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히브리서 8장: 완전하신 예수님과 살자

진실과열정 2012. 5. 13. 10:59

본문) 히브리서 8장 (신 29:29)

제목) 완전하신 예수님과 살자.

 

*오늘은 히브리서 7장 후반부와 8장을 통해, “완전하신 예수님과 살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히든카드

 

     우리는 히든카드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은 카드죠.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도록 숨겨 둔, 비장의 수를 우리는 히든카드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사회생활을 하면서, 히든카드의 중요성을 경험해 보았을 겁니다.) 이 히든카드는 스포츠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 같아요. 상대방이 모르는 숨겨둔 비밀병기가 있는 겁니다. 미국의 대표 스포츠로, 메이저리그가 있는데,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길이 남는 히든카드가 있었습니다. 바로 양쪽방향으로 공을 칠 수 있는 타자입니다. (여러분, 한번 해보세요. 어떤 방향이 쉬운지.) 원래 우타자, 좌타자라고 하는데, 이런 선수는 스위치히터라고 합니다. 칠 수 있는 자리를 마음껏 바꿀 수 있는 겁니다. 투수가 상대선수의 스타일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탁월한 감독일수록 이러한 히든카드를 잘 활용합니다. 미국 야구에 코니 맥이란 감독이 있었는데, 무려 50년 동안 감독을 했어요. 그 감독이 활용했던 것이 바로 히든카드, 스위치타자였답니다. 월리 생이란 스위치타자를 내보내서, 어떤 경기에서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경기 양쪽 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답니다. 히든카드가 있으면, 그 게임은 이기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히든카드를 듣게 됩니다. 말 그대로 히든카드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좀 어려운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오신 분도 있고, 시험기간이라서 머리가 꽉 찬 분들도 있지요. 이러저러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기왕 온 거, 그냥 가면 억울하잖아요. 기도하며 집중해서 하나님의 히든카드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그 히든카드를 나도 가지고 승리하며 사는, 한마음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요! 오늘은 히브리서 7장 후반부와 8장의 말씀을 통해서, “완전하신 예수님과 살자”라는 제목의 말씀을 들을 겁니다. 그런데, 제목이 이러하니, 제가 말씀드리려는 히든카드의 정체는 이미 탄로 난 셈이죠(히든카드=예수님; 히든카드가 또 뭐가 있겠어요!). 히든카드(hidden card)라는 말이 리빌드카드(revealed card)가 되고 말았네요. 그래요. 우리는 히든카드의 시대에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리빌드카드/계시된카드의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서 다시 확실히 배우고 믿음 가운데 거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히든카드는 바로 예수님이다; 이 히든카드는 생명을 주며, 하늘의 것이고, 또한 변치않는 새언약이다; 하나님의 히든카드인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완벽한 분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알고 믿고 있는 내용이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케 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히브리서 7장 11절부터 8장 13절이지만, 여러분이 기억하시고 묵상하실 말씀은,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을 오늘의 주제말씀으로 잡고,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개역개정). 좀 오래된 개역성경은 ‘감추어진’을 “오묘한”으로 말하면서 신비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보여주지요. 이번엔 개역성경으로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말씀의 중심에서

 

1. “오묘한 일 : 나타난 일”

 

  ① why? : what?

     7년 전 한국에서 Th.M 과정으로 구약을 전공할 때, 말씀에 대한 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구약각권에서 하나의 주제본문을 잡고 하나의 설교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해보자! 그래서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읽으면서 깊은 묵상과 치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정말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데도 계속해나가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제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바로 신명기였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와 아담의 범죄로 에덴을 상실했던 것에서부터, 출애굽과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까지의 모든 역사를 깨달았던 유일한 사람, 바로 모세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토라를 기록하면서, 그 최고의 절정인 신명기에서 놀라운 신앙의 유레카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강해하는 중에 난데없이 신명기가 나온 것 같지만, 신명기 29장 29절의 이 놀라운 말씀은, 히브리서를 이해하는데 핵심 열쇠가 됩니다: 오! 이스라엘이여! 오! 믿음의 자녀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숨겨진 일과 나타난 일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과 너희에게 속한 것이다. 생명이 있고, 사망이 있으며;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믿음이 있고, 불신앙이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육체의 세계가 있고, 영적 세계가 있다. 우리가 썩어질 육체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영적 세계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자세이다!

 

     이걸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 속한 숨겨진 일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이에요(“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사 45:7). 생명과 죽음, 재림과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을 영어로 표현하면 why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why를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구약의 지혜문헌인 욥입니다. 욥은 시종일관 why?를 묻습니다. 욥은 한사람 욥이 아니라, 인간지성의 총체를 상징해요. 인간지성이 하나님께 아무리 why?를 묻는다고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보여줄 뿐입니다(땅의 기초를 다지시는 하나님, 바닷물의 경계를 정하시는 하나님, 번개 길을 내시고, 얼음을 만드시는 하나님, 젊은 사자에게 식량을 주고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예비하는 하나님; 욥 38장). 그래요 욥이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던 이유는, 그가 던졌던 고난에 명쾌한 이유(why)를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에는 구분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비록 썩어질 몸인 인간의 영역에 살고 있지만, 또 다른 참 된 세계 곧 썩지않을 하나님의 세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 속한 ‘숨겨진 일’은 하나님의 세계인 것입니다.

 

     반대로 나타난 일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토라가 필요한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를 가진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토라/가르침/도(道)/율법이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은 why?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what?을 묻는 겁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이런 물음인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왜 해야하죠 묻지 않고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요. 신앙은 하나님의 영역인 why? 대신에 인간의 영역인 what?을 묻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what, 다시 말해서, 이 나타난 일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상황과 현실에 따라서 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온전하게 보이지만, 그건 마치, (사진) 타조숨바꼭질과 같습니다. 타조는 숨바꼭질을 할 때, 자기 머리만 땅에 묻지요.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완전해 보여도, 불완전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나타난 일은 그 성격상 불완전합니다. 저는 구약을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이러한 점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맹목적인 율법주의(바리새인)는 참된 신앙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은 양을 잡고 그 고기를 먹습니다. 출애굽기 12장 9절을 보면, 삶아서(lv;B') 먹지 말고, 다 불에 구워(vaeê-ylic.)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16장 7절에서는 유월절 양을 “삶아(lv;B')” 먹으라고 합니다(한글성경/영어성경은 원어대로 번역하지 않고, ‘구워’라고 했어요. 아무래도 출애굽기 말씀을 따른 거지요). 이 명령은 후대에 고민의 대상이 됩니다. 구워먹어야 하나, 삶아먹어야 하나? 그래서 역대하 35장 13절을 보면, 요시야 시대에 유월절은 “양을 불에 굽고(vaeÞB' xs;P,²h; WlïV.b;y>w:)), 그 나머지 성물은 삶았다(WlªV.Bi)”라고 나름 해결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인간을 대상으로 나타난 율법은, 그 대상이 불완전하고 변하기 쉽기 때문에, 율법 역시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존재 의의는, 일찍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동시에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었지, 바리새인들처럼 각각의 세부적인 조항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② 생명의 능력 : 육체의 계명 (7장 11-19절)

     이제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이 히브리서에서 어떻게 확장되는지 봅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그리고 더 나아가 율법이 나타난 일에 속했음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레위 지파를 통한 제사제도와 율법이 완전하게 보였지만, 더 이상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는 본질적 약점을 가진 제도와 율법이었음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죠. 그리고 지난주 말씀처럼, 멜기세덱을 말해줌으로써, 하나님의 오묘한 일은 바로 멜기세덱과 유다 지파를 통해 오셨던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다시 말해서 나타난 일이 완전하지 못함을 7장 11-19절은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는 처음과 마지막절에서, 나타난 일이 온전하지 못했다고 못을 박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11절),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19절)

 

     나타난 일은 레위 자손을 통해 대제사장이 제사와 율법을 가르쳤다면, 오묘한 일은 “우리 주께서 유다 지파로 좇아 나셨으며,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되심”이구나!(14,15절). 나타난 일, 곧 제사와 율법이 “(썩을)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된 것”이라면, 오묘한 일, 곧 예수 그리스도는 “무궁한 (썩지 않을)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로구나!(16절).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던 나타난 일, 그 자체도 감사할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영역인 오묘한 일이, 이제는 인간을 위해서 드러나게 되었다면, 이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썩을 육체에 관계된 율법의 종교에서 벗어나, 썩지 않을 생명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적인 신앙은 참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율법은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약점을 의식하게 만듭니다. 율법은 신앙을 두려움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을 자유함으로 바꿔주십니다. 율법적인 신앙으로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율법적인 신앙으로 수입의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내 일이 잘 안풀릴 것 같아. 이건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자유함의 신앙입니다. 자유함의 신앙은 주일 이외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교회에 가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떡을 떼고 교제하는 것이 기쁨인 겁니다. 자유함의 신앙은, 십의 이삼사, 아니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며 필요를 따라서 나눌 수 있는 삶입니다. 예수를 깊이 알수록 신앙은 정말 재미있는 삶이 되요. 성령 안에서 의롭고, 평화로우며, 희락을 누리는 것이 바로 신앙이고, 하나님 나라에요(롬 14:17).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나타난 세계, 곧 율법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묘한 세계,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있음을 받아들이세요. 또한 동시에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지만(그래서 why는 신의 영역이라고 했지요), 그래도 오묘한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타난 세계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는 (그래서 what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했지요) 한마음교회의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③ 하늘 : 땅 (8장 1-5절)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은 8장에서 계속됩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이스라엘이 행했던 장구한 제사가 단지 나타난 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땅의 것이라는 자리매김입니다. 오리지널인 하늘의 것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5a절). 반대로 오묘한 일은, 참된 제사가 있다는 영적 도전입니다. 이것은 썩어질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위엄의 보좌 우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주님께서 만드신 “성소와 참 장막”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이 무엇에 대한 도전입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오묘한 일을 끝까지 감추셨다면, 우리 인간은 평생 모형과 그림자를 진짜인 줄 알고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오묘한 일을 드러내 보이셨던 겁니다. 물질적인 피의 제물을 바침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진짜가 아닌 그림자입니다. 진정한 관계회복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성소에서 참예물이 되신 예수님의 은혜로 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땅의 예배는 흠없는 양을 드리는 것이라면, 하늘의 예배는 이제 비록 흠이 있지만,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진짜와 모형의 차이는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1년 간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습니다. 말이 1년이지 정말 길고 힘들었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아보고 싶었고, 아이들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엄청 뽑았습니다. 기숙사 방을 아내와 아이들 사진으로 도배를 했지요. 아내의 손도 잡고, 아이들 머리도 쓰다듬어 줍니다. 그래도 이게 심리적으로 꽤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사진이 말을 하더라니까요! 공부가 안되서 사진을 보면, “아빠, 빨리 공부하세요!”) 그런데, 여러분, 만약 제가 지금도 아내와 아이들 사진을 쓰다듬어 주고 있다면? 저는 병원에 가야합니다. 심각해요. 이게 바로 진짜와 모형의 차이입니다. 가족이 없을땐, 사진이라는 모형으로 감사했어요. 그러나 이제 가족이 진짜 눈 앞에 있으니, 더 이상 모형에 갇혀 살수가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특별히 8장 1절과 4절에 나오는 ‘하늘’과 ‘땅’이라는 대조적인 단어에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말씀이 계속해서 저에게 묻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늘의 사람이 될 것인가, 땅의 사람이 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한마음교회여, 너는 하늘의 사람이 될 것인가, 땅의 사람이 될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는 히브리서의 교회에게 던져진 것입니다. 우리는 11장을 다룰 때, 이 질문을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율법이 예수님 앞에서 폐기된 것처럼(7장 18절), 땅의 신앙 스타일도 하늘의 신앙 앞에서 폐기되어야만 한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맙시다(골 3:2); 땅에 있는 지체를 죽입시다: 곧 음란을 죽입시다. 부정을 죽입시다. 사욕을 죽이고, 악한 정욕을 죽이며, 탐심을 죽입시다(골 3:5).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을 죽입시다(골 3:8). 이제는 하늘의 신앙을 삽시다: 긍휼의 옷을 입읍시다. 자비와 겸손의 옷을 입읍시다. 온유하고 오래 참읍시다. 누구에게 혐의가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합시다(골 3:12-13). 불안의 시대에 살지만,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합시다. (이 세상에 큰 일은 딱 한가지 뿐이에요: 주님 다시 오는 것; 이제는 큰일났네 라고 말하지 마세요. 평강이 여러분을 주장하게 하세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골 3:16-17).

 

  ④ 첫언약 : 새언약 (8장 6-13절)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은 이제, 첫언약과 새언약으로 그 절정을 맺습니다. 율법과 함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요약하는 말이 바로 언약(covenant)입니다. 그 언약의 부분 역시,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율법이 예수님 앞에서 폐기되는 것처럼, 첫언약 역시 새언약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도다”(8:7). 이건 수사학입니다. “니가 잘했어봐, 내가 왜 나섰겠니.”

 

     첫언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돌판에 받은 관계 증명서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것으로, “내 언약을 지키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지라(출 19:5-6; 34:27-28). 그런데 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요.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얼마가지 않아 언약은 깨어집니다. 약속이 깨진 것이지요. 여기에 하나님은 무죄이고, 오직 이스라엘만 유죄입니다. 그래서 최초문서예언자인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고발하지요: “너희는 언약을 어겼다”(6:7).

 

     이 언약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다른 신을 섬길 것인가? 농경사회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바알이 농경에 용하다는 소문에 혹하고 넘어갔던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알을 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물질을 보는 겁니다. 성경을 바라보지 않고 처세술을 보는 거구요, 기도를 바라보지 않고 경험을 보는 겁니다. 믿음을 보지 못하고, 환경을 보는 겁니다.

 

     언약이 깨지면, 관계는 깨집니다. 너와 나 이제 사랑하기로 언약/약속했어. 그런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자꾸 옆집 사람에게 눈이 가고 있다면, 그 언약은 깨지는 것이고, 그 관계는 깨지는 겁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약속에 기초했던 것이고, 호세아가 그 약속이 깨졌음을 고발했던 겁니다.

 

     호세아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예언자가 있는데,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왕국의 멸망을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제 곧 우리는 멸망한다!”라고 날마다 외쳤던 것이지요. 멸망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지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렘 22:9).

 

     첫언약이 나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게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첫언약은 돌비에 쓰인 것으로, 죽게하는 의문의 기능뿐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돌에 기록된 언약관계는 언제나 사람들을 정죄케 할 뿐이었습니다. “넌 바람났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첫언약을 뛰어넘을 새언약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은 더 이상 돌비석에 새긴 것이 아닙니다. 죽게하고 정죄하는 기능이 더 이상 없습니다. 그 약속은 살리고 의롭게 하는 기능만 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이 예레미야에 대해서는, 정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레미야에 대해서, 우리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실어 놓았습니다.) 중요한 점은, 히브리서는, 오묘한 것과 나타난 것을 대조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중요한 언약신앙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찍이 예레미야부터 약속된 것이며,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의 교회는 더 이상 돌비를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습니까? 이 말은 여러분이 문신을 새기라는 것이 아닙니다(차카게살자). 우리가 새길 수 있는게 아니죠.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도장을 찍으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오늘 우리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더 좋은 언약, 곧 새언약의 중보자” 되셨다고 알려줍니다(8:6; 7:22). 첫언약이 무거운 짐이고 깨질 위험이 있었다면, 새언약은 은혜이고 깨지지 않는 완전한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새언약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바라보면 자꾸 비교하게 되고, 불평과 원망만 나옵니다. 결국 광야같은 세상에서 불뱀을 만나 고통만 당하는 겁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높이 올린 놋뱀보고 이스라엘이 치유된 것처럼, 주님 바라보시면서, 승리하는 한마음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온전케 하시는 대제사장 예수(7:20-28)

 

     이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 그분이야말로 오묘한 일이며, 예수, 그분이야말로 하늘의 참된 것이며, 예수, 그분이야말로 새언약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perfection) 대제사장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짧게 어떻게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시는지 3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예수님은 맹세하셨다(7:20-22)

     예수님이 완전한 제사장이 되시는 이유는 그분의 맹세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레위 제사장들은 세습직입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맹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고 히브리서는 20절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맹세가 무엇인지 히브리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 4장이 떠오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8-19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사야말씀에서 ‘여호와의 종’에 대한 부분을 발췌하셨습니다. 처음을 들으면, 그 결과를 말 안해도 아는 것처럼, 이 여호와의 종이 그러한 내용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해서 주의 종이 되었으니, 이제 그 종이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출사표에서 분명한 맹세를 하신 겁니다. 내가 너희의 허물을 위해서 찔리겠다; 나는 너희의 죄악을 위해서 상하겠다; 나는 너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을 것이며, 너희의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에요. 나를 살리려고 맹세하시며 십자가 지신 거에요. 그래서 그분의 맹세가 있기에, 예수님의 대제사장되심은 우리를 완전케 하는 겁니다.

 

  ② 예수님은 변치않습니다(7:23-25)

     예수님이 완전한 제사장이 되시는 이유는 그분의 영원성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레위인들은 아무리 훌륭한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 직분을 담당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7:25). 할렐루야!

 

     제가 좋아하는 찬양곡 중에, 주님은 산 같아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은 산같아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셔, 눈을 들면 보이리라 날 위한 그 사랑.” 언제나 거기 계시는 주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치않고, 항상 그 자리에 계십니다. 바로 나를 안아주시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실수할 때, 여러분이 넘어질 때, 눈을 들어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께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힘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 안개가 날 가리워서 내 믿음이 흔들릴 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두 팔을 벌리고 여러분을 안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변치 않는 분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의 대제사장되심은 우리를 완전케 하는 겁니다.

 

  ③ 예수라는 분이 완전하다(7:26-28)

     예수님이 완전한 제사장이 되시는 이유는, 마지막으로 그분 자체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레위인들은 아무리 대제사장이라도 자기 자신을 정결케 하고 업무를 봐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대형교회 담임목사라도 엄청난 회개기도를 하고 설교단에 올라가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정결하지 못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면 즉사하기 때문에, 그 허리에 줄을 매달고 들어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정결케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침례장면에서 정결하신 예수님의 본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자, 침례요한이 매우 당황하며 말립니다. “예수님, 제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 마땅한데, 주님께서 어찌 저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시나이까!” 침례는 일종의 정결의식입니다. 죄인인 사람이 죽고(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지요), 다시 물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신앙의 외적 선언인 겁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침례요한이 극구 말렸던 겁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대답이 기가막힙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4). 예수님의 구원은 하나님으로서의 구원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사람으로서의 구원도 되어야 했습니다. 죄가 없는 하나님이 진짜 인간의 상태로 되시겠다는 표현이 바로 침례였고, 진짜 인간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던 겁니다. 자신의 완벽한 의로움 자체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포기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완전함!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하신 분입니다. 침례가 필요치 않지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침례를 받으실 정도로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의 대제사장되심은 우리를 완전케 하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쉽게 전하려했지만, 그게 쉽지 않네요. 오직 성령께서 필요한 부분을 기억하게 하시고, 살아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잊지 말아야할 사실 한가지를 알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자체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8장 1절입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세상에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이 있는데, 우리는 오묘한 일을 깨닫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오묘한 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perfection) 대제사장되십니다. 이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요, 히브리서의 히든카드는, 1년에 10억을 버는 성공비결이 아닙니다. 깨어진 인간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구요. 건강한 육체 만들기도 아니며, 시간활용 200% 노하우도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히든카드는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 바로 예수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에 완전한 기준이자, 해답이라는 메시지가 오늘 히브리서의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고의 히든카드 예수님을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묘한 일이신 예수를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우리를 충분히 온전케하시는 예수와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의 문제로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을 낮추면 안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온전케 못할 것을, 땅의 것을, 그림자를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확실한 구원자 예수님을 날마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심을 확신하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더 나은 가치가 있음을 믿으며 가치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