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G. Dever, Who were the early Israelite?
고고학책(Dever 2003)을 다시 읽고 있는데, 초기이스라엘 사회의 그림을 재구성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한참동안 인적이 뜸했던 고지대(산지)에, 초기철기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이 정착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통해, 특별히 '4방구조가옥'부터 시작하여 확대가족, 씨족으로 증가하는 사회구성이해가 다시 그려집니다. 아무리 많아도 한 씨족이 100-150명에 불과하였기에(11세기 고지대 인구를, 핑켈스타인은 3-4만, 스테이저는 15만으로 잡지요), 그리고 농업을 주력으로 하는 생활기반으로 삶이 이루어졌기에,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소중했을 것인지 문득 생각이 납니다. 고대세계에는 '개인'이 없다 하지만, '한사람의 무게'는 분명 존재했을 것입니다.
미국에 오면서, 그리고 말 그대로 CNN을 통해 세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 사람 쌔고 쌨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뼈져리게 깨닫게 됩니다.
"쌔고 쌨어"라는 말에 들어있는, 상대적 우월감 혹은 만족하지 않음, 타인의 삶을 폄하하면서 결국 '나만 있으면 돼'라는 교만은 하나님앞에서 신앙을 무너뜨리지 않을까요?
어떤 눈으로 보면, 성서의 주된 네러티브는 '영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리자의 역사 혹은 '상대방은 무시되는 역사'로 읽힐 수 있지요(그래서 이데올로기 비평학자들이 거대담론을 반응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성서(네러티브)에서 죽어나간 이름없는 혹은 '쌔고 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삼하23장에서 그려지는 다윗의 사람들은, 이런 측면에서, 한사람의 무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베들레헴의 물을 먹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말했던 다윗의 소원을, 우직하게 목숨걸고 실행했던 용사들의 충성앞에 다윗이 정신을 차리는 모습에는(삼하 23:14-17),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할 바른 세계관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블로그를 만들면서, 지금은 좀 활동이 뜸하지만, 대문을 삼상 22:22에서 잡았습니다. "나의 연고로다". 히브리어로 '아노키 삽보티'라고 읽힙니다. 놉의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주검앞에서 다윗의 고백이 '나의 연고, 나 때문이다'입니다. 쌔고 쌘 사람들이라고 누군가가 말할 때에, 다윗이 한사람의 무게를 얼마나 힘겹게 지고 살았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물론, 평생 지켰던 한사람의 무게를, 그는 충복 우리야를 죽임으로써, 던져버리고 말았지요.)
만나는 사람이 많지도 않으면서, 제 어두운 속에서 자꾸만 '쌔고 쌘 사람들'이라는 기분이 스믈스믈 기어올라오려고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눈에 벗어내치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서 슬프네요. 오늘도, 다가오는 아이의 두팔을 기꺼이 안아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없이는, 그무엇을 말하고 소유하고 있다한들 나는 추악한 쓰레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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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G. Dever, Who Were the Early Israelite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2003)
제대로 노트 정리하면서 읽어두면 좋을 책들이 있지요. 멋진 견해(글귀)가 아닌, 중요한 '정보'들이 가득한 책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너무나 엉뚱하게 들릴법한 제목이지요. Dever의 책 제목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대학자의 학문적 양심이 표현되었지요. Th.M 공부하면서 처음 들었던 책을 몇년 후에 다시 공부한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중요한 '정보'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고고학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분야에 발을 내딛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죠. 요즘은 '간학문적'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고고학자로서 성서학에 '대화'(혹은 '수렴')를 시도합니다(p.142). 특별히 조금 생소하게 들릴법한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 관해서 말이지요.
간단히 말해서, 특별히 초기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비평적 검토를 거친 결과 성서본문 자체가 몇백년이나 후대에 기록된 것이 일차적인 문제이며(한편, 이런 근본적 문제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근본주의적 문자숭배사상이 현기독교의 현실이지요), 철기1시대 팔레스타인 중앙산지에 급격하게 등장하며 농업을 뿌리를 두고 정착했던 사람들('proto-Israelites')이 남겼던 가나안과의 문화적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초기 이스라엘의 '내부적 기원이론' 혹은 '공생적 개척모델'을 과감하게 제시합니다(p.188f). (이런 결과를 제시하기까지 치밀하게 전개되는 고고학적/인류학적 정보는 반론의 여지를 없게 합니다. 특별히 근본주의자나 [저자가 특별히 염두해두고있는 핑켈스타인을 포함한] 수정주의자들에게 말이지요. 독특한 점으로는 Marvin Chaney [1983]교수가 일찌기 저자와 같은 주장을 전개했다는 점인데, 데버는 거의 극찬을 하네요[p.133, 184].)
하지만 저자는 '수렴'지점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감히 이스라엘의 가나안기원이론이 크게 문제는 없겠으나, 갓월드와 같은 학자들이 제기한, 아마르나 시대에 활동했던 '샤슈'집단과 '소규모의 (이집트) 탈출집단'에 의한 (원시적) 야훼신앙의 가능성 역시 단편적인 자료로 성서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저자는 역사적 모세("larger-than-life" biblical Moses)를 제시합니다(p.236). 결국, 어찌보면, 대다수는 가나안 농민들이고, 여기에 소규모의 (엘리트? 혹은 모세?) 야훼신앙집단이 결집되어, 초기철기시대에 팔레스타인 중앙 산지에 농업을 기반으로 정착하였음이 최종적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차적으로 (유목민적 이상[p.177]이나 정치/종교적 이데올로기[p.179]가 아니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해야하는 '경제적인' 상황에서, 하나의 원이스라엘 집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데버(와 다른 학자들처럼)가 제기했던 것처럼, 성서본문의 '신화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유대인 전통 자체의 견해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p.232f), '성서=역사=사실=진리'로 만들어버린 모더니즘의 폐혜를 어떻게 극복해가는가에 있겠습니다. 저자가 깊은 유감을 두고 언급한 Joseph Callaway의 학문적 양심고백이 뇌리에 깊이 남습니다(p.43,48). (요즘 Marvin A. Sweeey[2012]를 읽고 있는데, 유대적 입장에서 히브리 성서를 접근하는 차원에서 상당히 '건강한' 방향을 느끼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데버가 마지막에 간략하게 언급했던 요셉지파(+베냐민)의 고고학적, 성서적 배경이(p.221), Daniel E. Fleming(2012)에서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 같아서, 역시 수렴지점은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책에선가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서술했던 대목이 생각납니다. 켄터키 루이빌 출신으로, 근본주의적인 입장이었지만, 땅과 성서를 정직하게 파면서, '성서고고학' 대신에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이란 명칭을 사용하게끔 만든 학문적 대가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유대교'로 옮겼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지요. 이는 그가 성서의 중요한 부분을 어떻게 읽는지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