 있는 자국은 주홍색으로 칠한집이라는 구절과도 역시 일치한다. 이러한 건축상의 모든 특징들은 사라져버렸고, 묻혔고 오랫동안 잊혀졌다. 바로 6세기 초반 바벨론에 의해 라맛 라헬이 파괴된 이후에 말이다. 이후에 페르시아 관청 건물이 꼭대기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한 때 유다 왕의 소유했던 거대한 왕궁이라는 자세한 성서적 묘사를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헬라 혹은 페르시아 시대의 성서 기록자/편집자가 라맛 라헬의 철기 시대 왕궁을 발명해 냈다고 쉽게 믿으려는 태도에 확실한 반대를 보여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