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라는 위력
레위기를 새벽설교로 들었다. 21세기 한국인에게 레위기라는 컨텍스트처럼 타자화되는 대상도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타자를 예수라는 신학적 읽기로 감상화하며 결국 오묘하게 해석하게 된다. '반려동물' 문화에 익숙한 많은 한국의 사람들이, 잡히는 소의 처절한 죽음의 의식을 불편하게 생각하며, 다양하게 상상할 것이다. 소가 울부짖고 피가 흥건하며 사방이 참혹하게 되는 그런 장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안에서 갈보리의 십자가를 대치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실 유대인들은 소를 간단하게 죽인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활방식과 달리, 고대 사회에서는 각 가정에서 동물을 잡고 직접 도살했다. 그것은 가족의 영양을 보충하는 말 그대로의 축복이었다. 그 안에서 감정적인 대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세계관은, 오늘 우리가 생명윤리라는 올바름과 상관없이, 철저하게 야훼라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이렇게 볼때, 왜 현대의 설교자들은 레위기를 탈 컨텍스트화 하는가? 비단 레위기만은 아닐것이다. 오히려, '탈컨텍스트'안에서만 '의미'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기원전 유대에서 번제는 일상이었고, 도살은 평범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외부인이 그것을 보면, 새롭게 되고 그 안에서 내부인이 인식하지 않았던(혹은 그럴 필요도 없었던!) 의미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다. 왜냐하면, 외부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대신, 자신의 것을 해석자라는 위력을 힘입어 뒤덮어버리기 때문이다.
레위기 안에서 요구되는 감정적 반응이 존재하고 있는가? 아니 독자가 그것을 느끼도록 본문이 요구하고 있는가? 차라리 히브리서를 전한다고 한다면, 그 독특한 파토스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레위기는 그들의 풍습이 만들어내고 있는, 독특한 제의적 공동체의 세계관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노력을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