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성서의 메시지]

[10] 열왕기서: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

진실과열정 2011. 4. 5. 11:24

 

- 열왕기서 -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왕하 19:15b)

 

 

 

1. 하나님의 역사 다루기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열왕기하 17장 23절)

 

 

1) 누가 역사를 주관하는가?

 

역사를 읽다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됩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나 강력한 군대에 의해서 지구의 역사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돈과 자원이 더 많은 사람이나 국가가 역사를 좌우하고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례를 들어보면, 유럽의 운명을 좌우했던 나폴레옹은 발 빠른 대포부대 덕분에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기민했던 대포부대가 밤낮없이 쏟아져 내렸던 폭우 때문에 발목이 잡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그만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내리는 비속에서 보잘 것 없더란 말입니다. 이는 또한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에서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계 최고의 안전도를 자부하던 일본이 방사선의 위협에 끝 모를 피난행렬로 분주한 것을 보면서, 정말이지 자연 앞에서 우리 인간의 나약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신명기적 역사,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결말에 마주하고 있습니다(서론을 참조하세요). 창세기에서 시작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작은 결론을 향해서 그 결승점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예언적 역사에서,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신적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은 자연의 거대함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 다루기를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성서가 그러한 깨달음의 역사입니다. 교과서로서의 역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성서를 「조선왕조실록」처럼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은, 그러므로 성서의 신적 역사를 오해하는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25대 472년간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순서대로 기록해 놓은 우리나라의 귀한 역사자료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실록과 다른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다른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록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열왕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왕상 14:19,29):

 

여로보암의 남은 행적은 ...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르호보암의 ...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열왕기서는 실록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성서는 그러한 책이 아니라고 여러 곳에서 부단히 가르치고 있습니다(왕상 15:7,23,31; 16:5,14 등). 그러므로 우리는 열왕기서에 대하여 올바른 접근을 해야겠습니다. 바로 숨 막힐 것 같은 왕들의 일대기에서, “과연 누가 진정한 왕인가?”에 대한 신적인 메시지를 똑바로 들어야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열왕기서의 신학적 메시지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일단 열왕기서의 밑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우리말성서는 열왕기상(22장)과 열왕기하(25장)로 나뉘어 있지만, 이것은 고대의 매체인 두루마리에 기록될 수 있는 물리적 한계로 인해 분리된 것일 뿐, 본래 열왕기서는 한 권의 책입니다.

 

    그렇지만 열왕기서는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남유다시대. 보다 자세히 말씀을 드리면, 왕상 1-11장까지 솔로몬에 의한 통일왕국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이란 이름 자체가 ‘샬롬/평화’이기에, 성전을 건축하고 위대한 ‘태평성대’의 왕국을 시작하였습니다(왕상 8:56). 그러나 11장에서 솔로몬이 타락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두 쪽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이를 분열왕국시대라고 말하는데, 왕상 12장부터 왕하 1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어찌보면 열왕기서는 이 분열왕국시대를 주요한 표적으로 놓으면서, 신앙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와 상당히 유사했던 분열왕국의 역사는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합니다(17장). 이후에 남유다시대가 왕하 18장부터 25장까지 이어지는데, 개혁적인 왕들이 등장하여 여러 가지 선한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남유다도 멸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자신들의 뿌리였던 아브라함의 본래 고향이었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왕기서를 간단히 요약한 내용입니다. 아까도 말씀해 드렸듯이, 성서는 실록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 시간 이스라엘 역사를 뒤돌아본 신적인 메시지에 집중해서 그 귀한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바로 ‘멸망으로 돌아 본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2) 멸망으로 돌아 본 이스라엘의 역사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라는 열왕기서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역사의 주관자이자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옳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러한 각오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 역시 정당한 각오와 신념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 신앙의 바탕을 바로 세우는, 큰 교훈과 도전을 받도록 합시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는 한 가지 키워드는 ‘멸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기록자가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써내려가면서 가장 무게를 두었던 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왜 우리가 멸망했는가?’를 곰곰이 되돌아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이제는 멈춰서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언적 역사가는 신앙의 기준으로 왕들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열왕기서의 신앙적 특징은, 이스라엘의 모든 열왕들이 평가를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평가받는 것을 꺼려합니다. 현대 사회의 경우 평가는 곧 자신의 미래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평가가 없으면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도저히 구분해낼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적 평가를 내렸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실질적인 교훈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왕들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받았을까요? 경제 성장이 기준일까요? 국력 증진이 기준일까요? 아니면 복지 사회가 기준일까요? 물론 이러한 측면은 상당히 중요한 것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서가 분명하게 내놓고 있는 신적 판단 기준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였습니다(왕하 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는가? 아니면 불순종했는가? 이것이 신적 평가의 최우선적 기준이었습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열왕들의 성적표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의 성적은 거의 전부 낙제였습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삼은 왕하 17장은 분열왕국시대의 신학적 평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매우 귀한 신학적 사상을 요약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가서에서, 말씀은 이스라엘 열왕들의 성적을 다음과 같이 공개합니다(14절):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왕국은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참고로, 이러한 불순종의 평가가 사사기 2장에서 유사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생 평가 기준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돈과 명예 혹은 웰빙을 기준으로 달려왔던 우리 인생의 경주를 잠시 멈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웰빙이 모두 말씀이 허락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었는지’를 최우선적으로 평가해야겠다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주일에 선포된 말씀대로 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이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자 드리는 고발이 아닙니다. 다시금 우리의 기준을 바로 세우려는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회개합시다.

 

3) 왕들의 역사 vs 예언자의 역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낯이 익은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입니다. 13절에서도 ‘선지자(나비)’와 ‘선견자(호제)’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일단 지금 시간에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들 ‘선지자’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점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서는 ‘선지자’라고 번역했지만, 우리는 보다 정확한 의미인 ‘예언자’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왕기서는 왕들의 활동으로 가득한 책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활동이 곳곳에 들어있는 전혀 새로운 역사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될 것이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다루기를 신앙의 눈으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열왕기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왕들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통상적인 역사와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비록 숨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인 예언자들(왕하 17:13b; “나의 종 예언자들, ~yaiybiN>h; yd;b'[]”)이 역사의 진정한 대리인들로 활동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시간 그 놀라운 발견의 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바로 열왕기서의 가장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부분을 우리는 살펴볼 것입니다. 그 유명한 아합이라는 왕과 엘리야-엘리사 예언자가 보여주는 역사 쟁탈권의 현장입니다.

 

    앞에서, 왕상 12장부터 왕하 17장까지가 분열왕국시대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 중에서 아합과 엘리야/엘리사가 관련된 본문이 무려 왕상 17장에서 왕하 9장에 이릅니다(절반이 넘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왕상 17:1)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왕하 9:36)

 

누가 보더라도, 열왕기서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열왕기서는 실록처럼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모든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서는 특징이 되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따로 부각시켜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고, 신앙인으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열왕기서가 선택한 핵심 사건인 아합 왕과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서,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많고 많은 이스라엘 열왕들 가운데, 열왕기서의 기록자가 하필이면 아합이라는 왕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합이라는 왕은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가장 번성했던 시대를 이끌었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합에 대한 성서 자체의 기록과 성서 밖의 자료들을 보면, 그의 세력이 어마어마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합은 아버지 오므리에서 왕조가 시작됩니다. 당시에 군대 장관이었던 오므리가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뒤엎고, 사마리아라는 곳에 수도를 세워 강력하게 번성했던 시대를 열었습니다(왕상 16:16,24). 아시는 것처럼, 아합은 국제결혼을 통해 세력을 더욱 키운 왕이었습니다. 바로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것이지요(16:31). 사실 국제결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등한 능력이 되니 상대가 허용해 준 것이지요. 아무튼 빨리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격이라고 할까요? 아합의 세력은 국제적으로도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일례로 아시리아라는 강력한 군대에 맞서 가나안의 12 연합군들이 힘을 모아 물리쳤던 전쟁이 있었는데(카르카르 전투), 그 전쟁에 참여했던 연합군들의 전력을 기록해 놓은 글을 보면, 아합이 병거가 2,000에 군사가 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12 연합군들 중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군사력이었습니다. (철병거만 따져보면 최고수준입니다. 양보다 질적으로 따진다면, 아합의 군대가 당대 최고라는 말씀입니다.) 고고학 연구자들은 사마리아 왕실에서 발굴했던 상아를 깎아 만든 고급 가구들을 보고, 또한 주변의 거대한 도시들을 보고, 아합 시대의 성장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를 정확하게 따져본다면 이 시대야말로 제일 잘나갔던 ‘정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때 만큼 하나님과 멀었던 적도 없었고, 그렇기에 이 때 만큼 하나님의 공의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은 파괴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상 18:13). 우상인 바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뒤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해야할 왕실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로 가득했습니다(18:19). 하나님의 말씀은 악용되었고 아전인수 격으로 곡해되었습니다(16:34).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보다 우상 앞에서 해결책을 구했습니다(왕하 1:2). 그러므로 사회는 점점 피폐해지고 불법이 자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있지 않는 집단의 결과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뿌리 깊은 우상숭배는 삶을 왜곡된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거역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는 자들이 돈과 힘으로 원하는 것들을 빼앗았습니다(왕상 21:15,19). 사회의 약자들은 갈수록 가난에 허덕여서 고리대금업자에게 자식들을 넘겨주어야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왕하 4:1). 평화와 희망은 사라지고 빈곤함과 절망이 삶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왕상 17:12).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합은 국가의 실력을 최고조로 높였던 왕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서의 중심 부분들을 읽어보면, 아합은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게 됩니다. 아합은 실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열왕기서 말씀은 예언자가 모든 일을 담당했다고 가르칩니다. 국가에 닥친 기근 속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들의 먹거리를 책임진 사람은 아합이 아니라, 엘리야/엘리사였습니다. 가루 한 움큼 밖에 없어서 그 것 먹고 죽음을 기다릴 과부의 식구를 먹여 살린 것이, 바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가난에 찌들어서 자녀들을 팔수 밖에 없던 가정을 회복시킨 것 역시 아합이 아니라 엘리사였습니다(왕하 4:7). 이들 예언자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했던 겁니다(왕하 4:41). 놀랍게도 엘리야와 엘리사에게서 예수님의 전형이 나타났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양식으로 수많은 무리가 먹고 남았으며(왕하 4:43-44), 병든 자가 치유함을 얻었습니다(왕하 5:14). 아합도 어찌할 수 없었던 나라의 전쟁도 승리로 이끌었고(왕하 6:18),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아났습니다(왕하 4:32-34). 그렇습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활동을 엘리야와 엘리사가 감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합이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역사의 참된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왕기서의 말씀을 통해,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듣게 됩니다. 아합의 시대가 죽음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놀랍게도 열왕기서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라고 12번이나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아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왕하 10:10). 왕들이 문제유발자(trouble maker)라면 예언자는 문제해결자(trouble solver)였습니다. 앞서 나열했던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주인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며 배웠던 참된 신앙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오감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법, 과학법칙에 지배당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법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오감과 과학법칙을 신뢰의 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성서는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감과 과학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기도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에 대한 체험적 삶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임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왕상 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hz< hT'[;)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새로운 법칙을 가져야만 합니다. 바로 아합의 역사가 아닌 예언자적 역사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아합이 이룩했던 세상적 기준에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가 평가되지 않고,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로써 이스라엘 역사가 평가되었던 것처럼, 나와 우리의 작은 역사가 우리들이 이룩했던 세속적 성취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과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전혀 새로운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활동하시는 역사를 살아가십시오!

 

4) 오늘, 말씀대로 살자.

 

말씀을 정리하면서 본문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인 왕하 17:23의 말씀에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로써 하나님이 활동하시고 있음을 명심하게 됩니다. 국가의 운명, 사회의 운명, 조직과 가정, 그리고 개인의 운명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이 말씀을 기록했던 남유다 왕국의 신앙인들의 ‘오늘’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을 깨닫고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새로운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우리들도 역시, 오늘 말씀에 순종하며 세속적인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을 가슴 설레며 기도하고 기대하는 예언자적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삶을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내가 왕이 되려 했던 것을 회개합시다(왕상 1:5). 또한 세상적 법칙이 나를 다스리게 했던 습관에서 벗어납시다. 나의 눈을 열어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전반에서 개입하시도록 요청합시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시다(왕하 19:15-19). 내가 예언자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은 진정한 왕의 편에 선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2. 예언자적 삶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열왕기하 5장 8절)

 

 

1) 예언자의 나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루시는 주요한 방식은 바로 예언자를 통한 개입이었습니다. 열왕기서를 통해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는 왕이 아닌 예언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예언자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언자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열왕기서를 통해서 두 가지로 예언자의 나라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말씀에서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도합 14번에 걸쳐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이 바로 예언의 성취였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이 모든 사건을 일관되게 “여호와의 말씀대로(hw"ßhy> rb:ïd>Ki)”라고 말합니다. 우리 몇 가지만 살펴봅시다. ①우리들의 환경이 극적으로 변화되었던 이유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 17:16; 왕하 4:44; 7:16; 14:25). ②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왕상 13:26; 14:18; 22:38; 왕하 1:17; 9:26; 10:17). ③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는 것도 역시, 바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왕상 15:29; 16:12; 왕하 24:2). ④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실히 보여주는 마지막 예언은 요시야 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왕하 23:16). 요시야 왕은 열왕기하 23장에 등장해서 남유다 왕국에 사상 최대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선왕 중에 선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러한 위대한 왕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키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라는 거지요. 놀랍게도 요시야 왕이 등장할 것이라고 약 300년 전에 예언되었습니다(왕상 13: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우리가 살아가는 발걸음이 단순히 인간의 짧은 계획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계획안에 있음을 찬양합시다. 열왕기서는 놀랍게도 14번을 통해서, 완전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예언적 역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참조 암 3:7).

 

    이러한 발견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그러므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를 깨닫고 날마다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또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결국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매 주일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어질 때, 그 말씀을 받고 마음에 심으면 언젠가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때론 인간적인 마음에 그 기간이 너무나 길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계획표 안에 그분의 뜻을 아름답게 성취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말씀에서 왕이 되는 유일한 방법으로, 예언자를 통한 기름부음이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 백성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언자를 통한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그리고 주변에서 아무리 추대한다 해도,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언자의 기름부음 뿐이었습니다(왕상 1:39):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xv;m.YI)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그렇습니다. 특별히 분열왕국이 되고 난 이후, 남유다 왕국은 다윗의 후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말씀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을 떠나 패역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한 왕조가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날 때마다, 그 뒤에는 바로 예언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축을 흔드는 대격변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어보일지라도, 그 중심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예언자)이 역사의 주관자로 활동했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서가 포인트로 잡고 있는 사건이 바로 아합 왕국의 멸망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합 왕국(혹은 오므리 왕조라고 합니다)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국제 정세의 변화는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찍이 호렙산 정상에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왕상 19:15-1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깨닫고 보면, 우리는 예언이 성취되는 나라,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더 큰 믿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법입니다.

 

2) 예언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예언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예언’에 대한 거리낌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을 번역하는데 ‘선지자’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둘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나비(aybin")’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이나 행동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미리 알다’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예언자’라는 말은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행동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에, 많은 학자들은 후자를 선택하고 있습니다(foreteller가 아니라, forth teller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열왕기서는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예언자들에 대해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말씀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사람(~yhil{a/ vyai)’이라고 가르쳐줍니다(왕상 12:1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신합니다. 그는 세상에 속해있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과 동일하게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왕하 9:7). 이 시간 예언자적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전을 드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역사하신다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므로 철저하게 ‘종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를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는 부정적인 경우입니다. 왕상 13장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했지만, 끝까지 그 말씀대로 자신의 삶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말씀은 실패한 하나님의 사람을 두고,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라고 불렀습니다(26절). 우리는 끝까지 말씀을 지키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긍정적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까마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먹여 살리고 그를 지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강력하게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의지입니다(왕하 9: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께서도 역시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두 번째로 말씀은 예언자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언자는 왕들이 망쳐놓은 이스라엘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빛이었고, 부패하고 썩은 사회의식을 새롭게 의식 개혁한 소금이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곳이 있다면 예언자들은 언제나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고(왕하 2:19-22), 사회 정의가 회복되도록 사회적 약자들의 편이 되어주었습니다(왕하 8:1-6).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갈 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언자의 근본적인 기능이, 잃어버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길을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단독으로 기도 싸움을 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잃은 백성들이 깨닫고 ‘돌이키기(왕상 18:37; tyNIr;xoa] ~B'li-ta, t'Bosih] hT'a;)’ 위함이었습니다(39절):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우리가 예언자적 삶을 살아야 하는 목적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예언자적 삶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주를 찾게 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지막 세 번째로 말씀은 예언자가 세상에서는 ‘미친 놈’이란 평가를 받는다고 일깨워줍니다. 엘리야를 사용하셔서 아합 왕조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속에서, 세상의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하찮게 보았습니다.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예언자를 “미친 자”라고 불렀음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왕하 9:11): “그 미친 자([G"vum.h;)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냐?” 이 말은 수동태입니다. 세상이 볼 때도 스스로 이렇게 미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뭔가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시선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사는 것 같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더욱 기도하게 합니다. 자칫하면 내가 드러나고, 정말 미친 사람으로 그치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존귀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기도를 심는다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 결국 모든 사람들로 주께 돌아가게 해줄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런 간증을 말합니다. 자신은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이 병들어 죽음을 당하고,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왕상 17:21)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고서야, 과부의 마음은 진정 여호와께 돌아왔던 것입니다(24절).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줍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우리를 ‘미친 자’로 만들 뿐입니다.

 

3) 오늘의 예언자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예언자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서를 읽어보면 예언자들에게도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짓 예언자들이 출몰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알과 아세라 신의 예언자들이 850명이나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왕상 13:18). 왕의 비위에 맞추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입 발린 말로 상황을 타개하려던 ‘정치적 하나님의 사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왕상 22:5-6). 혹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질투하고 부러워하기만 했던 ‘무늬만 하나님의 사람’도 있었습니다(왕하 2:3). 문제가 발생하면 기도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절절매는 ‘무능력한 하나님의 사람’도 있었습니다(왕하 4:38-39).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빛을 비춰줍니다. 오늘의 예언자는 과연 누구인가? 라고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지 맙시다. ‘자칭 하나님의 사람’에서 ‘자칭’을 떼버립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던 인본주의를 이겨냅시다. ‘정치적 하나님의 사람’에서 ‘정치적’을 떼어 버립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확확 보이는 성도들을 폄하하고 시샘하는 습관에서 떠납시다. ‘무늬만 하나님의 사람’에서 ‘무늬만’을 버립시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기만 하면 발만 동동 구르며 신앙인의 참된 능력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과거를 회개합시다. ‘무능력한 하나님의 사람’에서 ‘무능력한’을 떼어 버립시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다!

 

    오늘 본문은 국가적 문제 앞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외침이었습니다. 문둥병이 걸린 나아만 장군이 도움을 찾고자 이스라엘에 원조를 요청했을 때, 그 누구도 해결해낼 수 없었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끼어들면 손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을 뿐이었습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왕하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오늘날 깊은샘수원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언자로 활동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운 기도로, 긍휼을 품고 사람들을 섬김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십시다! 여러분을 통해 천하만국이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세상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왕하 19:15b). (이제 히브리어 성서의 순서는 예언서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12소예언서 순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언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증거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 뜨거운 예언자적 심장을 발견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