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하나님께 드리는 식사

진실과열정 2014. 1. 25. 14:40

N.T.Wright는, 역사적 정황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오히려 '역사'의 자기-회귀적 위험성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타당한 방식으로 서사 세계(Narrative world)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방법론이 저는 제일 마음에 듭니다.

구약을 공부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서사 세계를 그려내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역사적 정황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무시한채 '신약의 (2차적) 해석자들이 이렇게 보았으니 구약의 세계가 이렇다'라고 한다거나(예를 들면, 히 11:1로 창 1장을 접근하려 한다거나),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21세기 서구의 눈'으로 끼워맞추는 일은, 물론 가능하지만, 저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그 어렵고 난해한 여러 제사들을 기술하면서, 느닷없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그것(제물)을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이니라"(레 3:11). 쉽게 말하면, "하나님, 식사하십쇼!"입니다. 레위기 21장에 제사장들과 관련된 성결규례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6절). 그러므로 장애인은 하나님께 '식물(food)'을 드리지 못한다고 합니다(17,21절).

'21세기 서구의 눈'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어찌 '소불고기'를 드신단 말인가? 그것도 아침 저녁으로 제사장들이 날마다 '식물(food)'을 드린다고?

고대근동, 바르게 말해서 고대서아시아의 종교는 각 지역의 신들에게 아침과 저녁으로 음식을 공양해서 바치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를 확인하는 시합을 제안하면서, 구체적으로 제단을 쌓고 신이 불로 응답('잘 먹었다~')하는지 아니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제시했을 때,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은 어느 누구 하나도, "어? 그런 방법이 있었어? 난 금시초문인데?"라고 갸우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방법에 익숙했고, 아니 고대서아시아의 모든 종교가 그것을 따랐습니다. 이들은 신을 초청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몸에 피상처를 내기도 했지요(왕상 18:28). 그러나 역시 이것은 바알 선지자들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슥 13:6)라는 구절처럼, 종교사적인 차원에서 유일신론에 열의를 가졌던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종교에서 의도적으로 이방문화적 요소를 제거하려고 노력했지만, 바로 슥 13:6에서와 같이 '살아남은'(?) 부분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 역시 멀지 않은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William G. Dever(2001, 2005)에서 자세하게 제시됩니다. 결국, 외형적으로 볼때, 이스라엘의 종교적 행위는 고대서아시아의 그것과 비교할 때, 전혀 구분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를 대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적합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성서 읽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신앙의 흐름과 그 안에서 신학의 정수를 캐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건, 하나님은 시편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가령 주려도(배고파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편 50:9-12)

수직적으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제물을 드리고, 수평적으론 공의와 인애를 사회속에서 보여주지 않으면서 제물을 드린다고 한다면,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은 하나님이 잡수시지 않겠다는 겁니다(미 6: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가 터질 지경이다. 너희들이 가져오는 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구나!"(사 1:11-15).

하나님은 전혀 다른 예배를 제안하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시 50:14). 상한 심령으로 내게 오라.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를 찾으라(시 51:16-17). 내게 찬양을 드려라. 그곳에 내가 좌정하겠다(시 22:3).

먼 길 걸으신 예수님이 배고플 것이라고 여긴 제자들이 잠시 '음식'을 사러 갔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려 깨어진 심령의 여인을 찾으시고, 그를 구원하십니다(요 4:29,42). 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배고파 하십니다. 황소와 기름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들이 주님께 나아오지 못해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벽한 교제' 안에 그 어떤 피조물도 들어갈 수 없다는 '헬라적 사상'은 구약의 서사 세계(narrative world)에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레위기로 돌아와서, 오늘의 모든 제사장들은, 역시 '하나님께 식물을 드리는 자'이어야 합니다. 매 순간 자신의 상한 마음을 드리는 제사장으로, 그리고 주변의 상한 마음을 인도하여 진정한 '세상의 구주'를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