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제2이사야서 강해-1]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사 40:1-2)

진실과열정 2010. 7. 15. 16:32

제2이사야서 강해(1)

 

본문) 이사야 40: 1-2

제목)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1. 말씀 앞에서

 

    우리 깊은샘 수원교회는 지난 30여년간 영화동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활동을 해 왔습니다. 이제 입북동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조금 더 체계적이며, 조금 더 역동적으로 복음활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크기나 방법에 있어서 기존에 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전략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시프트’ 즉 생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거지요.

    가장 쉽게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성도 여러분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고,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들을 써 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주 중요한 고민들이 발견되고, 또한 그러므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도제목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우리 교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① 거울/시계; ② 물질; ③ 일꾼/열정; ④ 성령의 능력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쌍기억(ㄲ)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① 집, 자동차: 결국, 돈이라고 하겠네요; ②부모, 배우자, 자녀, 사회관계: 결국, 사람입니다; ③건강, 학벌, 성공, 권력: 결국,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조금 재미있게 생각해 봅시다. 이런 것들을 쌍기억(ㄲ)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꿈, 끼, 꾀, 깡 ……. 생각해보니 이렇게 해도 참 많음을 발결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끈’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현실의 한계에 부딪칠 때, 많은 사람들은 이 ‘끈’에 대한 미련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끈이 없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지요. 얼마전에 끝이난 선거만 생각해봐도, 어떤 끈을 잡고 있는 가에 따라서 당락이 결정되는 이치이지요. 그러고 보면, 무엇이 진짜 중요한 끈인지 몰라서, 다양한 끈들을 잡고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집, 자동차, 부모, 배우자, 자녀, 건강, 학벌, 성공, 권력……. 마치 놓치면 깊은 바다에 빠져 버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죽기살기로 붙잡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끈들을 ‘클리프행어의 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클리프행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줄만 의지해서 절벽을 오르는 산악인들을 ‘클리프행어’라고 부릅니다. 이 영화의 초반에, 어떤 클리프행어가 줄을 타고 높은 산을 건너가다가, 그만 그 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클리프행어는 천길 낭떠러지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는 신뢰할 수 없는 그런 끈, 바로 ‘클리프행어의 끈’입니다. 그리고 이 ‘클리프행어의 끈’에 세상의 사람들은 메달려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입니다: 전문산악인들이 들을 때에는, 제가 너무 극단적인 예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도는 산악인의 끈이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안전한 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은 ‘불안정하고 완전한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헛된 것을 붙잡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이렇게 강력하게 외쳤던 선언이 진실이며,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진리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 26절에, “저희가(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6).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무엇이 진실한 끈인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다시 말해서 집을, 자동차를, 부모를, 배우자를, 자녀를, 건강을, 학벌을, 성공을, 권력을! 끈으로 알고, 조물주 곧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의 사명이 바로 세상에 진실한 끈을 소개하는 일일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붙들어야 할 진실한 참된 끈이 피조물이 아닌, 참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 끈을 붙잡고 살아갈 때,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절대적 사명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끈’을 잡고 사는 최고의 행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끈’을 잡고 멋지게 살아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끈’을 붙잡을 때, 물론 어려움이 닥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으로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끈’을 붙잡음으로,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빛의 능력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빛의 자녀로 어둠을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끈’을 잡고 사는, 신앙의 참된 맛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끈’을 붙잡고 살아가는 신앙의 멋진 모습에 큰 도전을 받도록 합시다!

 

 

2. 말씀 안에서

 

    오늘의 말씀의 실제적인 방향은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이 전도세미나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전도의 기술, 전도자의 자세, 아파트 전도법, 어려운 불신자를 만났을 때의 대처방안, 등등의 내용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말씀은 평범한 신앙인에게, 아니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상 별 능력이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진짜 평범한 신앙인에게, 꿈을 꾸게 하는 말씀입니다. 전도의 꿈을 꾸게 하는 그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늘의 불을 소망할 수 있도록, 평범한 신앙인의 상처받은 연약한 심령을 위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이 위로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능력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심령에 역사하여, 진정한 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진정한 끈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진리, 곧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위대한 전도자로 일어설 수 있게되기를 소망합시다! 할렐루야!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월드컵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응원문화가 정말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삼삼오오 TV앞에 앉아서 소박하게 응원했었는데, 이제는 광장으로, 운동장으로 모여서 수천명, 수만명이 함께 응원하는 집회 형식의 응원문화가 활발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집에서 응원하는 것 보다 더 재미있고 더 박력이 넘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만명이 모이는 서울 광장에서 응원을 한다해도, 정작 남아공의 월드컵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이렇게, 야구나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생생하게 느끼려면, TV앞에 앉아있지말고, 경기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하게 느끼려면, 성경이 말하는 장소로 가야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생생한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요?

 

    우리가 얼핏 알 수 있는 것은, 앞장인 이사야 39장에 등장하는 ‘히스기야 왕’입니다. 이 히스기야 왕이 BC 700년대의 사람이니까, 이사야 40장은 그 가까운 이후쯤 될 것이겠지요(몇년 후 쯤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39장과 40장은 바로 마침표 하나로 구분되어 있지만, 사실 200년이나 떨어진 아주 먼 시간의 공백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힌트를 39장 6절에서 얻을 수 있지요: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습니다. BC 1000년경에 다윗이 세웠던 하나님의 나라가 손자시대에 북쪽 지파들의 반란으로 남북으로 분열되더니, 반란의 후손인 북이스라엘은 300년도 못버티고 망하고, 다윗의 혈통을 이은 남유다역시 BC 586년에 바벨론에 망하고 맙니다. 결국, 다윗의 후손들은 586년 이후부터 수천리길 떨어진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 39장과 40장은 이렇게 150년이라는 역사적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150년의 기간은 어떠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바로 망해가는, 무너져 내리는 집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결국, 폭삭 주저앉아버린 비참한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폭삭 무너져 내린 집을 바라보고 있는 희망잃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1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어다”

 

 

 

    혹시 볼펜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1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두 개의 단어에 동그라미를 쳐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말로는 이 ‘위로’가 마지막에 나오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이 ‘위로’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나옵니다. 150년간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먼저 입을 연 것입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언제나 사랑이 나오며, 용서가 선포되며, 회복이 약속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먼 이국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무익한 백성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이 ‘위로’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위로받은 적이 있나요? 언젠가 라디오에서 위로와 관련해서 설문조사 결과를 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아팠는데 위로를 받았는가를 물어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툴툴 털고 일어나”; “조심했어야지”; “누구는 그 거가지고 몇 달 고생했다더라”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은 ‘위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위로를 세상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위로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 참된 위로를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위로란, 절망의 종결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젠 당신이 겪었던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이제는 당신을 힘들게 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어두움의 터널이 이제 끝이나고 새로운 빛이 시작되었다고 알리는 것이 바로 위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도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다!(그러니 이젠 더 이상 받을 것도 없고, 정말 끝이다!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 깊은샘수원교회는 정말로 그러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산 증인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간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정다이 말하라!” “네 죄가 사해졌다고 외치라!” “어려움이 모두 끝이 났다고 선포하라!”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우리는 여기에서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푹신한 베게와 같은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나를 포근히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내 모든 악한 행실도 품으십니다. 내 모든 악한 생각도 품으십니다. 그분이 품지 못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온동네 사람들에게 개처럼 끌려다니다가 예수님의 발앞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건만, 그때만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사방은 공포와 위협으로 가득차있었지요. 그 여인은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따뜻한 위로가 그 여인을 감싸안기 시작합니다: “여인아, 내가 너를 위로한다. 내가 너를 위로한다. 네 죄가 사해졌다. 내가 사한다.” 요한복음 8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죄인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에덴동산 이후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 그런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위로를 갈망하는 분이 계십니까? 깊은 어두움의 터널에서 슬퍼하고 있습니까? 죄악중에 절망하며 여호와의 무거운 손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이 위로의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슴에 위로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억눌렀던 모든 어려움이 끝났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의 현실도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3. 말씀 속에서

 

    이제 좀 더 본문의 말씀을 보다 깊이 실천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본문에서(1절,2절) 너희에 밑줄을 쳐봅시다(3번 나옵니다): 여기에서 ‘너희’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예언자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사야요, 그는 침례요한이요,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그는 바울이고, 그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해야하는 책임과 의무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너희’에 여러분의 이름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소명을 위해서 기뻐하십시오. ‘위로자’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날마다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 백성/예루살렘’은 누구일까요? 이들은 한 때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패망한 사람들이고, 포로된 사람들입니다. 소망과 생기를 상실한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게 섬기지 못하는, 속사람이 변화되지 못한 허물뿐인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출발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어느 한 사람만의 뛰어난 능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전도는 온 교회가 전심을 다해서 기도할 때 생기는 변화의 열매입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위로를 받을 때,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 회복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복음화와 함께, 먼저 우리 믿음의 공동체의 우선적인 변화를 위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변의 사람들이 전도되어 온다고 할지라도, 차가운 성도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성령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교회가 된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전도되어서 올 때, 더욱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실천사항: 아멘하기! 통성 기도할 때, 혼을 담아 기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