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선답 (마가복음 14장 1-11절)
제목: 사지선답 (2월 3일 깊은샘수원교회 설교)
본문: 마가복음 14장 1-11절
1. 말씀 앞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사지선답'입니다. 네가지 중에 하나가 정답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학교에 다닐때 생각해보면, 시험을 보는 일이 제일 싫었습니다. 내일 시험을 본다 싶으면, 내일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고 헛된 꿈도 꾸었지요. 그리고 막상 시험을 보게 되면, 사지선다형 문제를 풀게 됩니다. 네 개의 보기 중에서 답이 하나 있으니, 그 정답을 찾으라는 거죠. 그런데, 이게 참 아리까리 합니다. 그래서 답을 찍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아리까리할 때, 몇 번을 찍으시나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4개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볼펜이 있으신 분들은, 제가 가리키는 말에 동그라미를 쳐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나와있습니다. 그중에서 마가복음 14장 1절부터 11절까지, '수요일'에 일어났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로 읽어서 그 안에 나타나는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볼펜이 준비되었으면 저를 따라서 표시해 보십시오. 2절의 '민란'입니다. 4절의 '허비'입니다. 8절에 '내 장례'입니다. 그리고 11절에 '기회'입니다. 이게 바로 수요일의 사지선답입니다.
저는 오늘 그 4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사지선답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이 동그라미를 친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시면, 답은 분명히 나옵니다. 신앙은 몇 번입니까? 3번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분명합니다. 너무 간단하고 뻔한 답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신앙의 정답이 간단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정답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참된 신앙을 헷갈리게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과연 무엇때문에 신앙의 정답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우리는 두개의 기준을 두고, 다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준은, '목적'과 '방법'입니다. 첫째로, 목적입니다.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사람의 나라인가?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둘째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가(진리인가)? 나의 생각으로 하는가(거짓인가)? 그림을 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에 나오는 4개의 요소가 어디에 속하는지 집어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신앙이 정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것들에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말씀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2. 분문 안으로(1번): “민란”
1번은 '민란'입니다. 민란은 정치를 말합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유월절이 되기 이틀전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명절이 바로 유월절이지요. (내일 모래가 구정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에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멀리 갈리리에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호산나!'하며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란 말 뜻은,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해서 엄청나게 기대를 했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음을 알았다면, 당연히 '호산나!'하면서 영접해야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1절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자를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합니다. 왜요? 이들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구원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목해서 보시면, 대제사장은 원래 한 명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초대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시고, 계속해서 한 명씩만 이어 받아서, 대제사장의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한 명입니까? '대제사장들'입니다. 2명 이상이라는 겁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 사이의 역사를 보면, 제사장들이 왕에게 뇌물을 바쳐서 대제사장 직분을 삽니다. (그때에는 김영란 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을 통치하기 편하도록 왕의 말을 잘 듣는 제사장을 마음대로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제사장이 여러명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왕의 일을 하는 정치꾼이었던 겁니다.
'서기관'이란 말은,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이 곧 나라의 법처럼 생각되었던 시대였으니, 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서기관이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했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 앞에 당장 무릎을 꿇고 영접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여기에 서기관은 예수님을 위해서 말씀을 통달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사람을 다스리려고 통달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눈 앞에 왕에게 잘보이거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표에 자리를 잡아보면, 목적이 '사람의 나라'이고, 방법이 '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정말로 이들은, “흉계로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도”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거짓된 방법으로 사람의 나라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정치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환호성을 보내니까, 백성들이 잠잠해 질 타이밍을 기다리자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정치 그 자체를 나쁘다고 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정치꾼'에 대한 평가입니다. 정치꾼은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의 박수를 더 좋아합니다. 정치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살아갑니다. 신앙인의 모습에도 이러한 정치꾼의 요소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로 내려주신 신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잘보여서 얻어낸 것인 양, 돈 많고 지식 많은 사람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대제사장 직분을 돈으로 사고 파는 정치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서기관처럼 해박하게 알지만, 막상 삶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말씀 없이 내 생각으로만 판단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정치꾼처럼 사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3. 분문 안으로(2 번): “허비”
2번은 ‘허비’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떤 여자가 향유병을 깨뜨려서, 아주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한 눈에 부자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한 집의 냄새와 또 그 가난한 집에서 만들어낸 보잘 것없는 음식냄새가 막 섞여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아주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향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모든 악취를 덮어주는 최고급 향유입니다. 여러분, 냄새나는 곳에서 최고급 향기를 맡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오~ 원더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냄새를 맡자마자 어떤 사람들이 “화를 냈다”(4절). 최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는데, 왜 화를 냈을까요? 이들의 키워드가 바로, '허비'입니다. 이렇게 비싼 향유를 돈으로 팔면, 가난한 사람들이 몇 년 동안 배고파하지도 않을 텐데,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거야!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람의 나라'를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분명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미묘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구제를 해야하지만, 사람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하는 구제가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구제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 단체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연민, 불쌍하게 여김에서 비롯된 구제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인데, 이렇게 동물보다 못사는 신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구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확인하는 구제입니다. 단지 사람답게 살지 못해서 그게 불쌍해서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제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돈때문이라고 한다면, 사실 너희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라도 너희 주변이 넘치고 넘친다. 그러니 허비했다고 화내지 말아라. 내가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빵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정죄함을 받아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기 위해서 왔다. 내가 대신 죽어야 너희들이 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이고, 내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온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서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사람의 나라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허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한마디로 '신비'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속해서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도, 결국 사람의 나라를 목적으로 둘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예수믿고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건강하고 자손만대 복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죽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4. 분문 안으로(3 번): “장례”
3번은 ‘장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정답이 바로 3번입니다. 성경은 '내 장례'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왜 향유를 깨뜨렸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던 식사 자리에서 오직 두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이름 없는 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나라를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대신죽으심입니다.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죽음은 다른 곳에서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그만큼 피하고 싶은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발 이 방법을 피하고 싶습니다, 라고 탄식하시며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건이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함으로 받고, 그러한 예수님을 본받아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신앙을 이름 없는 한 여인이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오늘의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삶은 때로는 이 여인처럼 핀잔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대충 믿어라, 라고 시기와 질투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영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외로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묵묵히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널리 알려라! 이 말은, 복음의 성격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내용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실제로 살아가는 모델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이렇게 널리 알려지는 모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5. 분문 안으로(4 번): “기회”
마지막 4번은 ‘기회’입니다. 사실 3번, 정답을 맞추었기 때문에 4번은 넘어가도 되지만, 제가 볼 때, 4번이 가장 우리의 신앙에 위협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4번을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1-2절의 내용에 짝을 맞추어서, 10-11절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흉계를 꾸몄는데, 이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마음을 먹고,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약속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을 조금 색다르게 여러분에게 풀어드리고자 합니다. 즉, 유다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방법이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가룟 유다가 돈에 환장해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 같지만, 사실 복음서를 연구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조금 쉽게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열심당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과격한 사람들도 있어서, 품안에 짧은칼, 단도를 품고 로마장군이나 앞잡이들을 죽이는 암살범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단도를 뭐라고 부르라면, '시카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도를 품고 다니는 열심당원들을, '이스가리옷'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는 남자이고, '시카리'는 단도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다는 가룟 유다라고 불리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스가리욧 유다라고도 불리웁니다. 결국, 유다는 자신의 폭력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방법으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가룟 유다가 그랬으니, 오늘날에도 있겠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가복음14장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3번이나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 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환호하는 백성들이, 예수님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처럼 다 칼을 들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 우리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노라고, 가룟 유다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작전입니까! 그러나, 인간의 방법은 하나님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이렇게 인간의 방법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똑똑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생각이 말씀보다 위에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그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나의 경험이나 나의 생각이 말씀 위에 있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4. 말씀이 삶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앙의 사지선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신앙은 어떠한 내용들을 암기하고 믿기만 하면 되는 그런 학교 시험이 아닙니다. 신앙은 암기가 아닙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에 있어서, 오늘 말씀은 4가지 모습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이게 칼로 자르듯이, 분명하게 나누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떨때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모든 모습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사단은 지혜롭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가 충돌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평가를 더 두렵게 여기면서 매일 매일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바른 신앙인입니다. 또한 바른 신앙은,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습관이 인생을 만든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습관은 영성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구정입니다. 새롭게 마음을 잡을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앙의 선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첫번째 유혹이 무엇입니까? 돌덩이로 떡을 많이 만들어서 배부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람의 나라를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사람의 나라를 위해서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배를 채우면 되는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쳐주셨습니다.
두번째 유혹은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려서 사람들에게 힘을 보여주라는 유혹입니다. 사단은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말씀에 약속하지 않았느냐? 어떤 위험이 닥칠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그러니 말씀을 믿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이용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사람의 나라를 이루려고 할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7). 말씀으로 사람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잘못된 신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는 무엇입니까? 사단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의 방식으로 이루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따를 때, 사람의 지혜를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시면서,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신앙의 바른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우리에게는 똑같은 문제가 주어집니다. 1번, 2번, 3번, 4번. 여러분은 어떤 답을 고르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