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 When Did They Know It? -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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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William G. Dever; 번역: 양지웅>
** 각주는 생략하였음을 알립니다**
제 4 장
“역사 이면의 역사”에 도달하기:
본문과 인공유물 사이의 수렴이
이스라엘의 기원과 국가의 발전에 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이 책의 중심 명제는 매우 간단하다: 현재 상태의, 매우 심하게 편집된 형태로 된 히브리 성서가 언뜻 보기에도 현대적인 측면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별로 없다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당한 수준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분명하게도 대부분의 그러한 “역사의 사실”은 다양한 종류의 유사-역사적 내러티브에 포함되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유사-역사 내러티브에서, 히브리 성서의 저자 혹은 편집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적 틀은 비평적이고 분별력 있는 연구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분명치 않게 보인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이러한 진실 덩어리를 끈기 있게 파내야만 하며, 이 일은 절대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내 생각으론 가능하다. 바로 이점이 “수정주의자들”의 접근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우리가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히브리 성서는 절대적으로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단지 선전문구라는 말이다. 그들에 있어서, 만약 성서 이야기들 가운데 어떤 것이 역사적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전부가 그런 것이 된다 ― 다소 극히 단순화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요즘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실증주의자”가 되어서, 역사가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라고 단언하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히브리 성서의 어떠한 부분을 역사 기록을 위한 가능한 자료로 사용하는 일에 대하여, 조심성이 있으면서도 그래도 낙관적인 계획을 옹호해야만 하겠다.
서언: 어떠한 책인가?
히브리 성서의 여러 책들 중에서, 본문 학자이건 고고학자건 역사가라고 자인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책들을 분명하게 짚어나가면서 논의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대부분의 학자들과 같이, 나는 오경의 많은 부분들을 제외하고자 한다. 특별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이다. 이들 자료들은 분명히 “원-역사”라는 성질의 것을 구성하며, 이 원역사는 후기 편집자에 의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주요한 서사시에 첨부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오랜 동안 구전 전승을 통해서 다듬어졌으며, 이들 이야기들 중에 어떤 것 ― 족장 내러티브의 일부분과 같은 것 ― 은 어떤 실제적인 역사적 환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들 전승들은 전설적이며 심지어 터무니없는 자료들로 덮어 씌워졌기 때문에, 현대의 독자들은 “이야기”로써 단지 즐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역사의 차원에서 신중하게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그 어떠한 고고학자라도 에덴 동산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비록 좋은 스릴러 영화 소재거리가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야기는 실로 지상의 낙원(히브리어로 간 에덴)에서 인류(히브리어로 아담, “사람”)와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하와, “생명-부여자”)에 관한 것이다. 짧게 말하면,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서로를 발견했고, 그래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낙원이란 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목가적이면서도 뜻 깊은 진실한 이야기이다. 에덴은 그 어떤 지도상에도 나와 있지 않는 곳이며, 마음의 장소인 것이다.
혹은 족장 내러티브를 읽어보라. 한 세기 동안 총망라한 조사가 있은 후에, 훌륭한 고고학자들 모두는 아브라함과 이삭 혹은 야곱을 신뢰할 만한 “역사적 인물”로 만들어 주는 그 어떠한 환경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상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고고학적 언급을 20년 전에 한 바 있는데, 바로 기초가 되는 성서 연구 논문집,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Israelite and Judean History)에서 였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모세와 출애굽에 관한 고고학적 조사는 앞의 경우와 유사하게 성과 없는 연구로 폐기되었다. 참으로 오늘날, 초기 이스라엘이 거의 토착민에 의해 기원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앞도적인 상황에서, 이집트로부터 탈출했다거나 시나이 광야를 통과해서 40년간 유랑생활을 했다는 의견이 들어설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세와 같은 인물은 기원전 13세기 중후반에 남부 트랜스요르단 지역 어딘 가에서 존재 했을지도 모른다. 이 상황은 많은 학자들이 야훼 하나님과 관련된 성서 전통이 발생했다고 보는 자리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러한 인물을 역사적인 개인으로 확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그가 후대의 이스라엘 종교의 설립자라는 면 역시 증명할 수 없다. 레위기와 민수기에 관해서, 이것들은 매우 후대의 제사장 계열의 편집자에 의해서 “원-역사”에 첨가된 것이 확실한데, 제의적인 정결과 “약속의 땅”이라는 주제에 열중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현대 독자들이 좀처럼 편집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다른 문학적 소재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역사적이지 않다.
영어로 된 성서에서 “시문학,” “지혜문학,” 그리고 “경건문학”이라고 부는 것들 상당수도 역시나 역사적 고려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에는 다음의 책들이 포함된다: 시편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여러 시대를 걸쳐 생겨난 것으로, 예전적인 사용을 위한 기도와 찬송시 모음집이다. 또한 잠언과 전도서가 있는데, 지혜로운 말들을 수집한 것으로, 어떤 것들을 상당히 후대의 것이며 다른 것들은 비-이스라엘적인 영향을 상당한 정도로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룻기, 에스더, 욥기, 그리고 다니엘서도 포함된다. 이러한 책들은 역사적인 소설로 기원전 2세기까지 내려온 비교적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데, 보다 자세히 말해서 하스모니안 전쟁의 위기라는 일종의 고안된 “현실적인 삶의 자리”를 나타내주고 있다. 아가서(혹은 솔로몬의 노래)도 들 수 있다. 이것은 동방의 성적인 사랑 노래 모음집으로, 유대인과 기독교 주석가들이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결국 성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후대에 기록된 “소 예언서” 몇 권을 들 수 있는데, 그 문학 전승자체가 마지막에 자리를 잡고 있다거나 그래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책들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책들 중에서 역대기상하서는 제외시켰는데, 이 책은 열왕기상하를 분명히 의존하고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와는 달리, 특별한 경우에 있어 역사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몇 개의 독립적인 전승을 보유하고 있다. 예언서들에 관해서 우리는 머지 않아 언급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왕조 이스라엘의 “서사시적 역사”와 그에 앞선 형성시기(“사사기”)가 “신명기적 역사”(Dtr)로 불리는 것에 주로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신명기적 역사란 여러 가지 것들이 혼합된 작품으로, 신명기에서 출발하여 사무엘을 거쳐 열왕기서까지 이어진다. 비교적 옛 자료들이 혼합된 것으로, 매우 정교한 문학적 기술로 한데 묶여서 하나의 광범위한 국가적 서사시를 만들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가나안에서의 초기 형성시기(즉, 우리가 이제는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2세기)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과 포로기의 시작점(6세기 초반)까지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문학적 집적물인, 신명기적 역사는, 그 첫 번째 부분인 신명기(혹은 모세의 “두 번째 율법”)를 필두로 주제가 통일되고, 그 주제를 따라서 현재 모양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참으로 성서 내적 전승과 현대 학계의 많은 견해들 모두에 의하면, 신명기적 역사의 핵심은 7세기 후반 요시야 시기에 있었던 종교적 개혁 집단에서 생겨난 문학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오래전에 분실된 율법책”은 왕하 22:8-20에 보도되고 있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곧이어 왕 앞에서 낭독하였고, 이는 후에 범국가적인 개혁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명기적 “학파”를 이루었던 사람들 중에서 급진적인 부류가 신명기 자체의 핵심을 편집했다가, 분명한 이유로 인해서 전설이 된 모세의 입을 통해 표현되게 만들었으며, 그런 다음 그것을 성전 안에 숨겼고, 그러다가 극적으로 발견되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야훼로부터 나온 기적적인 “새로운” 말씀으로, 이스라엘이 회개할 수 있는 일종의 “두 번째 기회”인 셈이며, 신-바벨론 제국의 진출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짧게 말해서, 하나의 문학적 복합 작품으로써 신명기적 역사는 전반적으로 “선전문구”로, 과격한 정통주의 개혁의 국가주의 집단에게 신학적인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으로, 이것을 (그 당시의 예언자적 개혁 운동과 함께) “야훼 유일신” 파벌이라고 부른다.
신명기적 역사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개요는 대략 1930년 이래 만들어진 주류 성서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다음의 몇 가지 문제들이 남아있다. (1) 첫째로, Dtr의 저작 연대이다. 그것은 요시야 시기(약 640-609년)보다는 더 이를 수 없는데, 그렇지만 성서 학자들은 바로 이점을 놓고 양분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Dtr이 포로기 이전에 기록된 하나의 통합된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포로기 이전의 핵심이 있었고(Dtr1), 상당 부분이 포로 후기인 페르시아 시기에 편집되거나 추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Dtr2);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학자들은, 바로 수정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작품 전체가, 통일되어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관없이, 헬라 시대로 연대설정할 수 있다거나(필립 R. 데이비스) 혹은 심지어 로마 시대까지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토마스 L. 톰슨).
(2)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 것의 대답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적 논제, 복잡한 문학적 저작 기법, 그리고 확실하지 않는 연대라는 문제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신명기적 “역사”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두 번째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직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신명기적 집적물은 단지 모세에게로 돌려지는 “핵심 주제들”만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전체로 볼 때, 그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서사적 역사”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명기 역사가가 만들어낸 기초적인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 문학적 자료에 대한 급진적인 편집과 개정판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초기의 기록물 대부분은 우리가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Dtr은 후대의 “모세 유형의” 개혁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에서 일종의 “신정론적 역사”인 셈이다.
신명기적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의 연결된 내러티브로 열왕기상하가 있는데, 이 책은 다윗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대략 350년 이후인 예루살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 본문에서 “역사적 덩어리”를 캐낼 수 있는 우리의 최적 조건의 테스트 케이스가 바로 열왕기상하이다. 그러한 이유로, 열왕기서는 지속적으로 학자들을 매혹시켰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에 열왕기서의 문제를 놓고 아주 훌륭한 씨름을 한 스티븐 L. 맥킨지(Steven L. McKenzie)의 「열왕기서의 문제: 신명기 역사에서 열왕기서의 저작」(The Trouble with Kings: The Composition of the Book of Kings in the Deuteronomistic History)을 들 수 있다.
맥킨지는 열왕기서의 연대와 저작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후대의 예언자적 첨가, 예를 들면 엘리사-엘리야 이야기군과 같은 첨가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맥킨지는 이 이야기를 전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예언자적 자료들 몇 가지를 살펴볼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확신하기를, 그러한 자료들이 편집되고 심지어는 매우 후대(포로후기)에 예언자의 이름을 가진 학파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실제적인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서는 보다 초기의 그리고 확실히는 철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내용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확실히 말하자면, 대예언서의 자료들 중에 상당부분이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의도하지 않았으며 신학적인 메시지와는 별도로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러한 일상 생활의 그림의 많은 측면이 페르시아 시기와는 전적으로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줄 생각이다. 헬라-로마 시대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들이 어울리는, 유일한 장소는, 바로 철기 II 시대(약 1000-600년)이며, 그러므로 그 기원을 실재했던 진짜 역사에서 찾아야지, 허구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 기원은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러한 진술은 수정주의자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이들은 성서 기자가 진짜 역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한들 별로 아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추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게 했고 결국, 심지어 완전한 날조라는 결론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히브리 성서는 전적으로 “경건한 허구”이며, 사실상 문학적 날조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고고학적 자료를 사용함으로써, 도전하고 반박하고자 하는 허무맹랑한 단언이라고 하겠다.
삶의 자리: “실제적인 삶의 환경”을 찾아서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현대의 히브리 성서의 문학 비평 연구는 “D 학파”(Dtr이 여기에 속한다)를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익명의 작자 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생각되는 다른 문학적 재료 덩어리 혹은 “자료”를 구분시켜 놓았다. 이러한 것들에는 “J 학파”를 포함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야훼(독일어로 자베[Jahve])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선호했기 때문에 불려진 칭호였다. 이 J자료는 기원전 10-9세기에 아마도 남쪽에서 기원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대조적으로 “E 학파”도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란 히브리식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것은 9-8세기로 연대가 정해졌고 북쪽 지방의 관심사가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J와 E라는 문학적 전승 줄기는 오경 곧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이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민수기까지로 하한선을 맺고 있다)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였다. J와 E 자료가, 아마도 상당히 오랜 자료들로, 어떤 지점에서 합쳐지고 내부적으로 결합되었다는 이론이 세워졌다. 이로 인하여 이중적 표현들, 상호 모순된 내용들, 시대착오적인 부분들 등등의,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오경에서 주목해왔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현재 모양대로 오경을 만들어냈던 이러한 융합과 편집 과정은 “P” 혹은 “제사장 학파”에게로 돌려지는데, 이들은 포로후기 시대에 주로 융성했던 집단으로, 바로 이 시기에 히브리 성서가 실제로 작성되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비록 내가 주장하려는 바와 같이, 전체가 저작 혹은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네 개의 “자료들” ― J, E, D, 그리고 P ― 의 구분은 “고등 비평,” 즉 성서 학계의 “문서 가설”이란 최종적인 공헌이었다. 비록 그러한 서로 구분된 “자료들”이라는 기초적인 이론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격을 받아 왔지만, 그리고 상당 부분 개정되어 왔지만, 그것은 현대의 모든 문학 비평과 히브리 성서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여전히 넓은 윤곽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에 언급했던 역사적 관심은, 순전히 “문학적” 접근이란 영역에서는 특별히 마음에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고등 비평”이, “하등 비평” 혹은 정확한 히브리 본문을 세우려는 시도와는 대조적으로,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역사적 석의에 두는데, 곧 만약 정확함을 통해서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신학적인 차원을 다루는 것이 아니며 최소한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본래적 맥락에서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현대 비평과 대부분 집단에서의 목표는 신뢰할만한 히브리어 본문을 세우는 것이었고 또한 여전히 그러한데, 이는 가능한 한 문헌학과 문학 분석을 통해서 오류들을 수정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각각의 책과 그것들 안에 있는 각 부분의 연대, 저작권, 그리고 역사적 환경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본문을 자세하게 석의하고 해석하는 일인데, 이를 통해서 그 본문의 역사적인 의미와 의의를 나타내 주는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 학자들의 경우에서, 최종적으로 본문이 이해되었을 때, 본문의 전체적인 종교적 관념들을 조직적으로 공식화하는 작업, 곧 일종의 역사적인 “성서 신학” 작업이 필요한데, 이 작업은 현대의 “비평” 학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덕분에 “역사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이유로 틀림없이 정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현대의 문학-비평적 접근은 참으로 “실증주의적”이라고 하겠다. 그렇기에 많은 “포스트모던” 학자들은 그 일에 의문을 품거나, 심지어는 그것이 권위적인 입장을 띄고 있을 뿐 아니라 과신하고 있다는 이유로 냉철하게 거절하기도 한다. 여전히 “역사주의”에 대한 최근의 공격은 너무도 쉽게, 고고학자로써 내가 본질적으로 여기며, 모든 고대 본문 연구 분야에서 비평적인 차원으로 여기는 것을 놓쳐버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현대의 비평적인 히브리 성서 연구에 있어서 한 가지 특별한 양상으로 “양식 비평”이 있었는데, 이것은 위대한 독일인 학자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에 의해서 제창된 것으로, 「구약의 민간 설화」(The Folktale in the Old Testament, 독일어로는 본래 1917년에 출간됨)와 같은 책에서 발전되었고, 첫 번째 연구서로는 그의 창세기 주석을 들 수 있다(1901년). 양식 비평과 이후에 나온 “편집 비평”(문학 전승이 마지막으로 편집된 방식을 분석함) 모두는 성서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로, 어떻게 본문이 수집, 전수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거대한 문학적 저작물로 편집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그 방법은 개별적인 단위들을 일단 구분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이러한 개별적인 단위들은 그것들을 다시 특별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 문자적인 의미로, “삶의 환경”)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문학적인 특징 ― 그것이 신화, 전설, 영웅담, 민간설화 혹은 그런 종류의 것들이건 ― 을 기술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그 자료들의 기원과 영속성, 곧 처음엔 구전으로 되었다가 다음엔 마지막으로 기록된 전승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양식 비평은 셈어학, 민족학, 비교 종교 연구, 그리고 특별히 고고학이 오랫동안 잊혀왔던 고대의 동방이라는 성서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넓혀주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에, 이국적이며 종종 극적인 방식으로 매력을 발산하게 되었다.
성서 본문의 삶의 자리, 혹은 환경을 복원한다는 기초적인 생각은 특별히 고고학자들에게 적합한데, 왜냐하면 그 일이야 말로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최근에 이안 호더와 다른 학자들이 주창했던 “맥락 고고학”(제3장)은, 간단히 말해 여기에서 제기된 나의 모든 주장들의 기초가 되는, 역사와 역사 기록에 대한 고고학의 잠재적인 공헌을 기초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여전히 오랜 “성서 (고고학)”에 설득된 고고학자들조차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고학적 맥락과 본문 학자라는 삶의 자리를 좀처럼 병렬시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 이는 아미도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우리의 두 학문 분야가 특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립이라는 성질 때문으로 보인다.
성서 학자에 의해 발견된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사실상 연구조사는 문학의 자리(Sitz in Literatur)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달리 말해서, 문학과 그 전수과정의 역사를 “실제적인 삶” 혹은 통상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역사보다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맥락”이다. 확신컨대, 소수의 성서 학자들은 이것의 결함을 느끼고 있어왔다. 롤프 크니림(Rolf Knierim)의 최근 히브리 성서의 문학 비평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다음의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 비평에 있어서, 본문 배후의 사회적 환경은 일반적인 본문을 형성시켰던 매우 결정적인 생성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이스라엘 역사라는 어떤 포괄적인 사회학적 그림이 양식 비평 작업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의미를 항상 갖게 한다. 그러므로 남은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포괄적인 그림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크니림은 계속해서 공공연히 비난하기를, “모호하게 규정된 본문 형식에 미덥지 않은 상황을 재건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나는 간단히 전통적인 순환논법이었다고 요약하고자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로운 방향이 나올 수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사회학적인 연구와 구약 문헌들에 대한 장르 연구가, 각각이 자신의 합당한 위치 속에서 연구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방향은 방침에 따라서 상관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방침에 따른 상관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록 미흡하기는 하지만 최적의 조치를 한 것이 된다. 어떠한 프로그램만으로도 안 되며 단지 시행하는 것 또한 안 된다.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서 고고학을 포함시키는 것은 어떨까. 고고학이야말로 히브리 성서의 독립적인 사회에 대한, 유일하게 가치를 지는 정보이지 않은가. 참으로, 내가 주장하는 바로는, 고고학은 진정한 “성서 이스라엘의 사회학”에 있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톰슨도 역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으며, 비록 빗나간 측면이 있지만, 최종 편집이 일반적으로 포로후기 “상황” 아래에서 기술되었고, 전체로서 히브리 성서의 저작이 그가 단지 “어떤 소수의 전수자(a handful of tradent)”라고 부르는 자들의 작품이라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삶의 자리(Sitze im Leben)가 민중들의 삶(Leben des Volkes) 가운데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 우리는 책을 사랑했던 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나 같으면 간단히 우리가 문학 ― 어떤 “실제 상황”이라기보다 일종의 문학가 ― 을 다르고 있다고 말하겠다. 많은 문헌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점은 바로 문학이 반드시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최소한 대중의 삶을 반영하지 않고, 단지 지식 계급의 삶만을 반영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서 본문은 매우 극소수 엘리트 집단의 창조적이며 문학적인 상상력을 반영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곧 포로이전과 포로후기의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계층은 몇 안 되는 제사장, 때때로 왕실에 연계된 지식인들, 문서 예언자들, 그리고 서기관들로 구성된다. 바로 이들과, 그들 자신과 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성서를 기록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심 없는” 역사를 쓰거나 일상적인 삶의 활동들에 대해서 자세한 사항들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고 그래서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실상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직 고고학만이, 페르난드 브로델과 일부 아날 학파 역사가들이 논증하는 바와 같이, “백성들에게 역사를 되돌려 줄 수 있다.” 혹은 성서 표현을 빌리자면, 고고학은 이러한 “티끌 가운데 자는”(단 12:2) 익명의 민중들에게 그들의 확실하며, 오랫동안 잊혀왔던 목소리를 되돌려 줄 수 있다.
아마도 요점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누가 역사를 만드는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기록하는가? 중요한 것은, 브로델의 경우와 같이, 누가 주연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는 셀 수 없는 개별적인 것들 보다 천년이나 되는 장기간동안에 서서히 움직이는 것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로, 종종 역사라기보다는 신화를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주인공인가? 만약 “역사가 승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승리”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논의 하는 바, (만약 우리가 “행간을” 기술적으로 읽기만 한다면) 성서 본문에는 현재 많은 이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순전한 역사적 정보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실상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대부분에 있어서, 즉 고대 이스라엘의 사람들 대부분에 관해서와 그 시대의 대부분에 관해서,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실제 삶”과 역사적 방법론
지금까지 나는 다소간 성서 본문의 “실제 삶”을 재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고고학의 가능성에 관해 낙관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그에 관해서는 성서가 진짜 역사적인 기억과 정보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독자적인 확증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본문과 인공유물 증거 사이에 어떠한 “수렴”이 있음직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문이 “단지 신비롭게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자들의 가설을 대신하여 일종의 통일성 있는 문학 생성 이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비평에서 고고학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이러한 제안이 분명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그러한 방법론은 이전에는 한 번도 제안된 적이 없었으며, 성서 학자나 시리아-팔레스타인 학자 그 누구에 의해서도 실제로 수행된 적이 없었다. 물론 혹자는 이점에서, 그러한 “수렴”을 찾는 일이 바로 이제는 불신 당한 옛 “성서 고고학”이 추구하려했던 그것이 아닌가 하고 이의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것과 내가 여기에서 제안하려는 것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로, 역사 기록을 위한 두 개의 자료원에 대한 독자적이면서도 평행적인 조사와 관련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 둘 사이에 학자들이 책임을 진 비판적인 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례연구에 앞서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고려해봐야만 하겠다; 짧게 말해서, 우리는 역사서술에 대한 서론을 개진해야만 한다.
나는 다음에서 일반 상식의 차원을 요약할 것인데, 이것은 역사 기록 작업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기초 위에 “사실”을 구축하기 위해 널리 용인되고 있는 규칙들로, 본문 상의 사실이거나 인공유물에 관한 것들이다. (나는 수정주의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에 대하여 보다 비-역사적인 접근을 개진하기 전에, 그들이 이와 유사한 방법론적 명시화를 기꺼이 환영할 것이다.) 만약 언어적으로 다소 법정의 그것과 같이 들린다면, 오히려 그것이 적합한 은유가 될 것이다.
(1) 본문이나 고고학적 인공유물은 외부적인 참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을 독자적인 증거라고 하는데, 그 자료가 확실한 증명이 될 수 있기 전에 정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2) 히브리 성서의 경우, 오직 가능한 외부적 증거는 고고학에서 나올 밖에 없는데, 이는 인공유물이나 원상태로 복구될 수 있는 자연적 환경 형식 혹은 성서 외적 문헌상의 증거들이다.
(3) 본질적이며, 참으로 유일한 것으로, 정당한 방법은 각각의 증거를 서로 구분해서 “심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증거를 “읽는” 같거나 혹은 매우 유사한 해석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본문과 물질 문화 전문가 모두가 동의해야만 한다; 이것은 타당한 “사실”을 그러한 상태로, 비판적이며 선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정보원과 그것들로부터 파생되는 사실들을 비교하는 것인데, 알려진 것 혹은 알려진 것이라고 주장되는 것을 요약하는 일종의 종합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러한 종합이 독자적인 비교 작업 전에 단언된다면, 그것은 선입견을 만들어낼 뿐, 하나의 결론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환원주의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논증은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4) 역사적 조사에서 “객관성”이라는 것이, 모든 책임 있는 학자들이 오랫동안 자각해왔던 것처럼(수정주의자들은 좀처럼 그러한 주장을 발견하지 않았다), 분명 불가능한 반면, 객관성은 진지하게 시도되어야만 한다. 만약 조사를 가능한 한 정직하고 공개된 상태로 유지하려고만 한다면, 혹은 적당한 차원에서 “청렴”하려고만 한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조사는 하나의 어릿광대극이 되고 만다(예를 들면, 근본주의자 “학자”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5) 두 자료 혹은 “증거”가 다행히 자신들의 증언에서 수렴을 하는 때라면, 역사적인 (혹은 주어진) “정보”는 이치에 맞는 의심을 초월하여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수렴된 증언이 암시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무책임한 학자적 태도라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한쪽 편의 중요한 증거를 발표하지 않음으로써 합당한 이유도 없이 다른 편의 증거에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핵심 증언을 매수한 경우라면 법정 밖으로 내던져야만 한다.
(6) 역사가는 최후의 중재인, 혹은 심판관으로, “역사적인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비록 어떤 경우는 충분한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태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7) 과학적인 차원에서 역사적인 “증명”은 역사적 재구성에 있어서 거의 사용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목적 그 자체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과 행동은 하찮은 방식을 제외하면 “법칙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물리학에서 미립자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견될 수는 없다;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미지의 변수들이 존재한다; 비록 “역사적 과정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라도, 실험은 그것들이 불가능하며 혹은 반복될 수 없음을 보여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확증도 가능하지 않으며 더구나 반증 역시 불가능하다.
(8) 마지막으로, 역사가는 “개연성의 균형”을 맞추어서 작업해야만 한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일을 궁극적으로 증명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 엎으려면 보다 그럴듯한, 곧 새롭고도 보다 우월한 독자적인 증거들로 가득 찬 각본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회의주의는 보상받지 못하며, 참으로 유죄로 의심을 받을 것이다. 회의론자는 “반대 증언” 편에 머무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증거는 파기되며, 소송사건은 모든 그럴듯한 역사적 요구에 의해서 충분히 성립되었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9) 최후 배심과 상소 청구는 보다 넓은 동료 공동체가 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에 관해서 담고 있는 본문과 고고학적 증거의 경우엔, 이 공동체는 주류 학자들뿐만 아니라 교육받은 대중들로 구성될 것이다. 이것은 톰슨이 지시하는 것처럼, “선거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어떤 신문학 비평가가 지속적으로 진리를 시험하는 것처럼, 본문을 특이하게 해석하는 “경연장”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보다 넓은 차원의 의견일치를 구하는 문제로 ― 의견일치는 수정주의자들의 선동적인 전술에 대한 신선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만약 나의 주장이 “중도적” 입장이라고 간단히 취급된다면, 그렇게 내버려 둬라: 그런 것이 대부분의 진리가 발견되는 방식이다.
몇 가지 “사례 연구”: 이스라엘인이란 민족성
위에서 언급한 수정주의자들의 몇 가지 기본적인 가정들을 거부하며, 나는 일찍이 한 가지 선례가 되는 사례를 미리 쓴 적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동시대인들로부터 차별화할 수 있는 인종적 집단이란 차원에서, 우리가 과연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고고학적 기록물들을 식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수정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아니오”라고 답한다. “초기 이스라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종학에 대한 개론적 연구와 “민족”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를 가지고, 여기에 방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정리해놓은 것을 기초로, 이제 이러한 정보를 성서/본문 상의 정보와 비교 혹은 대조해보도록 하자. 우선 서로 독립적인 두 개의 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980년대 초반부터, 이스라엘과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일종의 “공생(symbiosis)” 모델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전시켜왔다. 현대 이스라엘의 거주지인 웨스트 뱅크 지역에 대한 광활한 표면 탐사가 몇 몇의 이스라엘 팀으로 구성된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는데, 이 탐사 작업에서 어떤 지역에 대해서는 비교적 철저한 탐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중심부에는 약 300여개의 소규모 농경 촌락이 13세기 후반에서 12세기에 새로이 생성되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들은 매우 작았고, 기껏해야 몇 에이커 정도로, 경작할 수 있는 지역과 풍성한 우물 근처에 위치한 언덕 꼭대기 위에 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들은 거의 항상 에워싸는 벽이 없었고, 그 어떠한 종류의 방어 시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촌락들은 중앙 산지 지역에 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하부 갈릴리의 언덕지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브엘세바 주변의 남부 네게브까지 쭉 뻗어 있다. 그 어느 지역에서도 후기 청동기 시대에 파괴된 폐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참으로, 초기 철기 I 시대에 거주지로 선택된 지역들은 거의가 눈에 똑똑히 띌 정도로 가나안의 도시 중심지를 벗어난 장소로 국한되었다. 그들은 후미진 언덕 지역의 변경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지역들은 이전에 드문드문하게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었다. 분산된 정착 방식과 전반적으로 소규모의 촌락이 우세한 점에서, 독특한 비-도시적 사회와 경제를 엿볼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농경사회인 것이다. 예상 인구는, 잘 분석된 인종학적 비교연구와 지역의 크기를 기초로 볼 때, 중앙 산지 인구는 후기 청동기 시대 말기(13세기)에 대략 만 2천명 정도였을 것이며, 그런 다음 12세기에는 약 5만 5천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다가, 11세기에 이르러 약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극적인 “인구 폭발”은 자연 증가 만으로는 간단히 계산될 수 없으며, 소규모 그룹의 목축 유목민들의 정착이 있었다는 가정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대규모의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부터 유입되었으며, 가나안 도시의 인구가 별로 없는 외곽지대로 이주하겠다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던 것이며, 그러다가 이제 후기 청동기 시대 마지막에 와서 감소했던 것이다.
발굴된 촌락들은 U자 모양의 안뜰을 가진 가옥 구조라는 특징을 보여주는데(소위 “4방구조”로 일컬어진다), 두 개에서 네 개까지 집단으로 밀집해 있으면서, 공통 벽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옥은 일층에 저장 공간과 동물 보호를 위한 방이 있고, 이층에 대규모의 확대 가족을 위한 넉넉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독특한 가옥은 실제로 가나안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로 보건대 이 가옥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농가로 추정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거의 동일한 가옥이 동부 지중해의 농촌 지역 전반에 걸쳐 발견되었다. 그 어떠한 기념비적이거나 “엘리트”들에 의한 형태의 구조물은 이들 철기 I 시대 촌락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안뜰을 가지고 있는 가옥 집단들로, 최대 대여섯 개가 모여 있는 정도이다. 하버드 대학의 로렌스 스테이저(Lawrence Stager)는 증명하기를, 이러한 독특한 가옥 양식과 전반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한 촌락이라는 가옥 배치가 여호수아, 사사기, 그리고 사무엘서에 나와 있는 사사시대의 일상 생활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의심할 나위 없이 긴밀하게 맺어진 가족들과 씨족 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통상적인 농경인들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였다. 스테이저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의 안뜰을 가진 가옥은 핵가족 거주를 보여주며; 그러한 가옥이 몇 개의 집합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확장된, 혹은 성서가 말하는 베트-아브(bêt-ʾāb), 곧 “아버지의 집”에 해당되는 다중 세대 가족이 거주했던 것이 된다.
나 스스로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가족제 생산 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으로 비교하곤 했었는데, 이는 인류학자 마샬 D. 샬린스(Marshall D. Sahlins)가 말한 “사실상 축소된 지파 경제(tribal economy)”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원시 사회의 조건 ― 통치자가 없는 사회 ― 을 상정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성서에 기록된 초기 이스라엘과 산지 지역의 고고학적 인공유물들 모두에게 적절한 기술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개의 새롭고 혹은 보다 효과적으로 발전된 기술들이 거의 같은 시간대에 고지대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것들로는 언덕 중턱에 집중적인 계단식 농경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소규모의 자급자족 농경에서 가장 적합한 것으로, 특별히 원예농업과 포도재배에 맞아 떨어진다. 또한 여기에는 작은 산맥의 계곡에서 곡물 생산에 적합하며, 심지어는 많은 건조한 경사지에서 가축들을 방목하기에도 좋다. 새로운 기술로 회반죽을 칠한 수조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기반암을 깎아 만든 것으로 여러 가옥들에서 발견되었다. 곡물 저장을 위한 돌로 연결된 저장소 역시 새로운 특징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앞선 시대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유례가 없다.
청동과 돌을 깎아 만든 도구들은 이 시기에도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철기는, 하나의 새로운 기술로, 산발적으로 나타났는데, 곡갱이나 쟁기도구들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만 존재했다. 도자기의 형태는 후기 청동기의 퇴화된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자기제품들을 보면 이제는 고속물레로 만들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종종 발견되었다.
이러한 모든 경향들은 촌락 경제가 농경과 목축이 혼합되어 있음을 시사하는데, 건식 곡물 농업으로, 잉여 농산물과 (노동력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들을 지역적으로 상호교환 했을 것이다. 대규모의 다세대 가족들은 그러한 경제를 주요한 생업으로 여겨 집중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가족제 생산 양식”이다.
이와 유사한 농경 삶의 양식이 여러 시대에 고대 팔레스타인 농촌 지대의 특징으로 자리를 잡아 왔는데, 심지어는 20세기 후반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이제는 “식생활”이라고 구별하는 것의 한 가지 측면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 발굴된 지역에 돼지 뼈가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는다. 돼지는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 상대적으로 흔했고, 사실 여러 지역에서 잘 순응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통계적으로 철기 I 시대 고지대 집터에서 돼지 뼈가 희박하는 것 ― 종종 전혀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매우 적은 정도만을 포함한다 ― 은 하나의 “민족적 표지”가 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돼지를 금지하는 것과 관련된 후기의 성서 자료와 부합하는 것이 되며,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을 “가나안 사람”과 구별 짓는 하나의 기준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 뼈의 존재와 부재가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민족 구분”과 그들의 실체적인 한도에 대한 우리의 가장 좋은 고고학적인 지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많은 확실한 표시들이 결국엔 발견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치적인 면에서, 비록 그 거주자들이 민족적 집단으로써 자신들 스스로를 한정하는 과정 중에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의 권위 집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사사기에 나오는 진술과 너무나 잘 일치하고 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종교적인 면에서, 철기 I 시대 고지대 촌락에는 그 어떠한 형태의 신전이나, 성소 혹은 신당이 그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앞선 후기 청동기 시대에 신전이 융성했던 것과 날카롭게 대조하는 장면이다. 현재 상태로, 우리는 단지 단 하나의 철기 I 시대 제의 시설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것은 사마리아 언덕 지대에 자리 잡은 격리된 작은 개방형 신당으로, 낮게 절단된 벽에, 제단 모양의 연단이 있고, 거대한 입석(성서에는 마체바[māṣṣēbā])의 특징을 보여준다. 소수의 철기 I 시대 도자기 파편들, 몇 조각의 테라코타식의 제대, 몇 개의 철기 조각들, 그리고 잘 보존된 청동으로 된 황소 입상은 옛 가나안 제의에서 볼 수 있는 남성 신 엘(El)과 연관될 수 있는데, 이 신의 주요한 별칭이 바로 “황소 엘(Bull El)”이었다. 엘은 초기 성서 본문의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의 국가 신의 두 가지 이름 중 하나로 남아 있는데, 주로 “조상들의 하나님”이란 표현으로 사용된다. 또 하나의 초기 이스라엘 인들의 신당으로 추정되는 곳은 에발산 꼭대기, 곧 세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권위 있는 연구가들은 이 시설을 격리된 농장이나 성채로 여기기도 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는 10-9세기인 왕조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의 종교나 제의에 대한 확실한 고고학적인 증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보다 가시적인 정보가 부재하다는 점은, 극단적으로 단순하며, 반(反)우상적이며, 비제도적인 제의가 아마도 농경이란 삶의 약식에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이는 옛 가나안의 “풍요 종교”에 기초했음 ―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음 ― 을 말해준다.
몇 안 되는 조각난 비문들이 이들 철기 I 시대 촌락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다. 13세기 후반/12세기 초반으로 보이는 항아리 손잡이가 라말라(Ramallah) 근방의 라단나(Radannah)지역에서 발굴 되었는데, 여기에는 원시-가나안 어로 ʾaḥl[d]가 새겨져 있었고, 그 뜻은 아마도 “아힐루드의 소유”로 보이며, 이것은 성서를 통해 알려진 어떤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보다 중요한 것으로 4줄로 쓰인(혹은 알파벳 문자들의 나열된) 글자들이 있는 도기파편으로, 이것은 아마도 성서의 에벤에셀인 11세기 초반의 이즈벳 사르타(ʿIzbet Ṣarṭah)에서 발굴된 것인데, 이 문자는 원시-가나안 문자를 담고 있다. 어떠한 기록물에서도 그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일종의 연습문자는 고립된 물품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그것은 거의 확실히 어떤 학생의 글자 연습이며,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자가 기능성을 띄기 시작했음을 최소한 알려주는 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자기는 많은 문화적 양상들을 반영하며, 문화적으로 연속되고 변화되는 가장 민감한 지점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고지대 거주지의 철기 I 시기 도자기는, 특별히 12세기 초반의 것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옛 후기 청동기 II 시기의 지역적 전통을 매우 강하게 남겨놓고 있다. 직접적으로 연속성을 보이는 것은 거의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분명하다고 하겠는데, 단지 표준적이며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원형을 만들어가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적지와 물질 문화는 고고학자들이 “일괄 유물(assemblage)”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연속적인 예들을 보여준다. 즉 동시대에 속하는 고고학적 각종 인공유물들과 그 주변 환경들로, 이러한 것들은 안정적으로 결합된 패턴을 따르며, 특정하거나 잘 정의된 지리적 영역 너머로 분산된다. 그러한 일괄 유물은, 충분히 발굴된 유적지로부터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그럼으로써 다른 일괄 유물들과 서로 구별할 수 있게 될 때,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고학적 문화”라는 표시를 갖게 된다고 말해진다. 특별히 만약 그러한 일괄 유물이 독특하거나 새롭거나 혹은 밖에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다음에 일괄 유물은 자신 있게 알려진 “민족 그룹”에게로 돌려질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해안 평야의 블레셋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페니키아 사람들의 유물도 인식할 수 있으며, 아람인들, 모압인들, 암몬인들 그리고 에돔인들을 인식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인들이라고 하지 못할까?
이스라엘 핑켈스타인 ― 아이러니하게 일찍이 “초기 이스라엘”에 대한 제목으로 책을 쓴 사람이다 ― 과 같은 극소수의 고고학자들이 최근에 와서 “민족성”애 대하여 현재 유행하고 있는 회의주의적 노선을 최하고 있는데, 이는 간단히 말해서 앞서 논의했던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한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입증할 증거들의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얼마 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민족성이 인종주의와 혼동되어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전까지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고학과 민족성에 관해 기록된 가장 최근의 저서는 실제로 고고학자의 사례 연구를 부적합하게 나치주의에서 말하는 “민족성”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고고학을 일종의 “우월한 인종(Super Race)”으로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확신컨대 이러한 접근은 “불합리한 추론(argumentum ad absurdum)”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민족성을 인식한다는 우리의 능력에 대하여, 실로 우리만의 권리에 대하여, 위와 비슷한 회의주의가 성서 수정주의자들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톰슨은 다음과 같이 놀랄만한 주장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족성은 역사서술 해석상 일종의 허구이다: 그것은 인간 관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관념으로, (물질 유물을 기초로 기술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전문용어로 용인되지 않고 있다. 민족성이 이처럼 매우 초기 시대에 인류의 존재에 대한 공통의 양상을 띠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톰슨은 “민족성”이 무엇이건 간에 사회적인 관계 구조만이 다루어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별적인 결정의 실제적 효과는 종종 임의적이며 실로 언제나 우연적이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떠한 사회 과학 ― 정형화된 인류의 의식과 행위를 초래하는 문화적 현상에 대한 연구 ― 도 가능하지 못하게 된다. 또 다른 수정주의자들의 불합리한 점들로, “모든 사람들은 일부러 허구적으로 말하곤 한다”라는 톰슨의 진술, 그리고 “고대 근동의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가나안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했었다”라는 렘케의 단언을 들 수 있다.
다른 성서학자들은 이보다 덜 교조주의적이다. 이들 중에는 마크 G. 브렛(Mark G. Brett)가 편집한 「민족성과 성서」(Ethnicity and the Bible)에 기고한 자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브렛 자신은 수정주의자들이 견지하는 일반적 회의주의의 표면적 가치를 단순히 수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자리매김하는 일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에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심하게 단순화시켜, 진술할 정도이다. 미국 학자로 종종 수정주의자들과 연합하기도 하고 요즘엔 역시 셰필드에서 강의하고 있는, 다이아나 V. 에델만(Diana V. Edelman)은 매우 긴 장에서 여러 가지 “민족적 표지들”을 구분해 내고 있는데, 이는 나 자신과 다른 고고학자들의 견해 일치된 것으로, 사실 이 견해는 프레드릭 바르트(Fredrik Barth)의 선구적인 민족학적 연구를 그대로 따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정착 형태와 패턴, 건축양식, 도자기, 장묘풍습,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것들이 포함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러한 것들이 초기 철기 시대 고고학에서 두드러지게 새로운 것이라는 점을 부인했으며, 또한 비록 현재 어떤 방식으로든 민족성에 관해서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된다 할지라도 민족성의 규정 문제에 대하여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에델만은 민족성의 규정은 복잡하고 역동적이라고 주장했는데, 민족적 표지들은 예측 가능할 수 없으며, 단 한 줄의 민족적 특성도 작성해낼 수 없고, 그렇기에 물질 문화 특성 하나 만으로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고학자들이 달리 무엇을 말했겠는가? 에델만은, 그리 놀랍지도 않은 것이, “현재 상태의 본문과 인공유물상의 증거로 볼 때, 왕조 이전의 이스라엘 민족성에 관해서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이러한 모든 회의주의적 입장에 기초가 되는 것은, 내가 볼 때, 실제 후기 청동기-철기 시대 고고학 자료들에 대한 지식이 유감스러울 정도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민족이란 자각과 경계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허구라고 미심쩍어 하는 기본 가정에서 찾을 수 있겠다.
과연 고고학은 우리가 합법적으로 “초기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에 빛을 비춰주었는가? 위에서 기술했던 “일괄 유물”을 한 번 고려해보자. 비록 후기 청동기 시대와는 약간의 연속성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약 1200년대의 철기 시대가 막 시작하는 때에 주목할 정도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 촌락의 문화는 역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최소한 과거에 인구가 부족했던 고지대와 극소수의 도시 중심부에서 침입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전반적인 일괄 유물은 충분할 정도로 동종의 것이며 특정한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구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이름표말인가?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초기 철기 시대의 고지대 정착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다음, 다음과 같은 톰슨의 용어가 이어질 것이다: “시리아 외각 남부 가장자리의 철기 시대 주민들”(확신컨대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그에게 무척이나 거북한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러한 최소주의적인 명칭조차도 연대기적이며, 문화-진화적이며, 그리고 기능주의적인 구분을 대담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 역시 “민족적 표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고고학적 자료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로 심사숙고를 거친 후에, 나는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야만 한다고 제안하였다. 바로 여기의 12-11세기 복합체에 대한 명칭으로 “원(原)-이스라엘 사람들(Proto-Israelite)”이란 칭호를 붙인 것이다.
최소한 두 개의 추가적인 증거들을 더해서 나의 이 제안을 정당화해야겠다. 잘 알려진 이집트 제19왕조 파라오인 메르넵타의 “승전비”는, 그의 제위 3년(약 1210년) 즈음에 더베에 세워졌는데, 가나안에 실재하거나 감지된 다수의 적들에 대하여 거둔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본문은 패배한 여러 민족들을 나열하고 있으며, 그런 다음에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이 “황폐케 되었고; 그 씨앗은 없다”고 되어있다.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로는, 연대가 천문학적 계산법으로 볼 때 5년 안쪽의 오차범위 안에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라고 읽는 것은 확실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어로 “백성”을 가리키는 종족지칭어 혹은 복수 한정사 뒤에서 나타나며, 왕국, 도시국가 혹은 그와 같은 부류의 개념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민족 그룹으로 지칭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실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이집트인들의 생각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집단으로, 이집트의 지식계층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이 본문과 다른 이집트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가나안인들, 후리안인들, 샤슈-베두인들, 혹은 가나안의 다른 그룹들로부터 확실히 구별되어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뜻밖의 본문 ―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성서 외적 참조 본문으로 가장 이르며 또한 가장 확실한 ―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주의자들은 그 명백한 관련성을 회피하기 위해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주장하기를, “이스라엘”의 언급이 그 본질이나 위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혹은 그들은 이 언급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하게” 알려진 참조라고 하면서 깎아내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에서는 하나의 나무랄데 없는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할 필요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메르넵타 비문이 우리에게 명료하게 말해준다는 점이다: 가나안에는 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존재했었고 그러므로 이집트 ― 이들은, 어찌되었건, 성서적으로 편견에 빠지지 않았고, 그들은 그렇게 특별하고 독특한 사람들을 단지 자신들만의 정치선전적인 목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창안해낼 법하지 않다 ― 에 의해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웠다. 더 나아가, 만약 우리가 메르넵타 비문을 기초로 지도를 깊이 살펴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집트가 차지했던 영역이 분명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후리인”은 북쪽에 위치했고, 샤슈-베두인들은 네게브 사막과 트렌스요르단에 자리를 잡았으며,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블레셋인들과 다른 “해양 민족”들이 해안가를 따라서 정착하게 된다. 약 1200년 가나안에 “이스라엘인”만의 영토로 중앙 산지를 제외하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 메르넵타의 “이스라엘”이 이곳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겠는가?
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결론이 그 어떤 차원에서도 특정 성서 본문에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더 나아가 “성서”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의존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입장을 변호할 필요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위에서 제시된 자료 대부분을 산출하는 일에 관련된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전부가 비종교인들이다 ― 간단히 말해, 물질 문화 유물을 분석하는 일에 전문성을 가진 교수들이다. 다른 측면에서, 일군의 보수적 종교 배경을 가진 미국 고고학자들은, 이들은 고고학적 연구를 의심할 나위 없이 여호수아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정복설”을 변호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사를 착수했던 자들로, 대부분의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토착적 기원”이라는 압도적인 증거를, 비록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남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조셉 A. 켈러웨이(Joseph A. Callaway)는 주장하기를, 이제부터는 본문이 아닌 고고학적 증거가 이스라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성서적 편견”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비난 역시 상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 고고학자들을 중상모략하기 위해서 고고학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성경주의자”나 “시온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언어도단이라고 나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확실히 그들을 역사가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제는 성서의 정보로 눈을 돌려보자.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의 기원을 기술하고 있는 성서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면, 창세기에서부터 여호수아서까지 들어있는 전통적인 이야기가 고고학적으로 조사된 것으로 도출해낸 그림과는 간단하게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된다. “출애굽-정복”이라는 전체 이야기는 이젠 거의 전적으로 신화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데, 대신 “신화”라는 용어의 적확한 의미 안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하겠다. 즉, 신화란 아마도 “역사적인 허구”라고 할 수 있겠으나, 종교적인 신념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주로 말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볼 때, 이러한 이야기들은 후대의 이스라엘이 “해방된 백성”이라는 자인식을 강력하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사실”이다. 나는 심지어 이 이야기에는 어떠한 실제 역사적인 진실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해왔었는데, 왜냐하면 히브리 성서의 상당 부분을 썼다고 알려진 남부 집단들 가운데, “요셉 가문(지파)”이라고 알려진 집단이 있었고, 실로 이들 중 다수가 본래 이집트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말했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성서가 사용하는 용어대로) “온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는 체했을 것인데, 비록 후대인들의 조상 대다수가 실제로는 가나안 지역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매우 힘들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설명하게 된다. 추수감사절이라는 범국가적인 휴일에, 우리 모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선조들과 애국적인 차원에서 동일시되곤 한다(비록 우리 모두가 미국혁명여성회의 정식 당원 회원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 나의 조상들은 1840년대 일어났던 아일랜드의 감사 대기근으로 인해 아일랜드의 도니골 지방에서 피난 온 찢어지게 가난한 아일랜드 농부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아마도 아프리카, 멕시코, 혹은 다른 곳 출신일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민족성”이란 말에 붙은 의미의 다양성을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민족성은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라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부정될 수 없는 일종의 깊은 차원의 소속감인 것이다. 그 어떠한 민족적인 집단이라도 통일성이 있다. 유대인 공동체 ― 확실히 세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하나의 민족적 그룹으로는 볼 수 없는 ― 는 이러한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유월절이 되면, 전세계의 모든 유대인들은 다음의 낭송을 통해서 출애굽 이야기를 엄숙하게 기념한다: “이 밤에 우리는 이집트에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거다.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의 진정한 유월절 학가다(Haggadah)이며, 부분적으로는 가공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익살스러우며, 확실히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차원에서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성서의 내러티브의 상당부분을 구해내고자 애쓰고 있지만, 아마도 우리는 한계를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서를 그게 그렇지는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히브리 성서의 기록자와 편집자들은, 어떤 이들이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더 나은 역사가들로, 자신의 최종판을 다른 변형판에 위치시켰다. 다시 말해 여호수아에 연속으로, 사사기서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종종 발견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들의 이야기들에 혼동하면서, 그것들을 조화롭게 하고자 시도해왔었다. 그렇지만 명백한 모순들은 너무나 엄청났다. 여호수아서는, 거의가 초기 이스라엘의 한 위대한 영웅을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책으로, 그가 가나안 대다수에 대한 전면적이며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공적을 돌리고 있으며, 영토 전체를 정복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사사기서는 삿 1:1에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다음으로 200년 동안 활동했던 12명의 “사사들”의 이야기가 엮어지고 있다. 이들 사사들은 카리스마적인 인물들로 여호수아가 처리했었던 중대한 위협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야훼에게 선택된 자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가나안과 가나안 문화가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으로 1장에서 우리는 “정복된” 것으로 간주된 어떠한 “부정적인 목록(negative list)”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정복되지 않는 도시들이 나온다. 그것들 중에 하솔과 같은 도시는 여호수아가 완전하게 파괴했었다고 전해진 바로 그 도시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전투와 혼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사기서의 작가 혹은 편집자는 다음의 반복어구를 여러 곳에 사용하고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삿 21:25).
현대의 성서 역사가, 혹은 심지어 사려 깊은 평신도는 즉시 사사기서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가졌던 “반-왕정” 경향성에 주목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그러한 경향의 인식이 사사기서의 기록자가 실제 역사적인 과정을 상당 부분 정확하게 기술했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자기합리화는, 그러한 사실이 있은 후 아마도 몇 세기가 지나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본질적인 사실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철기 I 시대는, 우리가 말하는 식으로 해서, 확고할 만한 군사적인 전투가 없었고, 대대적인 가나안 도시 중심지들의 대대적인 파괴도 없었으며, 인구의 멸절도 없었고, 외부인 그룹의 무차별적인 힘에 의한 승리도 없었다. 그 어떠한 특징들이 없다. 오히려 특징이 있다면, 이제 우리가 열띤 고고학 조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대규모의 사회경제적 분열에 의해서, 대다수의 인구가 고지대 개척지로 이동하였고, 경쟁하는 민족과 문화적 그룹들 간의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이 한 두세기 동안 어느 곳에서건 지속되었다. 철기 I 시대의 팔레스타인과 남부 시리아의 이러한 “다-민족” 사회의 구성요소 가운데, 학자들은 확정적으로 “이집트인,” “가나안인,” “블레셋인,” “신-히타이트인,” “아람인,” 그리고 “페니키아인”을 규정해내었다. 나는 이러한 잘 알려진 다른 어떤 민족 그룹들의 경우에서처럼, 우리의 “선-이스라엘인”에 대한 증거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그들을 독단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단지 편견의 결과라고 보일지도 모르겠다.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말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초기 “이스라엘인”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는 성서 기사 단독으로 나온 것은 아니며, 심지어 성서를 중심으로 ― 확신컨대 성서 내러티브의 주된 흐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증거는 고고학과 본문 자료 간의 만들어진 수렴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대부분이 사사기서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것을 온통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에 비추어서 “진짜로 들리는” 사사기의 내러티브 안에서, 단지 일반적인 문화적 상황으로 간주될 수만은 없다. 스테이저는 내가 조사했던 비슷한 시기에 웨스트 뱅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인에 의한 탐사작업 결과물을 통해 나온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에 주목하였다. 그의 탁월한 1985년 소논문인 “고대 이스라엘 가족의 고고학(The Archaeology of the Family in Ancient Israel)”은 정확하게 내가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자세한 수렴의 한 방식을 개략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내용들은 “사실 그대로의” 고고학적 결과물로, “사실적”인 취지를 담고 있는 사사기서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상황들과 일상적인 생활양식의 기술들과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얼마 정도는 사무엘상하서와 심지어 여호수아의 일부분과도 수렴하고 있다.
(1) 개별적인 거주양식으로, 여기에는 생활과 저장을 위한 시설이 함께 붙어 있는데, 바로 음식물, 여러 가지 동물들 그리고 10명 안팎의 사람들이 생활하게 된다. 이를 벧-아브(bêt-ʾāb), 곧 성서적 표현으로는 “아버지의 집”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가부장적 모습인데, 모든 게베르(geber) 곧 개인들이 속한 핵가족인 셈이다. (2) 몇 개의 집이 모여 있는 집합체는, 공통되는 벽과 안뜰 그리고 다른 특색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성서가 말하는 미쉬파하(mišpāḥâ), 곧 사실상 다세대의 확대 가족인 차원에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전형적인 중동지역의 “직계가족”이다). (3) 보다 상위의 조직으로, 전체 촌락을 들 수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여러 집합체들로 구성된 것으로, 이는 성서가 말하는 세베트(šebet), 곧 “씨족, 부족”이 된다. (4) 많은 촌락들 전체의 복합체는 베네-이스라엘(benê-Yisrael),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되는데, 이는 전체로서 하나의 민족 그룹인 셈이다. 새롭고도 결정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성서 본문이 말하는 오래되고 민간설화적인 이야기 층에 대한 정교한 사회-인류학적 읽기 사이의 이러한 놀라운 유비 ― 나의 표현으로, “수렴” ― 는, 결국 고고학이 “초기 이스라엘”의 실제 유물에 빛을 비춰준다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100년에 걸친 “성서 고고학”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성공 이야기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수정주의자들 중에 그 누구도 초기 이스라엘 분야에서 상당히 많이 인용되고 있는 스테이저의 소논문을 참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마도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만약 그들의 마음이 동요된다면, 그들이 눈을 돌려야만 될 수렴 지점을 요약하기 위해서, 우리의 두 개의 자료로부터 독자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간단한 표 형식으로 제시해보도록 하겠다(137페이지를 보라).
성서적 통일 왕국 시기의 수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정주의자들은 큰소리로 부인하기를, 히브리 성서가 말하는 “통일 왕국” 곧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 치세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실재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9세기 중반 까지, 북쪽엔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전혀 없었고, 사마리아에 수도가 있을리도 만무했다. 남왕국 다시 말해 유다 왕국도 없었고, 예루살렘에 수도도 없었다. 7세기 중후반까지는 말이다. 그들이 반복해서 단언하고 있는 내용에서 특징적으로 빠져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어떠한 증거도 충분치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다 파괴적인 것으로 “국가 형성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충분한 연구서들을 비평적으로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가 형성 과정이라는 현상은 지난 20년간 수많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 사회-인류학자들과 학자들 사이에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어진 주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최근 수정주의자들 가운데 하나이자 알스트룀의 제자이기도 한, 마가렛 M. 젤리나스(Margaret M. Gelinas)는 언급하기를, “학자들은 이제야 ‘국가라는 지위’에 대한 공통의 정의에 도달한 것 같다. 즉 그것이 BCE 천년대 초반의 시기 동안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톰슨은 이러한 질문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왔고 조사되는 필수적인 사회경제적 자료들을 규명해내기 시작하였다.”
“초기 이스라엘” | 철기 I 시대 고지대 촌락 |
자료: 성서 본문, 주로 사사기서, 사무엘서 | 자료: 고고학적 자료, 기원전 12-11세기 |
주로 고지대에 정착하지만, 대조적으로 저지대에도 정착함; 참조. “경계선 목록” | 집터는 이전에 간간히 거주했던 고지대 개척지에 새롭게 세워졌다. |
블레셋인의 유입과 관련된 연대 설정 | 철기 I 시대에 새롭게 정착한 블레셋 사람들과 동시대 |
“장막”의 은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가다.” 기드온은 단지 300명의 용사들이 있었다. | 작고, 단순한 촌락; 100-300명 가량의 인구 |
기드온은 그의 아버지의 밭을 쟁기질하다가 부름을 받는다; “나실인”은 도시적 가치관에 대한 거부로써 서원한다. | 농업 경제와 삶의 양식으로, 부분적으로 새로운 농업 기술에 기초하고 있다. |
가족, 부족, 그리고 씨족이 지배적인 단위이다; 동족 결혼, 시집살이, “아버지의 집” 안에서 개별적인 존재; 어떤 레위인들은 “가정 제사장”이다. | 집의 구조와 형태는 친족 배경의 사회 구조를 반영한다; 촌락들은 동족에 집단을 이루고 있다; 북쪽과 남쪽 사이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사회-경제 구조는 “가족제 생산 양식”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전쟁을 알리거나 소집하는 표현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장막으로”를 쓴다. | 인류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평등주의(egalitarian)” 혹은 더 좋은 표현으로 “지도자가 없는(acephalous)” 사회이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적 약자”를 구성한다. 그러나 보다 복잡한 정체성 형성의 과정이 그 배후로 진행되고 있다. | 촌락의 거주형태는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을 이룬다; 가옥의 형태, 도자기 형태, 몇 안 되는 제의 장소들은 모두가 후기 청동기 가나안 문화와 약간의 연속성을 보여주지만, 점차적으로 다양성을 띄고 있다. |
모압과 암몬으로부터 접경지역의 전쟁을 벌이다. | 철기 I 시대 유적지들과 약간의 일반적인 문화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곳들이 남부 트렌스요르단에서 알려지고 있다. |
지역에 분포되어있는 가나안 사람, 블레셋 사람들과 종종 분명치 않게 작은 전투를 벌이다. “가나안의” 문화가 일반적으로 압도적이다. | 정착은 일반적으로 평화적이며, 거의 파괴된 지층이 보이지 않는다; 블레셋에 인접한 어떤 지역에서는, 블레셋의 도자기가 적거나 혹은 전혀 없다. |
문학작품 자체는 별로 없으나, “초기적 시”에서 몇 가지 구전 전통을 반추해낼 수 있다; “쉽볼렛/십볼렛” 이야기는 지역적 방언을 나타낸다; “국가표준” 언어와 필기체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 글자연습(abecedary)을 포함하여, 고대 가나안 필기체가 나타나는 비문들이 몇 있다; 개별적인 이름들로 후기 히브리어에서 나타나게 된다. |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 파벌을 조장하는 위험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국가”에 관한 그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라도 최근의 수정주의자들의 작품에서 국가 형성 과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론 연구를 헛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을 찾애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핑켈스타인은 이러한 일반 학문에 대하여 다소 전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다른 이들과는 구별된다 하겠다. 그렇기에 비록 이스라엘 국가의 출현 연대에 대하여 나와는 차이를 보일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는 “국가”를 논의할 때만큼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수십 명이나 되는 권위자들을 쉽게 인용할 수 있는데, 이들은 국가와 국가의 변화를 범세계적으로, 여러 세기를 거쳐서 분석했던 권위자들이다. 예외 없이, 그들 모두는 “국가라는 지위”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권력의 중앙화에 있다고 입을 모아 지적한다. 국가라는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적인 것이지 크기나 도시화라는 것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보다 깊이 살펴볼 것이다.
“국가형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적절한 비평적 학계의 도움으로 비추어볼 때, 과연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직 렘케와 톰슨만이 그 어떠한 소위 증거라는 것을 개진하고 있는데, 사실 그것들은 거짓 증거들 뿐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가 제시하는 팔레스타인 역사에서는, 역사적인 통일 왕국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서 성서 이야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과 같은 왕들을 위한 공간은 없다. 전통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초기에는 실상 그러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오래 전에 해당하는 상상의 세계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 시대의 실제 세계에서는, 단지 몇 안 되는 촌락들이 유다 고지대 전역에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삼림지역, 방목지, 그리고 스텝 지역은 모두가 변경의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사울이나 다윗과 같은,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에 의한 왕국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충분치 못했다.
내 견해로 보자면, 그 사실을 그렇게도 요란스럽게 무시하는 사람은, 단 한 줄의 진술만을 했다하더라도, 대우를 받는 학자로서의 그 어떠한 신용도 박탈해야만 한다. 렘케와 톰슨은 10세기의 그들만의 “몇 안 되는 촌락”들에 대한 증거를 전혀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핑켈스타인, 아담 제르탈(Adam Zertal), 아비 오피르(Avi Ophir), 고인이 된 이가엘 실로(Yigael Shiloh), 나 그리고 다른 고고학자들은 방대한 조사와 잘 문서화된 인구 측량을 기초로, 13세기 후반 고지대의 인구는 대략 1만 2천명에서 5천명에 이를 것이라고 보았다.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인구는 대략 5만까지 성장하고, 11세기에는 약 8만 명, 그리고 10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인구는 십중팔구 10만 명까지 증가하였다. 핑켈스타인이 “약 2,200명”이라고 예측한 것은, 톰슨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초로 주장되고는 있지만, 이 숫자는 10세기 예루살렘 주변의 몇 안 되는 촌락에 국한 된 것이지, 유다 전체의 고지대가 해당된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를 상정한 것도 아니다. 다른 곳에서 고지대 ― 즉, 성서가 말하는 “통일 왕국”의 중심부를 이루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역 ― 인구에 대한 핑켈스타인의 예측은 대약 6만 5천에 이른다. 구두로 핑켈스타인은 말하기를, 약 10만 명은 10세기의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놓고 봤을 때 그렇게 높은 수치는 아니라는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비록 톰슨이 10세기 인구를 절반으로 줄인다 하더라도, 아니면 더 나아가 1/4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성에 반대할 그 어떠한 주장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마야의 저지대 국가인 티칼(Tikal)은, 인류학자들이 유사한 국가형태로 인식하였는데, 기껏해야 5만명 정도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여러 개의 다양한 계곡으로 이루어진 안데스 산맥의 국가들에서는 만오천 명에서 만육천 명 정도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권위 있는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대략 2만 명으로 국가가 시작될 수 있으며, 그러한 수준의 사회가 되면 중앙화의 단계로 발달하며 거의 필연적으로 국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톰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하지만 10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부족했다고 말하는 “도시화”에 대해서, 인류학적이며 고고학적인 연구서들은 다른 입장을 주장한다. 탁월한 권위자 비어 고든 차일드(Vere Gordon Childe)와 로버트 매코믹 아담스(Robert McCormick Adams)는 각자 독립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국가를 형성시킨 “요인”으로 반드시 도시화가 선행될 필요가 없으며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국가를 이루었던 어떤 초기 사회들은 진정한 도시 단계의 사회적 진화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기도 했는데, 그런 사회들 가운데 중국의 한 왕조를 들 수 있으며, 이는 국가에 대한 연구서에 종종 인용되고 있는 “원시적”(즉, 독자적으로 진화를 겪는) 국가의 다양한 예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찰과 전혀 별개의 차원에서, 나는 최근에 가용할 만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매우 자세하게 정리한 바 있는데, 10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최소한 10개 정도의 유역지가 “도시”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철기 시대의 남부 레반트 지역의 소규모 주거지들과 엄격한 잣대로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심지어 뜸하게 인구가 분포되어 있는 트랜스요르단의 9세기 모압은 이제는 고고학자들이 볼 때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최소한 필립 S. 쿠리(Philip S. Khoury)와 조셉 코스티너(Joseph Kostiner)가 「중동지역의 부족들과 국가 형성」(Tribes and State Formation in the Middle East)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전거를 보였던 “부족”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엔, “부족 국가”라는 용어가 이전 세대의 학자들이 좋아했던 “추장제(chiefdom)”보다 더 선호되는 것 같다.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은 10세기 중후반이나 철기 II시대 초반에 중앙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소규모의 그러나 진짜로 인증된 “국가”가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바로 고고학적인 연구만으로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붙이는 이름표는, 약 1210년 가나안의 “이스라엘”이라고 언급했던 파라오 메르넵타 비문을 볼 때, 이집트의 기록물들로부터 보충설명이 될 수 있다. 이는 또한 모든 고고학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철기 I-II 시기 물질 문화와의 연속성을 고려해 볼 때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다. 성서가 필요한 사람들은 문화적 과정을 공부하는 우리 고고학자들과 그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수정주의자들이다. 그들의 논의 출발점이 어찌되었건 성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해하기를, 이스라엘의 발전은 성서 본문이 말하고 있는 그 시간이 아니라, 9세기 중반으로 그 때는 성서 외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첫 번째 언급이 발생했던 시기로, 간단히 말해 신-아시리아와 모압 본문이다(아래를 보라). 과연 얼마나 성서 본문이 언제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적인 “의심의 해석학”으로 연구되어야만 하는가? 반대로 비성서 본문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는가? 결백한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성서는 자동적으로 유죄 상태인 것만 같다.
만약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선입견에 대하여 그 어떠한 의심이라도 생긴다면, 독자들은 단지 “이스라엘의 왕”과 “다윗 집안”을 언급하고 있는 9세기의 텔 단 비문에 대해서 그들이 요약해놓은 거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될 것이다(이 “다윗 집안”은 오늘날 추가된 조각의 도움으로 유다의 요람(“여호람”) 통치 시기, 즉 약 847-842년 동안 통치했던 연대로 확실시되고 있다). 비문의 사실성은 인정하는, 논쟁의 “긍정적인” 입장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세계의 권위적인 비문학자 대부분의 의견을 발표하게 되었다(이들 중에 그 누구도 톰슨이 말하는 “성서학자”는 없다): 비문은 정확하게 그것이 말하고 있는 바를 뜻하고 있다. “부정적인” 입장에 대해, 우리는 코펜하겐 학파의 톰슨, 렘케, 크라이어의 견해를 알고 있다. 독자들이 아마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요점이 이것과 연관해서 제시되어야 하겠다. 톰슨과 렘케는, 10-8/7세기에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국가에서 그 어떠한 평행되는 발전의 과정들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부정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하나 ― 톰슨이 사마리아 혹은 (의심스러운 범-아시리아 관념에서) “사마리나” 국가라고 부르는 ― 의 국가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즉 성서에 나오는 북왕국 말이다. 그러나 9-8세기에 북과 남의 경계가, 정밀한 고고학적 연구에 기초해서 볼 때,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루스 아미란(Ruth Amiran)의 「고전인 성지의 고대 도자기」(Ancient Pottery of the Holy Land)에서 이미 북부와 남부 “혈통(families)”이란 용어로 철기 시대 도자기들 상당수를 분석해 놓고 있다. 8세기 후반과 7세기의 글이 새겨진 셰켈-분동(分洞)과 기둥 밑받침의 신상뿐만 아니라, 또한 8세기 후반의 “왕실 인장이 새겨진 항아리 손잡이”는, 유다에 너무나 일상적인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북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고학자들이 “산산조각 난 지역”이라고 부르는, 게젤에서 벧엘로 이어지는 지역을 따라 예루살렘의 북쪽 지역만이 존재했다는 점은, 바로 그 지점에 문화적이며 또한 그러므로 일종의 정치적인 경계선이 위치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성서 학자들 스스로는 지난 한 세기도 전부터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시종일관 언어적인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철자법에서 차이를 보였고, 특별하게 신의 이름이 섞여있는 개개인의 이름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북쪽에서는 어미형이 야(-yaw)였다고 한다면 남쪽에서는 보다 긴 형태인 야후(-yāhu)가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차이점들은 고고학적이며 또한 언어학적인 사실들이지, “성서적 공상물”이 아니다.
7세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국가의 수도로 인정하기 거부하고 있는 톰슨에 대하여, 그는 전적으로 침묵의 논증을 삼고 있을 뿐인데, 나다브 나아만(Nadav Na'aman)이 최근에 지적한 바와 같다.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었던 나아만은 보수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급진적이다. 그렇지만 그는 톰슨(과 렘케)의 주장에서 오류를 쉽게 지적해낸다. 10세기 고고학적 지층들은 철저하게 계층화된 상태에서 노출되지 못했고, 고대 예루살렘의 파괴물들은 거의 발굴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발견된 것이 지극히 소량이었던 점은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증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게젤의 성문
본문과 인공유물 사이에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하나의 “사례-연구”는 특별히 적절한 것으로, 간단히 말해 너무나 잘 알려진 게젤의 성문과 성벽이다. 이것들은 1902-9년에 R.A.S. 마칼리스터(Macalister)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게젤의 독특한 4개의 통로로 된 문과 장갑 (혹은 이중) 성벽에 처음으로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고인이 된 이가엘 야딘 ― 정치적 수완과 전투 전략 모두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 이었다. 이후로 그는 1950년대에 하솔에서 발굴작업을 하면서 게젤에서와 거의 동일한 성문과 성벽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다음 중앙 이즈르엘 계곡의 므깃도에서도 역시 같은 것을 발견하였다. 야딘은, “성서 고고학자”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자신의 히브리 성서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1958년 그는 짧은 소논문에서 왕상 9:15-17을 인용하게 된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게젤이 파라오가 성을 “불태워” 파괴한 후에 이집트에 의해서 솔로몬에게로 양도되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솔로몬이 결과적으로 게젤에 “성을 쌓았는지를”, 그리고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예루살렘에도 동일한 성을 쌓았는지를 기술한다. 야딘은 주목하기를, 왕상 9:15-17에 열거되어있는 네 개의 장소 중에서 세 곳이 거의 동일한 10세기 도시 성벽과 성문으로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나온 것들은 8-7세기와 평행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발견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그렇게 부르고자하는 어떠한 수렴을 취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상당히 중앙화된 솔로몬의 행정기관 아래에서 일종의 “왕실의 기술자 부대”에 의해서 건축되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1967년과 1971년 사이에 히브리 유니온 대학-하바드 셈족 박물관의 게젤 탐사단은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성문과 성벽을 재배치하였고, 마칼리스터가 분명치 않다고 남겨 두었던 부분들을 발굴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II지역에서 발견한 바가 있다. 즉 두꺼운 장갑 성벽은 대략 10세기 중반의 것으로 연대 설정이 되는 도자기의 두터운 파괴층 위에서 발견되었고, 그러므로 이는 초기에 이집트에 의해서 파괴된 것인지 문제의 여지를 남긴다. III지역에서, 성벽과 인접한 성문은 예외적으로 잘 만들어졌으며 아름답게 보전되었음이 판명나기도 하였다. 4개의 통로로 된 문 윗부분은, 다시금 깊이 돋운 흙 위에 세워졌고, 그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열 번이나 넘는 연속되는 층으로 이루어졌다. 세 번째로 다시 덮는 작업을 한 후에, 외부의 2개의 통로로 된 문루(門樓)가 (그리고 아마도 마칼리스터가 말하는 “외벽”의 재건축이) 추가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 지역은, 인접한 “호화로운 궁전(Palace 10,000)”을 포함하여, 주요부분이 파괴를 겪게 되었고, 그런 일이 있은 후 위쪽 문의 약화된 서쪽 부분을 받쳐주기 위해 부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파괴층에서 나온 도자기는 독특하게 빨간 색의 현탁액으로 채색되어 있고 손으로 광을 낸(윤을 낸) 것들로,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10세기 후반으로 연대설정이 되고 있다. 똑같이 독특한 수레바퀴로 광을 낸 도자기는 9세기 초반의 것으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알려졌지만 여기에서 만큼은 눈에 띌 정도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통상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도자기를 근거로 ― “솔로몬의 태평성대”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를 고지식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방식으로 ― 우리는 게젤의 III지역의 성벽과 성문이 10세기 중후반으로 연대설정을 할 수 있다. 도자기 증거에 추가로 해서, 우리는 약 925년경에 있었던 이집트 파라오 셰숑크의 잘 알려진 군사 원정에 의해서 나타난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데(아래를 보라), 이로 인하여 우리는 파괴 연대를 확고하게 결정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건축과 주요한 사용처의 상황들을 보다 초기로 생각해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건축물들은 약 970-930년 사이로 잡을 수 있으며, 이는 성서 기사가 솔로몬의 치세로 주어진 시대와 같다. 우리는 이러한 “수렴”을 전혀 만들어내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그러한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고, 그것을 역사 기록을 위한 적합한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만약 성서의 솔로몬이 게젤 성문과 성벽을 건축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그와 유사한 왕을 만들어 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중앙화의 증거들로 사용해 왔다. 곧 게젤뿐만 아니라 하솔과 므깃도의 건축물이 10세기에 솔로몬의 “국가”에 대한 증명이 된다고 주장해왔다. 사실 이것은 수정주의자들이 문제 삼는 기본적인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열띤 거부의 대상이 되어왔었다. 톰슨은 최근에 내가 1969년 봄에 게젤에 갔었던 일을 비방하였는데, 이 때는 어느 누구도 편파적으로 발굴되었으며 다시 덮어둔 마칼리스터의 문(톰슨은 이것을 “마카비시대의 성”으로 본다)을 본 적이 없었던 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가지고 “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려” 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심지어 내가 의도적으로 성문에서 부자연스러운 돌들을 제거했고 그것들을 언덕 아래로 굴려 보냈다고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에 더하여 나의 10세기 가설에 도전이 될 만한 도자기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폐기시켜 버렸다고 비난하였다. 그러한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텔 단 비문이 위조품이라고 했던 톰슨의 저의와 유사하지 않은가? 수정주의자들이 이러한 증거들을 반증하며 자신들의 견해와 다른 학자들의 정직성에 비난을 걸기에는,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이 너무나 미약하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고학적 자료가 “벙어리”가 아니며, 오히려 일부 학자들이 들을 생각을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게젤에 성문이 있었지만, 그것이 9세기(즉, “솔로몬의 것이 아닌 것”)로 연대설정해야 한다는 톰슨의 용인조차 안심이 되지 못한다. 그는 우리의 10세기로 연대설정을 잡은 것이 그 어떠한 “성서적 연관”이 없으며, 오히려 그 건물의 기초와 성문과 거리의 초기 사용 단계들이 손으로 광을 낸 도자기의 독특한 양식으로 특성화된다는 사실에서 나왔다는 점을 완전히 묵살한 셈이다. 여기와 다른 곳에서 이 도자기는 셰숑크의 군사원정으로 인한 파괴 이전-시기의 거주 지역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 사람이 바로 왕상 11:40과 왕하 12:2-4 (그리고 이집트 연대기)에 나오는 “시삭”이며, 이 본문은 피하기 어려운 동시성을 보여주며, 그렇기에 약 925년의 게젤 성문을 위한 하나의 사전시점(terminus ante quem)이 된다. 뒤에 소개한 본문은 시삭의 침공이 “르호보암 왕 오 년에” 발생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이는 솔로몬이 죽은 후 5년이 지났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대략 970-930년 동안 통치하는 것이 되는데, 만약 성서의 “오 년”이 정확하다면 말이다. 어찌되었건, 솔로몬의 게셀이 파괴된 것은 성서 외적 증거에 의해서 대략 925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다.
시삭의 침공과 관련하여, 윌리엄 F. 올브라이트, 벤자민 마자르, 그리고 요하난 아하로니와 같은 초기 학자들이 한 세대 전에 시삭 침공에 대한 지도를 작성해 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하겠다. 여기에는 많은 장소들이 이집트에 의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오늘날 목록들과 지도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래에서 장소들과 지층을, 최소한도로, 포함시켜보고자 한다(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표는 시삭의 목록에 언급된 지명이다):
하솔 제9층 텔 미칼
텔 아부 하완 제3층 텔 카실레 제8층
텔 케이산 제8-A층 *게젤 제3층(지금은 확실치 않다)
*므깃도 제5-A/4-B층 텔 바타쉬/팀나 제4층
*타아낙 제2-B층 텔 엘-하마
*벳-스안 상부 제5층 텔 에스-사이디에 제9층
텔 메보라크 제7층 텔 마자르
비평적인 독자라면 즉시 이러한 솔로몬과 시삭의 동시성에 주목할 것이다. 독자들은 또한 직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즉 페르시아-헬라-로마 시대 ― 파라오의 이집트가 오래 전에 잊혀졌으며 그 문학작품들도 거의가 손실된 시대 ― 에 살았던 성서 기록자 혹은 편집자들이 그러한 동시성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는 점 말이다. 후대의 편찬자들 역시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적지들의 특정한 파괴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도시들의 고대 유물들은 시간의 모래 아래 오랫동안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솔로몬-시삭 파괴층의 동시성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어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당연하게 여기며, 기껏해야 해당 언덕의 어떤 층이 무리할 정도로 정확하게 시삭의 침공에 가장 잘 들어맞는지를 논의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서 학자들은, 특별히 수정주의자들은, 진기하게도 이 점에 무관심하다. 최근에 나온 표준적인 고대 이스라엘 역사책들은 단 몇 줄로 이것을 그냥 넘어간다. 그 어느 것도 고고학적 증거를 내놓지 않으며 그 의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젤리나스는, 솔로몬 왕국의 증거를 취급하면서, 시삭의 침공이 지나가는 길에 단지 벌어진 것이며, “그 사건에 대한 이집트이 기사가 없기” 때문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삭 비문의 본문에 들어있는 전쟁 일정, 파괴된 장소들의 목록, 그리고 전리품들 목록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단지 이 본문이 이스라엘 혹은 유다라는 “국가”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면 이집트 파라오가 아주 먼 거리를 원정을 떠나면서, 그리고 나중에 그 일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단지 톰슨이 말하는 것과 같은 “유다 고지대 전역에 분포된 몇 안 되는 촌락들”을 파괴하기 위한 일이라고 정말 그녀는 가정하는 것일까? 의미심장하게도, 젤리나스는, 다른 수정주의자들을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몇 번의 시삭의 파괴에 대하여 훌륭하게 출간된 고고학적 자료에 대해서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중앙화 계획과 행정기구와 관련해서 내가 여기에서 요약해 놓은 적지 않은 고고학적 증거들은 연구서들에서 국가단계의 조직화에 대한 주요한 특징들로 여겨지는 것들을 반영해준다. 심지어 이 시점에서 그러한 특정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에 관해서 신중하게 접근한다 할지라도, 하솔, 므깃도 그리고 게셀의 증거들은 단독적으로 유효하지는 못하다. 여기에서 제시된 증거는 10세기에 대한 고고학적인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다른 특정한 정보들을 보다 자세하게 접근하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도시의 방어시설과 나머지 모든 것들이 극적인, 대규모의 조직화와 중앙화 과정의 일부분으로, 10세기 초반에서 9세기 초반 기간에 팔레스타인 대부분의 지형도를 완전하게 뒤바꿔버린 과정에 속한 것이라고 강조하고자 한다. 정착 유형과 분포의 상당한 변동 모두가, 대부분의 분명한 새로운 고고학적이며 그렇기에 새로운 문화적 단계의 표지가 되는, 인구의 변화를 특징짓는다. 이 경우엔 바로 철기 I시대에서 철기 II시대로의 변천이라고 하겠다.
수정주의자들은 철기 I-II시기의 변천에 대한 자료를 간단히 무시해버리지만(톰슨의 “몇 안 되는 촌락들”), 모든 고고학자들은 도시화와 중앙화의 현상이 이러한 지평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고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심지어 “극단주의자”들도 포함한 가운데, 여기에서 언급한 10/9세기 내에서 정확한 연대조정문제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즉, 도시방어시설은 10세기 후반인가 아니면 9세기 초반인가? 수정주의자들은 이러한 정보들을 전혀 인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연대조정문제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서로 다른 견해들을 선별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마치 그들 자신의 견해를 지지해주는 것 인양 말이다; 그들은 그 안에 들어있는 복잡성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로 도자기 연대설정과 같은 문제 말이다.
“행정기구 목록”
국가형성과 관련된 또 다른 특정한 문제들 중에서, 잘 알려진 왕상 4장의 솔로몬의 “행정구역 분할” 목록에 관심을 기울여보도록 하자. 위에서 강조했던 국가체제의 주요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앙화로, 만약 이스라엘이 참으로 그 당시에 단지 어떤 측면에서 일종의 “추장제”가 아니라 하나의 진짜 국가로 조직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10세기에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직접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이번 사례연구에 있어서, 성서의 증거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제기한 논제를 결정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확실하게 조직화되었고 그러므로 우리의 분석을 위한 하나의 편리한 틀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상 4:7-19에 의하면, 솔로몬의 주요한 행정적 정책들 가운데 하나는 전 영역을 12개로 분할한 그의 통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12구역은 각각이 그 자체만의 “고위 관료(히브리어로 니타르[niṭār]; 새번역은 장관-역주)” 혹은 장관을 두고 있다. 혹자는 이것 모두가 상당히 후대에 성서 편집자의 측면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선전문구가 아닌지 의심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즉, “이상적인 왕”으로 솔로몬의 평판을 높이며, 또한 “12 부족”이라는 오래되고 아마도 비역사적인 관념일지도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 말이다. 다른 측면에서, 각각의 구획이 한 달 간 왕실의 필요들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비성서적인 생각만으로 충분하며, 또 하나의 다른 이유들을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기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왕상 4장에서 언급된 이 목록의 편찬자가, 그 어떠한 자료와 그 어떠한 목적으로 작업했던지간에 상관없이, 자신이 갖다 쓸 수 있는 실제 역사적인 문헌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수정주의자들은 그러한 제안은 도저히 어떨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며 한결같이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본래의 삶의 자리가 과연 복원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가 물어보는 일이 오히려 공정한 것이라고 하겠다. 즉, 구획들의 목록과 주요한 도시들이 어떤 방법에서건 “확실한 사실들”과 상호관련을 맺는가 ― 그것이 지형학적인 차원에서 들어맞는가? 다시 말하지만, 간단한 표(150페이지를 보라)를 통해 성서가 말하는 자료를 정리할 수 있겠다(당분간 동일한 지역이라고 제안함으로써 고고학적으로 연관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미리 예상해보자).
이러한 역사적인 것으로 가정된 목록에 관해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말해두어야 할 점은, 이것은 직접적인 기사가 분명히 아니며, 더구나 반드시 다른 성서 자료들과 일치해야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목록은 “12부족”에 대한 다른 목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12”라는 숫자를 산출하지 않고 있다. (제시된 1열에서 구획을 규정한 것은 부분적으로 요하난 아하로니의 접근을 따르고 있다.) 왕상 4장의 성서 본문은 표면적으로 전통적인 12부족들 중에서 단지 일곱 개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는데(비록 목록상으론 다양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특별히 단, 므낫세 그리고 스불론 지파는 생략하는 반면, 사실상 이스라엘의 관리 아래 있지도 않는 다른 지역들, 곧 해변의 돌(아마도 블레셋이나 페니키아 지역)과 트랜스요르단의 바산과 길르앗(확실히 이 시기엔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니었다. 있다 해도 극히 드물다) 같은 지역이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상 4:1-17의 “행정조직 목록”이 있는 그대로 근거가 확실한 역사적인 문서라고 간단히 주장할 순 없겠다. 현재 그 자체로 매우 심하게 편집된 형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신명기적 역사와 그에 따른 이스라엘 역사의 파노라마의 일부분임에 분명하며, 그 연대도 늦은 포로전기부터 포로후기로 잡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수정주의자들이 모든 경우에 단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 초기의 자료들, 가능하다면 기록물과 같은 종류의 자료들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나는 이 목록의 어떤 측면은 성서 외적 자료를 통해 우리가 10세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매우 잘 맞아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 어떤 다른 곳에서도 거의 자리 잡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숫자 (아하로니) | 구획과 옛 “지파” 이름 | 장관의 이름 | 적합한 행정 중심지 | 고고학적으로 동일시된 지역 |
1 | 에브라임 | 벤-훌 | 세겜 디르사? | 텔 발라타 텔 엘-파라(북부) |
2 | 베냐민 | 벤-데겔 | 벳-세메스? 게젤? | 텔 엘-루메일레 텔 엘-예제르 |
3 | “아루봇” (남부해안) | 벤-헤세드 | 헤페르? 소고? | 텔 이프사르 쿤틸렛 압바드? |
4 | “돌” (북부해안) | 벤-아비나답 | 돌 | 텔 돌 |
5 | 이삭 | 아힐룻의 아들, 바나 | 므깃도 | 텔 엘-무테셀림 |
6 | 바산/길르앗 | 벤-게베르 | 라못-길르앗 | 텔 에르-루메이스 |
7 | 길르앗 | 아히나납 | 마하나임 | 텔 에드-다합? |
8 | 납달리 | 아히마아스 | 하솔 | 텔 엘-케다 |
9 | 아셀, 스불론 | 바아나 | 욕느암 | 텔 케이문 |
10 | 잇사갈 | 여호사밧 | 이즈르엘? | 제린 |
11 | 베냐민 | 시므이 | 기브온 | 텔 엘-집 |
12 | 유다/갓 | “한 장관” | 예루살렘 | - |
고고학적 연관성
예비적인 고찰로 12개의 장관 이름들 중에 다섯 개(혹은 바아나를 포함시킬 경우라면 여섯 개)가 히브리어로 벤(ben), 곧 “-의 아들”이란 말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친족 배경의 뿌리에 여전히 근접해 있는 초기 사회의 모습으로 충분히 설정할 수 있(고 그러한 이름들은 사실 후기 철기 시대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같은 내용을 두 명의 장관들 이름에서 똑같이 말할 수 있겠는데, 바로 아히나납과 아히마아스로, 이들의 이름에는 아히(ʾāḥî), 곧 “나의 형제(는)”이란 단어가 결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족”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 되는 이름의 형태이기도 하다. 왕상 4장에서 나타나는 개인적인 이름들 중에 하나로, “아힐루드”가 있는데, 이 사람은 므깃도 장관의 아버지로,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되었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초기의 히브리어가 기록된 비문들 중에 하나에서 거의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 비문은 라다나에서 발견된 12세기 경으로 추정된 글자가 새겨진 항아리 손잡이로, 라다나는 성서가 말하는 브에롯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황적인 것으로 고려될 수 있는 정도의 이 증거보다 더 강한 흥미를 돋우는 것은 바로, 이 목록에서 각 구획의 수도와 연관된 증거이다. 어떤 구획들에서는 하나 이상의 많은 중심지가 나열되어있기는 하지만(최고 세 곳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다른 이들과 같이) 최선의 후보지로 보다 크고 더 잘 알려진 도회지를 제안해 왔었다. 150페이지의 15개의 가능한 “후보지들” 중에서 두 개가 거의 확실히 고대 유역지로 알려진 것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개 장소들 중에서 13곳은 상당히 잘 발굴되었고, 어떤 것들은 상당히 광대한 수준에서 작업되었다. 그리고 10세기의 생활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고학자들이 발견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이러한 12곳의 도회지들 중 어떤 곳도 “구획의 수도”로 충분히 기능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물질유물들, 즉 대규모의 중앙화된 도시 계획화에 대한 중요한 증거들이 바로 여기에 들어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수정주의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다른 역사가들을 아연실색케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10세기의 므깃도, 아솔, 그리고 게젤을 논하면서, 국가형성의 증거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 세 곳은 모두가 자신이 포함된 구획 목록에서 충분히 수도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지만 보다 유사한 장소들 몇 곳을 추가해보도록 하자. 몇 가지 인상적인 고고학적 유물들도 함께 살펴보면서 말이다(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살펴보겠다).
티르사(Tirzah)
성서의 티르사는 확실히 텔 엘-파라(북쪽)와 동일시되는데, 이곳은 넓고 돌출한 분지로 세겜에서 북동쪽으로 15마일 떨어져 있으며, 아인 파라(ʿAin Farʿah) 샘 발원지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샘을 따라서 요단 계곡으로 깎아지른 듯 한 급경사를 이룬다. 그곳은 위대한 프랑스 고고학자이자 성서 학자이기도 한 뻬레 롤랑 드 보(Père Roland de Vaux)에 의해서 1940-1960년에 발굴되었다. 중요하고 전략적인 중기 청동기 도심지로, 그곳은 때때로 10세기 중반에 성서의 티르사로 다시 세워졌다. 그런 다음 9세기에 티르사는 세겜을 대신하여(왕상 14:17) 북왕국의 수도가 되었는데, 다시 말해 오므리가 티르사에서 7년간 통치한 후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기 전까지 북왕국의 수도였다(16:17,18). 문제가 되는 10세기 층은, 만약 티르사가 사실상 솔로몬 왕국의 행정 구획 중심지로 기능하였다고 한다면, 지층 제7-A층이 유력할 것이다. 이 지층은, 발굴된 도자기를 근거로 볼 때 확실히 10세기로 연대를 잡을 수 있는데, 일종의 틀을 잡아 끼워 넣는 도시 성벽으로 방식(offset-inset)에, 두 개의 출입문이 있는 성문, 성문 가까이 성소가 붙어 있는 거대한 공공 장소, 그리고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4방의 안뜰을 가진 집들이 통합된 형태이다. 이렇게 너무나 잘 기획된 도시 환경으로 보건대 이것들은 도시화 계획의 조처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티르사는 솔로몬 시대에 에브라임 지역의 북쪽 구획의 행정 중심지로 잘 어울린다.
벧-세메스(Beth-shemesh)
나는 제안하기를, 게젤이, 즉 10세기의 도시화되고 강력하게 요새화된 도시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사례가 되는 게젤이, 베냐민 지파 구획의 행정 중심지로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150페이지를 보라). 그러나 이와 동등한 훌륭한 후보지로 벧세메스를 들 수 있는데, 이곳은 사실상 왕상 4:9에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이 구절에서 게젤은 들어있지 않다. 벳세메스는 영국과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1911-13년에 먼저 그리고 다시 1928-33년에 발굴되었는데, 그 결과는 아직 논쟁 가운데 남겨져 있다. 1990년에 스로모 버니모비츠(Shlomo Bunimovitz)와 즈비 레더만(Zvi Lederman)이 보다 정확한 현대 방법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종류의 탐사 작업을 위해 그 도시로 돌아왔다. 옛 “지층 제II-A층”은 오랫동안 지도적인 권위자들에 의해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로 대충 연대가 설정되어져 왔었다. 그러나 그 장소는 이 기간 동안 요새화되지 않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벧-세메스를 잊혀진 곳으로 내버려둔 채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은 맥켄지의 “강화 벽”이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10세기에 해당된다고 이미 증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다소 전형적인 11세기의 “원-이스라엘” 촌락이 잘 세워진 중심 도시로 거기에는 큰 저장소, 넓은 공공 건물, 그리고 경이로운 공학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용량의 지하 급수 시설이 포함될 정도로 발전되는, 중요한 특징적인 전환이 나타나고 있다. 10세기 물건들 중에 하나는 매우 흥미롭다: 양면으로 된 게임판 한 조각인데, 여기에는 그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 이름은 “하난(Ḥanan)”으로 탁월한 권위자 프랭크 M. 크로스(Frank M. Cross)가 그 연대를 10세기 후반으로 잡았던 초기의 서체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기록이 빨리 잡아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우리의 논의를 확증시켜줄 뿐만 아니라, 글자가 새겨진 게임판은 특별히 벧-세메스에서 특별하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 옆 동네가, 왕상 4:9에 다음으로 제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엘론 벧-하난”으로, “하난 집안의 참나무”라는 이름의 가까운 촌락이기 때문이다. 하난이라는 이름은 또한 텔 바타쉬(Tel Baṭash), 곧 성서의 딤나에서 발견된 10세기 그릇 파편에 새겨진 것에도 나타나는데, 이곳은 겨우 5마일 떨어진 곳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충격적인 수렴은 다시금 말해주기를, 성서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이 열왕기서의 신명기적 역사를 편찬하는데 있어서 매우 오랜 자료들을 끌어다 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결국 이제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통일 왕국 시대의 벧-세메스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방비가 되지 않는 촌락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은 주요한 중심 도시였다. “텔 아비브 학파”의 젊은 고고학자들인 버니모비츠와 레더만의 말을 따르면, “벧-세메스는 요새화된 행정 중심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그들은 주요한 건축물을 다음의 말로 결론을 내렸다:
이 공공 건물은 기원전 10세기에 건축되었는데, 아마도 통일 왕국 기간 동안인 것 같다. 그러므로 벧-세메스는 다윗과 솔로몬의 기간 동안 어떤 중앙화된 행정기구가 존재했음에 대한 증거를 더해주는 것이 된다.
수정주의자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유다 고지대 전 지역에 손에 꼽을 만큼 정도의 촌락민이 있었을 뿐”이라는 톰슨의 주장에 맞선 이 새로운 증거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톰슨 자신이 텔 아비브의 고고학자 집단에 찬성하며 인용해오지 않았는가? 마치 그것이 나 자신과 “성서 고고학자”라고 가정된 다른 이들에 직접적인 방법론적 적수가 되는 양 말이다. 단순한 사실은, 모든 전문적인 이스라엘, 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고고학자들은 사실상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분석 도구를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해석에 이견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히브리 성서가 가장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기는 솔로몬의 업적들 가운데 하나는 위대한 국가적 성소의 건축이다. 예루살렘에 기념비적인 성전을 세운 것 말이다. 전통적인 성서 학자들은 왕상 6-8장의 솔로몬 성전에 대한 다소 정교화된 기술을 신중하게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어왔었다. 그러나 그 설계나, 건축 그리고 집기들에 대한 많은 기술적인 용어들은 상당히 최근까지 다른 외적인 확증의 도움이 있기 전까지는 불가해한 것으로 남아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수정주의자들은 열왕기서의 기술들이 완전한 공상이라고 치부해버리기 위한 증거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 열린 마음을 가져보도록 하자. 좋은 역사가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본문과 인공유물 사이에 어떠한 수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솔로몬 성전의 두드러진 특징들은, 전적으로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성서 기록에 기초하고 있는데, 다음의 도표로 제시될 수 있다(156페이지를 보라).
만약 성서의 정보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정보들”을 다른 외부적인 자료들과 구별해서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서 얻게 되는 그러한 외부적인 자료 말이다. 극소수의 문헌학자들과 성서 역사가들이 그러한 시도를 해왔으나, 대부분은 여러 가지 난해한 기술적인 용어 때문에, 게다가 비성서적인 유사한 자료와 친숙하지 못하는 그들의 배경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요점은 이것이다: 성서의 기술만으로는, 비록 우리가 히브리어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언어가 상당히 일관되게 ― 쉬운 말로 “환상적으로” ― 보인다 할지라도, 문자 그대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참으로 성서가 말하는 솔로몬 성전의 “황당무계한” 모습은 수정주의자들과 다른 이들이 그것을 후대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솔로몬의 황금시대”라는 오랜 전설로 북돋아진, 허구로 취급해버리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성전이 실제로 “황당무계”하며, 다시 말해서 꾸며낸 이야기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란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겨져 왔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우리는 히브리 성서에서 기술되고 있는 “솔로몬 성전”의 모든 한결같은 특성들에 대한 청동기와 철기 시대의 필적하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최고의 유사물은 15-19세기의 가나안-페니키아 세계에서, 아니 오로지 그 세계에서만 나왔다. 그렇지만 극소수의 학자들이 이러한 유사건축물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1. 세 부분으로 된 설계, 하나의 축대에 세 개의 연속된 방이 이어짐 | 왕상 6:3; 대하 3:3,4 |
2. 페니키아 양식을 따라 건축됨 | 왕상 7:13,18; 대하 2:1-16 |
3. 전체 면적은 약 30×90피트, 높이는 45피트; 현관과 실내 성소는 20×20피트, 본당은 50×20피트 | 왕상 6:2,16,17; 7:9,10; 대하 3:3,4 |
4. 기초 성벽은 두께가 약 8피트 | 왕상 6:2 |
5. 튼튼하고, 채석장에서 다듬어진 기초석으로 건축함; 강화 나무 들보가 상부 구조의 모든 세 부분에 삽입됨; 내부 벽은 치장된 삼목 판으로 깔려 있으며, 삼목으로 된 지붕으로 들보를 삼음 | 왕상 6:6-18,36 |
6. 두 개의 청동으로 된 기둥이 있는데, (석류와 백합의 모습이) 정교하게 치장되어 있으며, 현관 입구 옆쪽에 자리 잡음 | 왕상 7:15-22; 대하 3:15-17 |
7. 호리병, 야자 나무, 그룹, 개화된 꽃들 그리고 금을 입힌 연속된 나뭇잎으로 된 나무 판지로 실내를 장식함 | 왕상 6:15-22; 대하 3:5-9 |
8. 지성소는 두 개의 조각된 올리브 나무에, 황금으로 입힌 그룹들이 있으며, 높이는 15피트로 날개 끝에서 날개 끝까지 15피트 | 왕상 6:23-28; 대하 3:10-14 |
9. 건물과 앞마당의 가구들은 청동을 주조한 판벽에 높이가 4피트에 달하는 바퀴모양을 한 화로가 포함된다; 화관, 사자, 수소, 그룹들, 야자나무로 치장을 함 | 왕상 7:27-37; 대하 4:6 |
10. 제사를 위한 항아리들, 삽, 물동이, 부삽, 그리고 심지 가위 | 왕상 7:48-50; 대하 4:11-22 |
여기에서 나는 이제 우리가 솔로몬 성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엄청난 양의 고고학적 확증들을 단지 지나가면서 언급하려고 한다(여기에서 기록된 것은 위의 목록표의 숫자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1) 수수께끼 같이 여겨지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혹은 “긴 방”의 성전 설계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통틀어서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성전 설계에 있어서 표준적인 것이었음이 판명 났는데, 거의 30개의 사례들에서 이제는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심지어 면적, 넓이, 그리고 세부 사항들까지도 일반적인 원칙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 유래하고 있는 “페니키아 양식”은 완전히 옳은 것으로 판명이 났다; 철기 IIA시대에 이스라엘의 초기 도시화 과정에서 토착인 전통에 의한 기념비적인 건축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원형이 세기를 앞선 가나안 전통에 있는 이웃 나라의 사람들로부터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2) 나무 들보를 얽힌 것과 함께 장식된 석공 건축 방식은 처음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중기-후기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을 통틀어 기념비적 건물을 건축하는데 전형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는 특별히 알라라크(Alalahk)와 우가릿의 호화로운 건물뿐만 아니라 후기 청동기의 팔레스타인 북부의 하솔의 건물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톱으로 켠” 혹은 끌로 장식한 돌 조각이라는 성서의 기술에 대해서, 채석장에서 이미 완료된 형태로 만들어지며 그리고 “망치 소리도 없는” 장소에서 함께 어울린다는 것도 역시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누구라도, 정확히 그렇게 장식되고, 미리 제작된 석재 ― 고고학자들에게는 “모나게 깎은 돌”로 알려져 있다 ― 가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되어 정확히 10-9세기의 이스라엘에 기념비적이거나 “왕실의” 건축이라고 특성 지워진 것이라고 우연히 알지 못하게 되었더라면, 그것이 정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장식한 석재의 뛰어난 예들은 단, 하솔, 므깃도, 사마리아, 게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아마도 10-9세기 어떤 의미에서 행정 중심지였고, 그러므로 왕실의 행정 정책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위를 보라). 그러한 장식 석재가 이스라엘로 유입된 것에 대하여 이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해양 민족” 곧 블레셋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미케네 양식의 장식한 석재를 13세기 후반에 키프로스로 가지고 온 (혹은 최소한 전해 받은) 사람들로, 그런 다음에 그것이 페니키아 해안 지대로 넘어왔고, 이곳에서 아마 지역 곳곳에 채택되었을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페니키아” 상인들과 석재 장인들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언급은 완전하게 말이 된다; 그리고 10세기는 페니키아-이스라엘의 접촉 초반으로 기대할 수 있는 정확한 시기이기도 하다. 채석장에서 미리 만들어진 돌이라는 특이한 형태라는 표현에 대하여, 므깃도와 게젤에서 발견된 장식된 조각들을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겠는데, 이것들은 10세기에 세워진 기념비적인 건물과 성문으로, 벽돌공의 기하학적 표지들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지며 심지어는 빨간 색의 줄의 흔적들, 곧 진보된 채석 용구의 증거이다.
(5) 모든 세 번째 벽돌에 나무 들보를 끼워 넣는다는 표현 역시 신비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표준적인 도구로, 단과 같은 이스라엘 내의 다른 지역들에 있는 왕실 건축물뿐만 아니라, 특별히 시리아의 유역지들에서도 발견된다 ― 그리고 틀림없이 그것들은 장식된 돌의 특징이 있는 것으로, 이것은 우가릿의 거대한 궁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한 건축양식은 명백하게 지진의 피해로부터 거대하고 무거운 벽을 보호하려는 실용적인 장치였다. 그것들이 현대의 건축물에서와 같이, “갈라진 틈의 이음매”와 같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나무 판으로 덮은 상부 층과 결합된 아래의 석재에 대한 성서의 기술은 여전히 신비로우며, 현대 고고학자들이 그 답을 내놓기 전까지는 유사한 것이 없는 줄만 알았다. 시리아에 자리 잡고 있는 중기 청동기 에블라(Ebla)와 후기 청동기의 알라라크, 그리고 이제는 북부 팔레스타인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하솔에서, 우리는 (화산 활동으로 생긴) 검은색 현무암으로 된 하부 판벽이 직립하여 서 있는 모양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기념비적 건축물의 예들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상부 측면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서 나무판의 끝으로 이어 붙일 수 있게 했으며, 바로 이것이 직립된 석재에 붙어있게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의 기술은, 비록 후대의 것이라고 생각될지언정, 후기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에 대해서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확하다. 이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6) 솔로몬 성전 현관 입구에 정교하게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은, 너무나 두드러진 것이어서 히브리 성서에서는 보아스와 야긴이라는 이름을 받을 정도인데, 역시 독특한 것만은 아니다. 중기 청동기, 후기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의 가나안 전지역에서 알려진 표준적인 두 부분 혹은 세 부분으로 나뉜 성전들은 정확히 그러한 기둥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형적인 두 개의 남아있는 기둥들이 발견된 것으로, 현관이나 입구 옆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벽기둥 사이[temple-in-antis]”라는 설계는 이제 고전시대로까지 이어질 정도이다). 정교하게 받침을 장식했다는 기술은 완전히 명쾌하지는 않지만, 그 의도는 장식의 나머지 것에 잘 들어맞는다(아래 7장을 보라). 다른 곳에서, 간단히 말해 10-9세기의 왕실 건축물들은, 야자나무가 새겨진 받침(이전에는 “원-에올리아식[proto-Aeolic]”으로 불렸다)에, 통상적으로 단독적으로 서있지 않고 벽 속에 묻히게 세워졌던 것으로,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거의 확실히 정형화된 “생명의 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후기 청동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반적인 소재였다.
(7) 성전 내부의 장식과 그 기구들에 대한 특성 전반을 보면, 이전에는 단지 추정에 그쳤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후기 청동기-철기 시대에 가나안의 미술과 도상학 부분에 매우 잘 어울린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금사슬”과 관련된 것들은 완전하게 분명치는 않지만, 유사한 것으로 후기 청동기 미노아 지방의 길로쉐(guillôche) 문양과 유사하게 보여지는데, 이것은 나선형의 줄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예를 들면 하솔의 H 지역 성전에서 출토된 현무암으로 된 번제용 물동이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다. “개화된 꽃”은 거의 확실히 백합이나 파피루스 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둘은 모두 후기 청동기 시대에 지나칠 정도로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것들은 또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철기 시대 상아 가공품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러한 것으로 9-8세기 사마리아에 출토된 것이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도장에서도 보이며, 시나이 반도의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ʿAjrûd)의 8세기 성소에서 출토된 채색된 저장용 항아리에서도 나타난다. “석류”는 고대 근동에서 통상적으로 번영과 관계하는 것으로, 청동기-철기 시대의 유사한 것으로 청동으로 만든 화로의 장식들(아래를 보라), 라하브(Lahav)에서 출토된 제의용 그릇에, 그리고 인장들에 새겨진 것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또한 여러 유역지에서 출토된 상아로 만든 제사장의 지팡이에서도 나타는데, 여기엔 우연히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어 오늘날 유명하게 된 8세기의 상아로 만든 석류를 예로 들 수 있으며, 거기엔 히브리어로 “...h(“야훼[Yahweh]”로 추정할 수 있다)의 성전 제사장을 위해 따로 둔 것”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거의 확신컨대 솔로몬 성전에서 나온 것이다.
(8) “그룹”이란 용어는 이제는 어찌 되었건 간에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오동통하고 사랑스러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며 연인들에게 화살을 던져대는 그런 피조물로 오랫동안 오해되어왔지만 말이다. 성서가 말하는 “그룹”은 간단히 말해서 일종의 “혼합된 피조물”로, 이것은 기원전 3천 년대에 고대 근동에서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통상 사자의 몸체에, 인간의 머리, 그리고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룹은 신성을 나타내는 주요한 도상학적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종종 왕의 보좌 양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한 “사자 모양의 보좌”는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되었는데, 잘 알려진 12세기 므깃도에서 출토된 상아로 만든 판벽으로, 어떤 가나안 왕이 일련의 행진을 맞이하고 있다. 후대의 철기 시대에 나온 그룹의 모습으로는, 10세기 타아낙에서 출토된 테라코타로 된 제대에 남아있는 것에서, 아즈루드에서 출토된 채색된 저장용 항아리에서(여기엔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있는데, 내가 판단하기에는 여신 아세라(Asherah)로 보인다; 아래를 보라), 사마리아에서 출토된 상아로 만든 것들에서, 수많은 인장들에서 나온다. 한 쌍의 그룹이라는 상징성은, “우상 숭배적”인 소재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 이스라엘의 국가 신 야훼는 사자 모양의 보좌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고대 근동의 다른 모든 신들과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예외가 있다면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9) “사자”에 대한 연관성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룹들에 대한 설명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사자는 종종 후기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종종 사자의 등 위에 나체의 여성 신이 올라타고 있는데, 이 여신은 거의 확실하게 아세라이다. 그녀는 고대의 본문에서 “사자 여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집트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까지 내내 도상학 분야에서 상당히 애용되어 왔었다. 철기 시대의 사자 소재의 예들은 므깃도에서 출토된 상아 상자를 포함할 수 있으며, 타아낙에서 출토된 10세기 제대, 쿤틸렛 아즈루드의 저장용 항아리, 여러 가지 사마리아 상아제품들, 그리고 많은 인장들로, 특별히 너무나 유명한 “여로보암의 종”의 인장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이제는 약 9세기 초반 여로보암 I세의 것으로 생각된다. “소들”은 황소나 수송아지로 생각될 수 있다. 황소는 레반트 지역에서 통상적으로 가나안의 탁월한 남성 신 엘(El)과 연관되는데, 이 신의 이름과 형상은 초기 이스라엘이 차용하였고 야훼라는 새로운 국가 신으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자세한 사항은 크로스와 다른 이들이 보여준 바 있다. 혹자는 시나이 산에 세워졌던 그 유명한 “황금 송아지”를 회상하며, 북왕국이 분리하면서 세웠던 벧엘의 황금 송아지를 상기할지도 모르겠다. 팔레스타인의 제의적 상황에서 실제 철기 시대의 황소의 사례는, 므낫세 지파 영토의 12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방된 제의 장소(성서는 “산당”이라고 말한다; 아래를 보라)에서 출토된 아름다운 청동 황소를 포함할 수 있으며, 타아낙의 입상에서도 발견되는데(어떤 이들은 이것을 일종의 말로 보기도 한다), 여기에는 그 등위에 날개가 달린 원반 모양의 태양을 짊어지고 있다. 또한 8-6세기의 다양한 인장들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성전에 대한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 건물과 그 안뜰은 청동을 주조해서 만든 “도림질 세공” 기법의 화로로 밝혀지고 가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것들은 그 높이가 4피트에 이르며, 어떤 것은 바퀴가 달렸고, 그룹, 사자, 소, 그리고 야자 나무의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매우 유사한 청동 화로들이 12세기 이래로 키프로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또한 페니키아에서도 출토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야자 나무”와의 관련성은, 우리가 위에서 성전의 기둥들과 받침을 논의하면서 보았던 바와 같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야자수” 밑받침에 대한 이갈 실로(Yigal Shiloh)의 연구뿐만 아니라, 또한 룻 헤스트린(Ruth Hestrin)과 다른 이들의 연구를 따라서, 익숙한 “나무” 형상의 의미는 이젠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예언서와 신명기적 역사의 기록물들에서 그것을 종종 금지하고 있으며 또한 아세라와 그녀를 위한 꼭대기의 “작은 숲”을 고발하고 있는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이 이방의 신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와 모든 산 꼭대기에서”(사 57:3-5) 간음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야자 나무의 꼭대기에서 잎이 수그러지는 그림의 받침대를 생각해볼 때, 기둥 그 자체는 확실히 정형화된 야자 나무이다. 참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철기 시대의 나오이(naoi), 곧 테라코타로 만든 작은 성전 모형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방금 말한 한 쌍의 나무들이 있다 ― 입구 옆쪽에, 완벽하게 야자수의 받침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10세기 텔 엘-파라(북부)에서 출토되었다. 다른 것들은 트랜스요르단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것들이 성전과 관련된 다른 소재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특별히 비둘기가 있으며, 이것은 페니키아 세계에서 아세라/타닛(Tanit)과 연관된다. 혹은 “황소자리의 별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일종의 아세라 상징물이다. 페니키아의 나오스(naos)로 분명한 예는 키프로스의 이달리온(Idalion)에서 출토된 것으로, 아마 7-6세기로 보이는데, 이것은 두 개의 완전하게 표현된 야자나무의 받침대가 출입구 옆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입구 안쪽으로는 나체의 여성 입상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아세라(키프로스에서는 아스타르트와 동일하며, 이는 아도니스와 결합되는데, 셈어로는 아돈[ʾadôn], 곧 “주님”으로 가나안-이스라엘의 바알에 상당하는 존재)이다.
지금까지 나는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 열거된 솔로몬 성전의 개별적인 소재들의 고고학적인 사례들을 상대적으로 적은 수준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수의 다소 완전한 철기 시대의 성전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보다 도움이 되는 수준으로까지 비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한 가지 것으로 (그렇지만 수정주의자들은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북부 시리아의 텔 타이낫(Tell Tayinat)에서 출토된 9-8세기의 작은 성전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시카고 대학에서 발굴하였다. 그것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 건물로, 성서가 기술하는 것과 설계와 크기 모두에서 유사하였고, 주랑 현관에 사자가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 나타나 있었다. 내부의 성소(성서는 데비르[debîr]로, “지성소”)는 신성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뒤쪽 벽에 칸막이가 있었다. 발굴자들은 모퉁이를 깎는 건축 기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였고, 이는 어떤 이들이 재구성하면서 보여준 바와 같다. 9-8세기의 시리아 성전에서 나온 다른 예들에서는 최근에 발견된 것들과, 터키 국경 근처 북부 시리아인 아인 데라(ʿAin Derʿa)라는 아람의 수도에 있었던 거대한 성채 성전을 포함시킬 수 있다. 극소수의 고고학자들과 성서 학자들만이 이 성전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 양식으로, 안쪽과 밖이 사자와 그룹의 모양으로 새겨진 현무암 기둥들로 장식되어있다. 가장 놀라운 특성은 네 개의 거대한 발자국이 문지방에 새겨져 있으며 그런 다음에 입구를 따라서 안쪽 방으로 들어갔는데 ― 첫 번째 발자국, 다음으로는 한 계단 위로 올라가 있고, 마지막으로는 입구를 따라서 큰 걸음으로 나 있다 ― 신은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의 효과는 강렬한 것이었다.
다른 성채의 성전으로 진지르리(Zinjirli, 오늘날 터키에 있으며; 고대 아람의 수도 사말[Samʿal]이다)와 텔 할라프에서 발견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둘 모두는 작은 성전으로 요새화된 성채, 어떤 궁전, 그리고 다른 기념비적 건축물에 혼합되는 하나의 전체 왕실 건축물의 일부분이다. 전반적으로 솔로몬의 “윗 도시,” 곧 성전과 궁전, 후궁실과 행정 건물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이끌어 내야만 하는 결론은, 솔로몬은 성서 저자가 그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처럼 대담한 창시자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전형적인 철기 시대 레반트 양식 분야에서 볼 때 동양적인 군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사실상 그가 사라진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솔로몬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하기 전에, 아마도 이제는 한 점 의혹도 사라졌을 것이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성서의 복잡한 기술 매 한 가지마다 이제는 후기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사례들로 확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왕상 6-8장에는 “공상적인” 것이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정말로 공상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6세기의 바벨론에서, 혹은 그보다 훨씬 후대인 헬라-로마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기록자가 그러한 자세한 기술들을 “발명해” 냈다고, 그런데 그것이 우연히 수 백 년 전의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철기 시대 성전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수정주의자들에게서 찾아야할 것이다 ― 성전들은 그 때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고 또한 잊혀졌는데도 말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솔로몬 성전”을 위한 유일한 삶의 자리는, 성서가 말하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존재했었건 그렇지 않았건 상관없이, 철기 시대의 것으로 발견되었으며, 아무리 늦게 잡아도 10-8세기에는 존재했었다. 아마도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간단히 이것이다. 어떤 주장이 독자들의 흥미를 보다 더 끌어당기고 있는가: 히브리 성서의 성전에 대한 “기발한” 서술인가? 아니면 수정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수세기 후에 살았던 기록자들이 “전적으로 창안했다”는 주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