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마거릿 맥밀런, [역사사용설명서]

진실과열정 2010. 5. 18. 11:17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악용하는가?

 

 

저자 마거릿 맥밀런은 이러한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와 그들의 관계를 정지하게 직시하지 못하는, '악당'들의 간계와 농락이라고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어찌보면 유쾌한 역사 뒷담화를 거치고 보면, 내가 바로 유치한 악당짓을 계속하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이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혹은 지능적으로 이 말이 회자되고 있음은, 인간은 역시 역사를 악용하는 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저자는, 역사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과 악용하는 사례를, 급변하는 세계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간략하게 예를 들어놓으면서, 명쾌하게 그리고 책임 있게 제시하고 있다. 격동의 시기에 이슈화되었던 사건들에 대해서, 그 이면에 들어있는 거대 정치꾼들의 속셈에 넘어간 대중들을 단순히 비난하기 보다는, 견실한 비판적 시선을 유지해야만하는 '건강한 소시민'으로 활동할 것을 요청한다.

 

 

몇 가지만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이 있다:

- 역사의 목적: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

해 쓰여야 합니다."(187)

 

- 나쁜 역사서의 정의: 복잡한 이야기 가운데 일부분만 들려주는 것(등장인물들이 말한 적도 없는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는 태도), 주인공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때, 충분한 근거도 없는 현상을 대충 일반화하고, 부합하지 않는 거북한 사실들을 무시하는 것(56-7).

 

- 그러므로 가장 조심해야할 것: 우리는 역사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거창한 주장이나, 진실을 단정적으로 내뱉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249). 민족주의 집단들이 불만이나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역사를 사용하는 것, "역사가 우리를 선도하니,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정말 위험하다. 역사가 명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253). (참고로, 역자가 마지막에 인용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발언은 확실한 실례이다[267]: "흠 없는 지도자는 없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정운찬 총리 후보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저자에 의하면, 역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대상이다. 절대로 역사 자체가 주체로 나서지 않으며,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전문 역사가이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아마추어 역사가이든, 역사가에 의해서 사용될 뿐이다. 아마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리라. '새로운' 역사라는 말이, 인간 사회의 규정할 수 없으며,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라면, 나는 훌륭한 역사라고 생각하는 법을 이 책을 통해서 배웠다.

 

성서를 연구하면서, 그 대상의 적합한 규정을 놓고 지금도 계속 고민 중이다. 혹자는 '역사'라고 보거나(최근에 W.G.Dever [2001]을 번역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사소한] 약점이 보인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그들의 주장 만이 역사가 될 수는 없다"[69이하]). 혹자는 '문학'이라고 보거나(나는 솔직히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드라마광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들이 어떠한 문학을 읽고나 있는지도 모르겠고), 혹자는 '신의 말씀'이라고 보고 있다(당연한 거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이어령비어령하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현실!). 어느 학자가 '만화경(kaleidoscope)'이라고 조심스럽게 소개한 것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다 이 말을 붙여놓고 싶다: '자칭 고귀한 그 남자들의' 만화경 말이다. 아무튼, 저자가 이 책의 주된 사례를, 누구나 쉽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 정치로 잡았다는 것이, 확실히 역사를 다루는 프로임에 틀림없다. 종교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161-2는 예외). 역사가는 자신이 지뢰밭에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항상 주변을 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프랑스의 역사태도를 높게 평가한다. 지독한 낭만 때문일까?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모멸감이 아닌 반성을 배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이러한 역사가가 되자고 재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은 과거를 고찰하면서 프랑스 법체계 가운데 심리 판사처럼 일하는 법을 익힌다. 역사가는 질문한다. 무슨 일이 왜 발생했을까? 우리는 역사적 증거를 다룰 때, 특히 그 증거가 기존 가설과 모순될 때 진중해야 한다. 증인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이런 증언과 저런 증언을 어떻게 비교 검토할까? 과연 우리는 올바른 최적의 질문을 제기해왔을까? 역사가들은 더 나아가 과거의 특정한 사건, 사상, 사고방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얼마나 중요할까? 답은 우리가 현재 묻는 바와 중요시하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역사는 늘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역사는 과정이다."(245-6)

 

 

거대한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벌이는 일들이 잡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주의 역사에서, 우리 인간문명은 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어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렇기에 가장 단순하게, 나의 자녀들이 물어볼 때, "아빠는 왜 그렇게 살았어?"라는 물음에, 대답할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나는, 작은 예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쓰레기를 '잘' 버리는 행위들이 모일 때, 지구는 보다 깨끗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을 '잘' 뽑는 행위들이 모일 때, 우리나라는 보다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을까? 아무튼, 올 봄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천안함' 사건이, 역사가들의 난동으로 더렵혀지는 꼴을 보자니, 역사는 억울할 뿐이겠다.